홍야차·궁신권
칠신병과 헤어지고 사흘 만에 무곡산장 무리에 따라잡혔다. 다행히 홍야차가 이끄는 무리는 일곱밖에 안 되었고 그마저도 팔다리 성한 놈이 드물었다.
"어떻게 찾았지?"
"사향묘가 피하는 방향으로 왔지. 머리는 잘 썼다만, 나도 그 정도 궁리는 한다."
홍야차는 흰자위까지 붉게 충혈되어 전설에 나오는 악귀를 방불케 했다. 칠신병의 기괴한 모습에도 별로 놀라지 않았던 쌍둥이가 홍야차 얼굴을 감히 쳐다보지 못했다.
사향묘가 죽어라 가기 싫어하는 곳으로 왔다는 뜻이다. 칠신병의 호의가 오히려 폐가 되었다.
"지금까지 정체를 잘 숨겼다만, 끝까지 감추진 못했구나."
홍야차가 품에서 광명패를 꺼냈다. 잔월은 언제 분실했는지도 몰랐다. 말도 못 하고 누워 있던 집에 흘린 건지 아니면 진선의 대장군부에 흘린 건지. 어쩌면 객잔에서 짐을 급히 수습할 때 흘렸을 수도 있다.
"광명우사의 광명패를 몸에 지니고 위급한 순간에 멸세교 칠신병이 나와서 돕는 다라. 네 신분이 진정 궁금하구나. 암흑교 소법왕이냐 아니면 한림아 형제냐?"
안경에서 있었던 일이 중원 전체에 퍼지고도 남을 기간이었다. 그러나 홍야차는 강호의 소문을 믿지 않았다. 종남은 잔월 정도의 아이를 키울 능력이 없다.
봉황산장 보낼 때까지 단전도 없던 아이가 갑자기 무형지기로 완안덕명에게 내상을 입힐 정도의 고수가 되었다는 사실을 믿기 힘들었다.
"단전을 감쪽같이 감춘 걸 보면 멸세교 같은데. 맞지?"
차라리 단전을 감추고 행세하다가 갑자기 개방했다는 게 말이 된다. 납치할 때 여섯 살밖에 안 되었다는 사실을 홍야차는 무시했다.
잔월은 광명교와 암흑교 그리고 멸세교가 사실 같은 뿌리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몰랐다. 심지어 광명교가 명교라는 것도 미처 알지 못했다.
"좀 알아듣게 말해주면 무척 고마울 텐데."
"끝까지 발뺌하는구나."
"그런데 나는 왜 쫓는 거야?"
"네놈이 상편을 외웠다며? 곱게 구결을 얘기하면 살려서 보내주겠다."
"네가 날 이기면 구결을 알려주마. 네가 지면 우릴 이대로 보내 달라."
잔월은 비록 피로가 쌓이긴 했지만, 몸은 멀쩡했다. 몸이 불편해 보이는 홍야차를 상대로 이길 자신이 있었다.
"그래, 약속을 어기는 놈은 항문에 창(瘡 - 부스럼)이 날 것이다."
홍야차도 자존심이 무척 강한 놈이었다.
다짜고짜 휘두른 주먹이 잔월 얼굴을 스쳤다. 잔월은 깜짝 놀라 뒷걸음질 치며 공령환허를 풀어버렸다.
'확신은 금물이구나.'
존재감을 심장 어림에 드러냈다. 그런데 홍야차의 주먹은 얼굴을 노렸다. 홍야차의 공격을 피하고 어떻게 공격할지 미리 정해놓았던 잔월은 하마터면 돌덩이 같은 주먹에 얼굴을 다칠 뻔했다.
'한대붕과 같은 놈이구나. 덩치 큰 놈들은 다 이럴까?'
한대붕은 붕산권 자체의 특성이었고 홍야차는 싸움만 시작하면 생각을 비우는 성격 때문이었다.
'월영도법도 안 먹힌다.'
홍야차는 월영도법이 보여준 허실을 무시하고 그냥 공격했다. 잔월은 훌쩍 물러나 계도를 칼집에 넣었다.
계도와 수통을 천희연에게 맡긴 잔월은 육합권으로 홍야차를 상대했다. 초식의 정묘함은 오히려 잔월이 나았다.
홍야차의 동작이 큰 공격을 피한 후 상체를 쭉 뻗어 교토망월(皎兎望月)의 초식을 펼쳤다. 그러나 홍야차는 멀쩡했고 옆구리를 때린 주먹이 오히려 튕겼다.
'무슨 동작을 해도 몸 전체를 움직인다. 그래서 작은 동작에도 큰 힘이 실린다. 내가 가격할 때도 몸놀림만으로 받은 충격을 전신으로 분산했다.'
한대붕은 외공 따로 붕산권 따로 놀았는데 홍야차는 내공을 외공에 합친 느낌이었다. 몸과 팔다리를 움직이는 것으로 내공을 움직이는 듯했다.
[궁신권 같아요. 꾸준히 수련하면 외공이 익혀지고 내공도 알아서 움직이는 대단한 권법이에요.]
궁신(窮身)권은 몸의 한계를 끌어내는 권법이다. 허약한 자는 익히다가 쓰러질 정도로 힘을 빠르게 소모하는 무공이었다.
장점이라면 권법만 수련해도 몸이 튼튼해지고 내공이 생겼다. 일정 경지에 이르면 초식에 따라 내공이 알아서 움직였다.
[공격할 때도 모든 힘을 하나로 모으고 방어도 온몸으로 하는 권법이에요. 내가중수법으로 내공을 흔들면 승산이 있어요.]
천희연의 조언은 무척 고마웠으나 잔월은 내가중수법을 펼칠 줄 몰랐다. 육합권을 열심히 수련하면 경지에 이른 후 알아서 깨달을 수 있지만, 잔월은 익혀야 할 무공이 너무 많았다.
구인류에도 내가중수법의 깨달음이 적혀있지만, 잔월은 이제 음양인과 양음인을 탐구하는 수준이었다. 음양환 덕분에 음양인과 양음인을 능숙하게 펼치지만, 깨달음이 성취를 따라가지 못했다.
몸이 알아서 펼치는 거랑 머리로 확연히 아는 건 그 차이가 어마어마했다.
'장기전으로 끌고 가자.'
잔월은 양손을 앞으로 뻗어 홍야차의 주먹을 받았다. 홍야차는 잔월이 피하는 대신 손바닥으로 맞서자 몸을 더 빨리 돌렸다.
'다르다.'
한대붕의 붕산권은 내공으로 주는 타격이 대부분이었다. 주먹은 그저 내공을 전달하는 수단 정도였다.
그러나 홍야차의 주먹은 내공도 많이 실렸고 주먹 자체가 주는 충격도 만만치 않았다.
홍야차 주먹에 실린 힘을 해소하느라 내공을 돌려주는 게 늦었다. 침투한 내공을 방출할 때 홍야차는 이미 오른 주먹을 거뒀다. 노궁혈로 내보낸 내공은 허공을 때렸다. 오른 주먹을 거둔 홍야차는 왼 주먹이 날렸다.
'혼연일체가 깨졌다.'
홍야차 주먹을 막으며 몸의 균형이 깨졌다. 이어지는 홍야차의 주먹은 도무지 피할 수 없었다. 잔월은 어쩔 수 없이 음양환을 일으키고 홍야차 주먹을 받았다.
홍야차의 주먹에 맞은 손바닥이 얼얼했다. 몸에 침투한 내공은 음양환이 아무 피해 없이 잘 처리해 노궁혈을 통해 밖으로 내보냈다. 그러나 주먹에 실린 경력은 잔월이 몸으로 해소해야 했다.
잔월도 막막했지만, 홍야차라고 편한 건 아니었다.
'반탄력이 점점 강해진다.'
강한 타격에 옥녀공이 조금씩 반응했다. 진선의 대장군부에서 환약을 먹고 피를 토한 후 내공이 급격히 늘었기에 옥녀공의 위력이 예전보다 훨씬 나아졌다.
옥녀공은 외공에 속한다. 비록 수련 방식은 내공과 약물에 의지하지만, 굳이 따지자면 외공에 더 가깝다. 옥녀공을 익힌 후 굵은 몽둥이로 몸 전체를 두들기며 옥녀공을 깨워야 한다.
일반 외공은 두들겨 맞으면서 충격을 분산하고 해소하는 법을 몸이 익힌다. 옥녀공은 반대로 내공으로 그런 방식을 익힌 다음에야 몽둥이로 두드린다. 논어를 통째로 암기한 서생에게 각 구절의 의미를 알려주는 것과 비슷했다.
잔월은 종아리를 사 년이나 맞았지만, 그땐 내공이 적어 단련 효과가 없었다. 한대붕의 붕산권은 내가권이어서 옥녀공을 자극하지 못했다. 오늘 홍야차의 이게 사람 주먹이냐 싶은 공격에 옥녀공이 점점 자기 역할을 찾아갔다.
'궁흉극악(窮兇極惡).'
궁신권에는 몇 개 위력이 무척 강한 초식이 있었다. 홍야차는 그중에서 가장 약한 초식을 꺼냈다. 잔월한테서 무극환허인 상편 구결을 들어야 하기에 살상력이 너무 강한 초식은 자제했다.
덮쳐오는 홍야차의 신형을 보며 잔월은 책에서 봤던 산사태가 생각났다. 머리가 하얗게 물들며 모든 생각이 사라졌다. 잔월 몸이 세찬 강물에 휩쓸린 지푸라기가 되었다.
멀리 튕겨 난 잔월이 고개를 젖혀 붉은 피를 토했다. 그러나 공격에 성공한 홍야차도 기분이 찝찝했다. 왠지 잔월이 아닌 잔월 주변만 정신없이 때린 느낌이었다.
"약속은 지켜야지. 잘 들어."
잔월이 피를 닦고 전음으로 무극환허인 상편을 외워줬다. 홍야차는 멍한 얼굴로 전음을 들었다.
"약속 지켰으니 이만 헤어지자."
잔월은 계도를 등에 메고 수통을 품에 넣었다.
"잠깐. 구결 하나도 못 기억했다. 그리고 듣기만 해서 무슨 글자인지 어떻게 알아?"
"겨우 이백 글잔데 못 기억했다고?"
홍야차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내상 괜찮아요?]
[일부러 피 토했습니다. 내상 안 입었어요.]
[도망칠 수 있을까요?]
[어려울 겁니다. 저들을 다 해치울 방법을 고민합시다.]
"이렇게 하자. 내상이 나으면 다시 대결하자. 내가 지면 구결 적어줄게."
"혹시라도 내가 지면?"
"반나절 안 움직이면 돼. 반나절 이후 쫓아오는 건 뭐라 안 할게."
"좋아. 약속 어기면 하늘이 벼락 내리는 거다."
잔월은 바람이 잘 들지 않는 곳을 찾아 편하게 드러누웠다. 쌍둥이도 잔월과 똑같은 자세로 드러누워 어느새 잠이 들었다. 유독 천희연만 마음에 걱정이 쌓여 편히 쉬지 못했다.
홍야차 쪽은 일곱 모두 쉬지 못했다. 여섯이 크게 원을 그려 도망가지 못하게 포위했고 홍야차만 잔월과 멀지 않은 곳에 다리 틀고 앉았다.
[제가 내가중수법을 모르는데 어떻게 펼쳐야 하는지 가르쳐줄 수 있습니까?]
[통배권 구결을 알려드릴게요. 저는 특별한 내공을 익혀서 일반적인 방식은 몰라요.]
[무공 구결을 외인에게 함부로 알려줘도 괜찮습니까?]
[통배권은 괜찮아요. 통배권 구결을 모르는 문파가 몇 없을걸요.]
구결을 들어보니 왜 알려줘도 괜찮은지 알 것 같았다. 천 년 전부터 전해진 통배권 구결은 이미 수많은 문파의 무공에도 인용되었다. 잔월이 익힌 육합권 구결에도 통배권의 것과 똑같은 구절이 여럿 있었다.
통배권 일부를 따서 그 특징을 극대화한 게 요즘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권법이었다. 모든 권법의 원조라 불리는 통배권은 오히려 위력이 약해 꾸준히 익히는 사람이 드물었다.
'특별한 내공을 상대 몸에 침투시키거나 침투시킨 내공으로 상대 기운을 흔드는 게 내가중수법이라. 너무 원론적인데?'
천희연은 특별한 내공을 익혀 평범한 내공으로 상대 기운을 흔드는 방법을 몰랐다. 무공이란 평생 매진해도 다 못 익히는 방대한 학문이다. 필요한 것만 배우기에도 시간이 부족하니 안 배워도 될 것에 굳이 시간을 허비할 필요가 없었다.
'극음의 기운을 홍야차 몸에 침투하면 어떨까?'
아까 느껴졌던 반탄력을 생각하면 어림도 없을 것 같았다.
'왼손에 극음의 내공으로 하고 오른손에 극양의 내공으로 하면?'
빙련기공과 천양기공을 동시에 펼칠 수 있다. 서로 겹치는 부분도 운기 경로를 짧게 토막 내는 방식으로 해결했고 순류와 역류가 동시에 존재해도 잔월에겐 문제 되지 않았다.
'쾌. 음양전환의 쾌. 한 손으로 극음과 극양의 기운을 번갈아 주입하면?'
갑자기 속이 울렁거렸다. 벌떡 일어난 잔월이 배를 부여잡고 헛구역질을 했다. 머리는 몰랐지만, 혈접장에 당한 몸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紅夜叉 홍야차의
窮身拳 궁신권과 겨루다
- 작가의말
옥녀공은 먼저 내공으로 익히고 다음 몽둥이로 때리며 수련을 시작합니다. 잔월도 단무전도 이건 몰랐죠. 다행히 홍야차 덕분에 수련 방법을 깨달았습니다.
쌍둥이 데리고 다니면서 싸우겠다고 날뛰면 개연성이 사라지고, 무협인데 안 싸우고 계속 도망가자니 재미가 사라지고. 그래서 자연스럽게 억지 싸움을 붙였습니다. 글쟁이의 기본 소양이죠.
Comment '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