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회·붕천
'사부도 이랬을까?'
내공을 조금만 움직여도 울렁거리고 메스꺼웠다. 무공에 관한 걸 떠올리면 머리가 아팠다. 입을 열어 말하고 싶은데 소리가 나가지 않았다.
"사부. 죽는 거 아니지?"
사부가 깼다고 환호하던 쌍둥이는 계속 말이 없는 잔월 때문에 엉엉 울었다. 그때 천희연이 들어와 쌍둥이들을 치웠다.
"쉬면 나을 거야. 그러니까 귀찮게 하지 마. 너희 때문에 쉬지 못하잖아."
"사부 죽으면 누나 미워할 거야."
"죽에 고기 조금 넣었어."
천희연의 말에 쌍둥이는 잽싸게 침상 곁을 떠나 밥상으로 향했다. 죽그릇을 든 쌍둥이는 콧물 대신 죽을 후루룩거렸다.
"백원선사께서 예전에 해주신 말이 있어요. 사람 몸은 사람보다 훨씬 똑똑하다고요. 내공을 움직이면 치료가 잘 되지만, 지금 내공이 안 움직이는 건 움직여선 안 되는 상황이기 때문일 거예요. 수준 낮은 의원한테 보이는 것보단 그냥 내공이 움직일 때까지 기다리는 게 훨씬 나을 겁니다."
천희연은 잔월 입에 죽을 조심스럽게 넣어줬다. 진짜 죽에 고기를 넣었는지 맛이 훨씬 좋았다.
가끔 입가로 죽이 흘러나오면 손수건으로 닦아줬다.
"죽이어서 배가 빨리 꺼질 거예요. 두 시진 뒤에 다시 올게요."
잔월에게 죽을 다 먹인 천희연이 떠났다. 아마 죽을 새로 끓이려는 듯했다. 그리고 쌍둥이가 다가왔다.
"사부. 우리 무공 가르쳐 줄게."
말을 마친 둘이 통배권을 열심히 펼쳤다. 어려운 부분은 동작을 멈추고 여기선 뭘 주의해야 한다고 해석까지 곁들였다. 가끔 의견이 달라 다투기도 했다.
쌍둥이 재롱 덕분에 잡생각이 사라졌다. 둘은 일각 정도 통배권을 열심히 가르친 다음 잔월에게 가만히 서서 피 토하게 하는 무공을 가르쳐 달라고 당당하게 요구했다.
해는 동쪽에서 뜨고 서쪽으로 진다. 달은 그 반대다. 기러기는 가을이 되면 남으로 날고 봄이면 다시 북으로 온다.
사람은 먹으면 배설한다.
"저와 쌍둥이만 남았습니다. 본 파에 문제가 생겨 다른 분들은 급하게 떠났습니다."
빨개진 얼굴로 잔월을 목욕통에 넣으며 천희연이 말했다. 잔월 역시 배변을 닦아주던 천희연의 손길이 생각나 얼굴이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누나 빨래할 테니 너희는 사부 목욕하는 거 도와줘."
"이번엔 누나 씻길 차례야. 저번엔 우리 둘이 씻겼잖아."
"말 안 들으면 죽에 고기 안 넣어!"
고기에 굴복한 쌍둥이가 조막만 한 손으로 잔월 등을 열심히 문질렀다.
"누나, 목욕 다 했어. 사부 침대로 옮겨야 해."
잔월을 작은 목욕통에서 꺼낸 천희연이 눈을 감은 채 천의 양 끝을 잡고 잔월 몸에 물기를 말렸다. 물기가 다 사라지자 잔월을 안고 하늘을 보며 걸었다.
"야, 너희 둘 사부한테 기저귀 해줘."
"그거 누나 해주던 거잖아. 우린 기저귀 안 한 지 오래서 까먹었단 말이야."
"희영, 희웅. 말 들으면 고기 구워줄게."
쌍둥이가 후다닥 달려와 잔월에게 기저귀를 해줬다. 잔월은 눈을 감고 속으로 한탄했다.
'아까 목욕할 때 보니 빨래가 가득하던데. 천 소저 볼 낯이 없구나.'
시간이 흐르며 볼 낯이 아예 사라졌다. 잔월이 하는 거라곤 주는 죽 먹고 빨랫감 늘이는 일뿐이었다.
천희연의 일과는 죽 끓이고 빨래하고 잠깐 시장 다녀오는 게 다였다. 빨래가 능숙지 않아 시간이 오래 걸렸고 죽 끓일 때는 온갖 재료를 넣으며 최소 한 시진씩 지켜봤다.
'쾌는 그냥 빠르고 잘 베는 게 다가 아니구나. 허와 실을 빠르게 전환하는 쾌도 있고 내공의 음양을 빠르게 전환하는 쾌도 있구나.'
한대붕 상대로 월영도법이 아예 소용없었다. 월영도법에 강한 자를 상대하는 초식은 잔월과 명월뿐이다. 남은 초식은 다수의 적을 상대하는 방식이었다. 무공을 완성한 사람이 양산박의 영웅호걸인 무송이어서 일대일보단 전장에서 펼치는 게 어울리는 무공이었다.
그 후손들도 강호에 출도하지 않고 그저 익히기만 했기에 고수와 대결하는 부분이 무척 취약했다. 한대붕이 아니었으면 이걸 깨닫기까지 훨씬 많은 싸움을 경험해야 했을 것이다. 음양환도 깨닫게 해줬으니 어찌 보면 한대붕은 무척 고마운 사람이었다.
'이래서 사부께서 나더러 월영도법을 다시 만들라고 하셨구나. 강호에 어울리지 않는 무공임을 미리 아셨던 거지.'
월영도법에 육합권과 통배권을 섞어보았다. 상소룡을 쉽게 상대하려고 급하게 배운 현천검의 초식도 섞었다. 취접장만 떠올리지 않으면 이젠 무공을 생각해도 괜찮았다.
'섬전도도 월영도법에 잘 섞이는구나.'
그때 밖에서 쌍둥이가 큰소리로 외쳤다.
"여기 우리 집인데요. 함부로 들어오면 안 돼요."
"우리 무서운 사람이야. 들어와도 돼."
하필 천희연이 없을 때 낯선 자들이 왔다. 크게 호흡하고 몸을 움직이려 했으나 여전히 허사였다.
문이 벌컥 열렸다. 땀에 전 사내 냄새가 코를 확 덮쳤다.
"저자는 누구냐?"
"우리 사분데요. 지금 아파요."
"집에 돈이나 뭐 귀중한 거 없어?"
"그런 거 하나도 없어요. 우리 맨날 죽만 먹어요."
"장군. 저기 비단옷이 있습니다."
쌍둥이와 천희연이 열흘 가까이 고생해서 핏물을 다 뺀 비단옷이 사내들에게 발각되었다.
그때 침상에 다가온 장수가 잔월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더니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혹시 잔월 공자 아닙니까?"
"사부 아파서 말 못 해요."
"사부 이름 잔월이었어?"
"저 진선 대장군 휘하입니다. 예전에 봉황산장으로 갈 때 호위했습니다. 홍운을 씻기는 일도 제가 늘 담당했는데, 얼굴 기억 안 납니까?"
고작 몇 년인데 장수 얼굴은 많이 늙었다. 그때 팔다리가 짧은 잔월을 도와 홍운을 씻겼던 기억이 나며 얼굴이 점점 익숙하게 보였다.
"야, 집어 든 물건 모두 내려놔. 대장군 의형제시다."
잔월의 웃는 얼굴에 장수는 확신이 섰다.
"공자께서 아프시다니 어서 대장군한테 데려가 치료케 하자."
병사들이 순식간에 잔월에게 옷을 입혀 마차에 태웠다. 사람 태우려고 준비한 마차는 아니고 약탈한 물건을 실은 마차였다. 잔월을 태우느라 병사들이 마차에 놓인 물건을 모조리 짊어졌다.
"너희 둘 말고 어른 없어?"
"있어요. 곧 올 거예요."
"어른이 오거든 공자는 강주의 대장군부에 모셨다고 알리거라. 공자를 돌본 공이 있으니 찾아오면 대장군께서 포상할 것이다."
쌍둥이는 잔월을 이대로 보내도 괜찮은지 몰라 갈팡질팡했다. 그사이 병사들이 마차를 끄는 말을 재촉해 출발했다. 길이 평탄치 않아 마차가 천천히 달렸지만, 사람이 걷는 속도보단 훨씬 빨랐다.
천완 정권이 수도로 정한 강주 외곽 병영에 도착하자 병사들이 약탈한 재물을 창고로 보냈다. 장수는 병사 몇을 데리고 마차를 몰아 진선이 있는 대장군부로 향했다.
마차 안에서 선잠이 들었던 잔월은 진선의 우렁찬 목소리에 깼다.
"잔월, 어떻게 된 거야? 자강과 두천도 무사한 거야?"
"대장군. 공자께서 크게 다쳐 말할 수 없다고 합니다."
"제길. 어떤 자식이 감히."
진선이 바로 잔월을 둘러업고 안으로 들어갔다. 새로 지었는지 기둥이나 벽의 색이 무척 생동했다. 잔월을 커다란 침대에 눕힌 진선은 하인들에게 이것저것 분부를 내렸다.
지시를 마친 진선은 잔월 손을 꼭 잡고 눈물을 흘렸다.
"그때 너희를 구하려 했으나 부친이 날 가뒀다. 혼자라도 너흴 구하러 갔어야 했는데 용기가 부족했다.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는진 몰라도 살아있어서 다행이다. 내 어떻게든 꼭 너를 치료하겠다."
잔월은 모두 무사하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할 수 있는 거라곤 웃음을 짓는 것뿐이었다.
"대장군. 한왕께서 부르십니다."
"급한 일이더냐?"
"장사성이 박주를 함락했습니다. 한림아와 유복통은 주원장이 있는 응천부로 도망갔습니다."
진선은 다급히 옷을 갖춰 입고 떠났다. 떠나기 전에 총관에게 잔월을 잘 돌보라고 신신당부했다.
"부인더러 내 동생이 어떻게 아픈지 잘 살피라고 해라. 내가 부친을 뵙고 돌아올 때 어의도 데려올 것이니 근처 약방에 문을 닫지 말고 기다리라고 말해두거라."
진선이 떠나고 얼마 안 되어 다른 사람이 들어왔다. 익숙한 향기에 잔월은 고개를 돌렸다. 고개가 아주 조금 돌려졌지만, 들어온 사람을 확인하는 데 지장 없었다.
우르릉 쾅쾅 우레가 울었다. 북방엔 드물지만, 남쪽에선 자주 볼 수 있는 가을 소나기였다. 먹구름이 순식간에 하늘을 뒤덮었다. 세상이 먹물에 담근 듯 까매졌다.
'완청.'
연한 노란색 비단옷으로 곱게 차려입은 공손완청이었다. 바로 뒤에 동 파파 모습도 보였다.
가슴이 찢어졌다. 수만 필의 야생마가 잔월 가슴 위로 달렸다. 익숙한 체취에 기분이 좋아지는 것도 너무 싫었다.
움직이지 못하고 말도 못 하는 게 다행으로 느껴졌다. 그게 아니었으면 어떤 추태를 보였을지 몰랐다.
동 파파도 잔월 얼굴을 보고 매우 놀란 기색이었다. 그러나 완청은 잔월을 처음 보는 사람처럼 태연한 기색으로 다가왔다.
가는 금속 막대기 세 개로 잔월의 맥을 짚은 완청은 동 파파에게 지시를 내렸다.
"파파. 속명환 두 알을 가져오세요. 급합니다."
동 파파는 고개를 공손히 숙이고 밖으로 나갔다. 동 파파가 나가자마자 완청은 소매에서 환약 두 알을 꺼내 잔월 입에 넣어줬다.
"낫는 대로 도망가요. 동 파파가 아마 비둘기 날려 사람을 부를 거예요."
잔월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완청의 추수같이 맑은 눈에도 뿌옇게 안개가 서렸다. 완청은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눈물을 닦아줬다. 애틋한 손놀림에 잔월 눈에서 눈물이 끊이지 않았다.
"컥."
갑자기 욕지기가 강하게 치밀었다.
"급해서 두 알 먹였어요. 몸이 튼튼하니까 그 정도는 버텨낼 거예요."
말을 마친 완청은 다탁에 가서 차를 마셨다. 짐짓 태연한 척 가장했지만, 바르르 떨리는 손으로 찻물을 연신 흘렸다.
"맡긴 물건은 돌려줄게요."
떨리는 목소리에 묻은 슬픔이 너무 슬펐다.
"아씨. 속명환을 가져왔습니다."
동 파파가 환약 두 개를 들고 들어왔다. 그때 잔월이 피 한 사발 웩 토해냈다. 완청이 얼굴을 찡그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금은 약을 먹여도 소용없겠어요. 시녀를 불러 피 냄새 안 나게 깨끗이 청소하라고 해요. 냄새 사라지면 그때 다시 부르라고 하세요."
완청이 밖으로 나가자 동 파파도 황급히 따라나섰다. 시녀가 들어오기 전에 잔월은 피 한 움큼 또 토해냈다.
"제길. 이게 뭔 꼴이야."
피를 토하니 속이 시원했다. 그러나 마음은 여전히 아팠다.
"무곡산장. 내 너희를 절대 용서치 않겠다."
再會 다시 만났는데
崩天 하늘이 무너졌다
- 작가의말
처음부터 이런 식으로 이야기를 짰습니다. 그냥 주인공 괴롭히려고 한 건 아닙니다.
영웅문 비롯해 김용 소설 읽어보신 분이라면 어떤 결말일지 짐작 가실 겁니다. 슬프게 끝내진 않을 거라고 확실히 말씀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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