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난·복잡
"하가촌의 일은 무어냐?"
잔월로선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잔월은 공손완아가 독살해 시체를 없앤 후 비급을 훔친 누명을 씌우려는 계획에만 연루되었다. 당했다면 화가 하늘 끝까지 솟구칠 일이지만, 실제로 발생하진 않았다. 그럼에도 이가 갈리고 주먹에 힘이 들어가는데 모든 사태의 중심인 무극존자는 여전히 평온했다.
"십여 년 전에 어떤 칼 쓰는 놈이 어린 여아가 납치된 일 없냐며 그 주변을 들쑤시고 다녔다. 십수 년이나 못 찾았는데 최근 혐의가 큰 자를 발견했다. 하가촌에서 모습을 드러냈다는 소식을 받고 수하를 보내 확인하게 했는데, 네가 내 딸을 조카로 오해하더군. 그래서 부랴부랴 함정을 준비했지."
남개방으로부터 정보를 받고 사람 몇 보내 사실 여부를 확인하게 했다.
"함정이라. 눈에 보이는 것 외에 뭔가 더 있다는 말이겠구나."
"그래. 내년 오늘 네 무덤에 좋은 술 가득 부어주마."
갑자기 연기가 피어올라 작은 장원을 꽉 채웠다. 빨간 연기, 누런 연기, 검은 연기, 희뿌연 연기가 서로 섞여서 꿈틀댔다.
높은 담벼락이 바람에 독이 흩어지지 않도록 방해했다.
"여기 사람 모두 미리 해약을 먹었다. 너랑 네 조카만 안 먹었지."
여기서 조카는 완청이 아닌 완아를 말하는 것이었다.
"제길. 조카 살리려면 어쩔 수 없이 진실을 얘기해야겠군."
무극존자가 예전에 오독교 독에 당한 건 사실이지만, 그때는 일부러 약하게 보이려고 심하게 중독된 척했다. 무혈지신을 이뤄 내공 움직임이 자유로운 무극존자가 독 기운을 몰아내지 않고 그냥 당한다는 게 말이 안 된다.
"너희가 훔쳐 간 태극환허인 상편은 내가 그린 거다."
"네 솜씨임은 알고 있다."
"사실 글자로 된 상편도 있다. 글 못 읽는 후손이 또 있을지 몰라 그림으로 비급을 만들었다. 그림만 보고 익히기엔 부족한 부분이 좀 있다."
"굳이 그걸 알려주는 이유가 뭐냐?"
"이 아이가 글로 된 상편을 외웠다. 난 일부러 글로 된 비급을 눈에 띄는 곳에 뒀지. 그림으로 된 상편은 감춰두고. 이 아이는 글로 된 상편을 외우고 그림으로 된 상편을 훔쳤다."
연기로 가려져서 장원 안의 상황과 사람들의 표정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잔월은 공손무기가 엄청난 고민에 빠졌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옜다. 죽이든 살리든 네게 맡기겠다."
무극존자는 자기 조카를 공손무기에게 던졌다.
"동 파파. 해약을 먹여라."
공손무기는 무극존자의 말이 사실일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었다. 비록 태극환허인 상편만 분석해서 익힌 자들이 하나같이 고수가 됐지만, 예상보다 위력이 약했다.
게다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하편도 남았다. 상편을 연구하다 보면 하편의 수수께끼 같은 구결을 이해할 수 있다고 여겼는데, 아무래도 글로 된 상편을 꼭 확인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무곡산장에도 무공 비급은 무척 많다. 그러나 사람마다 고수고 가끔 초고수도 나오는 봉황산장이 부럽고 시샘이 났다. 전대 가주는 자기 여동생을 봉황산장으로 시집보내 그 비밀을 캐냈다.
비급을 필사하라는 지시가 여동생에게 거절당한 후 전대 가주는 음모를 꾸몄다. 그러나 완벽한 기회가 좀처럼 생기지 않았다. 당시엔 봉황존자로 불렸던 무극존자가 가끔 장원을 떠나긴 했지만, 소식을 접했을 때는 기회가 사라졌다.
인륜까지 저버리고 음모를 진행했지만, 하편만 얻었다. 하필이면 무극존자가 상편을 몸에 지니고 나갔던 거였다. 글을 못 읽는 무극존자가 자격지심에 늘 책을 몸에 지니고 다녔는데, 하필 그날 손에 잡히는 대로 넣은 책 중에 태극환허인 상편이 있었다.
상편을 찾으려고 담벼락을 허물고 집도 허물고 땅도 헤집었다. 봉황산장엔 꽤 많은 비급이 있었지만, 태극환허인 제외하면 무곡산장 눈에 차는 건 없었다.
강호에 알려지면 사람들이 뱉는 침에 익사할 정도의 죄를 저질렀다. 세상 사람이 등 돌릴 위험을 무릅쓰고 얻은 무극환허인에서 지금까지 대단하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글로 된 상편을 완아가 암기했다는 말이 사실인지 모르지만, 마냥 무시할 수도 없었다.
"이젠 조카는 없는 셈 치고."
쿵 소리와 함께 장원 담벼락이 전부 무너졌다. 장원에 갇혔던 독이 사방으로 퍼졌다. 잔월은 자욱한 안개를 틈타 나무에서 재빠르게 내려갔다.
'무고한 사람이 죽어선 안 돼.'
잔월은 바람 세기와 방향을 가늠하고 적당한 곳에 내공으로 불을 질러버렸다. 불은 꽤 흉흉한 기세로 마을 쪽으로 향했다.
타는 냄새와 밝은 불빛에 마을 사람들이 황급히 일어났다. 다행히 사람들은 불을 끄기보단 재물과 가축을 챙겨 도망치기에 급급했다.
'이 이상은 내 몫이 아니다.'
잔월은 불을 지른 후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아까 읽은 은신법에 따르면 상대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 곳에 몸을 숨겨야 한다. 풀이 무성한 곳은 뱀이나 맹수가 숨어있을까 봐 사람들이 경계하기에 오히려 들키기 쉽다고 책에 적혀있었다.
'독이 많은 곳에 숨으면 되겠다.'
누구도 독 연기가 자욱한 곳에 적이 숨어있으리라고 예상하기 어려울 것이다.
무곡산장은 공손무기 오 형제 외에도 수십 명 고수를 동원했다. 오독교로 보이는 자들이 무극존자를 향해 독물을 던졌다.
'무극존자는 왜 도망가지 않을까?'
그때 잔월 귀로 무극존자의 전음이 날아왔다.
[기회를 봐서 공손무기를 처리해라. 안 그럼 하가장 사람들 목숨이 위험하다.]
진심으로 하가장 사람들을 걱정하는지, 자기 모친을 직접 죽였다는 공손무기를 죽이고 싶어서인지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잔월의 공격으로 틈이 생기면 본인이 도망치려는 속셈일 수도 있다.
그러나 잔월은 공손무기가 하가장을 향해 마수를 뻗칠 가능성을 무시할 수 없었다.
'무극존자만 발견했을까? 공손무기도 내 존재를 안다고 상정하고 필살의 기회를 노리자.'
무극존자는 공손 오 형제와 수십 명 고수에게 포위되어 힘겨운 싸움을 벌였다. 독 때문에 어느 정도 실력 저하가 있고 무곡산장의 준비도 무척 철저했다. 진법을 이룬 자 중 부상이나 죽음으로 결원이 생기면 바로바로 보충했다.
'저 흑의인들은 왜 목숨을 버려가면서까지 공손무기의 명령을 들을까?'
흑의인은 무곡산장이 거둬서 깊은 산에 모아놓고 키운 고아들이었다. 어려서부터 공손 씨에게 충성하도록 세뇌됐고 세상과 떨어져 살아서 자신들의 처지에 의문도 품지 않았다. 충성과 희생이 당연한 줄 알았다.
만약 홍야차 덕분에 서동이 되지 않았다면 잔월도 저들 중 하나가 되었을 것이다.
'무극존자가 힘을 아끼고 있다.'
강호 경험이나 전투 경험이 풍부한 건 아니지만, 무극존자가 겨우 서른 가닥 정도의 내공만 움직이는 걸 보고 일부러 힘을 숨기고 있음을 확신했다.
'무극존자의 속셈이 뭘까?'
가능성이 너무 많았다. 잔월을 이용해 몸을 빼려는 걸 수도 있고, 완아를 다시 빼앗아 함께 도망치려는 걸 수도 있다. 조카를 포기한 게 아니라 일부러 공손무기에게 넘겨 해독하게 했다면 다시 구할 가능성이 크다.
아니면 공손무기와 그 형제를 죽일 수 있을 만큼 죽이려는 생각일 수도 있다.
[무곡산장 원군이 더 있다. 빨리 손을 써라. 네가 기습해 저들이 놀라면 내가 봉황내의로 타격을 가하고 조카를 구해 도망치겠다.]
무곡산장의 계획과 달리 잔월이 살아서 무극존자에게 남쪽으로 가라고 알려줬다. 원래 사흘 거리에 함정을 준비했는데 급히 계획을 변경하게 되었다.
미리 쳐놨던 무곡(霧谷)진법을 해체해서 오는 중이다. 두 시진만 시간을 끌면 무곡진으로 무극존자를 가둘 수 있다.
꼭 무극존자를 죽인다는 보장은 없지만, 몇 년 도망 생활에 모두 진저리가 나서 어느 정도 위험은 무릅쓰기로 했다.
'단순하게 생각하자. 무극존자를 도와 완아를 구하는 게 협이다. 저대로 무곡산장에 끌려가면 고문을 당할지도 모른다.'
비록 공손완아를 좋아하진 않지만, 잔월은 '옳고 바른' 일을 하기로 했다.
'그래. 섬전도 구결은 이런 뜻이었구나.'
실전에 임하자 머리가 민활하게 돌아가며 이해하지 못해 억지로 짜 맞췄던 구결의 의미가 마구 떠올랐다.
쌍둥이를 치료하고 무극존자의 봉황내의를 제대로 견식하고 상관소혜의 구결 해석을 들으며 쌓은 것들이 긴박한 시각에 도움이 됐다.
"합!"
잔월은 일부러 소리를 크게 질렀다. 내공을 이용해 배로 낸 소리는 약 삼 장 높이의 허공에 울렸다. 소리를 지르는 동시에 섬전도를 펼쳐 순식간에 공손무기 앞으로 다가갔다.
깡 소리와 함께 공손무기와 잔월이 동시에 뒤로 튕겼다.
'빠름은 힘이다.'
잔월은 자신보다 무공도 강하고 내공도 많은 공손무기가 손에 든 검을 떨어뜨리는 걸 보며 섬전도 첫 구결을 떠올렸다.
잔월은 우선 소리를 질러 상대를 놀래게 하는 동시에 안심하게 했다. 소리가 들린 거리가 꽤 되어 경각심은 생겼지만, 공격받을 시각은 좀 더 뒤로 예측했다. 공손무기는 한발 빠른 잔월의 공격에 당황해 본신 실력을 다 끌어내지 못하고 당했다.
잔월은 다시 공손무기를 덮쳤다. 고수라고 모든 무공에 능통한 건 아니다. 검을 잃은 공손무기는 잔월이 흉흉한 기세로 덮치자 당황해서 뒷걸음질만 쳤다.
곁에 있던 형제 넷이 잔월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잔월은 이들의 상상을 벗어나는 모습을 보였다. 섬전도의 수법을 펼친 잔월의 몸이 사라졌다.
깡 소리가 울렸다. 잔월의 칼을 막은 완아가 다리가 풀려 바닥에 쓰러졌다. 거의 무방비로 보이는 공손무기의 앞을 막고 옥녀소수공으로 잔월의 공격을 막았다.
'이 철부지가 또.'
그때 어마어마한 기운이 뒤에서 터졌다. 무극존자가 드디어 봉황내의 초식을 펼친 것이었다.
진법으로 무극존자를 포위한 흑의인들이 한 줌 핏물로 화했다. 흉흉한 기세가 잔월과 완아만 피해 장원의 모든 사람을 공격했다.
완청의 하얗게 질린 얼굴과 두려움에 떠는 눈동자가 잔월 눈에 박혔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잔월의 몸이 움직였다. 완청에게 향하는 세 가닥의 내공을 계도로 잘라버린 잔월은 피를 토하며 날아갔다. 완청을 보호하던 홍야차가 등을 보인 잔월에게 어마어마한 내공이 실린 장법을 선물했다.
'나도 누구 말할 처지는 아니구나.'
허공을 날며 잔월은 피를 울컥 토했다. 인체는 신비하다. 피를 토하는 행위 역시 필요하기에 하는 것이다. 피가 아깝다고 참으면 울혈이 되어 몸을 해친다. 잔월은 코에 고인 피를 흥 풀어버리고 몸을 뒤집었다.
어느새 완아를 챙긴 무극존자가 잔월 덜미를 잡았다.
"잘했다. 공손무기 형제 둘 죽였다."
錯亂 엇갈리고
複雜 복잡하다
- 작가의말
공손무기가 진실을 얘기한 건 무극존자 마음을 흔들려는 목적도 있고 시간 끌려는 목적도 있습니다.
원래는 무곡진이라는 어마어마한 진법을 쳐놓고 무극존자를 유인하려 했습니다. 확실한 기회는 아니지만, 무극존자에게 쫓기고 무극환허인을 탐낸 강호의 불나방들에게 쫓기면서 인내심이 바닥났습니다.
무곡산장이 무극존자를 해치웠다는 소문이 퍼지면 불나방들도 귀찮게 못 할 것이기에 선뜻 모험한 겁니다.
무곡산장의 실수라면, 잔월이 주인공임을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는 겁니다. 절대 죽지 않는 주인공이 무극존자에게 남쪽으로 가라고 일러바친 탓에 애써 준비한 함정이 무용지물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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