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즉생·대성
물에 빠진 잔월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수영이나 잠수 실력이 나쁘지 않은 잔월이건만, 차고 거센 물살에 휩쓸리다 보니 순간 당황했다.
'응? 어디 갔지?'
게다가 품에 있던 무극존자가 맡긴 물건이 사라졌다. 물건이 사라지면 본인은 물론 흑표까지 죽인다던 무극존자의 말이 기억나자 정신이 번뜩 들었다.
물 안에서 눈을 뜨면 무척 따끔하다. 그러나 잔월은 자신은 물론 흑표 목숨까지 달린 일이라 통증을 무시했다.
'찾았다.'
가벼운 물건은 아닌지 기름종이에 싼 물건은 바닥에 가라앉았다. 그러나 물살이 하도 세서 바닥을 구르며 밑으로 밀려나고 있었다.
몸을 물살에 맡기고 균형을 잡은 후, 머리를 들고 숨을 힘껏 들이쉬었다.
"저기다. 산 채로 잡아라."
귀에 들리는 외침은 홍야차가 틀림없었다. 정기적으로 잔월에게 기해혈이 생겼는지 검사하며 자기 일처럼 안타까워하던 홍야차였지만, 잔월에게 독을 먹이던 일부터 시작해서 공적인 일에는 전혀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무곡산장에 잡히느니 차라리 죽고 말지.'
무극존자와 무곡산장의 원한에 관해 들었기에 저들이 잔월을 살려둘 가능성은 미약하다. 지금 생포하려 한다고 해서 끝까지 안 죽인다는 보장은 절대 없다.
충분히 숨을 들이켠 잔월은 강물에 잠수했다. 낙양의 잔잔한 호수와 달리 몸을 가누는 게 힘들었지만, 혼연일체를 이룬 잔월에겐 불가능한 일도 아니었다.
강바닥을 구르는 물건을 잡아서 품에 넣은 후 허리띠로 꽁꽁 동여맸다. 그리고 왼손으로 꾹 눌렀다.
'최대한 버티자.'
점점 숨이 가빠왔다.
'조금만 더 참자. 누군가 지켜보고 있을지도 모른다.'
강바닥에서 반 각에 가까운 시간을 버텼다. 그러나 홍야차나 그 수하들이 자신을 찾고 있을 게 뻔하기에 최대한 버티기로 했다.
'멍청이. 강가로 가면 무성한 풀이 모습을 감춰줄 텐데.'
나무와 풀이 우거진 곳으로 가면 안 들키고 숨을 보충할 수 있다. 잔월은 그 좋은 생각을 미리 하지 못한 자신을 책망하며 강가로 움직이려 했다.
그런데 어느새 두 다리가 수초에 묶여 움직일 수 없었다.
'물귀신인가?'
잔월은 등골이 오싹했지만, 품에 넣은 물건을 누른 왼손을 놓지 않았다.
오른손으로 바닥에 박힌 돌을 잡고 발버둥을 쳤다. 수초는 벗겨지거나 끊어지는 대신 오히려 더 강하게 옭아맸다.
꼴깍 물을 한 모금 삼킨 잔월은 코가 시큰하고 눈이 뜨거워지더니 뭔가 눈으로 흘러나갔다.
'죽기 싫은데.'
예기치 못한 봉변에 너무 당황해서 그냥 눈물이 나와버렸다.
죽음이 이렇게 선명하게 잔월을 덮친 적은 없었다. 살수에게 납치되었을 때도, 별장 지하에서 맹수와 마주했을 때도, 무극존자가 사람을 막 죽이는 걸 봤을 때도 겁먹지 않았다. 잔월은 본능적으로 상대가 자신을 해치려 하는지 판단하는 능력이 있었다.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았는지 아니면 만독불침과 금강불괴 수련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덕분에 잔월은 무지에서 오는 두려움은 있어도 죽음을 떠올리며 겁에 질린 적은 없었다.
'내가 죽으면 흑표도 죽는데. 그리고 외숙공도 엄청 슬퍼할 거야. 왕 원외랑 소숙도 내가 죽은 걸 알면 얼마나 슬퍼하실까.'
죽기 싫은 이유가 너무 많았다. 그 이유들이 모여 잔월의 발버둥에 힘을 보탰다. 투툭 소리와 함께 수초가 일부 끊어졌다.
그러나 잔월 다리에 엉긴 수초가 너무 많았다. 점점 눈이 아파져 오더니 갑자기 시야가 사라졌다. 청각도 무뎌지더니 급기야 감각도 사라졌다.
'이렇게 죽는 건가? 아빠 엄마는 병으로 죽은 게 아니라 나처럼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죽어 무덤이 없는 게 아닐까? 홍야차라도 날 찾아냈으면.'
툭, 툭, 투툭, 툭툭툭.
숨이 끊어지자 심장이 멈췄다. 그리고 심장 대신 다른 게 뛰었다.
열한 살이 되도록 생성되지 않았던 기해혈이 만들어지며 단전이 생겼다. 갓 생긴 말랑말랑한 아기 단전이 심장처럼 툭툭 뛰면서 내공을 모으고 뱉었다.
숨 대신 내공을 보충받은 혈도들이 다시 살아났다. 혈도들이 활력을 찾자 차갑게 식어가던 잔월의 몸이 뜨겁게 달궈졌다.
무의식이 잔월의 육체가 위험함을 감지했다. 그리고 자신이 아는 방법 중 가장 믿음직한 방식을 택했다. 아기 단전이 탐스럽게 빨아들인 내공들이 특별한 경로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약물 도움 없는 옥녀공 수련이 시작되었다.
툭툭툭, 투투투투툭.
단전뿐 아니라 단전과 가까운 혈도들도 뛰기 시작했다. 점점 많은 혈도가 뛰었고, 힘을 잃고 멈췄던 심장도 다시 세차게 뛰었다.
공손완아는 열한 살에 옥녀공이 아닌 옥녀소수공을 입문했다. 그러고도 무공의 기재라고 칭찬이 자자했다.
잔월은 탯줄 끊기 전에 옥녀공에 입문했고 다섯 살 되기 전에 소성했다. 그리고 지금 열한 살 나이에 대성에 도전했다.
심장에 이어 간도 뛰고 폐도 뛰었다. 방광이나 직장도 날뛰면서 대소변이 밖으로 배출되었다. 위에 남은 음식도 삼킨 강물과 함께 역류해서 입으로 토해졌다. 그러나 정신을 잃은 잔월은 아무것도 몰랐다.
갓 생긴 아기 단전은 다른 혈도들에 비교해 부족한 자신이 싫었는지 끊임없이 내공을 흡수했다. 기성해의 운기법이 외부로부터 내공을 탐스럽게 빨아들였다. 그 내공은 단전을 비롯한 전신 혈도를 단련하는 데 소모되었다.
내공 소모가 점점 심해지자 기성해는 질 수 없다는 듯이 내공 흐름을 더 빠르게 했다. 다행히 소성을 이룰 때 옥녀공과 기성해가 화합했기에 두 흐름은 서로 충돌하지 않고 각자 할 일에 열중했다.
가다가 멈춤은 아니 감만 못하다. 옥녀소수공이 대성하기 어려운 이유는 대성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내공이 끊어지면 안 되기 때문이다. 두 손만 단련하는 옥녀소수공도 그럴진대, 옥녀공의 대성은 말 그대로 꿈같은 경지다.
그러나 정신을 잃어 일절 간섭하지 않은 잔월 덕분에 기성해는 최고의 효율로 내공을 끌어모았다. 옥녀공 역시 한 톨의 낭비도 없이 기성해로 모은 내공을 혈도와 뼈와 근육 그리고 오장육부를 단련하는 데 사용했다.
인위적인 개입이 있었다면 낭비가 있었을 것이고 자칫 큰 화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었다. 그러나 천우신조로 잔월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옥녀공의 대성을 향해 꾸준히, 그리고 안전하게 다가갔다.
어느새 저녁이 지나고 밤이 되었다. 반나절 숨을 못 쉰 잔월이건만, 코로 거품이 끊임없이 나왔다.
"어푸."
정신을 차린 잔월은 자신이 달라졌음을 느꼈다. 몸에 수족처럼 부릴 수 있는 강대한 힘이 깃들었고 숨을 쉬지 않는데도 온몸이 상쾌했다.
다리에 슬쩍 힘을 주자 그토록 애먹이던 수초가 한꺼번에 끊어졌다. 수면에 빼꼼 머리를 내밀고 확인하니 그믐달이 뜬 캄캄한 밤이었다.
'밑으로 가자.'
개울가에 가서 무극환허인 상편을 수습할 생각에 잔월은 아래로 가기로 했다. 다시 잠수하니 낮에도 시야가 흐릿하던 강바닥에서도 모든 게 선명하게 보였다. 일각이나 숨을 안 쉬고 강바닥으로 이동한 잔월은 달라진 자신의 몸이 무척 기뻤다.
그렇게 일각 정도 더 내려가다가 그물에 걸려버렸다. 잔월이 죽었다고 여긴 홍야차 일행이 시체라도 건지겠다고 그물을 설치했다. 잔월은 양팔에 힘을 주어 그물을 찢고 그대로 밑으로 내려갔다.
새벽까지 그물 세 개를 찢은 잔월은 뭍으로 올라갔다. 강물을 탄 덕분에 말을 타고 반나절 달린 거리를 벌써 돌아왔다.
'이 새벽에 누가 말을 달리지?'
잔월은 길가의 무성한 수풀에 몸을 숨겼다. 한참 시간이 지나니 수십 명이 말을 타고 등장했다. 잔월의 청각이 무척 좋아진 탓에 먼 거리의 말발굽 소리를 들었던 것이었다.
'공손무기, 공손완아, 동 파파.'
알만한 사람은 셋밖에 없었다.
'설마 무극존자가 죽은 것인가?'
동 파파는 주름이 많아 표정을 알 수 없지만, 공손무기와 공손완아 얼굴엔 웃음꽃이 피었다. 그리고 말을 탄 자들 전체적인 분위기도 무척 들떠있었다.
수십 필의 말이 달그락거리며 지나갔다. 내공이 거의 없다시피 할 때도 공손무기는 잔월의 기척을 발견하지 못했다. 비록 본인은 모르지만, 옥녀공을 대성한 잔월의 기척은 옛날보다 훨씬 자연스럽게 변해 말을 급하게 달리는 공손무기 일행 누구도 길가에 숨은 잔월을 발견하지 못했다.
잔월은 공손무기 일행이 사라지고 한참 지나서야 움직였다. 아무리 빨리 달려도 지치지 않고 숨도 차지 않았다. 게다가 새벽이지만 대낮처럼 환하게 보여 전속력을 낼 수 있었다. 무극존자가 마적 수십 명을 죽였던 곳에 도착해 개울가로 가니 이미 파인 흔적이 있었다. 공손완아가 경황이 없어 숨긴 곳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는지 흔적이 한둘이 아니었다.
'무극존자는 어떻게 됐을까? 흑표 제발 살아야 하는데.'
잔월은 이곳에 머물 때 흑표가 사냥하던 작은 산으로 향했다. 거지의 돈으로 산 피풍의는 이미 강물에 쓸려 잃어버렸다. 그러나 단전이 생기고 내공을 얻고 옥녀공을 대성한 잔월은 한서불침까진 아니어도 추위를 크게 타지 않았다.
흑표 걱정에 밥 생각도 없었다. 내공이 충만해 며칠 정돈 굶어도 상관없는 몸이 되었다. 단 것과 고기를 좋아하는 거 빼면 딱히 식탐도 없었기에 잔월은 적당히 바람을 막아줄 만한 곳을 찾아 휴식을 취했다.
온갖 생각에 잠겨있다가 잠이 들었다. 그러다 이상한 느낌에 문득 깼다. 새벽의 끝머리가 되어 동쪽 하늘이 조금씩 물들기 시작하는 때였다.
수십 개 노란 눈동자가 잔월을 바라보고 있었다. 잔월이 눈을 뜨자 늑대 무리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섰다.
"너희, 겁먹었구나."
잔월이 입을 열어 말하자 늑대들이 부르르 떨었다.
"너흴 해치지 않아. 잠시 머물다 떠날 거야. 그러니 그만 물러가."
잔월의 말을 알아듣진 못했지만, 야성이 발달한 늑대들은 잔월이 자신들에 대한 적대감이 없음을 확인했다.
곰이나 범 같은 맹수라면 목숨 몇 개 던져서라도 상처를 입혀 쫓아내는 게 늑대들의 습성이다. 그러나 잔월은 일반 맹수와 느낌이 달랐다.
하룻강아지라면 멋모르고 덤빌 수도 있지만, 노른자를 수 년간 차지한 늑대들은 하나같이 백전노장이었다. 수많은 맹수와 싸우고 죽이고 쫓아내며 단련한 감각 덕분에 잔월에게 덤비지 않았다.
옥녀공을 대성했지만. 단전에 담긴 내공이 부족하여 금강불괴는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도 도검불침은 되기에 늑대가 아무리 많아도 잔월 상대가 아니었다.
늑대 무리를 타일러 보낸 잔월은 품에서 무극존자가 맡긴 물건을 꺼내 기름종이를 벗겼다. 누런 표지에 예상했던 다섯 글자가 보였다.
死卽生 죽음에서 삶을 꽃피우니
大成 옥녀공을 대성하다
- 작가의말
잔월이 옥녀공을 대성하고 내공을 얻었습니다. 이젠 슬슬 돌아다니며 무공 줍줍해야 할 시기인 듯합니다.
예상했던 다섯 글자는
1. 광풍살결말
2. 잔월홍결말
3. 잔월일대기
4. 무적천마공
Comment '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