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군보·삼풍
봉황내의 초식에 장원의 건물 중 반이 무너졌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잔월이나 담무천 그리고 한자강은 수습해야 할 물건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자신들이 지내던 집이 무너졌음에도 무덤덤했다.
공손완아는 사형 선고를 받은 죄인처럼 축 늘어졌다. 무극존자와 환속승이 싸우는 사이 도망치려 마음먹었지만, 겁에 질려 발이 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무극존자가 계속 자신을 바라보는 것 같은 느낌에 꼼짝도 못 했다.
"대머리, 넌 무당에 가서 도사가 되어라."
"당신 복수를 돕고 싶네. 내 책임도 없다곤 할 수 없으니."
"내 복수는 오롯이 내 손으로 이룬다. 넌 빠져라."
"그럼 잔월 저 아이는 어쩔 셈인가?"
"내가 데리고 있다가 흉수와 상관없음이 밝혀지면 무당으로 보내마."
환속승은 기절에서 깼지만 아직도 눈이 흐리멍덩한 잔월에게 다가갔다. 혈도 몇 개를 쓸자 잔월의 눈에 총기가 돌아왔다.
"내가 우선 재주 하나 전해줌세. 이후 무당에 와서 정식 사제 관계가 되면 내 재주를 남김없이 전하겠네."
무극존자의 허락을 받은 환속승은 잔월을 데리고 한쪽 구석으로 갔다.
"육합권 펼칠 때 기의 흐름을 보고 익힌 기성해와 내가 원래부터 알고 있던 음양무계를 합쳤다네. 잔월 소시주, 아니 소형제가 기성해를 이미 알고 있으니 음양무계를 가르칠 걸세. 그럼 내가 무극존자의 절초를 막아냈던."
환속승은 잠깐 말을 멈췄다. 초식 명을 생각했지만, 바로 떠오르는 이름이 없었다.
"그래. 광혜여곡(曠兮如谷)의 경지를 이룰 수 있을 걸세."
도덕경에 나오는 광혜기여곡을 줄여 초식 이름으로 지었다. 그런데 초식이라고 하기엔 형태가 없기에 경지라고 표현했다.
음양무계는 몸이 모든 기운에 해를 최소한으로 입도록 하는 대처법이었다. 간략하게 개괄하면 상대의 힘을 받아들여 전신 혈도로 분산하는 방식이었다. 딱히 수련법이 있는 것도 아니고 구결을 통해 깨달음으로 익혀야 하는 무학이었다.
다행히 환속승의 자세한 설명이 곁들여지자 옥녀공과 만독불침 수련을 몸에 새긴 잔월은 빠르게 이해하고 받아들였다.
"내가 관상을 좀 볼 줄 아는데, 왠지 나랑 소형제가 사제의 연은 없는 것 같네. 이번엔 제발 내가 틀렸기를 바라네. 그래도 단명할 상은 아니니 걱정하진 마시게. 소형제의 결백이 증명되면 부디 무당에 와서 날 찾길 바라네."
"대협의 성함을 여쭙고 싶습니다."
"깜빡했네. 내 이름은 장군보라고 하네."
잔월에게 음양무계를 전수한 장군보는 바로 봉황산장을 떠났다. 하루라도 빨리 무당에 가서 십 년의 약속을 이행하려는 마음에 경공을 전력으로 펼쳤다.
소림에서 봉황산장까지 하루밖에 안 걸릴 정도로 경공이 뛰어난 장군보였다. 보법과 결합한 신법은 몰라도, 장거리를 달리는 경신법은 천하제일을 논해도 괜찮았다.
반나절도 안 걸려 무당산에 도착한 장군보는 바로 무당파를 방문했다.
"고승께서 무슨 일로 본파 장문인을 찾으시는 게요?"
"난 스님이 아닐세. 무당에 입적하여 도사가 되려고 찾아왔다네."
장군보의 말투가 특이했지만, 도사 중에도 이상한 사람이 많았다. 그래서 무당파 도사는 장군보의 말투에 개의치 않았다.
"잠시만 기다려 주시오."
잠시 후 도사는 눈썹까지 흰 노인을 모시고 나타났다. 머리와 수염은 물론 눈썹까지 흰 걸 보면 나이 든 노인이 분명한데 눈에 정기가 흘러넘쳤고 얼굴은 아이처럼 보드라웠다. 게다가 볼이 대추처럼 붉어 혈기가 왕성해 보였다.
허리가 꼿꼿하고 걸음걸이가 힘이 넘쳤다. 그리고 장군보의 경지에도 노인의 실력이 짐작조차 어려웠다. 무극존자도 어느 정도 느낌은 있었는데, 눈앞의 노인은 망망심해와 같이 깊이를 가늠할 수 없었다.
"너는 나가보거라."
"네, 사조님."
단둘이 남자 노인이 자기소개를 했다.
"난 무당파 전대 장문인 장삼풍이라고 하네. 자네 이름은 뭔가."
"장군보입니다."
장군보의 말투가 예전으로 돌아왔다. 봉황산장에 있는 며칠 동안 고치려고 애써도 전혀 소용없었는데, 노인과 대화하며 순식간에 십 년 전 말투로 돌아갔다.
"하하하. 이거 인연이구먼. 내 속가 명도 장군보이네."
"엄청난 우연이군요."
"난 요동 의주 사람이라네."
"저는 복건 소무 출신입니다."
"나이가 어떻게 되시오?"
"이룬 바 없이 나이를 헛먹어 이제 서른여덟입니다."
"난 서른여덟에 관직을 버리고 도사가 되었다네. 자네도 서른여덟에 도사가 되려 하니, 정말 인연이 깊은 것 같군."
"올해 연세가 어떻게 됩니까?"
"잠시만 기다려보게. 백 살 넘은 이후부터 나이를 잘 세지 않아서."
장삼풍은 손가락을 꼽았다 펴면서 나이를 헤아렸다.
"백열여섯이군. 아직 여섯 해 더 살 수 있다네. 무척 긴 삶이 남았지."
"그럼 자넨 사부도 없이 지금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말인가?"
"가르침은 몇 번 받았지만, 정식으로 사제의 연을 맺은 적 없습니다."
장군보는 수다스러운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장삼풍과 대화하면서 엄청 많은 말을 했다. 장삼풍 역시 자신의 이야기를 푸는데 인색하지 않았다. 그래서 둘은 달이 저물고 해가 다시 뜰 때까지 대화했다.
"자네, 내 제자가 될 생각은 없는가?"
"문파를 어지럽히는 일이 아닌지 걱정됩니다."
"난 자네에게 내 모든 절학뿐 아니라 도호까지 넘기고 싶네."
장삼풍의 말에 장군보가 깜짝 놀랐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도호를 넘긴다는 건 죽은 후 명예까지 맡긴다는 뜻이었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할 소리는 절대 아니었다.
"자네 멸세교라고 들어봤는가?"
"금시초문입니다."
"명교는 알겠지? 예전엔 백련교라는 이름을 사용했네."
"압니다. 서수휘, 곽자흥, 유복통 등이 모두 명교의 이름으로 홍건군을 일으키지 않았습니까."
"그래. 명교는 세 개 지파가 있다네. 방금 말한 자들은 광명교에 소속한 자들이야. 이들은 세상에 적극적으로 개입해 명교의 교리를 널리 퍼뜨리려 하지."
장군보는 잠자코 장삼풍의 설명에 귀를 기울였다.
"또 하나는 암흑교라네. 이름은 좀 그렇지만, 광명교와 달리 조용히 지내기를 원하는 자들의 모임에 불과하네. 이들은 신을 믿고 따르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네. 굳이 인간이 나서서 신을 위해 뭔가를 하는 건 모독이라고 여기지."
"그리고 남은 게 멸세교라네. 이들은 파괴신이 도래해서 현생을 끝내야 한다고 믿지. 세상을 파괴할 때 신이 진정한 신도들을 피안에 데려간다고 믿는 자들이네. 이들은 중원과 달리 무공 체계가 혼란하지만, 위력은 하나같이 강하다네. 대신 익히기 어려운 단점이 있지. 그래서 무인 숫자는 그렇게 많지 않은데 대부분이 고수라네."
'무극존자만큼 강한 자가 또 있을까? 독고경천이라는 자라면 내 호적수가 되었을 텐데. 갑자기 종적을 감춰 참 안타깝구나.'
"이들은 천마라는 존재를 찾는다네. 천마를 파괴신의 화신이라고 믿지. 천마를 찾아내면 십만 마귀가 지부에서 뛰쳐나와 세상을 파괴한다고 하네. 난 무당파에서 제자들을 키우며 이들과 일전을 준비하고 있네. 내 제자들은 절정에 가까운 고수들이지만, 절대를 논할만한 자질을 갖춘 아이가 없다네. 그런데 하늘이 무심치 않은지 자네를 내게 보냈네."
장군보는 거부할 수 없는 굵은 인연의 끈을 느꼈다. 그래서 깊이 고민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여 수락했다.
장삼풍은 바로 적전(嫡傳) 제자들을 불러놓고 배사지례를 행했다. 향을 피워 삼청에 절을 올리고 장삼풍에게 절을 하고 차를 권했다.
"자, 이제부터 장군보가 너희 대사형이다. 도호는 나와 같은 삼풍을 쓸 것이다."
제자들은 무척 놀란 표정이었지만,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내 수명이 육 년 남았다. 육 년 동안 나는 대제자에게 모든 절학을 가르치겠다. 내가 죽은 후 이 아이가 나 대신 너희 무공을 가르칠 것이다. 서로 인사를 나누거라."
"대사형을 뵙습니다. 둘째 제자 이현종입니다. 도호는 철섬자입니다."
"대사형을 뵙습니다. 셋째 제자 왕도종입니다. 도호는 금섬자입니다."
"대사형을 뵙습니다. 넷째 제자 장청수입니다. 도호는 받지 못했습니다."
"대사형을 뵙습니다. 다섯째 제자 이종수입니다. 도호는 받지 못했습니다."
"대사형을 뵙습니다. 여섯째 제자 구원정입니다. 도호는 받지 못했습니다."
장군보가 대사형이 되며 남은 제자들이 하나씩 밀려났다.
"저 셋은 경지에 이르지 못해 도호를 내리지 않았다. 내가 죽은 뒤 저들이 너와 열 합을 나눌 수 있을 때면 도호를 내리거라."
장군보는 자신에 비교해 별로 손색이 없는 셋이 사부와 열 합도 못 겨룬다는 말에 매우 놀랐다. 금섬자와 철섬자도 자신보다는 약해 보이지만, 차이가 커 보이지 않았다.
"자, 그럼 대제자의 실력을 좀 보자꾸나."
말을 마친 장삼풍이 다짜고짜로 손바닥을 내밀었다. 손바닥이 전혀 흔들림 없이 곧게 다가오는데, 장군보는 손바닥이 빙글빙글 도는 느낌을 받았다.
'같은 방향으로 가면서 힘을 해소해야 할까 아니면 반대 방향으로 가면서 부딪혀야 할까?'
종잡기 어려운 공격이어서 대처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장삼풍의 손바닥이 몸에 닿자 괴이한 힘이 체내에 침투했다. 장군보는 재빨리 음양무계로 기운을 전신 혈도로 보냈다. 그리고 기성해의 수법으로 기운을 정리해 용천혈로 내보냈다. 그런데 무극존자의 강맹한 내공도 쉽게 분해했는데, 장삼풍의 기운은 잘 흩어지지 않았다.
"대단하구나. 내가 태극과 양의를 섞지 않았다면 큰 낭패를 볼 뻔했다."
모든 공격을 겨우 해소한 장군보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런데 장삼풍은 잘 막아냈다고 칭찬했다. 다섯 사제도 포권을 하며 진심 어린 칭송을 건넸다.
"내 공격을 해소한 수법이 무엇이더냐?"
"음양무계에 최근 얻은 기성해를 섞었습니다."
"음양무계라. 안타깝게도 나는 태극과 양의를 섞은 기운을 네게 보냈다. 태극은 음양이 균형을 이룬 기운이다. 아마 내 기운을 흩어버리는 게 쉽지 않았을 거다."
장군보는 자기 상황을 손금 들여다보듯이 얘기하는 장삼풍에게 완전히 감복했다.
"게다가 양의는 두 가지 선택 중 어느 걸 할지 펼친 나도 모른다. 아마 기운을 밖으로 유도하는 데 애를 많이 먹었을 거다."
장삼풍과 많은 대화를 나눴지만, 자신의 무공에 관해서는 전혀 얘기한 바가 없었다. 그런데도 장군보가 막기 어려운 공격을 했다는 건, 손속을 섞지 않고도 장군보의 밑천을 어느 정도 알아냈다는 뜻이다.
"너희 다섯은 각자 수련하거라. 군보는 나와 함께 폐관하러 가자꾸나."
張君寶 장군보
三豊 삼풍의 도호를 받다
- 작가의말
장삼풍에 관한 자료를 보면 요동 의주 사람이라는 말과 복건 소무 사람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복건 소무의 일을 적은 어떤 책에 장삼풍이 여든 번 이상 언급됩니다.
노산이라는 곳에 장삼풍이 심었다고 전해지는 나무들이 있습니다. 기록을 살피면 그 나무를 심을 때 장삼풍은 200살 가까이 됩니다.
정사엔 장삼풍이 소림사와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그러나 의천도룡기를 포함하여 장삼풍이 소림에서 스님으로 지냈다는 주장이 여럿 됩니다.
이러한 모순을 해결하려고 사실 장군보는 둘이었고 같은 도호를 사용했다는 설정을 짰습니다. 어차피 장삼풍이 알려진 건 원말명초, 즉 소설 지금 시점입니다.
수많은 무공을 만들고 제자들을 가르친 장삼풍은 조용히 죽고 환속승 장군보가 장삼풍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해 명성을 떨쳤다는 설정입니다.
천마가 언급되었는데, 이 글에선 천마가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 세계관에선 천마란 존재할 수 없는 존재입니다. 멸세교가 갈구하는 신의 화신이 바로 천마입니다. 혹시 갑자기 천마가 등장해 천마물로 바뀔까 봐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천마가 등장하길 바라는 분들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가끔 천마를 언급해 그 신비함을 부각하여 약간의 갈증이라도 해소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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