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87 화 – 뒤엎어 버렸다.
관심이 절실히 필요한 자한테 누군가가 봐준다는 것이 참 힘이 되고 고마운 것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 제 87 화 – 뒤엎어 버렸다.
하얀 창의 선택을 받으신 분.
대성관[大聖官]의 이 말에
리아인, 루카테르의 눈동자가 심하게 요동쳤다.
류안의 저기압을 발동시키는 단어 중 하나.
선택.
안 그래도 이미 저기압이 내려앉은 류안인데
더더욱 해서는 안 되는 말.
리아인, 루카테르는 겉으로 티는 내지 않았으나 안절부절못했다.
하지만,
그런 것을 알 리가 없는 대성관[大聖官]은
류안의 저기압을 증폭시키는 말을 줄줄 내뱉기 시작했다.
“하얀 창을 보러오셨다 하여 설마 했는데, 제 눈이 틀리지 않았습니다.”
대성관[大聖官]의 눈동자에는 환희가 가득했다.
“저희 빛의 성전[聖殿]은 오랫동안 성자[聖者]가 되어주실 분을 기다려왔습니다. 그리고, 성자[聖者]는 하얀 창의 선택을 받으신 분.”
리아인, 루카테르는 당혹감과 불안감에 온몸이 휘감기고 있는 상태로 숨죽인 채,
류안의 표정에 집중했다.
류안은 무표정한 얼굴로 대성관[大聖官]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었다.
위험하다.
멍한 표정이 아닌 무표정은 위험신호.
폭풍전야의 의미.
이런 것 역시 알 리가 없는
대성관[大聖官]은 류안의 염색한 긴 백발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정말 이토록 하얀 창에 걸맞은 하얀 분이라니. 성자[聖者]로서 저희와 함께 해 주십시오. 당신과 함께할 영광을 주십시오.”
대성관[大聖官]은 류안을 향해 양손을 정중히 펼쳐 내보이며 허리를 숙였고,
리아인, 루카테르는 저 큰일 날 소리만 해대는 대성관[大聖官]의 입을 막기 위해 기절시켜야 하나 고민하던 그때.
“이곳은 빛의 성전[聖殿]이지?”
류안이 입을 움직여 물었으며,
“네, 빛을 모시는 성전[聖殿]입니다.”
대성관[大聖官]은 긍정을 표하는 건가 싶어
환한 미소를 보이며 답해주었다.
“신이 아닌 빛.”
“네, 그렇습니다.”
류안의 얼굴에 미소가 드리워졌다.
대성관[大聖官]은 류안이 성자[聖者]가 되는 것을 승낙하는 것이라 여기며 잔뜩 기대감에 부풀었지만,
아니었다.
착각이었다.
류안의 미소는 온기 하나 없는···
싸늘함 그 자체였다.
그 미소에
대성관[大聖官]은 몸속 깊은 곳 본능으로부터 올라오는 오싹함과 마주해야 했으며
눈앞에 성스러운 하얀 빛의 존재가
서서히 어둠을 품은 존재가 되어가고 있는 것을 인지해야 했다.
“·········.”
염색을 풀어 원래의 긴 검은 머리카락을 한 류안의 손에는 두 개로 분리된 하얀 창이 아닌
검은 창이 들려있었다.
또한,
류안한테 귀속된 두 존재가 반응을 보이며
도톰한 하얀 옷을 그림자가 지듯이 물들여서는 멋들어진 검은 옷으로 바꾸었고
등에서는 보란 듯이 커다란 검은 날개가 존재감을 뽐내며 활짝 펼쳐졌다.
하얀, 빛의 성자[聖者]가 아닌
어둠을 품은 이단[異端]의 존재.
“·········.”
분명 배척해야 할 검은 어둠의 존재이건만,
너무나 순수한 밤하늘을 연상케 하는 그 모습에 대성관[大聖官]은 아무 말도 못 한 채,
어째서인지 거부하면 안 되는
눈앞 존재의 뜻을 겸허히 받들어야 한다는 강한 신념에 사로잡혔다.
새하얀 빛에서 검은 어둠으로 변하는 모습이
마치,
빛으로 엮인 굴레에서 벗어나
쉬어도 된다는 것처럼 보였기에.
빛에 지친 심신이 어둠을 받아들였다.
“···그대의 뜻을 따르겠나이다.”
대성관[大聖官]은 류안 앞에 무릎을 꿇고는
경의를 표했다.
이런 대성관[大聖官]의 모습에
리아인, 루카테르는 황당함에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뭐야···, 신념을 어쩌고··· 이렇게 바로 180° 변심해도 되는 거야?’
루카테르는 이제껏 빛을 섬기면서 어둠, 검은색을 배척하던 것들이 이러니···
황당함을 넘어 어이가 가출할 것 같았다.
거기에 더해
대성관[大聖官]의 모습을 본 성관[聖官]들도
그 누구 하나 동요하기는커녕 항의도 없이 뜻을 따라 겸허히 무릎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눈앞의 검은 존재를 받들 자세를 했다.
“하─···.”
그 모습에
류안은 서늘한 미소는 유지한 채 헛웃음이 나왔다.
류안이 의도한 것은
너희들이 찾고 있는 빛의 성자[聖者]가 아니니 신경 접으라는 것이었는데,
어째서 무슨 이유로 더 극성을 부리는 건지
당최 알 수가 없었다.
이러한 몰이해는 그대로 짜증이 되고 저기압을 건드리게 되었으니···.
그로 인해 이날,
빛의 성전[聖殿]은 처참하게 부서졌으며
지도에서 ‘빛의 성전[聖殿]’이라는 명칭이 사라지게 되었다.
그 와중에 다행이라고 할까,
이 난리로 다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류안은 그렇게 성전[聖殿]을 부수고
조금은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리아인, 루카테르와 함께 오두막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류안은 물론이고 리아인, 루카테르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지게 되니,
그것은
이 이후 시간이 꽤 흐른 뒤,
빛의 성전[聖殿]이 사라진 그곳 그 자리에
검은 어둠의 성전[聖殿]이 새로이 세워지게 된다는 것이었다.
* * *
은은한 허브향이 감도는 오두막 거실.
“푸크크킄크─··· 크······.”
의자에 앉아 웃음 참느라 애쓰는 자를 보며
벨드라엔은 한심하게 보고 있었고
리아인은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며
류안은 관심 없었다.
“푸훗, 크크큭. 큭─···.”
숨넘어갈 듯 웃음을 참고 있는 그 모습에
“보기 짜증 나니까, 그냥 웃어.”
리아인이 짜증 내며 말했고
“푸하하하──!!!”
워스만은 더 이상 웃음을 참지 않고 터트렸다.
그렇게 잠깐 호탕하게 웃고는 류안을 보며 말했다.
“대단해. 정말 맘에 들어. 아주 시원하게 뒤엎고 오셨어.”
워스만은 정말 속이 시원했다.
빛의 성전[聖殿]은 명칭 그대로 신이 아닌 ‘빛’을 섬기는 곳.
그래서인지
그 성전[聖殿]의 성관[聖官]들은 빛은 모든 것을 아울러 비추는 무형의 영광이라며
신과 다르다고 자부하면서 은근히 신을 무시해왔고,
이런 것이 신들의 신경을 건드려 불쾌해하며 싫어하는 신들이 많았지만
믿음과 신념에는 함부로 관여할 수 없기에
그냥 무시하는 척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래서 류안이 뒤엎은 사태로
워스만 뿐만 아니라
티는 내지 않고 있어도 여러 신이 통쾌해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
관심 없는 신들이 통쾌해하든 말든
류안은 대꾸 없이 여전히 멍하니 있었고
워스만은 계속 말을 했다.
“이야, 근데 뭘 어떻게 부쉈길래, 그것들이 얌전히 있는 거냐?”
워스만의 말대로
인명피해는 없었다고 해도 성전[聖殿]이 폭삭 형체도 남김없이 부서졌기에
류안과 리아인을 후원한 헨즈 공작 가문이나
레쉬아 왕실에 피해보상을 청구할 만도 했을 법한데,
빛의 성전[聖殿] 성관[聖官]들은 며칠이 지나도 아무 대응 없었다.
아니, 오히려
깨우침을 받았다면 자숙에 들어가 있었다.
그런 그들의 모습이
지켜봄의 시선에 얼핏 스쳐 지나가면서
류안의 표정이 뚱해졌다.
전혀 그런 의도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왜 뭣대로 해석하고 그렇게 받아들이는 건지
암만 생각해도 이해되지 않았기에···.
“그래서, 그거 물어보려고 온 거냐?”
벨드라엔이 미간을 구긴 채 말했다.
“1 왕자 다미엔이 불쌍하지. 이딴 녀석을 듀아 왕국의 수호신으로 영입했으니. 으휴─···.”
“왜 이래? 나름 수호신 역할 잘하고 있어.”
“그래? 그러셔? 그래서 여기 온 이유는 뭐냐?”
장난기와 못마땅함이 교차하던 분위기는 진지해져 갔다.
“너도 이미 전해 들었겠지. 각 신전에 천사가 모습을 보인다는 소식 말이야.”
벨드라엔은 손가락으로 미간을 잡았다.
말이 천사이지
가짜라는 것은 뻔히 알고 있었다.
“대체 그 검은 녀석들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건지···.”
“가관이지. 각 신전에 나타난 천사가 절대자가 곧 강림하니 그 뜻을 맞이할 준비를 하라고 한다더군.”
“하, 그놈의 절대자.”
벨드라엔은 조심히 류안을 봤다.
류안은 자신한테 하는 얘기가 아니라 그런지 저기압은 없이 여전히 뚱하니 있었다.
대신 리아인이 집중해 두 신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처형자의 하얀 창을 가지고 ‘그분’의 뜻을 이어받았느니 어쩌느니 해서, 심판자를 절대자로 착각한 것인 줄 알았더니···.”
벨드라엔은 말을 하다 시선을 느꼈고
워스만이 물끄러미 보고 있음을 인지했다.
“뭐야? 왜 그렇게 봐?”
“음, 내가 말 안 해줬나? 아니지, 레이쉴이 말해주지 않았어?”
“?????”
워스만은 국왕 레이쉴과 신의 대리인으로 리아인과 류안이 듀아 왕국에 왔을 당시,
야외연회장에서 일어난 사태 때 생포한 검은 옷 녀석이 말했던 것을
벨드라엔한테 알려주었다.
벨드라엔은 미간을 더 세게 잡았다.
그리고 확인차 되물었다.
“그러니까, 심판자를 뛰어넘을. 모든 신을 군림[君臨]할 절대자의 후보 신들이 다른 세계에 있고, 그 신들이 곧 이곳 세계에 온다는 것과 절대자를 선택할 검은 천사에 관한 예언서가 있으며, 검은 옷 조직의 진짜 하얀 창을 다루는 ‘그분’이라는 그저 하수인에 불과하다는 거냐?”
“뭐, 그런 셈이지.”
검은 옷 조직의 ‘그분’이라는 자가 단순히 하수인 역할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현재의 흐름으로 보면 대충 그렇게 보였다.
“하이고─···.”
벨드라엔은 기가 차고 어이없었다.
“그 예언서는 또 뭐냐?”
“글쎄, 검은 옷 조직에서도 오래전에 분실해 찾고 있는 것 같더군. 조만간 기록의 신을 찾아가 볼 예정이다.”
‘따로 알아볼 것도 있고.’
워스만은 의자 등받이 기대며 턱에 한 손을 대고 할 일들을 생각하던 그때.
삐이익──! 삐익─!
긴급연락 알림음이 울려 퍼졌다,
워스만은 품에서 다미엔과 직통으로 연결되는 영상통신 장치를 꺼내 연결했다.
-워스만 님. 긴급 상황입니다.
“긴급 상황?”
-네, 그것이······.
영상통신 속 다미엔은 다급한 모습을 보이면서도
뭔가 고심하는 듯 잠시 멈췄다가
말을 하기 시작했다.
-신의 처형식이 있다는 출처 불명의 통보가 왔습니다. 게다가 이곳뿐만 아니라, 모든 왕국의 왕실에 통보가 간듯합니다.
워스만과 벨드라엔의 표정이 굳어졌다.
“처형식은 언제지?”
-30분 뒤··· 세시 정각이라고···. 돌아오시겠습니까? 아니면, 제가 영상을 거기로 연결해드릴까요?
“아니, 그럴 필요 없어.”
워스만은 고개를 돌려 오두막 거실 현관문을 응시했다.
끼이익──···.
거실 현관문이 열리고
국왕 레이쉴이 영상통신 장치를 손에 든 채 누나인 세이지와 함께 들어왔다.
뒤따라 루카테르도 들어오고 있었다.
셋의 얼굴은 말할 것도 없이 어둡고 심각했다.
* * *
레쉬아 왕국의 국왕 레이쉴과 세이지,
수호신이자 멸의 신 벨드라엔과 쌍둥이 둘,
수호 드래곤 루카테르,
리아인과 류안,
듀아 왕국의 수호신이자 전쟁의 신 워스만.
그리고
영상 장치를 통해 자리를 함께한
듀아 왕국의 1 왕자 다미엔.
이렇게 오두막의 거실에 모여있는 상태로,
째깍. 째깍. 째깍. 째깍. 째깍.
시계의 초침 소리만이 거실에 울리고 무거운 침묵이 흐르고 있는 가운데,
레이쉴은 회중시계를 보고 있었다.
째깍. 째깍. 째깍.
째깍─!!!
유독 크게 들리는 초침 소리와 함께
시계의 바늘들이 정각 세시를 가리켰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비이잉──.
레이쉴이 들고 온 탁자 위 영상통신 장치에서
낯선 연결음이 들리는 동시에
영상통신 장치가 저절로 커지며 영상화면이 띄워졌다.
“!!!!!”
대형 3D 영상을 연상케 하는 화면이 펼쳐진 상황에 류안을 제외한 오두막에 있는 모두가 놀라며 경계했다.
평범한 영상통신 장치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형상.
영상 관련 고위능력을 가진 마법사이거나
혹은 ‘신’이 벌인 짓.
영상화면에는 넓은 관장을 앞에 둔 십자 처형대에 누군가가 묶어 매달려 있는 것이 보였으며
그 양옆으로 천사인 듯 보이는
검은 날개를 가진 자가 하얀 창을 들고 한 명씩 서 있었다.
그와 함께
영상인데도 불구하고 위압감을 주는
진짜 처형자의 하얀 창을 가진 검은 가면에 검은 옷을 입고 있는 자가 처형대 앞에 서 있었다.
검은 옷 조직의 ‘그분’이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다.
뼈가 되고 살이 되는 조언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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