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74 화 – 초대장.
관심이 절실히 필요한 자한테 누군가가 봐준다는 것이 참 힘이 되고 고마운 것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 제 74 화 – 초대장.
오두막에서 지내기 전
잠시 머물렀던 왕궁 내에 있는 손님용 방을 다시 이용해야 했다.
오두막과는 달리 이곳은 보는 눈들이 있어서
별로 내키지는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오두막은 부서지기 직전이었기에······.
리아인은 잠들은 류안을 조심히 침대에 눕혔다.
류안은 괜찮다고 했으나
다시 밀려 올라오는 미안함과 자괴감에
“후우─···.”
짙고 긴 한숨을 쉰 리아인은
도움이 안 되는 감정을 누그러트리기 위해 시선을 움직여 방을 둘러봤다.
정확히 기억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때 이용한 후로는 아무도 사용한 적이 없었는지 꽤 시간이 흘렀음에도
그 당시의 방 모습 그대로였다.
마치, 보존해 놓은 듯이···.
“하─······.”
리아인은 뭔 엉뚱한 생각인가 싶어
헛웃음을 내보낸 후,
늘 그랬듯 침대 옆 바닥에 책상다리로 앉아
잠든 류안이 깨어날 때까지 가만히 바라보며 기다렸다.
그런 방의 문밖에는
벨드라엔, 워스만과 함께 국왕 레이쉴이 있었다.
그 셋의 심정이 좋지 않았다.
류안의 도움 없이 일을 진행하려 했으나
결국에는 저 어린 신의 능력, 힘이 필요하다는 것을 다시금 느끼게 되었기에···.
레이쉴은 울컥 올라오는 것을 애써 삼키며
여기에 계속 서 있어 봤자 해줄 수 있는 것이 없어 자신의 임무를 하기 위해 집무실로 향했다.
그런 레이쉴의 뒷모습을 보는 벨드라엔한테
워스만이 진지하게 말을 했다.
“잠깐, 얘기 좀 할까?”
벨드라엔은 뭔 얘기인지 예상되는 말에
그 요청에 응했고
두 명의 신은 걸음을 옮겨 왕궁 뒤뜰 한적한 곳으로 왔다.
워스만은 주변에 아무도 없음을 탐색한 후
접근금지 결계를 펼쳤다.
그리고 벨드라엔을 가만히 응시하며 말했다.
“너, 이젠 그 제약 좀 풀지?”
“하─아─···.”
벨드라엔은 역시나 예상했던 말에 한숨을 쉬었다.
“···내가 왜 제약을 걸고 스스로 도망자 길은 선택했는지 너도 잘 알고 있을 텐데.”
“알지. 네 이기심과 무책임에서 도망치기 위해서잖아.”
워스만의 말에
벨드라엔은 흠칫하며 동요를 보였다.
그리고···.
“···그래, 네 말이 맞아.”
“하아─···.”
순순히 인정하며 고개 숙인 그의 모습에
이번에는 워스만이 한숨을 쉬었다.
“야─!”
자신을 부르는 강한 어조에
벨드라엔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고
장난기 하나 없는 진중한 얼굴의 워스만과 시선을 마주했다.
“네가 네 영역으로 있던 마을을 구하기 위해 제약을 걸고 도망자가 되는 것을 선택했듯이, ‘수호신’이란 명칭에 걸맞게 이 왕국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이젠 제약을 풀고 네 권능을 펼쳐야 하지 않겠어?”
워스만의 말에
벨드라엔의 표정이 묘해지며 말했다.
“지키기 위해 ‘멸[滅]’하라는 거냐?”
벨드라엔의 되묻는 말에
워스만은 아주 흡족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래, 이젠 네 영역이라 할 수 있는 이 왕국을 위협하는 뒤틀림을 멸[滅]해.”
워스만은 빌어먹을 페디로스를 상대한 후,
다시금 인지했다.
검은 옷 조직이나 그 조직을 조력하는 신들은 얼마든지 상대할 수 있고 질 것이란 생각조차도 하지 않고 있지만,
뒤틀린 기운은 다르다.
거기에다가 뒤틀림을 품은 신 녀석들도 상대해야 하는 변수가 생긴 상황에서
뒤틀린 기운을 다루는 류안.
그 아이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다.
그러나,
그 아이를 비장의 수로 정한 만큼
더 이상은 드러내지 않게 상식 밖의 그 능력들을 신중히 잘 숨겨야 했으며
그와 더불어
그 아이가 심신이 지치지 않게 잘 지켜야 했다.
그렇기에 그 대신
뒤틀림을 다루지는 못해도 없애 버릴 힘을 가진 존재가 나서야 했다.
물론,
리아인, 레이쉴, 다미엔이 각자의 능력으로 뒤틀림을 일부 없앨 수는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일부에 국한될 뿐이며
신이 관여되어 있고 뒤틀림의 규모가 예상 이상으로 커진 만큼,
뒤틀린 기운을 멸[滅]할 수 있는 벨드라엔이 앞에 나서야 했다.
“훗─.”
벨드라엔은 씁쓸한 웃음을 보였다.
“말이나 못 하면···.”
“그럼, 넌 손 놓고 그 아이한테 다 떠넘길 생각이냐?”
워스만의 거침없는 말에
벨드라엔은 또다시 흠칫했다.
“아니잖아. 너 그 아이. 류안과 리아인의 가림막이 되어주겠다고 하지 않았어? 그럼, 네가 앞에 나서야지.”
벨드라엔은 한 손으로 얼굴을 감싸 쥐었다.
“하-, 이건 뭐···. 차라리 왕국 하나를 멸하는 거가 더 쉽겠어···.”
“그렇게 해도 상관없고.”
워스만의 맞장구에
벨드라엔은 손에 가려지지 않은 눈으로 그를 매섭게 노려봤다.
“농담이다. 네가 행여나 그러겠다.”
워스만은 농담이면서도 진담이었다.
벨드라엔의 성격상 그럴 일이 없다는 것을 알기에 농담이었으며,
설령 권능을 펼쳐 왕국을 멸하게 한들
멸[滅]의 신으로서 권능의 일환이었기에
그 누구도 심판자조차 죄를 물을 수 없으므로 진담이었다.
“···제약 풀어서 해결될 거였으면 진작에 풀었다. 너도 봤잖아. 형체가 명확한 거라면 모를까, 그렇지 않은 것을 멸하게 되면 그 주변의 것들도 휩쓸려 같이 사라지게 돼.”
벨드라엔은 얼굴을 감싸 쥔 손을 내리고
워스만을 바라보며 뒷말을 이었다.
“검은 옷 녀석들과 그것들을 조력하는 빌어먹을 신 놈들이 허허벌판이나 죽음의 땅 같은 곳에서 난리 칠 리도 없고. 뒤틀림을 더 많이 얻기 위해 사람 많은 도시 아니면 자연이 우거진 곳을 노릴 것인데, 그런 곳에서 내 능력을 썼다가는 오히려 독이 될 수 있어. 뒤틀림을 한 곳으로 모을 수 있다면 그나마··· 아, 젠장!!!”
벨드라엔은 말하다 번뜩 인지하게 된 것에
급 말을 멈추고 짜증을 터트렸다.
그리고는
뒤뜰 벤치에 털썩 소리가 날 정도로 거칠게 앉고는 양손으로 얼굴을 쓸며 고개를 하늘로 치켜들었다.
“결국에는 류안의 도움이 있어야 하잖아!”
벨드라엔은 짜증을 넘어 화가 나고 착잡함과 함께 머릿속이 어지러워지던 가운데,
문뜩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피스링 마을에서 점술가가 한 말.
‘당신이 해야 할 일, 가야 할 길을 알려줄 존재.’
‘당신이 스스로 채운 제약의 족쇄를 풀어 줄 존재.’
‘검은 천사.’
벨드라엔은 그 당시 별말 아니라 여겼던 그 말이 류안을 얘기하는 것 같았으며
점술가의 마지막 말이 뇌리에 박혔다.
‘보호하세요.’
벨드라엔은 기가 찼다.
자신도 그렇고
이곳 세계가 마치······.
벨드라엔은 급 고개를 세차게 가로 저었다.
뒷생각을 마저 하면 그것이 현실이 될 것 같은 불길함 때문이었다.
이는 결코···,
류안한테 좋은 일이 아니었다.
워스만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으며
그런 상황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해야 하는 모순된 상황을 진행하기로 했다.
“후우─······.”
벨드라엔은 일단 착잡함을 가라앉히기 위해 긴 한숨을 쉬고는
피스링 마을의 점술가를 한 번 찾아가 볼 생각을 하면서 벤치에서 일어나고 있을 때.
하늘에서 두 개의 빛이 반짝이더니
그대로 일직선으로 내려와서는
워스만과 벨드라엔의 바로 눈앞에서 멈췄다.
그리고 섬광을 터트렸다.
파─확──!
그 섬광에 워스만과 벨드라엔은 본능적으로 두 눈을 감고는,
“이 망할 신 놈이─···.”
“전할 것이 있으면 좀 얌전히 전할 것이지. 뭔 이딴 식으로 전하고 ㅈ랄이야?!!!”
둘 다 짜증을 있는 그대로 표출했다.
섬광이 터지고 사라진 그 허공에는
두 장의 초대장이 둥실거리며 떠 있었다.
워스만과 벨드라엔은 감았던 눈을 뜨고 각각 초대장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봉투를 열어 내용을 확인했다.
┌─────···∴∵∴···─────┐
이 초대장을 받은 신들은
시국이 시국인지라
긴급대책 회의를 하기 위해
소집함을 알리는 바이니
이에 응해주길 바란다.
└─────···∵∴∵···─────┘
내용은 인사말 같은 어두도 없이
아주 간략했다.
그렇지만
검은 옷 조직과 하얀 창, 조력해주는 신들.
그리고, 뒤틀림에 대해 회의하기 위한 소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꾸깃───!
워스만은 진즉에 해야 하는 것을 지금에서야 소집한다는 것에 황당함이 밀려와
초대장을 거칠게 구겨 쥐었다.
벨드라엔은 그의 행동을 이해하면서 봉투를 정리하던 중.
팔랑~.
하면서 종이 하나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는
땅에 떨어지기 직전에 낚아챘다.
그것을 본 워스만도
벨드라엔한테만 따로 보내진 것이 뭔가 싶어 옆으로 와 얼굴을 들이밀었다.
“─!!!!!”
둘의 표정이 동시에 똑같이 구겨졌다.
그 종이는 다름 아닌
류안을 검은 천사로서 초대하는 초대장이었다.
“이것들이 진짜···.”
류안을 초대하는 이유는 뻔했다.
신이란 것들이 가만히 앉아서
지금 이 세계에 일어나고 있는 이런저런 사태를 해결해야 한다는 명목하에
류안을 신의 대리인 천사로 부려먹겠다는 것이었다.
벨드라엔은 이 초대장을 멸[滅]하고 싶었지만
류안한테 온 것이라 할 수가 없었다.
* * *
은은한 향이 감도는 방.
신한테도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레이쉴이 류안을 위해 준비해 준
심신안정에 도움이 되는 각종 허브차와 아로마가 가득 있었다.
그 덕인지 차분한 분위기가 흐르는 가운데.
테라스 창문으로 노을 져 들어오는 햇빛을
잔잔한 무늬의 레이스 커튼으로 가려 그림자가 옅게 드리워진 창가의 탁자 의자에서
평소처럼 멍한 표정으로 맑고 투명하게 우려낸 허브차를 마시는 류안이 있었다.
그 옆에는 당연히 리아인이 앉아 있었다.
벨드라엔은 그런 류안의 표정을 슬며시 살피며 조심히 초대장을 내밀었고
류안은 그 초대장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가만히 바라보더니.
“갔다 오기만 해도 되는 것이면 갈게.”
나지막하고 덤덤한 류안의 말이
벨드라엔과 워스만은 자신들한테 간다는 의사를 밝힌 것인 줄 알았다. 그러나.
아니었다.
류안의 말에 초대장에서 미세한 빛과 함께 진동이 일고 있었다.
“나한테 자꾸 이래라저래라하면서 건수 주지 마. 가서 확 뒤엎어버리는 수 있으니까.”
류안의 잔잔하지만 살벌한 말투에
초대장이 크게 움찔했다.
초대장을 향해 협박을 날리는 류안을 보며
벨드라엔은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워스만은
“푸하하하───.”
아주 속 시원하고 재밌다는 듯이
호탕하게 웃고 있었다.
류안이 신을 죽일 수 있는 신이라는 것을
저들은 모른다고 할지라도
신을 처형하는 하얀 창과 뒤틀린 기운을 다룬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위협적이기에
신들한테 제대로 경고를 날린 것이다.
류안은 미세하게 떨고 있는 초대장을 붉은색 브로치의 아공간이 아닌
옷 주머니에 대충 넣었다.
“날짜와 장소, 시간이 없던데 어떻게 소집 장소에 가는 거야?”
류안의 물음에 워스만이 답해주었다.
“그때가 되면 초대장을 받은 자들 한정으로 문이 나타나고, 그 문을 열면 바로 소집 장소로 연결되니까 그냥 들어가면 돼.”
“흐음, 그럼 문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초대장을 받은 자들은 위치와 행동을 감시당하겠네.”
“오호-, 초대장의 용도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군. 모르는 신들이 태반을 넘는데 말이야.”
워스만은 빠른 눈치에 감탄했다.
그리고 기특하다는 듯이 류안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것을 본 리아인은 바로 워스만의 손을 거칠게 쳐내며 류안의 머리에서 치워버렸고
벨드라엔은 뒤에서 워스만의 목을 팔로 조르며 뒤로 끌어냈다.
“너 뭐 하는 거야?”
벨드라엔의 화난 말투에
“너야말로 머리 좀 쓰다듬은 것 같고 왜 이리 과민반응이야?”
워스만은 의아함을 드러냈다.
리아인이야 류안한테 집착을 보일 정도로 과잉보호하는 것을 알기에 그러려니 하지만,
벨드라엔이 이런 반응을 보이는 것에 의아할 뿐이었다.
벨드라엔은 팔로 목을 조르고 있는 자세를 유지하며 워스만한테 들리도록 말했다.
“너 나중에 나하고 얘기 좀 하자.”
그리고 류안과 리아인을 조심히 봤다.
류안은··· 표정 변함없이 있었고
리아인은 흐트러진 류안의 머리카락을 정돈해주고 있었다.
벨드라엔은 워스만의 목을 조른 팔을 풀었고
워스만한테 지켜보겠다는 의미의 손가락 움직임과 눈빛을 보인 후,
리아인과 류안한테 다가가 소집된 장소에 갔을 때 생길 수 있는 상황과 그에 대처하는 것에 관해 알려주었다.
그런 모습을 목을 매만지며 보고 있는 워스만의 표정이 묘해졌다.
‘저 녀석 뭔가 눈치챈 건가?’
뼈가 되고 살이 되는 조언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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