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42 화 – 저기압.
관심이 절실히 필요한 자한테 누군가가 봐준다는 것이 참 힘이 되고 고마운 것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 제 42 화 – 저기압.
레쉬아 왕국. 국왕 레이쉴의 집무실.
분명 ‘인형’을 두르고 있는 벨드라엔 이었지만, 눈 밑에 다크서클이 가득했다.
듀아 왕국에 국왕 레이쉴이 가 있는 동안
재상들한테 붙잡혀 국정 업무를 보고 있던 벨드라엔.
그의 업무처리 능력이 예상외로 출중해 재상들은 너무나 만족해하고 있었으며,
쌍둥이 둘도 흡족해하고 있었다.
딱하다고 해야 할까···
벨드라엔은 ‘신’인 자신이 어쩌다 이러고 있는지 의문을 들어 하면서도 일은 참 성실히 잘하고 있었으니.
그렇게 오늘도 재상들한테 붙잡혀 힘들게 회의를 마치고 쌍둥이 둘과 함께 집무실로 온 피곤함에 찌든 벨드라엔은
듀아 왕국에서 돌아온 이들을 보며 말했다.
“···너희 거기서 뭘 하다가 왔냐?”
벨드라엔의 손에는
각 왕국에서 긴급으로 도착한 서신[書信]들이 한가득 있었다.
그 서신들에는
수호신으로서 조언을 구하는 것은 기본이요.
신의 대리인에 대한 문의가 가득했다.
“거기에 가서 신들과 아이들에 관한 정보만 알아 온다고 하지 않았어? 그런데, 왜? 류안에 대해 문ㅇㅡ······.”
벨드라엔은 국왕 레이쉴의 업무용 책상 위에 서류들을 잔뜩 놓은 후,
류안을 보려다 흠칫했다.
평소의 멍함 없이 무표정한 류안이 보였다.
그리고 깨달았다.
건들면 안 된다.
잘 못 건드는 그 순간,
신이 하나 죽어 사라지거나······
왕국 하나쯤은 그냥 가볍게 날아간다.
벨드라엔은 조심히 레이쉴을 봤다.
“크흠, 류안 군. 리아인 군. 피곤할 텐데 가서 쉬는 것이 어떤가?”
그 말에 류안과 리아인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고는 집무실을 나갔다.
쇼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레이쉴의 손짓에 허리 숙여 인사를 하고는 둘의 뒤를 따라 나갔다.
그렇게 세 명이 집무실을 나간 걸 본 후,
벨드라엔은 조심히 입을 열었다.
“류안···한테 무슨 일 있었나? 웬만한 일에는 귀찮다고 신경 안 쓴다면서 그냥 넘겼었는데··· 좀 전에 본 류안의 표정이······.”
레이쉴은 미간을 세게 잡았다.
“하─아···, 그것이······.”
한숨과 함께
듀아 왕국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하려던 그때.
똑. 똑. 똑.
“국왕 전하, 듀아 왕국에서 긴급서신이 도착했습니다.”
집무실 문밖에서 들리는 시종의 말에
레이쉴은 미간을 더 세게 잡았다.
그의 모습을 본 벨드라엔이 서신을 대신 받아 주었다.
“···뭐라고 적혀있습니까?”
“음, 듀아 왕국의··· 응?”
서신을 본 벨드라엔의 눈이 커지며 동그래졌다.
“뭐길래 그러시는···?”
레이쉴은 불안감에 긴장하고 있었다.
“어··· 듀아 왕국의 수호신 워스만이 이곳 레쉬아 왕국에 조만간 방문할 것이라는 통보인데···.”
서신의 내용을 들은
레이쉴의 눈도 커지면서 동그래졌다.
쌍둥이 둘도 놀라고 있었다.
“이 자식이 여길 왜 와? 아니, 이 자식이 수호신이라고? 미쳤나?”
벨드라엔은 황당함에 어이가 없었다.
* * *
왕국 레쉬아 왕궁의 중앙 정원.
국왕 레이쉴, 벨드라엔과 쌍둥이 둘.
그 외 호위기사 몇 명이 대기하고 있었다.
잠깐의 시간이 흐르고,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하늘 아래 기운이 회전하면서 모이더니, 곧 원형의 검은 통로가 생기기 시작했다.
수도 전체와 왕궁 자체에 펼쳐져 있는 이중[二重]의 보호막과 방어막은 우습다는 듯이 약간의 반발만 있었을 뿐,
두 막의 훼손은 없이 통로가 열렸다.
그 안에서 윤기가 흐르는 검붉은 색의 갈기를 휘날리는 웬만한 미인들은 뒷발로 걷어차 버릴 정도의 수려한 외형의 검은 말이 모습을 보였고,
그런 말의 등에 앉아있는 투박하고 흠집 많으나 멋이 느껴지는 검붉은 갑옷 차림의 한 존재가 모습을 보였다.
검은 말은 허공에서 평지를 걷듯 내려와서는 정원 잔디에 우아하게 발을 디디면서 착지했다.
그리고,
갑옷의 존재 역시 절제된 동작을 보이며 말 등에서 내려와 잔디에 발을 디디었다.
전쟁의 신 워스만.
등장부터 아주 그냥 존재감을 있는 대로 뿜어대고 있었다.
워스만이 검붉은 갈기의 검은 말 목을 가볍게 툭툭 치자.
검은 말은 연기로 변하며 사라졌다.
그런 뒤,
워스만은 눈앞의 존재들은 찬찬히 살펴봤다.
국왕 레이쉴이 먼저 한 걸음 앞으로 나와
한 손을 정중히 내보이며 인사했다.
“듀아 왕국의 수호신이자 전쟁의 신 워스만 님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일방적인 통보였는데도 불구하고 이렇게 환영해주니 고맙군.”
워스만도 손을 내밀어 레이쉴 손을 맞잡았고
둘은 악수를 했다.
“그런데 그 아이는 안 보이는군.”
워스만이 말한 ‘아이’가 누구를 말하는지 눈치챈 레이쉴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우선 안으로 들어가시겠습니까?”
어느새 악수하던 손을 놓은 레이쉴은 왕궁 출입구를 향해 손을 내보였다.
“그러지.”
워스만은 발을 움직여 왕궁으로 향했고
그 뒤를 레이쉴, 벨드라엔과 쌍둥이 둘이 함께했다.
왕궁 안, 국빈용 응접실.
워스만은 국왕 레이쉴을 배려해 상석의 자리가 아닌 적당한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소파 등받이 기대며 거만하게 다리를 꼬자
갑옷과 투구가 차례로 서서히 사라지며 죽은 피의 색을 닮은 검붉은 머리카락과 옅은 보라색의 눈동자를 한 워스만의 모습이 보였다.
워스만은 입꼬리를 올리며 한 존재를 향해 입을 열었다.
“오랜만에 보는군. 벨드라엔.”
벨드라엔은 구겨지려는 미간을 손님으로 온 자에 대한 예의로 억눌렀다.
“그래, 오랜만이다. 워스만.”
서로 미소를 지은 채 바라보는 두 왕국 수호신의 시선은 불꽃이 튀기듯 아주 강렬하게 부딪히고 있었다.
레이쉴과 쌍둥이 둘은 각자의 자리에 앉아 조용히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두 명의 신[神] 대화에 의도치 않게 끼어들었다가 잘 못 되어
그중 한 명인 전쟁의 신 권능이 발휘되어 ‘영역 싸움’이라도 하게 되면
고래 싸움에 새우등이 터지는···
이 일대, 왕국이 초토화될 수 있었기에.
레이쉴은 이 자리에 류안이 없는 것이 천만다행이라고 여겼다.
만약 이 자리에 류안이 있었다면
신들의 삼파전··· 아니, 삼파전이고 뭐고
한 명의 신. 류안에 의해 고래나 새우 할 것 없이 모두 깡그리 사라지는 끔찍한 상황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왜 이런 안 좋은 과몰입[過沒入] 하냐고?
류안이 어떤 힘을 지닌 신인 줄 안다면 이해될 것이며
거기에 다가···
그 신이 지금 기분이 안 좋은 상태이니··· 합당한 추론이라 할 수 있다.
암튼, 상상만으로 끔찍한 상황에
레이쉴은 부르르 올라오는 소름을 힘겹게 눌러 앉혔다.
그렇게 레이쉴이 속으로 안도하려던
그 순간.
안도감을 와장창 깨버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벨드라엔, 너 재미있는 ‘아이’를 숨겨두고 있었더군.”
“뭐─?”
벨드라엔과 쌍둥이 둘은 이 전쟁의 신이 뭔 말을 하는 것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 ‘아이’가 아니고 천사였지. 그래, 천사면 그동안 숨겨둘 만도 했지.”
“뭔 헛소리야?”
“허, 대리인으로 보내놓고는 계속 모르는 척 숨기는 건 웃기지 않나?”
벨드라엔은 워스만을 보며
‘손님이다.’를 주문 외우듯 속으로 읊조리고는 구겨지려는 미간을 관리했다.
그리고 잠시 생각에 빠졌다.
‘이놈이 왜 계속 자다 봉창 두들기는 소리를 해대는 거지? 멸족되어 없는 천사를 내가 무슨 수로 숨긴다고···. 응? 잠깐, 대리인이면 리아인하고 류안인데······.’
“천사를 나한테 넘기는 것이 어때?”
이 말에 벨드라엔의 미간은 결국 구겨졌다.
“야! 이 XX야! 뭔 말 같지도 않은 말을 지껄이고 있어. 한 왕국의 수호신으로서 용건이 있어서 왔으면, 얌전히 그 용건이나 보고 가!!”
레이쉴과 쌍둥이는
언성이 높지는 않았으나, 오히려 높지 않은 언성에 더 강렬하게 들린 처음 듣는 그의 험한 말에 눈이 커지고 입은 다물지 못한 채 굳어 있었다.
하지만,
워스만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아니,
오히려 익숙한 듯 여유롭게 입꼬리를 올리고는 아직 끝나지 벨드라엔의 말을 듣고 있었다.
“이 XXX 자식아! 그리고 뭘 넘겨? 아까부터 멸족된 천사 타령은 왜 해대고 난리야? 용건 없이 XX 같은 헛소리만 지껄일 것이면 그냥 네가 수호하는 왕국으로 돌아가! XXX─야!!”
계속 이어지는 저음의 험한 말에
쌍둥이 둘은 말려야 되나 안절부절못하고 있을 때.
“류안 이라고 했던가?”
“뭐─?”
응접실 안의 공기가 얼음물을 끼얹은 듯 순식간에 차갑게 내려앉으며 적막이 깔렸다.
그러나 곧
그 적막을 깨는 워스만의 목소리가 들렸다.
“조만간 난 전쟁을 할 거다.”
“─────!!!”
“어떤 전쟁인지는 아직 말 해 줄 수 없지만. 그 전쟁의 판도를 결정지을 아주 중요한 요소, 열쇠가 천사인 류안 이라는 아이가 가지고 있는 능력이다.”
워스만은 자세를 바로 하며 얼이 나간 듯한 그들을 바라봤다.
“그래, 솔직히 말하면 나한테 너무나 필요한 존재지. 그렇기에 나한테 양보해 줬으면 한다.”
벨드라엔은 저 말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고
대응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고 있었다.
그런 중 확실한 것은
전쟁의 신이 ‘전쟁’을 한다고 하는 것은 심히 심각한 상황이라는 거다.
설명을 덧붙이자면
심심찮게 오해를 하는 경우가 있는데,
전쟁의 신이 ‘전쟁’을 일으키는 것이 아닌
‘전쟁’의 기운이 모이는 곳에 영역을 두고 모습을 드러내는 것일 뿐이었다.
그러한데
‘전쟁’을 먼저 언급을 한 것이다.
벨드라엔은 미간을 손으로 잡고 진정시켜가며 신중히 머릿속을 정리해 갔다.
요즘 어째 다들 미간을 잡느라 바빴다.
전쟁도 전쟁이지만,
일단은 저놈이 잘 못 알고 있는 것부터 해결하기로 했다.
“네 놈이 착각한 것이 있는데, 류안은 내 아이가 아니야. 천사는 더더욱 아니고, 누구한테 양보하고 어쩌고 할 존재가 아니란 말이다.”
당연했다.
류안은 ‘신’이니까.
그것을 모르는 워스만은 그 아이.
천사 류안을 물건 취급하듯 말해서 그런 것인가 생각했다.
“그래, 당사자의 의견이 중요하단 것이군.”
벨드라엔의 미간은 다시 구겨졌다.
맞는 말이긴 했지만,
그 이전의 문제인 것을 어떻게 말을 해야만 저놈한테 ‘신’이라는 것을 빼고, 이해시킬 수 있을지 엄청 고민스러웠다.
그때,
“역시, 천사인 그 아이를 직접 만나서 말했어야 했어.”
“아니! 천사가 아니라고 이 XXX 자식아!!!”
벨드라엔의 입에서 다시 험한 말이 튀어나왔다.
아직 류안의 검은 날개를 본 적이 없는 그는 저 X 같은 전쟁의 신이 왜 자꾸 류안을 천사라고 하는지 도무지 이해해보려 해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런 속 사정을 알 리가 없는
워스만은 벨드라엔의 반응이 의아했다.
‘뭐야, 벨드라엔 이 녀석 왜 이래? 설마 숨기고 있었던 것이 아니고 정말로 천사인 줄 모르고 있는 거야?’
이 생각이 머릿속에 자리하자.
“허─······.”
워스만의 입에서 어이없는 탄성이 흘러나왔다.
서로 다른 감정을 보이는 벨드라엔과 워스만.
그런 두 신의 모습을 옆에서 보며 엄청나게 굳어 있는 레이쉴과 쌍둥이 둘이 있었다.
그들은 불안감에 숨이 막힐 것 같았다.
두 신의 말싸움?
이건 문제가 아니었다.
류안.
류안이 이 상황을 보고 들었다면······
아니지.
보는 힘이 권능이니 분명 보고 들었을 것이다.
안 그래도 듀아 왕국에 갔다 온 이후로 저기압인 류안이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왜 그런 말이 있지 않은가.
평소 조용하던 사람이 화를 내면 더 무섭다는···.
그러하기에
그들은 류안이 그저 평소처럼 무덤덤하게 넘어가 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랐다.
이 시한폭탄 같은 분위기를 만든 장본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이, 벨드라엔. 너 혹시 류안이라는 아이가 천사인 줄 모르고 있었냐?”
벨드라엔은 레이쉴을 봤다.
듀아 왕국에서 대체 류안이 뭘 보여줬길래 계속 저런 착각을 하는지 묻는 눈빛이었다.
“아───!”
레이쉴은 전쟁의 신 워스만의 언령[言令].
침묵의 제약 영향 탓인지
류안의 검은 날개에 대해 벨드라엔한테 얘기해 주지 못하고 있었다.
생각조차 못 했다.
벨드라엔은 레이쉴의 표정에서 정확하게는 몰라도 류안이 천사로 오해받을만한 일이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역시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기압인 류안.
“뭐, 그건 내 상관할 바 아니니. 난 그 아이를 만나러 가보도록 하지.”
워스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불안해하는 그들을 보며 씨익 웃어 보였다.
“내가 찾지 못하게 궁리하느라 헛수고할 필요 없어. 내 탐색의 힘을 튕겨내는 그곳 중심에 그 아이가 있을 테니까.”
속마음을 들킨 듯 움찔하는 그들을 향해
워스만은 여유롭게 손을 흔들어 보이며 응접실을 나갔다.
침묵이 내려앉은 응접실.
레이쉴, 벨드라엔과 쌍둥이 둘.
그들은 곧 벌어질지도 모르는 엄청난 사태에······ 뭔가 해야 했으나,
함부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언제 터질 줄 모르는 태풍을
잘 못 해서 긁어 부스럼 만드는 상황은 벌이지 말아야 했기에.
* * *
왕궁 구석에 있는 정원.
워스만은 여전히 맑은 하늘을 바라보며
자신의 탐색하는 힘을 튕겨낸 그곳의 중심에 있는 오두막을 향해 여유롭게 발걸음을 옮기며 가고 있었다.
“───♪”
그는 류안을 찾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자신이 왔다는 것을 알리려 일부러 탐색의 힘을 사용했으며,
그에 호응하듯
오두막 앞마당에 류안이 나와 있었다.
팔짱을 끼고 짝다리를 한 아주 불량한 자세를 하고서.
하지만,
워스만은 그 모습이 맘에 들었다.
군견 도베르만 앞에서 짜증이 어린 눈으로 노려보는 아기 검은 고양이를 보듯이
귀엽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워스만의 눈에 보였다.
검은 고양이가 몸을 낮추어 자세를 잡더니, 이내 발톱을 세우고 자신을 향해 맹렬히 달려드는 모습이.
문제가 있다면···
그 발톱이 신을 처형할 수 있는 하얀 창이라는 것.
“워후우──!”
워스만은 팔과 다리. 가슴팍에 갑옷을 부분적으로 두르고는 단검을 꺼내 들었다.
채앵─────!!!
평온하던 오두막의 앞마당 한가운데서
하얀 창의 창촉과 단검의 날이 서로 부딪히며 거친 불꽃이 튀었다.
뼈가 되고 살이 되는 조언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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