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45 화 – 쉼표.
관심이 절실히 필요한 자한테 누군가가 봐준다는 것이 참 힘이 되고 고마운 것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 제 45 화 – 쉼표.
타닥. 타닥. 타닥···.
리아인은 한발 한발 내디디며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여러 색이 섞인 듯한
혼탁한 검은색의 어둠 속.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공간에서 유일하게 흐릿하게나마 보이는 허공에 둥실 떠 있는 계단 판들을 내려가고 있었다.
타닥. 타닥. 타닥─···.
그렇게 한참을 내려가던
리아인의 얼굴에는 서서히 짜증이 서리기 시작했다.
“이거 언제까지 내려가야 하는 심연에 도착하는 거야?”
그도 그럴 것이
한참을 내려가고 내려가도 심연은커녕 계단의 끝도 보일 기미가 없었다.
-글쎄? 심연이 위치한 깊이는 주관적이라서 사람마다 다 다르거든.
“······ 그 말은 내가 심연을··· 그 밑에 묻어 둔 그것을 거부한 만큼 아래 깊숙이 있다는 말이야?”
-그렇다고 할 수 있지.
리아인은 심연의 목소리에 짜증이 폭발할 것 같았다.
-그래도 요즘은 내 목소리를 조금씩이나마 듣고 있어서 예전에 비하면 그리 깊지는 않을 거야. 뒤틀림을 가려준 신이 내 목소리를 부분적이나마 들리게 해준 이유가 이것 때문이었나···?.
심연의 목소리에 리아인은 멈칫했다.
하지만,
이내 발을 움직여 계단을 내려갔다.
타닥. 타닥. 타닥···.
얼마나 시간이 흘렀고
얼마나 계단을 내려왔는지 가늠하기 힘들고 정신도 아득해지려던 그때.
타닥. 타닥─··· 참방.
“───!!!”
계단 판을 밟는 소리와는 전혀 다른 소리가 들렸다.
계단의 끝.
참방─. 참방···. 참방.
검은 바닥에 얇게 물이 고여있는 듯
거울처럼 리아인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고,
한 발씩 걸음을 옮길 때마다 참방거리는 소리와 함께 물 파장이 일렁이며 주변으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그 파장이 사라지는 지점에서
화면이··· 영상들이 순차적으로 떠오르더니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기 시작했다.
촤라라라───락─···.
그렇게 펼쳐진 영상들에서는
이곳 세계로 끌려오기 오기 전,
류안과 다시 만나고 나름 평범한 18년간을 살았던 이전 세계에서의 삶이 보였다.
그 삶에서
부모라 할 수 있는 두 분과
나름대로 친분이 있던 교우의 모습을 집중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허나, 어차피 이제는 이전 세계에서 있었던 자신의 존재 흔적은 완전히 사라졌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딱히 미련은 없었다.
그래서였을까.
이전 세계에서의 삶을 보여주던 영상화면들이 일제히 가루로 부서지듯 바닥으로 꺼지면서 사라졌다.
그리고 대신,
그 이전의 삶의 영상들이 떠오르며 보이기 시작했다.
그땐 류안은 없었고
풍족하지 못했던 형편에 조금 고생하고 힘들었으나,
손길을 내밀며 껄떡대던 그 자식들이 없었다는 것만으로도, 나름 만족스럽고 괜찮았던 50년간의 삶이었다.
···············.
이번에도 리아인이 별 반응이 없자.
영상화면들은 또다시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다음으로 보게 된 것은
삶의 전환점이 된
류안과 처음 만났던 그 날.
정말 힘들고 지쳐있던 그때.
포기하고 싶어도 포기할 수 없었던
포기하는 것조차 용납 되지가 않았었던
그저 도망치는 것밖에 할 수 없었던 그때.
류안을 만나 잠시 쉴 수 있었으며
그 후,
대략 50년간의 삶과
지금의 18살 소년의 삶을 살 수 있었다.
리아인은 기쁨과 반가움에
그날의 영상을 더 자세히 보고자 다가갔다.
그리고
그 영상에 손을 뻗으려 하는 순간,
앞서 사라진 영상화면보다 더 빠르게 사라졌다.
마치,
리아인의 반응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이
심술을 부리는 것처럼 사라졌다.
리아인은 아쉬움에 가만히 서 있었다.
“·········.”
영상화면들을 보여주는 것을 잠시 멈춘 듯
그 공간에는 적막만이 흐르고 있었다.
또 얼마간의 시간이 흘러갔을까.
혼탁한 어둠이 깔려있던 그곳에 붉은색이 감돌기 시작하더니 서서히 주변으로 번져나갔다.
리아인은 이건 또 무슨 해괴한 짓인가 싶어
주변을 둘러보다가 이내, 눈동자가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익숙한 붉은색.
그 익숙한 붉은색은 곧 익숙한 곳으로 변해갔다.
이제껏 영상화면들로 보여준 것과는 달리
흡사, 그곳에 직접 있는 것처럼···
어느 마을의 중심에 서 있는 자신을 인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알아차렸다.
자신의 기억 속에 있는 수많은 삶 중
최초의 삶.
처음 ‘신의 손길’에 뒤틀렸던 그때의 그곳.
그 마을이었다.
하지만,
마을의 풍경은 보통 마을의 분위기와는 사뭇 달랐으니.
노을 진 것 같이 하늘을 붉게 물들인 불길.
그 불길에 휩싸여 있는 마을.
그리고
그 중심에 서 있는 리아인···.
리아인은 뺨을 따라 흘러내리는 한줄기 눈물을 느낄 수 있었다.
그때······
‘손길’에 뒤틀리며 생긴 능력 때문에
‘신의 손길’을 거부하고 폭주한 뒤틀림으로 인해 무너져가는 마을을
아직 어렸던 그때의 리아인은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었으며,
망연자실해 그저 웃음만이 나왔었다.
“하··· 하. 하.”
리아인은 저도 모르게 나오는 헛웃음과 함께
자신의 손을 들어 바라봤다.
백금빛의 전류 파편들이 거칠게 반짝이고 있었다.
마찰에 의한 정전기를 이용한
전류 파편들을 모은 전기의 힘.
뒤틀려져 생긴 힘이나 아이러니하게도 현재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는 능력.
하지만,
심연 밑에 묻어둔 그것은 이것과 달랐다.
리아인은 바꿀 수도 없는···
기억 속의 과거에 미련을 두지 않은 채
그것이 있을 심연을 찾으려 하던 그 순간,
눈앞에 로브 차림의 한 존재가 나타났다.
어딘가 익숙한······!!!
처음 ‘손길’을 내밀어 자신을 뒤틀리게 한···
망할 ⋄⋄의 신.
“아이야, 그때 네가 내 손길을 받아들였다면 이런 일은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 말에 리아인의 표정은 썩어들어갔고
입을 움직여 말했다.
“······웃기지 마! 거절했는데도 강제로 손길을 주어 뒤틀어놓은 거잖아!”
이제는 기억에서 흐릿해진
눈앞의 망할 신 놈 면상을 보려고 했지만,
로브의 후드로 인해 그림자가 지어져 얼굴을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그러던 중,
후드 속에서 흘러나오는 것이 보였다.
검고 긴 머리카락.
리아인의 한쪽 눈썹이 꿈틀거렸다.
휘이이이잉───······.
우연인지 아닌지
때마침 열기를 품은 바람이 불어오면서 눈앞에 있는 신의 얼굴을 가린 후드가 뒤로 넘어가며 벗겨지더니,
검고 긴 머리카락이 바람에 따라 휘날리며 얼굴이 드러났다.
그리고 보인 짙은 회색의 눈동자.
“───!!!!!”
리아인의 눈이 커졌다.
류안의 얼굴이었다.
그 얼굴에 입술이 잘게 떨리기 시작했으나
리아인의 눈동자에는 동요가 아닌 분노와 살기가 가득 채워지고 있었다.
류안의 얼굴을 한 그 신은 일순 멈칫하다가
리아인한테로 천천히 손을 뻗었다.
“아이야, 내 손을 잡거라. 그럼, 너의 뒤틀림은 사라지고 이 악몽과도 같은 상황도 사라질 것이다.”
류안의 얼굴로 온화하고 부드럽게 미소짓는
그 신의 모습은···
소름이 돋으면서 기분이 나빴다.
아니, 기분이 더러웠다.
역겨웠다.
리아인은 떨리던 입술을 멈추고는
으득! 소리가 날 정도로 이를 갈았다.
“웃기지 말라고 했지. 헛소리도 적당히 해야 들어줄 수가 있어.”
리아인이 눈동자 가득 채워진 분노와 살기를 표출하려던 그때.
-이 자식이 죽고 싶어 환장했나!!!
분노와 살기로 가득 찬,
격분한 심연의 목소리가 머릿속이 아닌
불에 휩싸인 마을 풍경 전체에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 소리에 놀란 류안의 얼굴을 한 그 신은 뻗던 손을 멈추더니,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주춤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야익! XXX 같은 자식아!!!
-지금 네까짓 게 감히 나의 신, 류안의 얼굴을 도용해?
-그것도 작살 내도 모자라고 시원찮을 그 망할 신 놈의 모습으로 보여줘?
격분함이 극에 달한 심연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울려 퍼지고 있었다.
-네 놈이 죽고 싶어서 환장했지? 어?
-그래, 그렇지 않고서야 이런 XX 같은 짓을 할 수가 없지.
-넌 내가 가만 안 둬.
-이 XXX야─!!!
XXX───··· XXX──··· XX······ X···.
얼마나 큰 소리로 외친 것인지
마지막 심연의 목소리가 한 욕은 여러 번 메아리치기까지 했다.
“하───······.”
심연의 목소리가 한 말 중,
‘나의 신, 류안’
이 말에 리아인은 인상을 찡그리려다 말았다.
틀린 말은 아니었으며
심연의 목소리는 바로 과거 자신의 목소리였기에······.
그저 그 목소리를 외면하고 있었을 뿐.
또한,
목소리가 내뱉은 말들은 전부···
리아인 자신이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리아인은 손을 펼쳐 백금빛 전류 파편들을 모았다.
모인 전류 파편들은 이내 창 형태로 모양을 갖추었고, 망설임 없이 눈앞의 신을 향해 휘둘렀다.
그에 류안의 얼굴을 한 신은 황급히 뒤로 물러나 피했으나,
파지르르르─르────.
전류의 여파가 얼굴에 스치고 지나갔으며,
신은 손으로 얼굴을 감싸더니 고통에 괴로워했다.
─────!!!!!
얼굴을 가로지르는 커다란 화상[火傷].
소리 없는 비명.
류안의 얼굴이 일그러져 흉측하게 변했다.
하지만,
리아인은 아무렇지 않게 다음 공격을 펼쳤다.
가짜였기에
용납할 수 없었기에
저 가면을 빨리 벗겨버려야 했다.
리아인은 다시금 백금빛 전류 파편들을 모았다.
“──···?!!!”
그런데,
모여든 파편들은 이제와는 다른
날카롭고 거친 빛이 되면서 그의 몸 주변을 감싸았다.
그리고, 그 빛들은
리아인의 몸을 타고 내려가 발밑으로 스며들 듯 사라졌다.
“·········.”
잠시 어리둥절하던 리아인은 곧 이것이 뭔지 알아챘다.
사라진 빛에
상처투성이의 신은 공격 시도가 실패한 것이라 여기고 기괴한 미소를 짓고는
도망가기 위해 발을 움직이던 그 순간,
발밑에 빛이 감돌더니
태풍 속 거대한 번개가 하늘에서 내려치듯
바닥에서 역으로 솟구쳐오르며 신의 몸을 덮치며 관통했다.
콰르르르─ 콰과광───!!!!!!
끼에에에엑─────!!!
바닥에서 솟구친 번개를 닮은 빛에 전통으로 맞은 그 신은 기괴한 소리로 울부짖었고
지지지직─ 껍데기가 타는 소리와 함께
류안의 얼굴을 한 흉측한 가면이 녹아내리며 완전히 사라졌다.
그것을 본
리아인은 마지막 일격을 날리려 했다.
그러던 그때.
쨍그랑───!
고통에 몸을 움츠린 신의 몸과 주변···
아니, 공간에 유리가 깨지듯 금이 가더니
이내 부서지면서 수면을 닮은 바닥으로 파편들이 떨어져 나뒹굴었다.
차락 차락 차라락─···.
떨어진 공간 파편들은 곧 잘게 가루로 부스러지면서 사라졌고
그와 동시에 도망간 것인지
망할 신의 모습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 대신,
혼탁한 어둠이 다시 보이면서
리아인은 희미하게 보이는 계단 판들 사이 계단참[階段站]처럼 넓은 판에 서 있는 자신을 인지했다.
“하···아, 짜증 나네. 아직 심연 근처도 못 간 거잖아.”
리아인은 미간을 잡았다.
“그 망할 놈 때문에 쓸데없이 시간만 허비했어. 야! 중간에 이상한 놈이 끼어들었으면 제때 알려줘야 하는 거 아냐?”
-뭐야? 나도 몰랐다! 심연에 발 디딜 때 보이는 파장 같아서 도착한 줄 알았다!!!
리아인은 되려 성질내는 심연의 목소리.
자신의 목소리에 어이가 없었다.
“그래, 너 잘났다.”
리아인은 지금의 이 상황이 웃기기 시작했다.
자신의 목소리에 비아냥거리고 있었으니
이건, 뭐
누워서 침 뱉는 것 같았다.
리아인은 소리 없이 헛웃음을 치고는
다시 계단을 내려가기 위해 발을 움직였다.
그런데.
“크─윽───!”
자리에 엎어지듯 주저앉았다.
“으─··· 윽···!”
그 망할 신 놈을 공격했던 날카롭고 거친 빛이··· 이제는 자신의 내부를 찌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잊고 있었던 것이 생각이 났다.
이 ‘빛의 힘’의 반동.
“아욱─··· 젠장···!”
라아인은 몸을 웅크렸다.
오래전···
그때도 도망치기 위해 이 힘을 사용하고는 반동으로 인해 얼마나 고통스러웠던가.
“크으으──···.”
참기 힘든··· 견디기 힘든 빛의 찌름에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 같았다.
심연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젠장···, 목소리라도 들으면 그나마 정신을 차리고 버틸 수 있을까 했는데···. 심연의 목소리 정작 필요할 때는 도움···이 안 되네.’
다시 누워서 침 뱉는 자신의 말에
웃음이 나와야 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으윽─ 크으으윽───······!!!”
겨우 붙잡고 있는 정신이 날아갈 것 같던
그 순간.
· ······아이야,
· 쉬고 싶으면 쉬어도 되니라.
· 너를 비추는 빛은
· 어둠이 가려줄 테니···
아련하게 목소리가 들려왔다.
“·········!”
놀란 리아인은 고개를 들어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향해 바라봤다
· 빛으로 지치고 힘든 몸을
· 어둠의 품에 맡기고, 편히 쉬어도 되니라.
다시 들린 목소리
류안의··· 진짜 류안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그 목소리의 울림과 함께
혼탁했던 주변의 어둠이 밤하늘의 어둠으로 변해가는 것이 라아인의 눈에 보였다.
· 그 빛은 더 이상
· 너를 괴롭히지 못할 것이니.
· 어둠에 물든 잔잔한 빛만을 느끼며
· 편히 쉬어도 되니라.
뒤이어 들린 류안의 목소리에
리아인은 일순 몸이 뒤틀리는 듯했다.
“───!”
그리고, 그 뒤틀린 틈으로
내부를 찌르고 있던 빛들이 빠져나오더니
밤하늘의 별처럼 허공에 자리하며 잔잔히 빛나는 것이 리아인의 눈동자에 비추어졌다.
통증과 고통이 거짓말처럼 사라진 리아인은 웅크렸던 자세를 펴서는 넓은 판 바닥에 편안한 자세로 앉았다.
그리고
별처럼 빛나고 있는 그 빛들을 보며
아련하게 들려오는 류안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렇게 잔잔히 흐르는 물처럼
잠깐의 시간이 흘러갔고.
· ···너는 신의 아이가 아니니까.
· 빛에 휘둘리지 말고
·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돼.
아련한 목소리를 듣고 있던 리아인은
왠지 류안이 저 말을 하면서 닭살이 돋았을 모습이 상상되어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났고,
그렇게 입가에 미소를 머금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어둠만이 가득했으나,
포근하고 편안함이 느껴졌다.
그때처럼 편히 쉴 수 있었다.
그리고 들린 말.
· 조급할 것 없어.
· 기다려 줄 테니까.
리아인은 감았던 눈을 뜨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끝이 보이지 않는 계단.
리아인은 발을 움직여 계단 판들을 밟으며 다시 내려갔다.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
여유로운 마음으로.
뼈가 되고 살이 되는 조언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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