뺏고 빼앗기 (4)
* * * * *
결국 루카스에게 종속된 메티갈로사는, 울며 겨자 먹는 격으로 그의 말에 고분고분 따랐다.
"저기 구석에서 무릎 꿇고 손 들고 있어라."
"...네에... 흐흐흑..."
그렇게 가장 큰 장애물을 깨끗이 치운 그는, 대악마 루치펠과 진중한 대화의 시간을 가졌다.
"후우, 감사합니다. 덕분에 골치 아픈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하하하, 우리 사이에 뭘 이런 거 가지고~. 아빠가 아들을 신경 쓰는 거야 당연한 거 아닌가?"
"......"
그는 툭하면 '아들~, 아들~' 거리는 대악마의 행태가 몹시 불만이었다. 하지만 반대로 루치펠은 그의 일그러진 표정에도 아랑곳 없이 싱글싱글 웃으며 본론을 꺼냈다.
"아참, 지금 저 쪽 상황이 되게 애매한 거야, 내가 굳이 말로 설명 안 해도 잘 알지?"
"예, 그렇습니다."
"내가 좀 알아봤는데, 선계 최고신들의 엉덩이가 아주 들썩들썩하는 모양이야. 그나마 다행인 건 대악마의 현세강림여부를 아직 정확히 모른다는 거고."
그 정보의 출처야 천상의 가브리엘일 게 뻔하니, 그것을 의심하고 자시고 따질 필요가 없으리라 여겨졌다.
"허면 제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아들은 어떻게 하고 싶은데?"
"아니..."
순간적으로 불만의 목소리를 높이려던 루카스는, 가까운 거리에서 이쪽을 뚫어져라 응시하는 유리아나를 의식하고서 불순한 행동을 자제했다.
"흠흠, 아둔한 저를 깨우쳐주십시오. 귀를 열고 제왕의 지혜를 경청하겠습니다."
"허허, 맨입으로?"
"......"
그가 번쩍하고 올려다 본 루치펠의 입가엔, 모종의 장난기가 잔뜩 서려 있었다.
'이 양반이 대체 무슨 꿍꿍이지?'
안 그래도 자신을 부르는 호칭과 말투가 영 석연찮았는데, 아무래도 대악마는 루카스가 선뜻 화를 내지 못하는 분위기를 꽤나 즐기고 있는 듯 했다.
"커험! 하잘것없는 제가, 제왕께 그 무엇을 드릴 수 있겠습니까?"
"에이~, 나는 딱히 큰 거 안 바래. 네가 지금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야."
"?"
"나를 아빠, 아버지라고 한 번 불러보려무나."
"이, 이런 ㅁ..."
"응? 뭐라고?"
"아, 아닙니다. 감히 미치지 않고서야, 제가 어찌 제왕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겠습니까?"
"아아, 신경 쓸 거 없다. 내가 허락하마. 누가 뭐래도 너는 내 영에서 태어난 영이 아니더냐?"
"......"
루카스의 생각이 깊어진 이유는, 루치펠의 어투에서 단순계약 이상의 똑 부러진 관계정립을 요구하는 상당한 진심이 느껴져서였다.
'뭐지? 어떤 대악마나 대천사가 우리 사이의 계약을 눈치라도 챈 건가?'
그에겐 곰곰이 따져볼 여유가 주어지지 않았다. 루치펠이 계속 머뭇머뭇하는 그를 향해 아주 달콤한 제안을 던졌기 때문이었다.
"네가 나를 아버지라고 시원하게 불러보려무나. 그러면 이 아비가 덤으로, 베엘제불에 대한 복수전까지 다소 늦춰주마."
"?"
지옥에서 세력다툼이 거하게 발발하면, 그 혼란의 영향이 마계에도 미칠 것은 당연지사. 그 혼탁한 분위기를 잘만 활용하면 루카스의 마계 정복전쟁이 한층 수월해질 터였다.
"그것을 굳이 미룰 필요가 있습니까?"
"으흐흐흐, 대충 3년 정도 미뤄줄 수 있다만? 그것도 저 행성의 시간을 기준으로 말이지."
대악마가 무엇을 염두에 두고서 이런 제안을 하는지 루카스도 금방 깨우쳤다.
"......그동안 저를 쭉 지켜보고 계셨던 겁니까?"
"하하하! 꽤 볼만 했었단다. 처음엔 가시만 잔뜩 돋아있던 네가 조금씩 부드러워지는 모습이 관전 포인트였지. 으허허허헛! 어떠냐? 그만한 세월이라면 며느리들하고도 어느 정도 알콩달콩하게 보낼 수 있지 않겠느냐?""
"......"
루치펠은 눈으로 쌍욕을 시전 중인 그를 적당히 다독여줬다.
"에이~, 내 나름의 배려였다. 앞으로 마계에서 한참을 너저분하게 뒹굴어야 할 건데, 어쩌다 기분 좋게 회상할 추억거리라도 있으면 심신회복에 적잖은 도움이 되잖느냐."
"......그렇다면 50년으로 부탁 드립니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련다는 심정에서 루카스가 흥정을 대뜸 걸었는데, 대악마가 그리 호락호락할 리 없었다.
"허허, 그건 좀 과하구나. 으음... 그래도 4년까진 어찌어찌 가능할 거 같다."
"그러면 30년은 어떠십니까?"
"껄껄껄, 전쟁에도 적기라는 게 있음을 너도 잘 알잖느냐~."
"......"
"좋다, 7년! 이것이 내 마지막 제안이다. 대신에 저 바깥 일을 정리하는 걸 적극 도와주마. 어떡하겠느냐?"
루카스의 마음이 휘청 기울었다. 고작 호칭을 바꾸는 정도로 사랑하는 이들과 보낼 시간을 7년이나 벌 수 있다면, 그렇게까지 손해는 아니라고 믿었던 것이다.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아... 아버...지."
" 껄껄껄! 오냐, 오냐. 내 아들아! 그럼 이만 나가자꾸나! 네가 자질구레하게 해야 할 일이 은근히 많단다!"
"예."
루카스가 이 발언의 무게를 깨우치게 되는 건, 아주 머나먼 미래의 일이었다.
* * * * *
루치펠이 몇 가지 방책을 알려주고 사라진 지 오래지 않아 많은 것들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특히 아르카니토로부터 전쟁상황을 보고 받는 라호나바스의 입장에선 당혹의 연속이었다.
<큰일났습니다, 라호나바스시여! 저희가 배신 당했습니다!>
{음?}
<저희가 믿었던 그 마족이, 아주 어렵게 완성시킨 워프게이트를 철저히 파괴하고 유유히 떠나갔습니다! 저희가 본성으로부터 보급을 받지 못하면 지금의 전선이 너무나 불리해집니다!>
{뭐, 뭐라?!}
그가 뒤통수가 얼얼함을 느끼며 자신의 주인인 마족 라트로키에게 고자질하려 하는데, 아르카니토가 또 다른 비보를 전해왔다.
<헛! 기뻐하십시오! 웜홀생성기가 다시 재가동했다고 합니다!>
{옳거니! 워프게이트를 망가뜨린 일은, 연결 혼선을 방지하기 위함이었구나! 다소 방법이 거칠었으나, 시간이 매우 촉박하여 그랬을 가능성이 크다. 아주 이해 못할 범주는 아니다.}
<그렇습니다! 양쪽에서 압박하면 저희의 승리입니다! 위대하신 라호나바스시여, 당신의 힘이 매우 절실합니다! 어서 건너오시어 무지몽매한 가축들에게 벌을 내려주십시오!>
{크흐흐흐! 오냐, 알겠다. 내가 친히 선두를 이끌겠노라!}
그런데 그 길로 훨훨 날아올라 웜홀에 도착한 라호나바스는 또 한 번 깜짝 놀라고 말았다.
{이게 왜... 일방통행이지?}
무언가 오차가 발생됐나 싶은 마음에 그가 전력으로 부딪쳐도 봤으나, 웜홀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대체 이게 뭔...}
보다 상세한 분석을 위해 그가 머리를 웜홀 가까이 가져다 댔는데, 때마침 웜홀 안쪽에서부터 매섭게 튀어나와 그의 미간을 노리는 그림자가 있었다.
- 싕-!
{으아닛!}
의표를 찌르는 기습이었으나, 공격보다 앞선 살기가 워낙 강렬했던 터라 늦지 않게 막아낼 수 있었다.
{흡!}
- 크과과과과! 터엉!
결국 그의 보호막을 뚫지 못하고 튕겨져 나간 인물은 바로 항사룡이었다.
"쳇, 아깝군. 나 답지 않게 흥분하여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치다니..."
{네 놈은 천신의 사도로구나!}
"틀렸다. 천신들과는 단순한 계약관계일 뿐. 본좌는 천마이니라."
{...무어라? 천마?}
비로소 웜홀의 기현상을 천신들의 농간쯤으로 이해한 라호나바스가 그를 향해 일갈했다.
{크하하하! 스스로를 대단히 높이는 놈치고 심히 어리석구나! 네깟 놈이 홀로 무엇을 할 수 있겠느냐?!}
표현 그대로였다. 이 일대 주변엔 그 본인을 제외하더라도 본격적인 침공을 위한 트로돈 군단이 무려 수십 만 단위로 도열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항사룡은 여전히 거만한 미소를 잃지 않았다.
"흥, 누가 혼자라더냐?"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갑자기 셈하기도 어려울 분량의 수정들이 마치 눈사태처럼 웜홀에서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 과가가가가가가...
하나같이 균열이 심각하여 척 봐도 불안정하기 짝이 없는 수정들은, 땅에서 뒹군 지 불과 몇 초도 되지 않아 일제히 부스러졌다.
- 챙~, 쩌저적, 쨍-!
그리고 그것들은 곧 같은 수의 악령 군단으로 화했다.
{{{꾸어어어어!}}}
{{{피아아아아!}}}
1대 정령왕을 따르다가 강제억류 당했었던 악령들. 그들은 뒤따라 등장한 1대 소왕들의 지휘 아래 전투태세를 갖췄다.
"이래도 본좌가 혼자로 보이느냐?"
{?!}
참으로 기가 찰 노릇이라 살짝 당황은 했으되, 그래도 초월자 라호나바스는 여유가 만만이었다.
{주제를 모르는 필멸자로군! 겨우 그것으로 한계를 초월한 나를 상대하겠다는 말이더냐?}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아는 법."
{뭐라?}
루카스에게 얻어 맞은 뒤로 자신의 아집을 깨트린 항사룡은, 잠시 늘어뜨렸던 장검을 고쳐 쥐었다.
"너 따윈 내가 넘어야 할 작은 동산에 불과하다. 내 오늘 네 녀석의 명을 끊고, 나를 옭아맨 천신들의 계약 또한 끊어버릴 것이니라."
{이 노옴!}
그렇게 역침공이 발발했다.
* * * * *
항사룡이 라호나바스를, 악령 군세는 트로돈 군단을 상대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악령들의 전력이 트로돈에 꿀리지 않았기에 전반적인 흐름은 우열을 가리기 힘들었다. 그러나 1대1 싸움중인 항사룡의 경우는 전혀 그렇지 못했다.
" 쿨럭... 끄으윽......"
{크하하하하! 주둥이만 요란한 놈이었구나!}
과연 신의 영역에 발을 디딘 자와, 이미 온전히 들어선 자의 격차는 뚜렷했다.
"미친... 빌어먹을 천신들이 갖가지 꼼수를 동원할 만 했군."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항사룡의 유효타는 발생하지 않았고,.어쩌다 운 좋게 방어막 일부를 찢어냈을지라도, 라호나바스의 예리한 응수를 피해 뒤로 멀찍이 물러나야만 했다.
"쯧, 행성을 십여 개나 집어 삼켰다 하더니만, 그것이 허언이 아니었나 보구나."
실상은 대악마 소환을 위한 에너지를 특정 기물에 축적하는 과정에서 흘러넘친, 그 찌꺼기만을 홀짝홀짝 주워 먹은 것에 불과했지만, 그가 그동안 헤쳐먹은 행성의 숫자가 숫자이다 보니, 그것만으로도 하급 마족에 준하는 격을 쌓을 수 있었다고 하겠다.
게다가 라호나바스는 이 행성의 모든 면을 지배하고 있다는 점이 항사룡을 더더욱 불리하게 했다. 갑자기 빈사상태인 행성의 의지가 되살아나서 통제권을 회수하지 않는 이상, 라호나바스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원소들이 방해했으면 방해했지, 그를 도와주진 않을 터였다.
"젠장, 공력 회복이 이리 더뎌서야..."
어쨌거나 항사룡의 본인만의 능력만으론 고전을 금치 못하는 현재의 처지를 쌈박하게 뒤집을 방도가 없었다.
{크흐흐흐, 간만에 즐겁게 놀았노라.}
"...어엇?!"
{이쯤에서 끝내자꾸나, 이 거만한 필멸자여!}
급격히 변화된 중력은 항사룡의 균형을 딱 한 찰나 무너뜨렸고, 산맥 같은 라호나바스의 꼬리가 그 틈바구니를 정확하게 노렸다.
- 쐐애애애액-! 터엉-!
일곱 천신의 가호가 깃든 육체 덕에 파리채로 얻어맞은 벌레처럼 '찍!'하고 터지진 않았으나, 핏물을 왈칵 토하는 내상까진 어쩔 수가 없었다.
"커헉!"
내공만 뒷받침해주면 빠르게 회복할 자신이 있었지만, 라호나바스에게 생명력을 대거 갈취 당한 행성에선 그가 내력으로 치환시킬 만한 자연의 기운이 몹시 희박했다.
"쿨럭, 쿨럭..."
{쯧쯧쯧, 필멸자 주제에 나를 홀로 상대하려 하다니 참으로 어리석었다.}
"으윽, 네 녀석이야말로 귓구녕을 틀어막고 사는구나."
{?}
"내 이미 말하지 않았느냐? 본좌는 혼자가 아니라고."
{......}
그가 항사룡과 어울리는 동안,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행성에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 작가의말
여담입니다만, 저는 개인적으로
성격이 고정된 주인공을 별로 선호하지 않습니다.
사건과 인연, 그리고 엇갈림 속에,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알게 모르게 달라지는,
그런 입체적인 인물 변화에서 묘한 매력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게 사람 사는 향기가 나지 않나요?
하하, 나만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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