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추구하는 영광 (1)
* * * * *
<빌리프-세일럼(Belief-Salem).>
‘팔스라인(Palmsline)’ 제국령 거주인구 14만 8천여 명의 대도시. 이곳은 '신념의 도시'라 불리며 유구한 역사를 자랑한다.
이 지역은 지질학적 측면에서 냉정하게 분석하자면, 토질이 퍽퍽하고 영양마저 충분치 않아 자체적인 농작물 생산량으로는 근근이 살아가기도 벅찬, 실로 비루하기 짝이 없는 지형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서방 ‘아루소니타(Arusonita)’ 대륙을 양분하는 거대 종교지파가 모두 이 도시를 성지의 중심으로써 받들고 있기 때문에, 이 황량한 지형적 단점은 그다지 도시발전에 있어 악영향으로 작용하진 못했다.
끊임없이 문전성시를 이루는 순례자 방문객 연평균 93만 명, 역대 최고기록 137만 명의 어마어마한 유동인구가 빌리프-세일럼의 번영을 사실상 지탱해왔다고 봐야할 것이다.
하지만 현재 척병들의 눈에 비춰지는 모습은 사뭇 달랐다.
정확하게는 97년 11개월, 훗날 사학자들에게 '100년 전쟁'으로 명명된 두 종교간 격돌이 이어짐에 따라, 지난날의 영광은 흡사 시체처럼 길바닥에서 황량하게 나뒹굴고 있었다.
"비켜! 비키라고 이 새끼야!"
야밤을 틈타 황급히 빠져나가려는 도성 곳곳의 크고 작게 무리지은 도피 행렬들. 그 중 어느 끝머리 한쪽에서 소소한 실랑이가 일었다.
"X발, 미쳤어! 저것들은 미쳐도 단단히 미쳤다고! 야야, 나 못본 척하고 그냥 가주라! 응?!"
"백인대장님, 안 됩니다! 아니 어떻게 전투를 코앞에 두고 이리도 무책임하게......"
백인대장이라 지칭된 사내는 도둑고양이처럼 탈주하다가 딱 걸린 것이 못내 창피했는지 얼굴이 화끈거리는 상태였다.
"야, 임마!!!"
허나 딱 그뿐이었을 뿐, 변명 가득한 역정을 토하며 좀 전의 행동을 돌이키진 않았다.
"그럼?! 나도 여기서 의미 없이 같이 뒈지리?! 저 광신도새끼들이 상식적이고 일반적인 수성전을 펼칠 거 같아? 분명 정신 나간 짓한다는 것에 내 혓바닥을 건다! 내 혓바닥을 건다고!"
"아니, 그거야... 그렇지만......"
"지금 고작 몇 천 명, 몇 만 명 따위가 아니야, X발! 50만이야, 무려 50만!!! 어떤 썩을 외눈박이 놈이 추계해서 보고했는지 모르겠다만, 내가 직접 봤을 적엔 그것보다 훨씬 더 많았어!"
젊은 병사는 막연한 본인의 희망을, 일찌감치 절망적인 현실에 굴복한 간부의 욕 섞인 투덜거림 앞에 내놓았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힘들 합쳐서... 해안전선으로 향한 본대병력이 회군할 때까지 버티기만 한다면..."
"개소리 작작해라! 여기 남은 병력이 몇이나 될 것 같냐, 앙?! 게다가 지금 어디 짱박혀 있는지 모를 본대병력을 기준 잡아 비교해도 적군의 규모가 3배, 아니 못해도 4배는 더 많다고! 처음부터 총병력으로 농성전을 벌였어도 빠듯한 수준이라니깐?!"
"그, 그래도! 전승무패의 그레고리 단장님께서 이끄시는 로기온 성기사단이 함께라면, 진짜 어떻게든..."
"X발! 말 같지도 않은 헛소리!!!"
"......"
"그새 너도 광신자들에게 물들어 버린 거냐?!"
어이가 출타한 간부의 목 근처 핏대가 최고조로 부풀어올랐다.
"작작해라, 쫌! 누가 봐도 허술한 정보인데도 불구하고 지휘부와 주력 본대가 귀신에 홀린 듯 싹 몰려나갔어! 그게 정말 우연일 거 같냐?!"
"...우리가 버려졌다는 소문이 설마..."
"몰라, 나도 어디까지나 짐작하는 거니까. 하지만 성내의 잔존병력이 1만 명도 채 안 된다는 것만은 알아둬라."
상급자가 공공연히 퍼진 이야기들을 꼬집으며 몰아세우자, 코앞의 하급자는 제대로 된 반박도 못한 채로 울상만 지었다.
"...대장님..."
"썩을! 대충 심각성 알았으면 내 앞에서 당장 꺼져! 해 뜨기 전에 서둘러 성 밖으로 튀어야한단 말이다!"
"대, 대장니임! 가시면 안 됩니다, 대장님!"
"아! 좀 비키라고!!!"
이와 같이 가망 없는 수성전을 포기한 이탈자들이 졸병 간부할 것 없이 점차 늘어났다. 그리고 이에 따른 침울한 감정은 타오른 불길처럼 일렁이며 진영 곳곳에 번졌다.
그렇게 지리한 시간이 흐르고 흘러, 어느덧 자리를 피했던 태양이 한 바퀴 되돌아와 아침을 알렸건만, 전날 미처 떠나지 못한 일반병사들의 사기만이 타다 남은 잿가루처럼 푸석거리며 맞아줬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결연한 의지를 다진 전사들도 존재했다. 그 대표격으론 어느 외딴 창고에서 아침기도를 마무리하고 있는 중년 사내를 콕 찍을 수 있을 것이다.
"...(중략)... 부디 당신의 얼굴을 이 종에게서 돌리지 마옵소서. 원수들이 당신 성전을 발아래 두고 비웃지 못하게 하소서. 이 비천한 종의 어려움을 헤아려 자비를 베푸시고, 승리의 월계관을 제게 내리소서. 아멘."
작은 비품 창고를 우직하게 채웠던 강대한 체구의 사내는, 기나긴 기도를 마친 후에야 이윽고 밖으로 나섰다.
"단장님."
때마침 상대적으로 작은 몸집의 장교가 그의 뒤를 부랴부랴 따라붙으며 말했다.
"단장님의 지시사항을 모두 이행했습니다. 현재 병력배치가 마무리되는 것까지 제가 직접 확인하고 오는 길입니다."
단장이라 불린 사내는 부관의 씩씩한 보고에 고개를 주억였다.
"알겠다, 지금 바로 가보도록 하지. 아참, 병력집계는 끝났나?"
"예, 성기사단 7,480 전원 이상무! 그 외에 잔존병력은 보병 1,093, 궁병 680, 민병대 610. 대기총원 9,863명입니다."
"음? 그래?"
"단장님께서 이탈을 묵인하신다는 소문이 퍼지자마자, 간밤에 탈영병 수가 폭증했습니다. 어제의 절반도 안 됩니다."
"허어.. 그래도 내 예상보단 제법 많이 남았는데?"
"저희 기사단을 제외하면, 모두들 남았다기보다 떠나지 못했다고 보셔야 옳습니다. 대부분이 다리부상이 있거나, 거동불편한 가족들이 있어서 마지못해 싸워야 하는 등의 개인적인 속사정이 있는 병사들입니다."
"아하, 그랬구만."
"에휴... 꽤나 담담하십니다."
부관은 이 암울한 전세에서도 태연하기 그지없는 상관을 보면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장내에 집결한 병력방향으로 움직인 단장의 뒤를 따랐다.
"그나저나 자네도 그렇고. 어떻게 기사단 놈들 중엔 이탈자가 단 한 놈도 없는 거냐? 다들 고향에서 오매불망 기다릴 가족들은 쥐꼬리만큼도 생각 안 하냐, 응? 그놈들이 죄다 고아출신이면 내가 이해라도 하겠다만 잘나신 귀족출신도 몇 분 계셨잖냐."
다소 뜬금없는 단장의 물음이 떨어지자, 부관이 걸음속도를 높여 그의 옆으로 나란히 붙으며 응답했다.
"와~, 실망입니다. 단장님. 저희가 썩어빠진 이교도들을 코앞에 두고, 순순히 등짝을 보이리라 여기셨습니까?!"
"허... 참..."
"아시잖습니까? 저희는 창조주 앞에 목숨을 내놓으리라고 이미 종신서원한 기사들입니다. 이교도 앞에서 도망이라니, 그 뭔 말 같지도 않는 소릴 하십니까?"
"......"
"흐흐흐!"
어이없는 말대답과 능글맞은 웃음을 들은 기사단장은 바삐 옮기던 걸음을 우뚝 멈추고 부관을 돌아보며 말했다.
"에라이... 미친 놈, 아니 미친 놈들아!"
"후후, 그건 맞지만 적어도 단장님께 그런 말을 듣고 싶지 않습니다. X 묻은 개가 어디서 뭐 묻은 개를... 흐흐, 나머진 아시죠?"
"크흐흐흐흐.... 그리 비유하면, 나도 딱히 대꾸할 말이 없긴 하구나."
기사단장은 입가에 얄궂은 미소를 띄우는 부관을 따라 얼마간 피식 웃었다. 그리고는 다시 발걸음을 떼며 물음을 던졌다.
"아참, 투석기는 총 몇 대나 있었지?"
"실제로 정상동작하는 건 91기뿐이었습니다. 처음 보고됐던 수량의 4할에도 못 미치더군요. 윗물이 썩어서 그런가 관리상태도 똑같이 썩어 있었습니다."
"쯧, 그래도 그 정도면 충분하다. 난 가서 우리 새끼들 점검할 테니까, 자넨 일반병력들에게 투석기 장전하라고 해. 거동조차 불편하옵신 병사님들이시니, 지금부터 천천히 준비시켜둬."
"옙!"
씩씩하게 대답을 마친 부관은, 상관의 반대방향으로 눈썹 휘날리듯 달려갔다.
* * * * *
침몰하기 직전인 빌리프 세일럼의 분위기와는 달리, 이 도시의 절반을 에워싼 적군들의 위세는 하늘을 찌를듯 했다.
심지어 여섯 명의 연합국 수장들이 모여 있는 간이천막에선, 이미 승리를 거머쥔 것처럼 자축의 술판이 거나하게 벌어지는 판국이었다.
"푸핫핫하! 듣자하니~ 간밤에 절반의 병력이 또 한 뭉텅이 빠져나갔다고 하더이다!"
이중 가장 높은 자리에 걸터앉은 자색비단옷을 두른 이의 너털웃음을 시작으로, 다른 수장들은 저마다 한 마디씩 거들었다.
"하하하, 거 어제 남았던 병력이 몇이나 됐다고! 이래선 싸움조차 될런가 모르겠소~."
"흐흐, 지원병력이 오지도 않을 거란 사실을 알게 되면 더 볼만할 겝니다."
"그렇지요. 제국은 그렇다 쳐도 교단마저 협상제물로 자기네들을 내버릴 줄은 미처 생각 못했을 테니까요. 뭐... 대충 다 알아차릴 내일 오후쯤부턴, 외각에서 공성병기로 성벽을 살짝살짝 두들겨만 줘도 오금을 지릴 겝니다."
"어이쿠~, 그러다 저놈들이 항복이라도 하면 어쩌지요? 행여 그리되면 무척 난처해지는데 말입니다! 앞으로 통치할 도시구역을 성벽에 가장 먼저 오른 순서대로 선별하기로 이미 합의를 끝냈는데 말이오! 푸하하하핫!"
"그러게나 말입니다. 껄껄껄!"
이 연이은 왁자지껄함 속에서 기회를 적절히 잡은 자색비단옷의 왕은, 다른 수장들을 두루두루 살피며 목청을 한껏 높였다.
"으허허허, 이번 제국과의 종전협약은 시작에 불과하오! 최근 몇 년간의 흉년으로 제국의 힘이 시들해진 바로 이때! 제국과 창조주 교단을 아주 벼랑 끝까지 내몰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 혈맹을 유지한다면, 충분히 가능하고도 남아요!"
"걱정 마시오! 우린 이번에도 '킨시프(Kinsif)' 왕의 지혜에 귀를 기울 것이외다! 아하하하!"
"말이라도 감사하오!"
만약 이 무리에 눈빛이 증오로 가득찬 노인만 섞여있지 않았더라면, 때 아닌 이 축제분위기가 쉼표 없이 쭉 이어졌을 지도 모르겠다.
"허허, '함슬라(Hamsla)' 왕께선 안색이 좀처럼 풀리지 않으시는구려."
킨시프 왕이라 불린 자색옷 중년인은, 적포도주가 담긴 술병을 들고 일어나 함슬라 국왕이 들고 있는 술잔을 친히 채워줬다.
"미안하외다. 하지만 내 손으로 내 아들들을 죽인 놈의 눈알을 뽑아내고 목을 잘라내기 전까진 계속 이럴 것 같소이다."
킨시프 왕은 최대한 다독이듯 말하며 그를 위로했다.
"이해합니다. 내가 왜 그 마음을 모르겠소이까. 여기 모인 모두가 그 가슴 찢어지는 심정을 잘 압니다."
"후우...... 나는 통치권이든 뭐든 다 관심 없습니다. 자식을 모두 잃은 내겐 필요 없으니, 전부 다 나눠가지십쇼! 허나!"
울분을 토해내던 함슬라의 왕은 가득찬 술잔을 벌컥벌컥 비워내며 말을 이었다.
"바리온 딘 그레고리(Barion Din Gregory)! 절대로 그 놈만큼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양보 못합니다! 그 누구라도 양보 못하오!"
"허허, 그 조건은 이 자리를 빌어 다시금 약속드리는 바요. 여기 있는 형제들도 마찬가지로 동의했고 말이오! 아니들 그렇습니까? 아하하하!"
서둘러 동조를 구하는 킨시프 왕의 눈빛에 다른 수장들도 서둘러 잔을 들어올렸다.
"암요! 그렇고말고요!"
"난 너무 성급하게 끝내지나 말길 바랄 뿐이오! 그놈 칼에 죽은 내 아우들과 장수들의 피가 지천에 강처럼 흐르고 있소! 천천히 고통에 울부짖게 만들어만 준다면! 이 '발투므(Valtume)'의 왕 또한 하등의 불만 없소이다!"
"나 '쿤룬(Kunlun)'의 왕도 같은 마음으로 약속드리오! 내 기꺼이 함슬라 왕께서 그 놈에게 내릴 최후를 옆에서 즐겨 구경하리다!"
함슬라 왕의 다소 누그러진 어깨를 확인한 킨시프 왕은, 분위기를 고조시키고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선창했다.
"하하하! 승리를 위하여! 위대한 우리 '알르나마(Al-Namah)'께 영광이 있으라!"
이에 다른 국왕들도 눈치껏 제각각 일어나 익숙한 전통에 따라 크게 외쳤다.
"위대한 알르나마께 영광이 있으라!"
"위대한 알르나마께 영광이 있으라!"
"위대한 알르나마께 영광이 있......!"
그런데 건배의 외침이 채 끝마쳐지기도 전, 둔탁한 울림과 해괴한 쇳소리가 한데 얽혀 얇은 천막 안으로 쑥 들어왔다.
- 파앙~! 팡! 파가가가각!
-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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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는 세계관 구축이 목적인 ‘퓨전 판타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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