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벌이 (1)
* * * * *
팽팽한 권력대립 속에서 중립을 유지하기란 사실상 쉽지 않다.
살기 위해서, 타의에 의한 휘둘림이 싫어서, 혹은 그냥 귀찮아서 등등. 그 어떤 이유가 됐던지 간에 세력 확장에 쌍심지를 켠 권력자들의 농간은 잠시도 쉴 줄 모르기 때문이다.
평소 아무리 언행에 주의를 해도 딱 한 번의 말실수조차 매도의 원인이 되기 일쑤이다 보니, 만일 서로 뜻이 맞는 자들끼리 탄탄한 유대관계를 형성하거나, 그에 버금가는 힘을 갖추지 못한다면 종국엔 어느 한쪽으로 굽히기 마련이다.
이런 관점에선 마계는 지옥보다 중립세력이 자리 잡기 쉬운 편이라 하겠다.
지옥은 베엘제불 또는 루치펠이란 팍팍한 흑백논리로 양분되어 있는 반면, 마계엔 또 하나의 탄탄한 파벌이 존재하는 까닭이었다.
그들은 다름 아닌 마계의 '전(前) 지배자'들이며, 중립 마족들과 공동 위원회를 구성함으로써 그 존속을 확고히 유지해오고 있었다.
비록 위원회란 동맹결성이 악마들이 마계에 영향력을 생성하는 와중에 떠밀려난 초월체들의 마지못한 선택이었지만, 그래도 이로 인해 뒷방늙은이 신세로 전락하지 않고 마계의 한 축을 거머쥔 귀족층으로써 당당히 살아남을 수 있었다.
참고로 이 동맹세력의 최대 거점영역은 공동 위원회의 본 회담장이 있는 '트브나브(Tbnab)'였으며, 아무래도 갖가지 마족들이 모여 지내다 보니 마계에서 가장 분주한 영역으로 손꼽히곤 한다.
이를 구태여 인간세계에 비유하자면 상업도시에 가깝다고 하겠다.
그런데 오늘따라 이 중립영역이 평소보다 유난히 더 시끌시끌했다. 이는 흉흉하게 몰려온 베엘제불의 사절단이 원인이었는데, 말만 사절단이었지 2천여 기의 고룡들이 대거 동원된 사절단 호위대의 구성은 특작부대와 다름없었다.
이런 살기등등한 무리들의 긴급 방문에 기이한 팽팽한 긴장감은 의장의 집무실까지 지체 없이 흘러 들었다.
- 똑똑.
예의 바른 노크 이후 그리스 복식 중 하나인 히마티온(Himation)식 차림의 여인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실례하겠니다, 의장님."
비잔틴의 달마티카(Dalmatica)와 닮은 의복을 입은 백발노인이 여인의 공손한 인사를 보며 물었다.
"무슨 일인가?"
"베엘제불측 사절단 대표가 의장님과의 면담을 요청했습니다."
의장이라 불린 노인은 직속 비서의 보고에 덥수룩한 수염을 습관처럼 훑었다.
"흠, 빨리도 왔군."
"어떡하시겠습니까, 의장님? 지금쯤이면 부의장실에도 보고가 들어갔을 겁니다."
"대표로는 누가 왔나?"
"라도돔(Radodom)의 지배자 '엔마노(Enmano)'였습니다."
이 대답을 들은 의장의 미간이 와락 구겨졌다.
"쯧, '슈펜트(Schupant)'의 직계자인가? 제법 거물이 행차하셨군. 도대체 무슨 꿍꿍이 속인지 원..."
"저희가 내부적으로 판단했었던 것보다 더 다급했던 모양입니다."
"으음... 그래. 이로써 루치펠의 직계자가 나타났던 소문은 사실로 확인된 셈인가? 뭐 어찌됐든 부의장과 같이 가는 편이 좋겠군."
"바로 부의장실에 기별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연락하는 김에 부하를 시켜서 엔마노는 귀빈실로, 나머지는 연회실로 보내도록 조치하게나."
"예, 그대로 이행하겠습니다."
잠시 전신거울로 옷매무새를 확인한 의장은 그의 애장품인 - 세 마리의 구렁이가 진주를 서로 먼저 삼키고자 기둥을 휘감고 올라가는 형상의 - 금속 지팡이를 챙겨 들고 집무실을 나섰다.
준비를 마친 의장이 문을 탁하고 닫았을 무렵엔 그의 비서가 이미 다소곳이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준비됐습니다, 의장님. 바로 이동하시겠습니까?"
"그러지."
의장의 긍정을 확인한 비서는 벽에 붙어있는 큼직한 액자를 만졌다.
- 부루룩. 꾸르륵.
그녀의 손길이 닿은 부분을 기점으로 전이마법이 활성화됐다. 높이 6.6m, 폭 13.2m의 테두리만 앙상하던 액자 표면 위로 어둑어둑하게 꿀렁이던 그림자는 마침내 모든 빈틈을 꽉 메웠다.
- 저벅 저벅.
그렇게 생성된 포탈을 통과하고나니, 키 194cm의 의장과 눈높이가 거의 차이 없는 장신의 여인이 본인의 수행원과 함께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의장님."
그녀의 의복은 전체적으로 의장의 비서와 유사했지만, 그보다 훨씬 더 화려한 자수 같은 치장이 둘 사이의 계급차를 나타내줬다.
"오늘따라 유난히 더 아름답군. 엔마노가 그대의 미모에 홀려서 조용히 돌아가 줬으면 좋으련만."
의장의 인사말에 부의장이라 불린 그녀가 고개를 들며 화답했다.
"어머. 감사합니다, 의장님."
"허~, 조금도 부정하지 않는 겐가?"
"호호, 칭찬은 당연히 즐겨야지요. 제가 언제 또 의장님께 그런 말을 듣겠습니까?"
"하하, 부의장 덕에 긴장감이 누그러지는군. 아무쪼록 옆에서 잘 좀 중재해주오. 나는 도무지 저 녀석들에게 정이 안 간단 말이지."
"네, 알겠습니다. 이만 가시지요. 호호호."
그들은 어째서인지 걸음을 재촉하지 않았다. 오히려 의도적으로 약 200m의 복도를 땀이 흐를 세라 느릿느릿 걸어 귀빈실에 당도했다.
"슬슬 오늘 중으론 뵐 수 있으까란 의문이 들던 참이었습니다."
잠시후 시종들이 물 흐르듯한 매끄러운 행동으로 문을 활짝 열어 젖히자, 전체적으로 날카로운 체형과 인상을 지닌 마족이 눈을 번뜩이고 있었다.
"허허, 본의 아니게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오. 라도돔의 군주."
"어쨌든 오랜만입니다. '티부스카얀(Tibuskayan)' 의장님, '메티갈로사(Metigalosa)' 부의장님."
"호호, 제겐 그렇게까지 과한 격식은 필요 없어요. 엔마노."
"에이~, 어떻게 부의장님께 감히. 그럼 일단 호칭만 편하게 하겠습니다. 메티."
르네상스풍의 짙은 파란색 예복을 걸친 엔마노는, 의장과 부의장의 반지 위에 각각 입을 맞추며 정중한 예절을 갖춘 뒤 몸을 세우며 말했다.
"두 분 모두 저와 오래 마주하고 싶진 않은 거 알고 있으니, 곧바로 본론을 이야기하는 편이 좋겠지요?"
"허허, 거 참 눈물나게 고마운 배려심이오. 이왕 그리 배려해줄 요량이었으면 아예 안 찾아왔으면 더욱 좋았을 거요."
"하하하. 정말 그러고 싶었습니다만 저도 제 주인의 명을 따라야 하는 처지인지라서 말입니다."
의장의 비아냥거림이 어김없이 시작되자 부의장이 슬며시 끼어들어 대화의 주도권을 가로챘다.
"엔마노. 그대가 온 이유는 당연히 루치펠의 직계자 때문이겠죠?"
"오, 벌써 알고 계셨군요. 과연 정확합니다, 메티."
"호호호."
그녀의 억지웃음에서 '본론으로 들어가자며? 잡설은 저리 치우지?'란 속마음을 읽어낸 엔마노가 즉각 운을 뗐다.
"에... 듣자니 타락천사 군단이 우격다짐으로 병력을 이동시키는 바람에 중립 영역 일부도 피해를 봤다지요?"
"그 건은 강력히 항의하였고, 그에 따른 만족스런 피해보상을 어제일자로 다 받아냈답니다. 이젠 내부적으로도 더는 문제 삼지 않기로 마무리 됐어요."
"큼, 그랬군요."
메티갈로사는 무척 아쉽다는 내색을 숨기지 않는 엔마노를 향해 딱 잘라 물었다.
"그럼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습니다. 그쪽에선 저희 위원회로부터 무엇을 얻으려고 이리도 급히 걸음하신 겁니까?"
"흠흠, 저희 위대하신 베엘제불의 직계자이자, '마이야모크(Mayamok)' 영역의 지배자인 '크발딘(Kvaldeen)' 님께오선 '자칭' 루치펠의 직계자에 대한 토벌을 계획 중에 계십니다. 하여 저희는 위원회의 적극적인 협력을 요청하는 바입니다."
엔마노의 대답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녀가 난색을 표했다.
"크발딘님께선 저희가 중립세력임을 잊으신 모양이군요. 설마 당신 또한 우리 위원회가 그 요청에 응할 것이라 기대하고 찾아오진 않았겠죠, 엔마노?"
"하하하, 물론입니다. 전혀요."
"더욱이 이와 같이 중요한 안건이라면, 절차상 표결에 부쳐 의결시켜야만 합니다."
"뭐, 그렇긴 하겠습니다만... 실질적으론 중립마족과 초월자들을 각가 대표하고 계신 두 분만 동의하시면 되는 것 아닙니까?"
"......계속 듣고 있자니 불편하군."
"하하, 말이 그렇다는 겁니다. 의장님."
노기 어린 의장의 말투에 엔마노는 잠시 옅은 웃음을 털고서 화제를 돌렸다.
"제가 거창하게 협력이라 표현했지만, 실상은 별 게 아닙니다. 물건 하나만 대여해주셨으면 하는 바람이 고작입니다."
"물건?"
메티갈로사가 고개를 갸웃하는 사이, 엔마노는 티부스카얀의 손에 들린 지팡이를 가리켰다.
"의장님의 '아지프-케이온(Azif-Keion)'을 며칠 빌리고 싶습니다."
"......"
아지프-케이온은 아주 먼 옛날 티부스카얀이 선계 최고신들에 의해 추방당하기 직전, 그가 이를 악물고 올림포스에서 탈취해낸 신물이었다.
물론 혹 탈취 과정에서 보석이 손상되지 않고 제 기능을 발휘했었더라면, 오늘날처럼 의장이 마지못해 아끼는 골동품이 아닌 선계를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강력한 마도구로써 악명을 떨쳤을 것이다.
"이건 또 무슨 수작이지?"
이렇듯 발끈하는 의장을 대하는 엔마노의 능글맞은 표정엔 변화가 없었다.
"하하, 저는 그저 크발딘 님의 행동지령을 따를 뿐입니다. 그분께서 만약을 대비하라고 명하시니, 저 또한 별로 내키진 않아도 따르긴 하는데... 어쨌거나 결론은 그 신물이 꼭 필요하다는 겁니다."
"흥! 내가 순순히 내줄 것 같은가?!"
"음... 예상된 반응이긴 한데... 슬슬 귀찮아지네요."
귀한 시간 축내는 실랑이가 지겨워진 엔마노의 얼굴색이 일순간 돌변했다.
"좋게 좋게 협조하시는 편이 여러모로 이로우실 겝니다."
"뭐, 뭣이?!"
갑자기 훅 치고 들어간 엔마노는 훌훌 불타는 의장의 눈빛에 맞서며 툭 쏘는 어투로 말했다.
"아무래도 의장님은... 그으... 마계 소식은 빠삭해도, 고위차원에 대해선 그렇지 않으신가 봅니다. 그게 정 힘들다 싶으면 평소에도 메티 부의장을 불러서 종종 물어보곤 하십쇼."
"...네, 네 놈이 감히!!!"
"아, 전혀 모르시는 거 같아서 조금 귀띔하자면, 지옥은 현재 저희 베엘제불님께서 대부분 장악하신 상태입니다."
"......"
"크크큭, 과거 마계의 6할을 차지하셨던 의장님의 권능이 아주 대단하단 건, 뭐 저도 인정하는 바입니다. 그러니까 저희 크발딘님께서도 의장님을 나름 존중해주고 계신 거겠죠."
- 으득.
입술 굳게 닫은 채로 어금니를 바드득 가는 의장의 표정임에도 불구하고, 본색을 드러낸 엔마노의 비웃음은 그칠 줄 몰랐다.
"그런데 말입니다. 지옥의 72권좌 중 한 분이라도 마계에 완전히 강림하시게 된다면? 하핫, 아무리 잘난 의장님이실지라도 과연 감당하실 수 있을까요?"
"......"
"지옥의 통합이 머지않았습니다. 그런 이후엔 마계에도 어떤 식으로든지 영향이 미치게 되겠죠. 아니, 아니. 우리끼리라서 미리 말씀드리자면, 몇몇의 직계자들의 변화는 벌써 시작됐습니다. 이전과 비교도 안 될만큼 강력한 힘을 부여받고 계시지요. 아~, 이미 알고 계시려나~?"
"...이이익..."
"아무쪼록 의장님께선 흐름을 잘 읽으시길."
"그만해요, 엔마노!"
이대로 사달이 난다하들 전혀 이상하지 않을 상황으로 치닫자, 메티갈로사가 급하게 저지하며 나섰다.
"당신은 협력을 요청하러 온 건 가요, 아니면 중립세력을 상대로 전쟁선포를 하러 온 건 가요?! 더 이상의 무례는 참지 않겠습니다!"
"아하하하하! 이거 이거 미안합니다, 메티."
부의장의 눈치를 스윽 훑은 엔마노는 다시 눈웃음 피식 흘리며 말을 이었다.
"의장님의 살의에 저도 모르게 동요했군요. 하하, 주제가 넘었습니다. 정중히 사과드리지요, 의장님."
"시간을 끌어 좋을 것 같지 않으니, 제 의견을 말씀드리겠어요.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의장님?"
- 끄덕.
티부스카얀은 고갯짓으로써 긍정표현을 대신했다. 그의 표정엔 부들부들 끓어오르는 감정을 애써 삭히려 애쓰는 모습이 역력했다.
이에 메티갈로사는 이 면담을 빠르게 마무리하고자 의견을 피력했다.
"우선 부의장으로서 위원회를 대표해 사절단에게 유감을 표하는 바입니다. 우리 위원회는 중립입장에 변함이 없으며, 베엘제불 측의 협력요청을 거절하겠습니다."
"허허... 메티. 이러면 서로..."
"제 말 아직 안 끝났어요. 엔마노."
그녀는 엔마노의 불편한 기색을 싹 자르고 나서 이야기를 계속했다.
"하지만 아지프-케이온은 의장님의 소유물. 그쪽에서 합당한 값을 치르겠다고 한다면, 사적으로 대여를 해드릴 용의가 있습니다. 그렇지요, 의장님?"
"...그 정도는 가능하지."
여전히 노기가 다 가시지 않은 티부스카얀은 잠깐 망설이다가 마지못해 수긍한 기색이었다.
"좋습니다, 메티. 그럼 특별히 원하시는 게 있습니까?"
"어떤 걸 줄 수 있죠?"
"흠... 필멸자들의 영혼따위야 이미 차고 넘치실 거고..."
마치 이것도 예측범위라는 듯, 엔마노는 별다른 반발없이 메티갈로사의 제안에 덤덤하게 응하는 태도를 보였다.
"아, 이러면 어떻겠습니까? 저희 쪽엔 지배자를 잃고 혼란 중에 있는 썩 괜찮은 영역이 있지요. 그러니 의장님의 신물을 며칠 간 대여해주신다면 그 중 한 곳을 드리겠습니다."
"왜 하나죠? 듣자니 지배자를 잃고 내분이 일어난 영역은 3군데라고 하던데! 못해도 2개는 주셔야 하지 않나요?"
"큭큭, 메티. 겨우 며칠 빌리는 것뿐인데 욕심이 너무 과하신 거 아닙니까?"
"전부 달라고 하고 싶지만 그건 엔마노 당신의 체면을 고려해서 참아준 거에요. 그나마 옛정을 생각한 거라 해두죠."
"흐음... 계산이 좀 안 맞긴 한데..."
티부스카얀과 메티갈로사의 표정을 한 번씩 훑어본 엔마노는, 검지로 탁자를 톡톡 때리며 잠시 손익을 저울질 했다.
"좋습니다. 까짓거 2개의 영역을 드리죠. 방금 전 의장님께 드린 무례에 대한 제 사죄로 치겠습니다. 하하하!"
"의장님께서도 이 정도 선에서 양보하실 수 있을까요?"
"쯧, 현재로선 부의장의 중재가 최선인 것 같네."
"감사합니다, 의장님."
신속하게 계약의 서를 작성하고 의장의 신물을 얻어낸 엔마노는, 당장 무엇이 그리도 다급한 지 그 길로 수하들과 함께 트브나브에서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그들이 빠져나간 방향이 입장할 때완 정반대라는 사실에 있었다.
-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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