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이후 (3) + 혁명은 성공, 반란은 실패의 역사 (1)
2m가 넘는 시커먼 그림자가 쥐도 새도 모르게 나타나 다가왔으나, 이미 예상하고 있던 그녀들은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셋 중 두 명의 눈망울은 초롱초롱한 달빛을 양껏 머금는 중이었다.
"많이 시장하시죠? 이것 좀 잡수세요."
"감사합니다. 근데 나는 많이 남았습니다, 육포. 그래서 이거 다 안 줘도 됩니다."
마족으로 거듭난 이래로 식사는 필수가 아닌, 취미생활이 된 루카스의 조악한 변명이었다. 그러나 그에 대한 신뢰가 금괴처럼 단단한 그녀들은 그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눈치였다.
"아, 그래요? 그럼 우리 같이 나눠먹어요!"
"그렇다면 나도 좋습니다."
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낸 베라는 작은 주머니에 담긴 쿠키를 소분하여 담았다. 그리곤 그 위에 고이 잘 접힌 쪽지와 함께 루카스에게 건네며 말했다.
"제프리 씨가 이걸 전해달라고 했어요. 루카스 씨의 방문을 고대하고 있겠다고도 하셨고요. 거기에서 몇 달이고 기다리시겠다시네요."
하지만 막상 종이를 손에 쥔 루카스의 표정이 어두웠다.
"험험, 저기... 나는 글자를 배우는 중입니다. 부끄럽지만 나는 희망합니다, 당신이 이것을 읽어주기를."
"그럼요, 물론이죠!"
베라는 루카스와 나란히 서며 문자가 빼곡히 적힌 쪽지를 펼쳐 같이 확인하며 웃었다.
"어머나~, 제프리 씨께서 배려를 진짜 많이 하셨네요. 주소를 공용어 외에도 여러 가지 언어로 적어놔서, 지나가는 행인들 아무나 붙잡고 물어봐도 전혀 문제가 없겠어요!"
"뭐라고 읽습니까?"
"에... 그러니까... 헤트만 국. ‘아비세르툼(Abyssertum)’ 지방. ‘에플키도(Efkido)’ 마을. 찾으실 사람의 이름은 ‘토비 스티덤(Toby Stidham)’."
"아비세... 아비셀?"
"아비세르툼."
루카스가 타미아르 공용어로 적힌 문장을 보고 천천히 발음하면, 베라가 그릇된 부분을 친절히 교정해줬다.
"아비세르툼. 에플키... 에플키도. 토비 스튀뎀?"
"스티덤이에요. 스티덤."
"아하, 헤트만 아비세르툼 에플키도. 토비 스티덤."
"네, 참 잘 하셨어요!"
"감사합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베라."
"에이, 별 말씀을요~."
그때 미라이와 리사는 뚱한 기색을 버럭 표출했다. 문자 그대로 '하하. 호호. 꺄르르.'하는 두 사람의 다정한 모습을 계속 견디고 있기가 힘들었던 것이다.
"흠흠."
"큼! 크흠!"
“이크.”
이에 흠칫한 베라가 루카스의 곁에서 한 걸음 떨어지며 화제를 비틀었다.
"그나저나 오늘 오후에 저희 쪽 수색대 대부분이 장거리 정찰로 빠져나갔어요. 그러니 이제 슬슬 떠나셔도 괜찮을 거 같아요."
"고맙습니다, 당신의 배려."
"헤헷, 아니에요. 그나저나 더스틴 경비대장이 저쪽 방향으로 2km가량 부근에 군마를 준비해뒀다고 했답니다. 자기가 직접 말 안장에 루카스 씨의 여행가방을 단단히 매달아뒀다고 말했으니까 아마도 어렵지 않게 찾으실 수 있을 거에요."
"오, 나는 말까진 전혀 기대 못했습니다."
"가장 좋은 지도와 나침반도 함께 넣어뒀다고 했어요. 분명 도움이 될 겁니다."
"고맙습니다. 그리고 부탁합니다. 나의 감사를 그에게도 전해주십시오."
"네~, 그럴게요. 그리고 개인적으로 첨언하자면, 차라리 여기서 북동쪽 '기아니크' 국경을 잠시 넘었다가 헤트만으로 향하시는 이동경로를 추천 드려요. 그쪽은 저희 수색대상 지역이 아니라고 들었거든요. 다소 돌아가는 여정길이 되겠지만, 그래도 대신에 귀찮은 꼬리가 들러붙진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알겠습니다. 나는 그렇게 하겠습니다."
"에궁, 제가 잔소리 같이 말이 많았네요. 그럼 아무쪼록 평안한 여행되ㅅ..."
"큼큼! 흐으음!!"
"앗! 아참! 루카스 씨!"
"?"
베라는 친구들의 헛기침과 눈치를 받으며 잠시 깜박했던 물음을 던졌다.
"호, 혹시 언제 또 뵐 수 있을까요?"
"음......"
루카스는 목까지 차오른, '게이트에 대해 자세히 알려만 준다면 짐꾼 노릇이라도 발벗고 나서서 해줄 수 있습니다'란 속내를 간신히 되삼켰다.
'요정족들은 워프게이트에 대해 굉장히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더욱이 내 목적이 마계로 가는 통로를 여는 것임을 알려지게 되는 날엔, 차원문의 실마리는커녕 죽자 살자 달려들 가능성도 대단히 크겠지. 어차피 게이트를 획득하더라도 어떻게 써먹는지도 모르는 나다. 절대 경솔해선 안 되겠지.'
모처럼의 좋은 인연을 계속 유지하고픈 그였다. 그래서 어떻게 화답해야 하나 잔뜩 고민하고 있는데, 때마침 바네사 남매의 얼굴이 복잡한 그의 머릿속을 샤샤샥 스쳤다.
"아, 나는 내년에 구경가야 합니다. 나의 친한 친구들이 그쪽 마법 학교에 입학합니다. 총 2명입니다."
"어머, 정말이요? 한 명도 아니고 두 명씩이나요? 저희 측 입학기준이 낮진 않을 텐데 굉장하네요!"
"각각의 이름은 샤비와 애드입니다. 그들은 많이 똑똑하고 대단히 착합니다."
"이야~, 이거 돌아가자마자 눈 여겨 봐둬야겠는데요? 호호호~."
또 다시 분위기가 도란도란해진 이때, 이대론 안 되겠다 싶어진 리사가 서둘러 왼쪽 손목에서 팔찌체인을 끌러내며 둘 사이로 끼어들었다.
"저기, 루카스 씨..."
"?"
그녀는 쌍으로 된 은팔찌 중 하나를 부끄럽게 내밀었다.
"저어... 이거... 별 거 아니지만 꼭 받아주세요. 헤헷."
척 보기엔 수수한 디자인이었지만, 팔찌에 새겨진 문양을 타고 은은하게 흐르는 요정족 특유의 마나 색채는 그것이 절대 단순한 액세서리가 아님을 확신케 했다.
"음? 이 비싼 거를 왜 나에게 줍니까, 리사?"
"그게... 말이죠. 아! 루카스 씨께선 잘 모르시는 거 같은데요! 저희 본토에선 외부인 출입규정이 너그럽지 않답니다! 미리 예고되지 않으면 경계를 절대 통과할 수 없어요! 진짜로요!"
"끄응... 그렇습니까?"
"그, 그러니까 내년에 오시면 이걸 문지기에게 보여주세요! 그리고 나서 '디스콰이로 숄치아, 나의 리사!'라고 말씀하시면 돼요!"
"!!!"
"?!!!"
"그, 그러면 곧바로 간단한 확인절차 이후에 바로 입장하실 수 있을 거에요."
"오호~!"
리사의 돌발행동은 뜻을 모르는 루카스에겐 감동을 불러 일으켰고, 같은 문화권인 베라와 미라이에겐 엄청난 충격을 선사했다.
그도 그럴 것이 '디스콰이로 숄치아(Disqaero Solcia)'는, 오드노아의 고유 언어로써 '나의 반쪽(반려자)을 원합니다'란 의미였던 것이다.
다시 말해, 리사는 루카스에게 오드노아의 상투적이며 대표적인 구애의 속삭임을 알려준 셈이었으며, 그 말과 정표를 확인하게 될 오드노아 일원은 한치의 의심 없이 루카스를 리사의 정혼자로서 방문자격을 부여해줄 터였다.
"오, 대단히 감사! 잊지 않겠습니다! 디스콰이로 숄치아, 나의 리사... 디스콰이로 숄치아, 나의 리사... 디스콰이로 숄치아, 나의 리사......"
"힛~, 완벽해요! 잘 하셨어요!"
하지만 이런 뜻도 모르고 몇 번이나 문장을 반복하여 열심히 외운 루카스는 그저 싱글벙글 웃었다. 그리곤 각양각색의 반응을 보이던 그녀들을 향해 허리를 꾸벅 숙이며 안녕을 고했다.
"감사합니다. 그건 여러 가지입니다. 당신들의 시간은 많이 늦었습니다. 또 봅시다, 내년에. 아무쪼록 무사하길."
"저, 저기요! 저도...!"
미라이도 뒤늦게 뭔가를 시도하려 했으나, 그녀가 이리저리 궁리하는 속도보다 루카스가 시야에서 사라진 속도가 훨씬 빨랐다.
- 팟!
"앗! 안돼에에!!!"
"어쩜! 순간이동 마법도 아닌데, 어떻게 저런 속도로 빠르게 이동할 수 있지?!"
절망을 양분 삼아 급성장한 미라이의 사나운 눈초리가, 현재 감성 충만한 리사를 정조준 했다.
"야, 리사! 너...! 너어어!!!"
"엣쿵~, 이를 어째?! 나 엉겁결에 저질러 버렸어! 꺄~! 우리 엄마, 아빠한텐 뭐라고 변명하지?"
"이, 이 몹쓸 암고양이가! 갑자기 이런 식으로! 훅~치고 들어와?!!!"
"헤헷~!"
"야-!!!"
"미얀~, 미라이~."
미라이가 뒷목을 잡으며 리사에게 손가락질을 했고, 반대로 베라를 방패로 삼은 리사는 미라이를 향해 혓바닥을 낼롬낼롬거렸다.
오직 제3자이자 이미 다른 임자가 있는 베라만이 이 광경을 두고 미소지었다.
"푸훕!"
"베라, 이 지지배야! 너 지금 웃음이 나오니?!"
"아니 그게 아니라, 당장 엊그제만 하더라도 야성미니 야수니 했던 너희들이 이러는 게 너무 웃기잖아. 안 그래?"
"핫... 그, 그건......"
베라는 그간 받은 지탄에 대해 말끔히 설욕이라도 하듯, 순간 멈칫한 친구들을 마구 골려줬다.
"루카스 씨도 인간인데~. 인간의 생명주기가 어쨌다던 분들은 다~ 어딜 가셨을까나? 아~, 맞다! 나중에 이건 루카스 씨에게도 꼭 알려줘야겠네~."
"......"
"......"
"오호호호~, 절 가멸차게 놀리시던 친구님들~, 지금 어디 계신 거죠~?"
유구무언. 입이 뚫렸어도 말문이 막혀버린 리사와 미라이는, 허리를 곧게 펴고 콧날을 높이 세운 베라에게 어떤 반박도 하지 못한 채 죄인처럼 고개 숙였다.
"...저희가 경솔했습니다, 베라 님. 부디 그 부끄러운 과거는 잊어주시와요."
"호호홋~! 왜 이러세요들? 어디 더 비난해보시지 않고요?"
"아잇참~, 얄궂게 그러지 마시고~. 앞으로 저희가 성심을 다해 평안히 보필하겠나이다. 그러니 님아, 자비 좀..."
"히힛, 니들 하는 거 봐서~."
앞날은 그 누구도 모르는 일, 자신이 무심코 내뱉은 말이 때때로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기도 했다. 부모들이 자녀들에게 평소 행동 가지를 바르게 하라며 괜히 잔소리하는 게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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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혁명은 성공, 반란은 실패의 역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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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또각. 또각. 또각. 또각. 또각.
5일 전 드레프타 근처에서 시작된 말발굽 소리는 출발 때만큼 여전히 느긋하기만 했다.
'여긴 어디고, 나는 여기서 무얼 하는가.'
올라탄 말에게 세월아 내월아 몸을 내맡긴 루카스. 그는 방심한 사이에 경주에 이긴 거북이처럼, 어느덧 타미아르 국경을 넘어 기아니크의 '레벨티오(Rebaltio)' 자작의 영지 경계에 다다라 있었다.
'쩝... 그냥 말귀 못 알아들은 척 베라 씨 일행에게 빌붙을 걸 그랬나? 후~, 아니다. 가뜩이나 신경이 예민한 상태의 요정족들인데 더 자극시킬 필욘 없지. 그래도 메토가 대마법사라는 사람을 소개시켜 준다고 했으니까 너무 조급해하지 말고 천천히 하자. 천천히.'
그는 가정과 후회를 반복했다. 하지만 그것도 하루 내내 붙들고 다니진 않았고, 점심 무렵이 되기 전에 그만뒀다. 수백 번을 되짚어 봤자, 본인이 처한 현실의 어느 것 하나 변하지 않음을 시원하게 인정해버린 것이라 하겠다.
'그건 그렇고... 성문을 통과하려면 저 줄에 서야 하는 건가?'
무의미한 잡념을 털어낸 루카스는 미리 말에서 내려와 입구 왼쪽으로부터 길게 늘어진 행렬 끝으로 붙었다. 가끔가다 값비싼 마차들만 오른쪽 대로를 이용하는 모습을 볼 적에, 눈치껏 줄을 잘 섰다는 판단이 들어 기분이 썩 괜찮았다.
"통과! 다음!"
이윽고 루카스의 차례가 되었다. 그는 중무장한 병사들의 손짓에 따라 어느 간이탁상 앞으로 이동했다.
"이름."
"루카스."
"출신지."
"타미아르, 비리디아."
"방문 목적."
"여행."
"용병?"
"때때로."
"소지한 무기."
"정글도 하나, 단도 하나."
"겨우?"
"여기."
루카스는 배낭 등받이 부분에 갈무리된 정글도와 엉덩이 위쪽 허리띠에 가로로 매달려 있던 단도를 꺼내어 보여줬다.
"흐음... 저쪽 가서 배낭 다 끌러봐. 야, 이거 확인해!"
"옙! 부관님!"
성문 경비대의 의심에도 루카스는 딱히 마음 상하지 않았다. 이미 국경을 넘을 때도 이와 같았거니와, 그가 인간시절에도 수없이 겪어본 바였기에 오히려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그의 단련된 근육과 큰 체구는 불필요한 시비를 줄여주는 장점에 비례한 만큼, 낯선 사람들의 경각심을 최대치로 끌어올린다는 단점을 그 스스로도 익히 알고 있는 까닭이었다.
물론 은근슬쩍 통행세를 얼마씩 쥐어주는 편법도 있었겠으나, 그의 빈곤한 돈주머니로는 그것을 시도해볼 엄두가 나질 않았다. 특히 갑옷의 때깔이 번질번질한 장교에게 겨우 몇 푼의 동전을 어설프게 찔렀다가는 자칫 역효과만 불러일으킬 수도 있었다.
"부관님, 이상 없습니다."
"정말이냐? 너 진짜 꼼꼼히 확인해본 거 맞아?"
"예! 몸수색은 물론 말 안장 밑까지 싹 훑어봤습니다만, 무기라곤 정말로 이 두 자루가 전부였습니다."
"음... 외부에서 엄한 놈들이 숨어 들었다는 첩보가 있었다. 다시 꼼꼼히 확인해!"
"옙!"
- 작가의말
지난 한 해 고생 많으셨습니다. 새해엔 복을 듬뿍 받으십시오. 남는 건 저한테 넘기시고요.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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