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려진 발자취 (3)
* * * * *
그로부터 며칠 뒤, 임무수행을 위해 에플키도에 상주중인 오드노아 특임대원 중 한 명이, 마을 외곽의 어느 건물로 빠르게 뛰어 들어갔다.
"리코우(Ricou) 조장님!"
"?"
"보, 보고드립니다! 하아... 하아..."
이름 불린 특임대 조장은 마시던 찻잔마저 내려놓곤, 눈 앞의 정찰대원이 숨 돌리는 약간의 틈을 기다려줬다.
"특이사항이 생겼나보군, '에벨린(Evelien)' 부관. 보고해봐."
"네! 현재 요주 인물들이 돌아와 중단됐던 발굴작업을 재개했습니다!"
"벌써? 이상한데? 음, 그보다 돌아온 그들의 보급량 수준은 얼마나 되지?"
"빈틈 없이 꽉 채운 짐마차 한 대 분량이었습니다!"
"...그 인간들이 끝내는 미쳐 돌아서 어디 마을이라도 약탈한 건가?"
''아닙니다. 늘어난 일행으로 유추할 적엔 후원자가 따로 있었던 것 같습니다. 참고로 추가된 구성은 성인남녀 각 1명과 10살 내외의 어린아이 1명이었습니다."
"쯧..."
"어떻게 대응하시겠습니까? 즉시 대원들을 집합시킬까요?"
인상을 찡그리며 잠시 생각을 정리한 리코우가 다시금 에벨린를 바라봤다.
"특별 대응은 없다. 우리는 계속 수수방관한다. 감시와 정찰이 중간에 끊기지 않도록만 신경하도록 해."
"하, 하지만 발굴 진척이 이전에 비해..."
"혹시 마법사라도 데려온 건가?"
"예, 땅을 파헤치는 속도로 짐작컨대 틀림없습니다."
"젠장! 하다하다 이젠 마법사까지 동원해올 줄이야! 어디서 굴러먹다 온 도굴꾼들인진 몰라도, 그 재주 하나는 인정해야겠다."
"말로만 듣던 인간들의 사회적 관계성을 실제로 겪어보니, 저희가 본토에서 배웠던 수준보다 상당히 끈끈한 것 같습니다. 저희가 미처 파악 못한 조력자가 있었을 줄은......"
"그런 습성 덕에 인간들이 빠른 속도로 이만큼이나 번성했다 해도 과언이 아니지. 우리보다 수명이 짧다고 마냥 우습게 볼 종족은 아냐."
"과연 그렇군요."
"...뭐 어쨌든 겨우 그 정도 인원이 늘어나 봤자다. 아무리 마법사라도 개인의 한계는 분명할 터. 우리 대원들이 몰래 정령을 부려 유적지 입구를 꽉 막아놓은 이상, 그리 쉽사리 뚫리진 않을 게다. 그러니 대응방침은 기존 그대로 유지하도록."
"......"
에벨린 부관은 순환근무 중 자신이 목격한 놀라운 광경을 설명하려 했으나, 곧바로 이어지는 조장의 말을 감히 끊을 수가 없었다.
"우린 우리에게 꾸준히 접촉을 시도하는 이 지역 유지들에게 심기불편하다는 입장만 계속 표출하면 된다. 나머진 욕심에 찌든 인간들끼리 서로 알아서 물고 뜯겠지."
"넵!"
"주임무를 잊지 말도록. 우린 악령이 풀려나는 최악의 사태를 대비해 전투력을 항시 최선으로 유지해야 한다."
"명심하겠습니다!"
"다른 조원들에게도 확실히 전파해. 인간들이 봉인석을 에워싼 결계를 건드리거나, 트로돈 선발대가 그걸 탈취하려고 시도는 게 아닌 이상 철저히 방관한다."
"예!"
"아, 그리고 넌 당분간 정찰근무에서 열외다. 숙소에서 비상대기하면서 유적지 내부에 설치해둔 검출기를 원격으로 예의주시하도록."
"알겠습니다!"
"그럼 가봐."
"네!"
그렇게 후임을 돌려보낸 리코우는 찻잔을 만지작 거리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래도 알랭 단장님께 보고하고 미리 증원을 요청해야겠지? 만에 하나란 게 있을 수 있으니까."
그는 즉시 침대 밑에서 꺼낸 가방을 열어 휴대용 통신장치를 조립해 본토와 교신했다.
"......(중략)... 하여 현재 11명의 전력으론 부족할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이상입니다, 알랭 단장님."
<거 마침 잘 됐군. 그 근방에서 놀고 먹는 특임조가 있으니 곧장 그리로 보내도록 하지. 그곳 상황이 안정될 때까지 한동안 요긴하게 쓰게나. 겨우 대원 둘에 깍두기 한 명이지만 보충전력으론 그럭저럭 보탬은 되겠지.>
"감사합니다. 그런데 놀고 먹는 특임조란 말씀이 이해가 잘..."
<그런 일이 좀 있네. 미안하지만 보안상 통신으로 설명해주긴 어렵겠군. 정 궁금하면 그곳에 도착할 대원들로부터 직접 듣게나. 둘 다 자네 동기들이니 불편하진 않을 걸세.>
"......알겠습니다. 제 요청을 수락해주셔서 거듭 감사드립니다."
<그래, 아무쪼록 자네들의 무사복귀를 기원하겠네. 이상, 통신종료.>
"넵! 통신종료!"
휴대용 통신장비를 역순으로 분해하던 리코우는 곰곰이 생각했다.
"음? 근데 깍두기는 또 뭐지?"
* * * * *
한편 에플키도에서 172km 떨어진 마을에선 바아가예거 용병단 단장이 의뢰자의 멱살을 흔들고 있었다.
"부단장이 죽었어! 부단장이! 내 의형제가 뒈졌다고!"
"케윽, 켁, 켁!"
"샌님 둘만 적당히 손봐주고 용돈 챙기면 된다며! 겁만 주고 마을에서 쫓아내면 되는 거라매!"
"크윽, '버그먼(Bergman)' 단장... 제발... 이것 좀... 놓..."
"에이! 썅!"
"아이쿠!"
스무살 내외의 곱상한 청년을 내팽겨 친 버그먼 단장이 씩씩 거리며 호통쳤다.
"씨ㅂ, 요즘 샌님들은 용병보다 전투도끼를 능숙하게 휘두르는 게 기본 소양인가보지, 앙?!"
"......"
"이 X새끼가 나한테 엿을 먹여도 유분수지!"
"버그먼 단장! 말이 심하오! 아무리 그래도 이 분은 '베클린(Backlin)' 남작가의 장남 '채드(Chad)'..."
용병들에 의해 강제로 무장해제된 5명의 고용인 중 대표격으로 보이는 자가 선뜻 나서서 버럭 했지만 결과적으론 본전도 건지지 못했다.
"...그래서 내가 안 죽이고 억지로 참고 계시잖냐, 이 개ㅅ야."
"......"
"왜? 내가 덩치에 안 맞게 주둥이만 적당히 놀리니까 겁나 만만해 보여? 칼밥 먹는 용병답게, 늘상 하던 대로 칼침부터 놓고 시작해줘?"
"이, 이 지방의 실세를 적으로 돌릴 참이오?!"
"아주 ㅈ랄하고 자빠졌네. 실세는 얼어 죽을. 넌 내 뒤에 누가 있는지나 알고서 씨불이는 거냐?"
"......"
"아, 근데 그러고 보니 넌 귀족도 아니었네?"
"...?!"
순간 버그먼의 소매 안에 감춰져 있던 단검이 고용인의 허파를 찢었다.
- 촤악.
"꺼어어읍!"
채드는 폐에 바람구멍이 나서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수행원의 모습을 보며 기겁했고, 버그먼은 죽음의 공포에 젖어 빳빳하게 굳은 채드의 겉옷에 칼날을 천천히 닦아내며 말했다.
"흐잌!"
"이보쇼, 채드 공자. 내가 지금 기분이 진짜 진짜로 더러워요~. 이걸 어떤 식으로든 풀긴 풀어야겠는데 말이야."
"......보, 보상을 하리다!"
"하하, 이제야 말이 좀 통하네. 계산은 확실하게 하셔야 할 꺼요. 이번에 뒤진 부단장이 전투사등급으로 따지자면 5급, 다른 한 놈은 6급이었거든. 한 마디로 약소국 왕실의 정규군에 들어가도 백인대장이나 십인대장은 충분히 해먹을 수 있는 놈들이었단 소리지. 알아들었소?"
"아, 알겠소! 어떻게든 돈을 마련하리다! 어떻게 해서든!"
"큭큭, 어떻게든 보상을 마련하는 건 영주님께서 하실 일이고~."
"?"
"돈이 마련되는 동안 공자님께서는 우리랑 함께 다니셔야지?”
"...그, 그건!"
버그먼은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는 채드의 목에 칼을 겨누며 말했다.
"허허, 괜히 잔머리 굴리지 마쇼. 재미없게."
"......"
"우리가 보상 받을 때까지 얌전히 있으면 아무 일 없을 거요. 단장인 내가 보장하지."
"...알겠소."
"자, 댁들도 똑똑히 들었지?"
남은 영주의 고용인들은 굴욕감에 부들부들 떨었지만, 자칫 채드 공자를 위험에 빠트릴까 싶어 고개만 끄덕였다.
"주제도 모르는 놈이 더 나오지 않아서 다행이네. 좋아, 좋아."
"......"
"어디보자~, 우리도 죽은 형제들의 복수를 좀 해야해서 바쁘니까 대충... 그래. 대충 보름 후에 베클린 영주성으로 찾아가리다. 그럼 그때 다시들 보드라고~. 채드 공자도 저기 낙타 하나 골라잡고 타쇼."
버그먼은 채드의 뺨을 두어 번 쫙쫙 때리며 그의 정신을 반짝 챙겨주곤 낙타 위로 올랐다.
"가자, 형제들아!"
그의 우렁찬 명령에 250명에 달하는 용병들이 발 빠르게 움직여 나아갔다.
* * * * *
이틀 뒤. 루카스 일행이 고대유적지 내부로 들어섰다. 특히 몇 미터나 앞장 서 있던 제프리와 토비의 탄성이 유난히 촉촉했다.
"드디어!"
"마침내!'
수많은 인부들과 함께 몇 달을 파냈던 내부가 멀쩡한 것을 꼼꼼히 살펴본 그들은, 마치 소풍 나온 아이들처럼 방방 뛰었다.
"오우, 좋았어! 안쪽은 멀쩡해! 우리가 마지막 날에 봤던 그대로라고, 제프리!"
"크하하하! 그 놈들이 이곳까지 어떻게 해볼 시간적 여유는 없었나 보구나! 여기까지 꽉 막혀 있을까봐 내가 얼마나 노심초사했는지 원!"
제프리와 토비는 루카스가 아니었더라면 몇 달이나 개고생해야 했을 유적지 초입의 단단한 암석지대를 떠올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우와..."
안전이 확인되고 뒤따라 들어온 알쿤다 자매가 유적지의 규모에 혀를 내둘렀다.
"어니! 갱장해!"
"땅밑에 성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어요!"
토비와 제프리는 야스민의 말을 듣고선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흐흐, 젊은 아가씨의 눈썰미가 대단하군요. 당장 보이는 꼬라지가 석공이 절벽에 건물을 새긴 수준 밖엔 안 돼서 그렇지 전체적으론 성채가 맞습니다."
"크~, 성채 하나가 통째로 매몰된 형태라고 설명하면 쉬우려나? 크으~, 방해만 없었어도 위에서부터 제대로 파내려 왔을 건데!"
"에잉~, 망할 방해꾼들 덕분에 돈이 더 들었어!"
"그러게나 말이다. 입 싹 씻고서 냅다 튄 인부들을 떠올리기만 해도... 아오! 빡쳐!"
그들은 도난에 대응하기 위해 유적지 인근의 토굴을 찾아 조금씩 확장시킬 수밖에 없었던 자기네들의 사정을 두고 한탄했다. 그러나 그들이 열악한 환경 속에 끈기 있게 일궈낸 성과들을 나디아가 들뜬 표정으로 두루두루 구경하는 모습을 보며 금방 의기양양해졌다.
"우왕~, 이거 무지무지 이삐다~."
"크흐흐, 꼬마야. 너도 제법이구나. 그 중에서 가장 비싼 걸 딱 알아보네. 이 장신구가 오랜 세월 속에 살짝 변색돼서 그렇지, 알고 보면 재질이 금이에요, 금!"
"히히, 그음! 그음!"
눈망울이 초롱초롱한 청중의 반응이 이토록 훌륭하니, 설명하는 제프리의 어깨에 흥이 절로 깃들었다.
"엣헴! 자랑 좀 하자면 이 아저씨한텐 사물의 기억을 약간 읽어낼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이 있단다."
"으와!"
"보자~, 보자~. 아, 이 술잔은 옛날 고대인들이 어떤 특별한 예식을 할 때 사용됐구나. 무거운 갑옷으로 중무장한 사람들이 술잔을 돌아가며 내용물을 나눠 마시곤 했었네~. 그게 어떤 의식이었는지까진 구체적으로 알 순 없지만, 참여자들의 진중한 표정에서 상당히 중요한 행사였음을 충분히 가늠할..."
이때 옛날이야기에 흠뻑 빠진 나디아의 뒤편에서 갖가지 유물들을 살피던 루카스가, 딱히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한 마디를 툭 던졌다.
"아, 그것은 ‘맹세의 잔’입니다. 종신서원할 때에 사용됩니다."
"?!"
그 한 마디의 내용은 참으로 충격적이었다.
-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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