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률을 읽는 소녀 (4)
* * * * *
그날 저녁. 내부수리를 사유로 강제휴점 중인 곤살로의 여관 지하창고엔, 복장이 후줄근한 불청객이 두 명이나 자리하고 있었다.
- 합, 합. 아구아구. 촵. 촵.
"아휴, 그러다 체하겠네. 느긋하게 먹거라. 부족하면 내가 더 줄테니 염려 말고."
"감사합니다."
"가, 가샤하니다!"
위기를 넘긴 자매들은 곤살로가 차려준 잡고기 스프에 흠뻑 빠져 있었다. 특히 얼굴이 시퍼렇게 멍이 든 야스민의 경우는, 얼얼한 통증마저 깜박 잊은 것처럼 부랴부랴 허기를 채웠다.
물론 이 지하 공간을 이 세 사람만이 차지하고 있던 건 아니었다. 곤살로의 아내와 그리고 이 둘을 이곳으로 데려온 개러스 또한 함께 하는 중이었다.
"개러스."
외견상 곤살로에 비해 최소 10년은 어릴 법한 그의 아내가 대뜸 친동생을 향해 눈총을 줬다.
"으, 응?"
"나랑 잠깐 이야기 좀 해."
"어? 어어... 누나."
그녀의 다그침은 남편에게도 쏘아졌다.
"그리고 당신도요."
"...그, 그래. 여보."
지하실 문을 굳게 걸어 닫고 1층 주방으로 올라온 그들은 진지한 대화를 시작했다. 사실 대화라기 보단 일방적인 추궁에 가까웠지만 말이다.
“야, 개러스. 너 바른대로 말해. 누구한테 무슨 청탁을 받았어!”
“뭐?”
“종업원조차 한 명 못 쓰는 우리 형편에 노예를! 그것도 둘 씩이나 데려왔잖아! 청탁 받았다가 엄하게 틀어지면 가족들까지 전부 피보는 거 몰라? 그리고 너 앞으로 걔네들 어떻게 먹여 살릴래?!”
“오, 오해야! '엠마(Emma)' 누나! 난 그런 적 한 번도 없어! 깨끗하다니까? 난 그렇게 간댕이 붓지 않았다고!”
개러스는 극구부인했지만 부정부패가 만연한 이 섬에서 평생 살아온 엠마로선, 한 번 생겨난 거친 의구심을 쉽사리 지우지 못했다.
”거짓말 마! 비리 눈 감아준 대가로 여자애들 받아온 거잖아! 여자애 허리가 완전 잘록하고 가슴이랑 엉덩이가 엄청 빵빵한 게! 제대로 네 취향이더구만, 뭐!”
“에이씨, 그건 맞지만 이건 아냐! 이건 아니라고! 난 아버지랑은 달라! 괜히 책 잡혀서 재산몰수 당할 짓거리는 절대로 안 해!”
아버지의 욕심으로 인해 가족들이 길거리로 내몰렸던 과거사를 들춰내고 나서야 엠마의 싸늘한 눈초리가 약간 누그러들었다.
”...너 진짜로 청탁 받은 거 아냐? 암만 봐도 네가 얼굴까지 예쁘장한 노예를 보자마자 홱까닥 돌아버린 걸로 밖에 안 보이는데?”
"아오, 진짜!!! 누난 평소에 날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던 거야?! 막말로 내가 뭐라고 그런 청탁 같은 게 들어오겠냐고!”
“야, 이 섬 밀수꾼들은 순찰 경비병한테도 꼬박꼬박 뇌물 갖다 바치잖아!”
”아니 그런 건 또 어디서 들어가지고... 암튼 난 아니야! 진짜 말도 안 되는 억측 좀 하지 마! 내 인생 목표는 가늘고 길게 사는 거야! 지긋지긋한 가난은 어려서 겪은 걸로 이미 충분해!"
"그럼 이 상황은 도대체 뭔데?”
그녀의 마지막 물음에, 방방 뛰던 개러스의 흥분이 착 가라앉았다.
"에... 그러니까...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 하면, 아까 집하장에서... (하략)..."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상당한 민폐를 끼쳤다고 생각하는 개러스는, 다소 억울한 마음을 꿀꺽 삼키면서 차근차근 털어놓았다.
“헉, 라구루라니?!”
그런데 이야기 중간에 특정 단어가 언급되자, 엠마의 질타가 빵 터졌다. 그녀는 개러스의 말을 도중에 똑하니 끊더니만, 마치 지네를 상대하는 닭처럼 동생을 마구 쪼아댔다.
"야!!! 개러스, 너 미쳤어?!"
"쉿! 지, 진정해, 누나! 그래도 내가 해질 때까지 뒷골목 전전하면서 최대한 남들 눈에 안 띄게 피해서 왔어. 내가 여기로 왔을 줄은 아무도 짐작 못하고 있을 껄?"
"야! 그게 말이야, 방구야?! 니가 지금 생각이 있는 거니, 없는 거니?! 정말 쥐도 새도 모르게 바다에 쳐박히고 싶은 거야?! 이럴꺼면 차라리 청탁을 받아!"
"나, 나도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구! 루카스 씨가 날 콕 찍어서 부탁하는 바람에..."
"뭐? 루카... 누구?"
"아니, 왜 그 있잖아. 그 덩치 살벌한 순례자 양반! 어제 누나한테 치근덕대고 행패부리던 놈들을 아주 박살낸 남자분 말이야."
"......"
개러스의 설명을 들은 엠마는 무적의 강철골렘을 연상케 했던 루카스를 즉시 떠올렸으나, 그래도 당장 코앞에 닥친 재난이 워낙 컸던 지라 흥분을 쉽게 삯히진 못했다.
"...그래, 나도 어제 일은 진심 고맙다고 생각해. 정말로 감사하고 있어. 하지만 개러스! 이 섬에선 라구루 놈들이랑 엮였다간 나중에 어떤 꼴이 되는진 네가 우리보다 훨씬 더 잘 알잖아! 막말로 그 사람이 우릴 끝까지 책임져준대?!"
"......"
"네가 아무리 항만조합의 관리라 해도 조심해야 한다며! 보호받는데도 어느 정도라는 게 있다며! 당장 걔네 쫄따구들도 어쩌지 못해고 박살난 우리 가게 안 보이니? 이걸 봐도 우리가 앞으로 어떻게 될 지 상상이 안 돼? 난 지금 눈앞이 캄캄하고 살까지 다 떨린다, 진짜!!!"
"...미안."
"여보! 여보도 개러스한테 뭐라고 따끔하게 한 마디 해줘요!"
"어... 음... 그게... 우리 처남이 매우 경솔하긴 했는데..."
"응? 당신 왜 그래요?"
곤살로 역시 아내의 분노에 깊이 공감하고 싶었으나, 이상하게도 화가 치솟질 않았다.
'그래. 이참에 아예 내륙으로 가서 자리잡는 편이 더 좋지 않을까? 먹고 사는 일이 문제가 되기야 하겠지만, 자금이야 차고 넘치는 상태고...'
불과 몇 시간 전에 루카스의 신분에 대한 의구심을 가져보기도 했었거니와, 다른 무엇보다 그가 수리비로 묵직하게 남기고 간 바지주머니 속 대금화들을 만지작 거릴 적마다 심리적으로 안정이 됐던 것이다.
“여보! 이 지금 상황에서 딴 생각이 나요?!”
“아, 아니... 그런 건 아니고... 당연히 나는 우리 가족의 달란하고 밝은 미래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을 하고 있었지~.”
“그게 딴 생각한 거잖아욧!”
“미, 미안...”
한편. 대뜸 발광하기 시작한 개러스의 목소리는, 차분하기 짝이 없는 곤살로와 달리 두려움에 푹 절어 있었다.
"누, 누난! 루카스 씨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사람인지를 못 봐서 그래!"
"아니, 이게 어디서 잘 했다고 되레 큰 소리야, 큰 소리가!"
"나, 난 똑똑히 봤다고!"
"그래, 니가 뭘 봤는데!"
“사람 생팔을 푹 삶은 문어다리 찢듯이 확 잡아 뜯었다고!”
"?!"
"그 괴물 같은 힘이 너무 무서웠어! 진심 장난 아니야! 어느 라구루 간부가 나타나 마법으로 만든 불을 채찍처럼 휘두르니까, 바로 그 인간의 오른팔을 뽑아서 바다로 던져 버렸다고! 쓰레기 내다 버리듯 아무 거리낌 없이! 자연스럽게!"
“......”
집하장에서의 싸움이 뇌리에 선명히 각인된 개러스의 이마엔, 씨알 좋은 포도송이처럼 굵은 식은땀이 송글송글 맺혔다.
"그 뿐인 줄 알아?! 루카스 씨는 겨우 그것만으론 성에 안 찼는지, 마법사의 화염 때문에 새빨갛게 달궈진 쇠사슬을 콱 집어들고서 피가 철철 흐르는 간부의 상처를 마구 지져대더라! 그 놈이 설사 팔을 되찾아 신전에 찾아간다 한들 치료가 쉽지 않게끔 말이야!"
"으으..."
그의 생생한 증언이 엠마의 끔찍한 상상력을 풍부하게 자극시키자, 그녀의 눈꺼풀이 자동으로 질끈 감겨졌다.
"솔직히! 내가 그 정도는 그러려니 할 순 있었어! 하지만 정말로 식겁했던 게 뭔지 알아?"
"뭔...데...?"
"그 중상자 귓가에다가 다시는 죄짓지 말라고 속삭이더라! 두 팔이 성한 채 지옥에 떨어지는 것보단, 오른팔 없는 병신인 채로 천국에 가는 편이 낫다면서 말이야!"
"헐......"
"아니 그런 미친 소리를 진지하게 하는 양반의 정신상태가 과연 정상일 거 같아?”
“......”
”세상에! 그게 고통에 눈이 뒤집어 까진 사람한테 태연히 할 수 있는 말이냐고! 사람을 조롱하면서 죽이는 해적들이 오히려 제정신이겠더라!"
"...맙소사."
"아니, 진짜 바로 그 상황에서! 루카스 님이 나를 불러 아이들 챙기라고 신신당부하는데! 그때 내가 무슨 배짱으로 거절할 수 있었겠어? 그때 내가 아닌 누나였으면 뭐 달랐을 거 같아?! 다시 한 번 더 분명히 말하는데! 이건 내가 자발적으로 원한 일이 아니야!"
"...그, 그래... 알았어. 미안."
동생의 안이한 행동을 나무라던 엠마의 입술이 금세 얌전한 침묵을 머금었다. 그러나 그 침묵은 오랫동안 이어지진 못했다. 뭔가 알싸한 기분에 뒤돌아본 엠마의 눈동자가, 피칠갑 상태로 주방 입구에 떡하니 서있는 루카스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
"흠흠, 미안합니다. 먼저 나는 여러분에게 정중히 사과하겠습니다."
"히이이익!!!"
엠마는 그대로 중심을 잃고 혼절했다. 거무튀튀한 핏물로 얼룩진 루카스의 모습은, 심약한 아녀자가 감당하기엔 다소 무리가 있었던 것이다.
"어이쿠, 마누라!"
* * * * *
미친 살인마와 다름 없는 몰골을 대략 정비한 루카스는 지하창고로 곧장 내려가 아이들을 만났다. 아직 엠마가 깨어날 기미가 없었기에 곤살로 가족에게 양해를 구하는 일을 뒤로 미룬 것이라 하겠다.
"아찌이, 저말 가샤항니다."
"사, 살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 지..."
“됐다. 앉아라. 나도 그래야만 했었다.”
그는 배꼽인사를 꾸벅 올리는 자매와 같은 식탁에 자리 앉으며 말을 계속했다.
"그보다 궁금한 것이 있다. 내게 준 그 양피지는 어떻게 받았지?"
"...그게... 그게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졌어요."
"하늘에서 떨어졌다?"
그의 진지한 얼굴색은 오히려 자매들에겐 몹시 억센 추궁과도 같은 압박으로 느껴졌다.
"...네에."
“지짜, 지짜에요!”
"흠, 그런가? 뭐 알겠다."
아리사엘의 개입을 알고 있는 루카스는, 실제로도 아이들의 말을 추호도 의심치 않았다. 그는 으레 있을 수 있는 기적이나 신비의 발현쯤으로 치부하고 끝낸 것이다.
그러나 최근의 삶 속에서 부당한 처우를 숱하게 받아온 이 자매들은, 루카스의 말뜻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특히 야스민의 예민한 반응이 상당했다. 그녀의 경험상 이 다음으로 이어진 과정은, 진실을 말하라며 다그치는 거친 폭력과 섬뜩한 고문, 그리고 저급하면서 더러운 성적 추행이었기 때문이었다.
"저, 절대 거짓이 아닙니다! 양피지 조각이 나타는 걸 저도 곁에서 봤어요!"
"그래, 그렇겠지."
"정말입니다! 믿어주세요!"
"음?"
"저, 전 어떻게 하셔도 좋아요! 하지만 제 동생에게만은 손대지 말아주세요!"
"......그건 무슨 말이지?"
"제, 제발요! 이제 막 아홉 살 밖에 안 된 어린애잖아요!"
덜덜 떨리는 목소리와 초조한 기색이 역력한 눈초리, 그리고 시퍼렇게 멍든 몸을 움직여 동생을 재빨리 감싼 보호행위. 딱 이것만 봐도 그녀가 지금 얼마나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인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후우..."
그제야 비로소 문제점을 자각한 루카스는 의자등받이에 몸을 삐딱하게 기대며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리곤 야스민의 들썩한 어깨가 조금이라도 누그러질 때까지 침묵의 시간을 가지며 얼마간 기다려준 다음 입술을 뗐다.
"내 이름은 루카스다. 너희의 성명은?"
"저, 저는 야스민, 동생은 나디아에요."
"혹시 성도 있나?"
"...네에. 성은 ’알쿤다(Alkunda)’입니다. 5대 조상님이 한때 제후 자리에까지 오르실 뻔한 분이었다곤 하는데, 그래도 다른 사람들에게 시건방지단 소릴 들을까봐 평소엔 이름만 밝히는 편이에요."
"음, 그렇군."
"저기... 이미 아실 수도 있겠지만... 제 동생에겐 장애가 조금 있어서... 소통이 다소 불편하실 테니까... 만약 하실 말씀이 있으시거나 하면 부디 제게만... 저는 루카스 님께서 시키는대로 뭐든지 다ㅎ..."
"흠, 잠깐. 나는 먼저 한 가지를 바로 잡고 싶다."
야스민의 갈수록 고조되는 감정을 느낀 루카스가 그녀의 대답을 싹뚝 끊었다.
"넌 오해했다. 나는 너희 안 때린다."
"...?"
"부당하게 안 괴롭힐 거다. 그리고 나는 어린애한테 성욕 발산하는 쓰레기도 아니다. 걱정마라. 내 이름을 걸고 굳게 약속한다."
"...정말...이신 거죠?"
"너는 첫번째로 이해해야 한다. 내겐 장애는 없다. 하지만 공용어가 몹시 서툴다."
"...아... 네."
"둘째로 나는 너희 이야기 듣고 싶다. 순수할 뿐 다른 마음은 없다. 너희 자매는 어떠한 이유로서 쫓기고 있는 거지?"
"루카스 님께서... 과연 저희 이야기를 믿으실진 모르겠는데요..."
"난 의심 없이 믿는다. 이 아이는 선택받은 자이기 때문이다."
"네?"
"나 표현 약하다. 그래서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그러므로 너희 이야기나 나한테 해줘라."
"...네."
야스민은 단조로운 문장을 통해 의사전달을 딱 부러지게 하는 루카스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나디아의 손에 깍지를 낀 채로 동생의 능력을 비롯한 과거사를 그에게 하나둘 씩 털어놓았다.
- 작가의말
.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