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는 순례자 (5)
* * * * *
- 쿠르르... 쿠웅... 드드드...
- 으아아아아악-!
몇 십 분 전까지만 해도 루카스가 머무르던 별실. 그곳에 큰 탁상을 새로이 들인 러셀은, 불규칙적인 진동과 메아리 같은 비명을 안주삼아 고급 증류주를 음미하는 중이었다.
- 쭐쭐쭐... 쪼오옥... 꿀꺽.
"크흐~, 달구나, 달아! 독주가 이리 달면 안 되는데 말이야. 허허허!"
"......"
물론 그 주변 인물들은 이토록 여유로운 한때를 만끽하는 러셀과는 달랐다. 간이 콩알만한 사람이든 아니든, 태풍 같은 이 위기가 무사히 비켜가길 기도하곤 했다. 입구가 뚫리면 이곳이 바로 자신들의 무덤이 될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조바심에 정신 못 차리는 건, 러셀의 곁에서 무장대기 중인 라케타 역시 마찬가지였다.
"러셀 님, 외람되지만 이런 상황에서 너무 느긋하신 것 같습니다. 추가적인 대안이라도 모색을 해보시는 편이 어떠ㅅ...."
"후훗, 라케타. 매우 간단한 문제를 괜히 복잡하게 생각지 말게나. 창고문이 뚫리면 그 길로 우린 끝난 거고, 그게 아니라면 좀 더 인생이 연장. 단지 그 뿐일세. 저쪽은 이 식량 저장고의 비밀통로까지도 이미 알고 있는 거 같으니까."
"그건 알지만 당신께선 생존을 확신하고 계시기에 충언을 한 번 올렸습니다."
"흠... 자넨 내가 지는 싸움에 판돈을 올인하는 걸 본 적 있나?"
그런 일은 꿈에서라도 상상해본 적 없는 라케타였으나, 적어도 이 순간만큼은 대꾸할 부분이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자작과 남작의 정예기사들과 마법사들을 홀로 막아낸다는 발상부터가 상식적으로..."
"푸흐흐흐, 이보시게~. 자네는 우리 레벨티오의 영웅님을 너무 폄하하는 것 아닌가?"
"저는 오히려 러셀 님께서 심하게 과대평가하고 계시는 것 같아 우려스럽습니다. 전해지는 이야기는 으레 부풀려져 있기 마련입니다."
"음허허허!"
잔을 꿀꺽 비워낸 러셀은 호탕한 웃음과 함께 다시 술잔을 절반가량 채웠다.
"그럼 사실만 열거해줄까? '벌건 대낮. 광장에서. 휠러 백작을 제거했다.' 이 3가지가 목격자들의 공통된 증언이라네."
"...그, 그게 정말입니까? 겁 많은 휠러 백작은 신관들과 마법사들의 결계 속에 항시 숨어 다니기로 유명하잖습니까?"
"으허허, 이거이거~ 단검 한 자루로 결계를 뚫어 깔끔하게 처리했다는 목격담까지 마저해주면 아주 까무러치겠는데?"
"...단검 한 자루로 말입니까?"
"껄껄껄, 믿음을 갖게! 난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여유를 부리는 게 아니야."
"......"
러셀은 라케타의 어깨를 톡톡 다독여 주면서 말을 계속했다.
"흠, 그나저나 요즘 내가 너무 안이하게 관리했던 거 같아. 뒤통수를 맞아도 별 시답잖은 놈들에게 맞으니까 기분이 상당히 더러워. 으허허허, 진짜 상상도 못 했지! 내가 그 페그 따위에게 당하다니 말이야!"
"죄, 죄송합니다. 모두 다 제 불찰입니다."
"조만간 정보망을 싸악 손볼 작정이니까 그리 알고 있게."
"예... 알겠습니다."
그렇게 라케타에게 안심과 혼란을 동시에 선사해준 러셀은, 다시 술잔을 기울이며 소박한 유흥에 집중하려 했다.
"러셀 님! 러셀 님!"
그런데 그 때 마침 수하 한 명이 헐레벌떡 달려와 그에게 큰 소리로 보고했다. 그는 다름 아닌 창고 철문에 달린 외시경으로 밖의 상황을 지켜보게끔 지시했던 폴이었다.
"하하하, 이 친구야~. 숨 넘어 가겠어~."
"헉... 헉... 루, 루카스 님께서!"
"뭐야? 설마 벌써 당한 건가?! 이런 젠장! 아직 1시간도 채..."
서두만 듣고 화들짝 놀란 라케타가 보고하는 이의 말을 끊으며 절규했다. 그는 마치 ‘내가 그럴 줄 알았습니다.’는 표정으로 러셀을 향하며 인상을 썼는데, 그 하극상의 조짐을 파악한 폴은 서둘러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어 보이면서 그의 지레짐작을 완강히 부정했다.
"아니! 그게 아닙니다, 라케타 님!"
"?"
"놀라지 마십쇼! 루카스 님께서 승리하셨습니다! 한 놈도 빠짐 없이 때려 잡으셨다고요! 하하핫!"
"...허?"
부들부들 치를 떨던 라케타는 순간적으로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진짭니다! 의심스러우면 직접 가서 확인해보십시오! 에반스 자작이 러셀 님께 무조건 항복한다면서, 무릎까지 꿇고 협상을 간청하고 있습니다!"
"......"
"...크큭... 크허허어! 으하하하핫!!!"
러셀은 창고가 떠나가라 폭소했다. 그가 상정했던 최대치 이상의 잭팟이 빵하고 터졌으니 충분히 그럴 만도 했다.
"아이구, 이런 맙소사! 크하하하! 이게 이렇게 잘 풀릴 줄 그 누가 알았겠는가?!"
"......"
어안이 벙벙한 라케타의 귀에는 연속되는 러셀의 환희가 전달되지 않았다.
"가만가만, 오늘이 내 생일이었던가?! 음허허허!!! 그래! 자로고 믿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
"하하하, 앞장 서게! 나름 자작인데, 하루 종일 무릎 꿇게 해서야 되겠는가? 어서 가지! 크어허허허허!"
잠시간 두 팔 벌려 만세 외치던 러셀은, 여전히 정신 못 차리는 라케타의 뒷머리를 가볍게 때리며 방을 먼저 나섰다.
- 딱-!
* * * * *
나흘 뒤 이른 아침, 러셀은 두꺼운 철판으로 도배된 죄수 호송용 마차 경비병에게 금화를 쥐어줬다.
"저기... 이러시면 제 입장이 너무 곤란ㅎ...."
"허허허, 끽해봐야 5분이면 충분하네."
"...5분만이라면야."
"자자, 다다음 달이면 태어날 막둥이 생각도 하셔야지. 아니 그런가?"
경비병은 자신의 신상정보를 꿰고 있는 러셀에게 거역할 수가 없었다.
"아... 네... 뭐... 신경 써주셔서 감사합니다."
"자네가 곤란하지 않게 금세 나오도록 하지."
"예."
그렇게 경비를 물리친 러셀은 마차에 탑승하자마자 혀를 끌끌 찼다.
"오우~. 이런, 이런! 쯧쯧쯧... 턱이 완전히 부서졌군."
그는 현재 사슬로 꽁꽁 포박된 페그 사이먼 남작 맞은 편에 떡하니 자리잡고 앉았다.
"허어~, 페그. 페그. 페그~. 도대체 왜 쓸데없는 과욕을 부려서 이 꼴이 뭔가?"
이 말에 페그 남작은 비좁은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용케 무릎 꿇으며 닭똥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아래턱이 완전히 바스러져 말을 제대로 할 수 없는 고로, 페그 남작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자비 청했다.
"아, 아그구... 그마아... 바바버줘어어어..."
하지만 그런 남작의 등을 다독여주는 러셀은 말투만 자비로울 뿐이었다.
- 툭툭.
"이봐, 페그. 자네가 너무 욕심을 부렸어."
"으어으어으..."
"자네가 허튼 마음 먹지 않고 자작의 충실한 개노릇만 꾸준히 했으면, 이렇게 까진 되진 않았을 걸세. 키우던 개가 자신을 물어뜯으려 했다는 걸 알게 된 에반스 자작이 어찌나 열성적으로 변하던지 원... 어허허허!"
"크흐흐흑, 내으가... 내으가 자모해써!"
"쯧쯧쯧, 결국 자작에게도 버림받고 자네 홀로 이렇게 쓸쓸히 대역죄인의 신세라니... 허허, 인생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야. 그렇지 않나?"
"우으으..."
"그러게 내가 양껏 잘라준 조각만 먹고, 분수에 맞게 거기서 만족했었어야지."
"......"
"미안하네만, 모두 다~ 자업자득이니 날 너무 원망 말게나."
- 땅. 땅.
반쯤 일어선 러셀이 철벽을 두들기자 마차문이 삐걱하고 열렸다. 그리고 그는 밖으로 몸을 다 빼내기 전에 망연자실한 페그 남작을 향해 넌지시 말했다.
"왕궁에 가서 문책 받을 적에 알아서 잘 처신하게. 혹시 누가 아나? 내가 자네와의 옛정을 생각해서, 이제 천민신분이 될 자네 부인과 딸을 특별히 거둬줄지?"
"...흐어으어으..."
"그녀들은 온갖 호사를 누리며 무척 방탕하게 살아왔으니, 내 보기엔 꽤나 좋은 창부가 될 것 같아."
"?!!!"
"그럼 잘 가시게나. 페그."
- 끼익~, 쿵. 철컥.
그렇게 잠깐 열렸던 철문이 도로 닫힘과 동시에 감정을 주체못한 페그 남작이 길길이 발광했다.
"우우!!! 으우우!!!! 아아아아!!! 러어세에에엘!!!"
후련한 표정으로 경비병의 경례를 뒤로한 러셀은, 한적한 골목에서 대기중인 수행원들과 함께 루카스가 기거하는 장소로 이동했다.
이윽고 그가 걸음을 멈춘 곳은 공교롭게도 루카스와의 인연이 시작된 창고였다. 러셀은 이미 자신의 여행배낭을 챙겨들고 서 있는 루카스를 보며 아부 가득 섞인 너스레부터 떨었다.
"아이고~, 벌써 짐을 다 꾸리셨습니까? 며칠 더 머무르셔도 좋을 텐데 말입니다."
"내게도 몇 가지 할 일 있다."
"지금이라도 마음을 바꾸신다면, 당장 마차를 수배해 루카스 님께서 가시는 목적지까지 편히 모실 수도 있습니다."
"괜찮다. 나는 일부러 참는 거다, 나중에 아주 어려운 부탁을 하기 위해서."
"하하하, 뭔진 몰라도 벌써부터 겁나는군요."
"그땐 후회해도 어쩔 수 없다. 계약이기 때문이다."
"어이쿠, 그럴 리가요! 이래뵈도 제가 신용 하나로 사업을 일궜습니다! 염려 마십시오!"
"그래, 알고 있다. 며칠 겪어본 그대는 대단히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에고고, 감사합니다. 그나저나 정히 홀로 떠나시겠다면, 약소하나마 이거라도 받아주십시오. 혹시나 해서 챙겨봤습니다."
루카스는 러셀의 수행원 하자르에게서 깨끗하게 접힌 종이가 빼곡한 작은 가방을 건네받았다.
"?"
"헤트만의 군사지도입니다. 여비도 나름 넉넉하게 넣어뒀지요. 헤트만 화폐이니 환전 없이 바로 사용하시면 됩니다."
"배려 고맙다. 잘 쓰겠다."
"행여나 여행 중에 불편한 점이 생기면, 제가 알려드린 방법으로 언제고 연락 주십시오. 아주 어려운 부탁 전에 연습 삼아 사소한 부탁을 해결해드리겠습니다."
"그러겠다."
"아, 그런데 혹시..."
"음?"
자꾸 신경 쓰이던 무언가를 이야기하려던 러셀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하하, 아닙니다. 좀 전에 오는 길에 성문 어귀에서 어떤 수상한 자를 본 것 같은데... 그냥 기분 탓일 겁니다. 또 의심병이 돋은 거겠지요."
"수상한 자? 혹시 여자? 세 명?"
"아니요, 키가 170cm 내외인 한 명이었습니다. 로브를 온통 뒤집어 쓰고 있는 탓에 성별은 불확실했지요."
"혼자라... 그럼 아니겠군."
"한 번 알아봐 드릴까요?"
"아니다. 안 그래도 일정이 계속 늦어지고 있다."
"제가 너무 예민해져서 괜한 말을 했나 모르겠습니다, 하하하."
별일 아니라는 대답을 들은 러셀은 루카스에게 악수를 청했다.
"그래도 이번 일로 인해 불필요한 눈들이 붙었을 가능성은 농후하니, 전 여기서 이만 인사드리겠습니다. 아무쪼록 평안한 여행길 되시길 빕니다, 루카스 님. 마법통신은 항상 신경 써두겠습니다."
"안녕히, 릭."
뜨끈한 악수를 나눈 그들은 건물의 앞문과 뒷문으로 각각 걸음 옮겼다.
'계획보다 며칠 늦어졌군. 딱히 급한 일이 있는 게 아니긴 하지만... 또 뭐가 어디서 어떻게 꼬일지 모르니 조금 서두르는 편이 좋겠다.'
이렇듯 마음 굳게 먹은 루카스가 오가는 사람들로 미어터지는 성문을 총총총 통과할 무렵이었다.
"루, 루카스 씨!"
"......?"
그가 러셀이 급히 보낸 전령쯤으로 여기며 돌아본 외침의 발원지엔, 웬 요정족 여인이 기운차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꺄아-! 찾았다! 역시 내가 옳았어!"
"......"
- 작가의말
요즘 작가의 말을 계속 작성하는 건,
자기암시와 자기최면을 걸기 위함입니다.
신경쓰지 마세요. 저도 자제토록 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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