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는 희생을 모른다. (2)
"정말 이러실 거요?"
심드렁한 표정의 제니티아는 모르쇠로 일관했다.
"내가 뭘 말이냐?"
"진짜 치졸하게 이런 식으로..."
"이 어미는 그저 저택 내의 보안을 강화했을 뿐이란다."
"그렇다고 책까지 일일이 봉인할 필욘 없잖습니까!"
- 탕.
간만에 뚜껑 제대로 열린 바리온이 탁상을 손으로 내려치며 거센 불만을 토로했으나, 뾰로통한 어린 아들을 흘끗 바라본 그녀는 여유가 만만이었다.
"여기엔 네 생각보다 가치 있는 책들이 많단다. 특히 저쪽에 있는 옛 고서들은 더더욱 그렇고. 호호호~, 하긴 천상 언어에 무지한 너와는 관계가 없는 일이겠구나."
제니티아의 손가락은 유리문짝까지 별도로 달린 어느 책장을 가리켰다. 과연 그렇게 추가 잠금처리된 것은 서재 내에서도 그것이 유일하긴 했다.
"제가 책들을 볼 수 있게 조치해주십시오. 정중히 부탁드립니다."
"풉, 그리 해주면 네가 이해할 순 있고?"
".........."
바리온을 향한 제니티아의 비아냥은 계속 됐다.
"여기 수북이 쌓아놓은 것들만 봐도 알만하구나. 간신히 읽을 수 있을 법한 책들만 가져다 놨네. 정녕 네 어휘 수준으로 공부가 가능하겠느냐?"
"......이해될 때까지 읽으면 됩니다."
"천상의 언어는커녕, 마계 공용어의 기초만 배운 네가? 오호호호! 어느 천 년에?!!!"
"난 해낼 거요, 반드시."
굳건한 의지를 표명하는 바리온을 내려다보던 제니티아의 눈가가 한층 더 가늘어졌다.
"이끌어줄 선생 없이 독학한다면, 이 방의 모든 지식을 습득하기까진 삼백 년은 족히 걸릴 게다. 특히 넌 아무 것도 모르니까."
"아, 아무리 그래도 그, 그 정도까진..."
"호호호, 지금까지 널 키우며 관찰해온 어미로써 장담할 수 있단다."
"......"
"어머~, 오히려 기뻐해야겠구나! 하나 뿐인 아들이 내 품 속에서 오래오래 머물겠다는 의미니까~."
- 으득.
"후훗, 내 눈치가 약간 빠른 편이란다."
차츰 쪼그라들던 바리온의 목소리가 돌연 침착해졌다.
"...그래서 하고픈 말이 뭡니까?"
"내가 도와줄 수 있다."
"끄응..."
바리온은 반대급부를 어느 정도 예상하곤 있었으나, 혹시나 하는 마음에 확인차 물었다.
"...허면 그 값으로 무얼 원하십니까?"
"음... 글쎄... 우선... 가장 먼저 호칭부터 바로 잡자꾸나. 나를 엄마라 불러 보거라."
"흥! 단념하시오! 절대 그럴 일 없을 겁니다!"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바리온의 즉답. 그러나 응당 그럴 것이라 상정했던 그녀였기에 이전처럼 곧바로 화를 내진 않았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대충 이럴 거라 예상은 했다."
이후 제니티아는 천천히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리곤 본인이 앉은 소파를 앞으로 쭈욱 끌어당겨 앉았다.
- 드르륵.
"!"
조금 달라진 그녀의 분위기를 눈치챈 바리온은 그것을 경계하여 몸을 뒤로 빼려했다. 그러나 월등하게 빠른 제니티아의 속도를 당해낼 수가 없었다.
"어딜!"
"...으윽!"
그녀는 슬금슬금 뒤로 몸을 빼는 바리온의 낌새를 보자마자, 탁자 위에 올려진 그의 팔을 낚아채듯 꽉 붙잡았다.
"...뭐, 뭐요? 무슨 짓을 하려는 겁니까! 이거 놓으시오!"
당황한 바리온이 반항하며 몸부림쳤지만, 겨우 아홉 살짜리 아이의 힘으론 어머니를 당해내긴 역부족이었다. 삽시간에 아들을 옴짝달싹 못하게 제압한 제니티아는, 그의 눈을 지긋이 응시하며 혼잣말처럼 말했다.
"갑자기 돌변한 너 때문에 정말... 너무나 속상했었다. 억장이 무너져 얼마나 피같은 눈물을 쏟아냈는지 모른단다."
"...그 부분에 대해선 나도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건 진심입니다."
"아니, 이젠 괜찮다. 오늘 이른 새벽에 문득 한 가지 사실을 깨닫고나서부턴 굉장히 편안해졌거든. 실제로 방금 너의 대답에도 아무렇지 않았었고 말이다."
"나, 난 별로 궁금하진 않으니, 이만 놔주시겠습니까?"
바리온이 바둥거림을 낑낑 멈추지 않았으나, 그녀를 조금도 떨쳐내진 못했다.
"......루카스."
"내 이름은 바리온입니다."
그의 대답은 여느 때와 같이 완고했지만, 이번만은 제니티아의 결의가 훨씬 더 강한 듯 했다.
"그래. 한때 인간이었다고? 특출하게 운이 좋아야만 100년을 간신히 살다 죽는다는?"
"......"
"네가 이전에 누구였든 난 상관없다!"
바리온은 그녀의 의중을 모르기에, 점점 거세지는 제니티아의 이야기를 일단 묵묵히 듣기만 했다.
"뭐라?! 왕께서 제안한 거래에 응했을 뿐이다? 흥!!! 그게 어쨌는데?! 난 그것을 알 자격도 없지만, 딱히 알고 싶지도 않아! 털끝만큼의 관심조차 없단 말이다!"
"......"
"내 관심은 오직! 내가 품어서, 배 아파서!!! 길고 긴 산통을 견디고 견뎌서 얻은 아들! 내 사랑스런 아들뿐이야!"
"큼... 거듭 말하지만 그대의 상실감에 대해선 굉장히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나 역시 거듭 말하지만, 난 이제 괜찮단다."
여기까지 단호하게 말을 마친 그녀는 아들의 팔을 자유로이 풀어주곤, 자세를 꼿꼿이 고쳐 앉았다.
"나는 아주 단순한 사실을 깨달았단다."
"......"
"너는 그저 남들보다 일찍 사춘기에 접어든 자식.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란 걸 말이다."
"?!"
"인간들은 흔히 '질풍노도의 시기'라고 표현한다지?"
"!"
바리온은 실로 기가 막혔다. 그녀가 자신을 반항기 가득한 청소년 취급하기로 결정했다는 말뜻을 이해했기 때문이었다.
"아니! 그, 그게 무슨...!!! 터무니없는 소리요?!!!"
"내가 너를 낳았다. 너도 포기하고 그 사실을 받아들이거라."
"웃기는 소리! 내가 미쳤다고 마귀 따윌..."
"하! 마귀 따윈 부모로 인정 않겠다? 그게 마귀 따위의 뱃속을 빌어 태어난 놈이 내뱉을 말이더냐?!!!"
"그, 그건 어쩔 수 없이..."
바리온이 빠르게 머리를 굴려봤자였다. 이건 반박의 여지가 없었다. 더욱이 지금은 당장 대꾸하고픈 마음보다 이 자리에서 서둘러 내빼야 한다는 충동이 솔직히 더 컸다. 이대로 있다간 제니티아에게 실컷 휘둘리게 될 것이 불 보듯 뻔했기 때문이었다.
"너는 내가 아니면, 그 어떤 것이든 하지도, 배우지도 못한다! 스스로 초월자로 거듭나지 못했던 필멸자의 한계 따위야 거기서 거기겠지."
"...끄으응..."
"왕께서 네게 부여하신 힘이 아무리 대단하다한들, 그것을 눈곱만큼도 개화시키지도 못한 네가 과연 뭘 할 수 있지? 미리 말하건대 타샤나 알베른의 도움은 꿈도 꾸지 마라."
"......"
"난 엇나간 아들이 제 정신 차릴 때까지 천 년이고 만 년이고 무한정 기다릴 작정이다. 아니, 네가 능력을 개화시키지 못하도록 철저히 방해해주마. 흥, 각자 고집대로 갈 데까지 가보자꾸나. 난 얼마든지 준비됐으니까."
일순간 바리온의 머릿속에 오만 생각이 스쳤다. 그렇다고 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이대로 뛰쳐나가 제니티아의 영역에서 벗어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이처럼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 그녀가 그렇게 놔두지도 않을 것이 당연한데다가, 심지어 이곳은 자신이 살던 세계도 아닌 어둠에 침식된 존재들의 집합소라 할 수 있는 마계 차원이었다.
'이대로 도망쳐봤자 개죽음이다. 마물의 맛좋은 먹이나 되려고, 루치펠과 계약한 게 아니야.'
무릇 자존심 세우는 일도 힘이 있을 때라야 가능한 법이었다. 살아생전에 교단 지도부의 결정에 종종 왈부왈부 불만 섞인 의견을 표출할 수 있던 것 역시도, 그가 그 세계에서 대체 불가능한 무력을 보유했었기 때문 아니었던가?
'마계를 쳐부수겠다고 천상 영광을 포기했다. 그런데, 그런데! 그것만으론 값이 충분치 않더란 말이더냐?!'
바리온은 아무런 준비가 안 된, 어리디 어린 자신의 손엔 그 어떤 패도 쥐어져 있지 않음을 실감하고 통탄했다.
'이제와 돌이킬 방법도 없다. 나는 힘을 키워 마계의 종자들을 모조리 멸할 것이다. 만약 그것을 위해 과거의 나 자신마저 부정해야 한다면...'
짧은 고심 끝난 바리온은 현실과 타협하기로 했다.
'...그래, 그리해야겠지. 아니, 그게 현재 유일한 나의 선택지일 것이다. 정녕 그래야만 목적을 이룰 수 있다면 나는 기꺼이 루카스가 되리라!'
거의 자포자기에 근접한 심정의 그는, 어금니를 꽉 깨물며 제니티아를 천천히 올려다보았다.
"...어... 어머...... 니."
"흥, 뭐라 했느냐? 벌레 기는 소리보다 작아서 도대체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듣겠구나."
빈정 팍 상한 바리온, 아니 루카스는 싱글싱글 웃고 있는 제니티아를 쏘아보며 다시 입술을 열었다.
"......어머니."
"오냐, 이 어미 여기 있다."
"이제 만족하시오? 당신 원하는 대로 해줬으니, 내게 지식을 가르쳐줄 차례요!"
하지만 승기가 넘어온 시점에 강하게 밀어붙이지 않는 승부사는 없다. 그리고 그것은 제니티아도 마찬가지였다.
"주. 세. 요."
"음?"
"어허! 감히 어미에게 그 무슨 버르장머리 없는 말투냐? 다시 똑바로! 이 어미에게 공손하게 부탁해 보거라."
- 꽈드득.
뒤이은 제니티아의 '싫음 말고'란 몸짓에, 바리온의 입 안에서 어금니 깨지는 소리가 났다. 그러나 단단히 작정한 그녀가 대충 넘어갈 리 없었다.
"자, 따라 해보거라. 가르쳐 주.세.요. 어.머.니."
"......"
부모의 관대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러나 훌륭한 부모는 자식에게 무한한 포용만 베풀지 않는다.
그들은 필요할 경우엔 언제고 아이의 머리꼭대기 위에 올라앉아, 자식에게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고 바른 행동마저 이끌어내는 위대한 존재들이었다.
"어서!"
"......가, 가르쳐 주... 후우......"
"진짜로 누가 더 손해일지 나랑 끝까지 해보겠느냐?"
연이은 어머니의 꾸중에 아들은 눈까지 질끈 감아야 했다.
"주... 주세요."
"다시. 제대로."
"...가르쳐... 주세요."
"다시!"
"......"
"가.르.쳐. 주.세.요. 어.머.니. 이 몇 마디가 그리 어려운 것이냐?"
"......가... 가르쳐 주세요. 어, 어머니......"
그제야 비로소 제니티아가 환히 웃었다. 그녀는 너무나 기쁜 마음에 미간 뒤틀린 어린 아들을 번쩍 들어 품에 콱하고 안았다.
- 와르르르......
이 덕분에 쌓여있던 책들이 사방으로 무너졌으나, 루카스에게서 패배를 이끌어낸 그녀에겐 조금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옳지, 옳지! 이제야 내 아들답구나! 어쩜 이렇게 예쁘게도 말할까? 오호호호!"
"크으윽......"
아무래도 오늘부턴 제니티아가 아닌 다른 누군가가 피눈물을 왈칵 쏟을 것만 같았다.
- 작가의말
몰랐습니다만 예약연재가 불가능한 시간대(새벽1~5시)가 있었군요.
안타깝지만 6시 15분부터 설정토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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