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퍼드 가의 최종병기 (3) + 내일은 영주님 (1)
"언니야, 그 분 성은 뭐야? 설마 귀족도 아닌 평민?"
"베레니스, 너어!!!"
"이히히힛~, 어쨌든 언니가 망상으로 꾸며낸 허구는 아니라서 참 다행이네. 그쵸~, 엄마?"
"아구구~, 우리 둘째가 날 닮아서 참 지혜로워요~. 오홍홍홍~."
"날 속였어! 이씨, 너무해! "
둘째의 기지로 격노상태가 해제된 이자벨은, 동생의 배신에 부들부들 떠는 첫째를 조곤조곤 압박했다.
"됐고. 어차피 딱 걸린 김에 나머지도 다 털어놔."
"......"
"에잇, 빨랑 말 안 해?! 내가 여기저기 막 들쑤시면서 따로 알아보길 원하는 거니?!"
"...칫, 알았어요! 그 대신 어디가서 말씀하지나 마세요. 야, 니들도 마찬가지야. 알았어?!"
"걱정마, 언니."
"응! 큰 누나!"
이름이 공개된 이상 차라리 그녀가 알고 있는 정보를 얌전히 가족들과 공유하는 편이 현명한 처사이긴 했다.
- 속닥속닥.
그렇게 지난 헤트만 흐나파스에서의 정령왕 난동사건은 청중들의 고막을 신선하게 어루만져 줬다.
"어멈머머! 어쩜, 세상에!"
"헐?! 진짜? 그래서?"
"우왕! 누나 그거 정말이야?"
물론 콩깎지 씐 엘로디의 뇌내에서 크게 변질된 장면도 일부 있었지만, 어느 용맹한 전사가 봉인 풀린 정령왕을 무자비하게 패퇴시킨 동화 같은 이야기는 매우 놀라운 것이었다.
게다가 이것은 불과 얼마 전에 일어난 실제 사건이었으므로, 강자지존이란 사상에 찌든 헬퍼드 가문 혈통들의 심장이 마구 날뛰는 건 당연지사라 하겠다.
"그때 루카스 님께서 정령왕을 때려눕혔다는 사실을 정확히 아는 사람은 손에 꼽혀요. 당시 흐나파스 마법사연맹 지부의 인원들마저도 디마우스 님과 레플로 지부장님이 요정족 정예들과 손을 잡고 간신히 물리친 걸로 알고 있죠."
“아, 그래서 극비로...”
여기에 신비한 요정족들까지 루카스를 꼬드기기 위해 혈안이 됐다는 정보까지 덧붙고나자, 다른 가족들도 폐하의 결정에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미안하구나, 엘로디. 이 어미가 지나치게 날카로웠구나. 우리 리처드, 아니 폐하께서 함구령을 내릴만 했네. 그만한 무력을 지닌 사람이라면 최대한 늦게 알려지도록 조치해야 마땅하지."
"네. 근데 디마우스 님께선 이것말고도 중요한 뭔가를 더 알고 계신 모양인데, 선을 확실하게 딱 긋곤 일언반구도 안 하고 계세요. 심지어 폐하께서 직접 추궁하셨는데도 말이죠."
"어머, 그러니? 그건 상당히 의외인데?"
"본인의 마나를 걸고 서약한 게 있어서 말하고 싶어도 못한다며 루카스 님께 허락 받을 때까지 봐달라고 이야기한 걸 제가 바로 곁에서 똑똑히 들었어요."
“목숨보다 중요한 마나서약까지?”
이자벨은 같은 마법사로서 느끼는 무게가 남달랐다. 그러나 지금은 공작가문의 안주인이자 엘로디의 어머니로서 집중해야할 요소가 따로 있었다.
"그 정도로 강력한 무력을 지닌 실력자라... 흠, 어디 이름난 귀족은 아니지만 그리 나쁘진 않네. 거기에 디마우스 님까지 나서서 보증할 정도면, 성정도 그리 괴팍하진 않을 거 같고... 그래, 그러니까 다시 짧게 요약하면 그런 인물이 우리 예비사위라~ 이거지?"
이자벨이 머릿속 저울질을 흡족하게 끝마친 그때. 루카스의 활약상을 듣는 동안 추임새 외엔 잠자코 있던 베레니스가 돌연 훅 치고 들어왔다.
"으흐흐흥~, 그래서 언니는 그 예비형부랑 어디까지 간 거야?"
"...야... 이이... 야!!! 쬐, 쬐끔한 게 모, 못하는 소리가 없어! 여기 로저랑 엄마도 계시거든?!"
"큰 누나, 어디까지 간다는 게 뭐얌?"
"너, 넌 아직 몰라도 되는 거야, 로저. 나, 나중에 더 크면 자, 자연스럽게 배우는..."
이자벨과 베레니스는 당황하여 말 더듬는 엘로디의 모양새만 봐도 대략의 견적을 뽑을 수 있었다.
"너... 설마?! 짝사랑이었니?"
"피이, 뭐야~. 완전 어이없어! 언니가 '아자니(Adjani)' 백작가문 같은 명문의 혼담도 단칼에 거절하길래, 난 또 갈 데까지 간 줄 알았잖아?!"
"...나, 나는 좋아하는 사람이 생겼다고만 했지... 연인이라고는 안 했었어..."
"에이, 퉤퉤퉤! 텄네, 텄어!"
"......"
알 거 다 아는 모녀와 달리 순진하기 짝이 없는 막내는, 다채로운 변화를 일으킨 엘로디의 얼굴색을 가리키며 고개를 모로 꼬았다.
"엄마! 큰 누나 얼굴이 막 빨개요! 감기 걸렸나 봐요?!"
"오호호호, 아들~. 이건 병이 병인데 감기랑은 조금 다른 거란다."
"예? 무슨 병인데요?"
"그게 뭐냐 하면 상사ㅂ..."
"아, 엄마아-!!! 동생 앞에서 창피하게 진짜!"
“호호홋!”
비밀이 한꺼풀 벗겨지고 난 가족 간 분위기는 다시금 이전과 같이 푸근해졌다. 그러나 결례를 무릎쓰고 식당으로 들이친 저택경비대의 당직자에 의해 그것이 오래 지속되진 못했다.
- 처저적, 처적.
"#@@##!@%&!"
이자벨은 부복한 상태로 목청껏 사죄올리는 경비대원을 손짓으로 일으키곤, 방음 마법을 즉시 거뒀다.
"미안해요. 결계 때문에 무슨 말인지 못 들었네요. 자, 다시 이야기해보세요."
"방해드려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급한 안건이면 당연히 그럴 수 있는 거죠. 그보다 무슨 일이죠?"
"예! 헤트만에서 개별 통신이 하나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제가 판단할 내용은 아니라서 이렇듯 보고드립니다!"
"어떤 내용이죠?"
"먼저 발신자는 헤트만 마법사연맹 인디나 지부의 지부장입니다. 내용을 짧게 요약 드리오면 '헬퍼드 가의 도움 덕분에 지부소속 마법사가 무사할 수 있었다. 그에 대해 깊은 감사를 전한다.'는 겁니다만..."
이자벨은 보고자의 의도가 뭔지 대략 이해했다는 고갯짓을 하며 그의 말을 적당히 끊었다.
"그렇군요. 내가 알기에도 현재 헤트만에 파견중인 우리 가문의 일원은 따로 없으니까."
"옙! 아직 통신을 종료하지 않았으니, 즉시 더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래요, 가급적 모든 걸 알아오세요. 감히 우리 헬퍼드 가문을 사칭하고 다니는 놈을 계속 방치할 순 없죠."
"옛! 가능하다면 몽타주까지 만들어보겠습니다!"
"호호호, 일처리가 깔끔해서 마음에 드는군요. 좋아요, 금일 당직자 전원에게 특별상여금을 하사할 것이니, 그렇게 알고 오늘 근무자들에게 전파토록 하세요."
"가, 감사합니다!"
입이 귓가에 걸린 보고자는 그대로 쏜살같이 튀어나가더니, 이자벨이 후식을 미처 다 먹기도 전에 종이 몇 장을 가지고 되돌아왔다.
“여기 몽타주입니다!”
당직자의 혼이 서린 그림이 펼쳐지자, 호기심에 이자벨 옆에서 곁눈질하던 엘로디의 동공이 놀란 올빼미처럼 확장됐다.
"...뜹?! 콜록, 콜록!"
"얘, 괜찮니?”
그녀는 어머니의 걱정에 이렇다할 대꾸도 없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뛰었다.
”어어? 얘, 얘! 갑자기 어딜 가니?"
잠시후 이자벨의 특명을 받잡고 서둘러 움직인 베레니스가, 엘로디의 침실 방문을 힘차게 열어젖혔다.
- 들컥. 끼이익.
"언니이-! 엄마께서 걱정하시잖아! 무슨 일인데 갑자기 방에 틀어박혀서 뭐ㅎ..."
온통 난장판이 된 방안 꼴도 대단했지만, 여행보따리를 꾸리며 혼잣말을 되내는 엘로디의 모습은, 순간적으로 베레니스의 말문이 턱 막혔을 만큼 더 가관이었다.
"아아! 이것은 필연적인 운명!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루카스 님! 제가 곧 갑니다~!"
당황한 베레니스는 엘로디를 제어할 수 있는 이자벨을 목놓아 부르며 달렸다.
"엄마아아-! 엘로디 언니가 완전 미쳤어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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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일은 영주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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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동에 이끌린 엘로디의 돌발행동이 이자벨에 의해 저지 당하고, 다음날 국왕 알현 후 돌아온 가주에 명에 따라 그녀의 호위 적임자들이 선별되고 있던 바로 그 시각.
"내려라, 천천히."
루카스는 알푸샤리카 제후령의 중심지이자, 그 제후 본인이 상주하는 성읍 '디그자이나(Diggzaina)'의 입구 앞에서 살벌한 인상을 쓰고 있었다.
보다 정확하게는 외성 가장자리의 검문대 앞이었다.
"더 천천히 내려라. 한 번에 한 명씩이다. 어이, 너! 넌 특별히 경고다. 또 한 번 수작부리면 손가락 남은 거 전부 자른다."
“힉!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이러한 압박은 그의 일행인 개러스나 알쿤다 자매를 향하고 있지는 않았다.
“히야~.”
이 풍경을 재미나게 구경중인 검문대 병사들의 말따나, 화물운송용 짐마차에서 하나둘 짝지어 내려오는 인원이 10명은 족히 넘어가고 있었다.
"거 떼거지로 많이도 잡아오셨네."
"선배님, 요즘 우리 제후령의 치안 상태가 그렇게 많이 안 좋습니까?"
"에이, 설마 그럴 리가... 응? 그러고보니 이상하네. 어떤 미친 놈들이길래 제후령 근처에서 강도짓을 한 거지?"
순간적으로 많은 의구심이 일어났으나, 마차 짐칸에서 끊임 없이 기어나오는 인간들을 구경하는 와중에 후르륵 증발됐다.
"캬~, 다 태운 게 용하다, 용해."
"으웩~, 오물 냄새도 심하지 말입니다. 장난질 못하게 틈도 안 주고 완전 빡빡 꾸겨넣었나 봅니다."
"어후, 이따가 네가 알아서 감옥에 인계해라. 난 도저히 같이 못 가겠다."
"에이~, 저 혼자서 뭘 어쩝니까? 선배님도 같이 가주셔야지 말임돠."
"이 새끼가 빠져가지고! 임마, 내가 니 짬밥 땐 50명도 끄떡 없었어!"
"프흐흐, 제겐 선배님과 같은 뛰어난 재주가 없지 말입니다~."
"아~, 이 짜식이 말이나 못하면..."
현재 루카스 일행이 끌고온 마차 크기를 감안하면, 사람을 '태웠다'가 아니라 '적재시켰다'라고 해야 옳았다.
게다가 쇠사슬에 엮인 사람들의 몰골도 남녀불문 말이 아니었다. 한 명 한 명이 모두 성인이건만 하등의 차별도 없었다.
입에 재갈 물린 사람, 손가락이 8개 미만인 사람, 한 쪽 눈이 없는 사람, 큰 화상을 입은 사람, 치아가 몇 개 안 남은 사람 등등.
공통적으로 속옷차림에 두 다리만 멀쩡하다는 점을 제외하면, 각양각색의 볼품없는 모양새는 실로 평등한 대우의 표본이었다.
"엥? 저게 다?! 정말이십니까, 개러스 님?"
"하하, 예, 그렇습니다. 안 믿기시겠지만 틀림 없는 사실입니다."
근무자들은 개러스의 친절한 설명을 쉬이 받아들이지 못했다.
"저게 무리 중에 우두머리 한 놈씩만 잡아온 거라굽쇼? ...저 숫자가 전부?"
"예, 예. 맞습니다. 밤에 여관방을 급습하거나, 음식에 독을 타거나... 뭐 산적으로 위장하는 것따윈 아주 예삿일이더군요. 덕분에 옛 성인들이 말씀하시던 ‘가시밭길’이란 게 어떤 건지를 온몸으로 체험한 것 같습니다. 하하하."
"...어... 저... 일단... 이 서류 좀 작성 부탁드립니다."
"넵, 그러지요."
선임병사는 제후께 중요한 뭔가를 꼭 보고해야 한다는 개러스에게 면담신청서를 한 장 건네주곤, 짐마차에서 내린 스물 세 명의 현행범들을 한 명씩 자세히 훑었다.
'암만 봐도 수배명단에선 본 적 없는 얼굴들인데... 이거 순전히 허풍 아냐? 쯧, 아니다. 판결을 내가 하냐~, 윗대가리님들이 하시겠지~. 나야 후딱 보고하고 위로 넘기면 거기서 땡인 것을!'
선임병은 개러스로부터 다시 돌려받은 신청서의 몇몇 주요 항목들만 대충 확인하며 말했다.
"곧 접수증을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큰 기대는 마십쇼."
"예, 익히 알고 있습니다. 저 같은 하급 관리자는 기본 열흘은 대기타야겠지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요즘 이상한 일들이 각지에서 심심찮게 보고되는 터라, 단순히 면담여부 결정조차 시일이 얼마나 걸릴지 장담 못 합니다."
"허어... 운이 많이 따라주길 바래야 겠군요."
"차라리 면담요청사유를 구체적으로 기입하시는 편이..."
"하하, 저도 그러고 싶습니다만... 워낙 보안을 요하는 사안인지라..."
"예, 그렇다고 하시면야 어쩔 수 없지요. 돌아가셔서 기다리고 계시면 차후 신청서에 기재된 여관으로 연락이 갈 겁니다. 혹 중간에 머무시는 장소가 바뀌면 꼭 다시 오셔서 알려주셔야 합니다."
"예예, 잘 좀 부탁드립니다."
- 짤그락.
"커흠흠, 뭐 이럴 걸 다... 하하핫."
개러스는 소은화 몇 푼을 선임병사에게 찔러주곤 한적해진 마차 위로 올랐다. 그리곤 어느샌가 루카스의 옆구리를 떡하니 꿰차고 있는 나디아를 향해 물었다.
"저기 신녀님, 제가 7일 안에 저희 제후님과의 개인면담이 가능하겠습니까?"
- 끄덕끄덕, 쫘~악~.
베시시 웃는 나디아가 그의 눈앞으로 펼친 손가락은 총 9개. 이 도시까지 오는 여정 속에서 그녀에 대한 믿음이 한층 더 신실해진 개러스는, 나디아가 알려준 이 90%란 확률을 추호도 의심치 않았다.
그리고 그가 실제로 맞이한 현실도 그러했다.
"뭣이?! 뭐가 어쩌고 어째?!!!"
알푸샤리카 제후의 입에선 개러스란 이름이 언급된 것은, 신청서가 접수된지 겨우 3일만이었다.
"야간 병력 중 180여 명이 수감 중인 스무 명 남짓의 죄수들에 의해 피살?! 심지어 무기고 일부도 털려?! 아니! 상황이 이 지경인데도 내 앞에서 기껏한다는 변명이 현상금 이력 없는 초범들이라서 방심을 한 거다?!"
전날 밤의 끔찍한 탈옥사건 소식을 접한 알푸샤리카가 뒷목을 부여잡으며 대노했다.
"이 무능한 밥벌레들 같으니!!!"
"...며, 면목 없습니다, 주군!"
"도시 내의 관료들 전부 집합시켜!"
"고, 고정하시옵소서!"
"뭐어? 고저엉?"
이 순간 그를 말리려는 행위는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꼴이었다.
"내가 지금 고정하게 생겼더냐!!!"
- 쨍그랑-!
"앗! 요, 용서를!"
손에 든 술잔과 집기 몇 개를 집어던지고도 화가 덜 풀린 알푸샤리카가 사납게 으르릉 거렸다.
"그 입 닥치고 지금 당장 마법사연맹에게 협력요청해서 범인들 추격해! 단 한 놈이라도 놓치면, 너흴 죄다 참수형에 처할 것이다!!!"
"며, 명을 받드옵니다-!"
"그리고 이 서류에 적힌 개러스란 놈도 당장 데려와!!!"
"옛-!"
제후 곁에 상시 대기중인 시종들의 증언에 의하면, 알푸샤라카가 길길이 날뛰는 모습은 마치 좀도둑에게 둥지 털려 자존심에 흠집난 용을 보는 듯 했다고 한다.
- 작가의말
부끄럽게도... 저만 즐기는 작품이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나마 나라도 내 글을 사랑하니까 다행...이라고 위안 삼아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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