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벌적 윤회 (4)
* * * * *
둘 만의 비행여정은 헤트만의 수도 내에 마련된 오드노아 임시 대사관에 도착과 함께 일단락됐다. 다행히도 폴라의 이야깃거리가 다 소진되기 전이었다.
“푹 쉬고 있어라, 리켄페나.”
“끼르으으~.”
“그래, 그래. 나도 아쉽다. 조만간 또 보자.”
익룡의 고삐를 대사관측 조련사에게 넘겨준 루카스는 폴라의 서류작업이 끝나길 잠시 기다렸다가 그녀와 함께 이동했다.
“루카스 님께선 동물을 무척 좋아하시나 봐요. 익룡과의 교감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다 그렇진 않다. 나는 오직 충성심 강한 부류만 선호한다.”
“혹시 고양이보다 강아지파?”
“고양이는 개냥이가 아니면 일절 취급 안 한다.”
“대단히 편파적이시네요?”
“훗, 개인취향이다. 난 주인의 머리 꼭대기에 앉으려는 애완동물은 사양한다. 게다가 마족에게 평등을 기대한 자체가 잘못이다.”
“되게 억지스러운데... 묘하게 수긍되는 논리네요.”
“아, 그나저나 이 다음부턴 뭐로 이동하게 되지?”
“에... 일단은 사막 경계까진 말을 타고 이동하려 합니다. 이후로 이용할 낙타는 리스베트가 책임지고 마련해두기로 이야기 됐어요. 여기 정밀지도입니다.”
지도에 표기된 경로와 예상소요 일정을 살펴본 루카스는 고개를 만족스럽게 끄덕였다. 다른 건 몰라도 폴라의 꼼꼼한 준비성과 일처리만큼은 그조차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좋군. 마음에 들었다. 수고했다.”
“감사합니다.”
“그럼 내일 아침 든든히 먹고 출발토록 하지.”
“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세상만사가 계획한대로만 흘러가진 않았다. 다음날 해 뜨기가 무섭게 응급환자 십수 명이 대사관 내부로 쏟아진 탓이었다.
“모두 물러나십시오!”
”다들 비켜서세요! 하나같이 위중한 상태입니다!”
루카스도 이 소란을 신경쓸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줄줄이 실려나가는 환자들이 전부 폴라의 동료들이기 때문이었다.
“맙소사! 알랭 단장님! 앗! 리스베트!
“끄으으으...”
”...포, 폴라... 서, 선배에...”
“정신 차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으으으으....”
리스베트의 답변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 역시도 지원 나온 인력들에 의해 급하게 옮겨진 까닭이었다. 때문에 루카스의 일정은 자연스레 연기됐다.
“출발 미룬다. 너는 네 전우들의 곁을 지켜라.”
“...감사해요.”
대사관에 주둔하던 인력만으론 감당되지 않아 메디오스페라에서 전문의료진이 급파됐을 정도로 환자들의 상태가 심각했다.
게다가 현 오드노아 최강자인 알랭 단장이 중상을 입은 경우인지라, 그에 따른 후속조치를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도 못 잡고 있었다.
“폴라, 너희 상부에선 네게 뭐라고 했나?”
“정황상 비스마우어 일족의 소행이 유력해 보이긴 하나, 원인도 파악 못한 상태에서 무턱대고 움직일 순 없다고... 병력지원은 신속히 이뤄질 것이나 동료들이 의식을 되찾을 때까지 무한정 대기하라 합니다.”
“흠, 장로 둘이 임무 중 사망한 영향이 큰가 보군.”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이미 사흘이나 지체됐으나 오드노아 지도부의 대처 자체가 잘못되진 않았으므로, 루카스는 이 불편한 현재 상황을 잠자코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러던 그때에 뜻밖의 인물, 일정상 아직 타미아르 왕족의 사탕발림에 시달리고 있어야 할 주소걸이 오드노아 대사관을 방문하여 루카스를 찾았다.
“허허허, 이렇게 또 뵙게 되는구려. 반갑소이다, 루카스 경.”
“난 거짓말로도 그대가 반갑다곤 못하겠다. 그보다 어쩐 일이지?”
“껄껄껄~, 좋은 말씀을 나누려 왔소이다~.”
“안 산다.”
“허허, 그리 과민하게 굴지 마시고 한 번 들어나 보오~. 지금 어딜 가도 이만한 정보는 못 듣소이다~. 참고로 나 역시 적잖이 놀란 내용이었다오!”
“......”
주소걸의 호언장담대로 아드퍼드로스가 선뜻 공유해온 정보는 무척이나 비밀스럽긴 했다.
“영역을 침범 당한 게 무척 언짢았던 괴물이 저들을 데리고 놀았던 게요. 그나마 내기에서 패했기에 약속대로 목숨만은 살려서 보내준 거고.”
“괴물?”
“아, 그렇다고 진짜 흉측하게 생긴 괴물은 아니고, 그냥 괴물 같은 인간이라오. 이 나조차도 승부를 장담할 수 없다 하면 대충 이해가 되시겠소이까?”
“그런 자가 딜레-둠브라의 배후에 있다라...”
부상을 입은 1급 투사 알랭 단장에 대해 절로 납득되는 해명이었으나, 이것도 이거대로 충격이긴 했다.
“그건 많이 놀랍다. 그대와 비등한 실력의 필멸자는 전혀 예상 못했다.”
“하하하, 보통 필멸자는 아니오! 나와 처지가 비슷한 경우이니까.”
“음? 혹시 정령왕의 봉인을 훼손한 자인가?”
“맞소이다! 성명 ‘항사룡(港仕龍)’. 그는 여신 숄라네이사를 포함한 일곱 천신의 사도이외다~.”
“...그랬군.”
“아울러 여신 이프리티아께서 과거 이 땅에 소환했던 2명의 영웅 중 한 명이기도 하다오.”
“?”
미적지근했던 루카스의 표정이 호기심으로 물들었다. 로비샤가 연관된 만큼 그의 관심이 지대해진 탓이었다.
“부디 자세히 듣고 싶다.”
“흐흐흐, 좀 전엔 안 산다고 하지 않으셨소?”
“아, 내가 경솔했다. 깊이 사과한다.”
“거 맺고 끊음이 시원시원하시구려! 껄껄껄, 좋소! 내가 들은 걸 전부 알려드리리다! 항사룡은 본디 염라국에서 단단히 별렀을 정도로 잔인 무도한 죄인이었다 하오.”
죗값을 혹독하게 치러야 할 미래가 확정됐던 그를 찾아와 구원의 손을 내민 이가 바로 여신 이프리티아였다.
“무고한 생명을 살리는 일에 동참하여 형량을 줄일 수 있도록 기회를 주셨던 게요. 아무리 환골탈태한 그가 장생한다고 해도 언젠가는 끝이 오는 법. 선행에 지극정성을 다하면 언젠가 우화등선하는 일도 개꿈은 아니란 여신의 설득과 제안에 혹해서 이 땅으로 넘어온 것이라 하더이다.”
그러나 선계의 최고신들이 그녀의 지나친 차원간섭 행위를 묵과하지 않기로 최종 결의하면서부터 문제가 생겼다.
이번 일을 본보기로 삼겠다는 논조에서 내려진 형벌이 그녀와 계약한 소환자들에게까지 미쳐버렸던 것이다.
“여신께오서 본인의 계약자들에 대한 선처를 간절히 호소하셨으나... 겨우 30여 년정도만 찔끔 탕감해줬을 뿐, 끝끝내 면책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하오. 하여 끊임없이 윤회를 거듭하는 처벌을 그들도 똑같이 겪어야 했다 하더이다.”
“크흠...”
형벌에 의한 윤회는 평범한 환생과는 거리가 아주 멀었다. 선천적 장애와 결함을 달고 태어나는 ‘X랄 같은 삶’이 보통이었고, 뭐로 태어나든 ‘업원(業冤, 전생의 죄로 현세의 괴로움을 받음.)’이란 사전적 의미 그대로의 나날을 감내해야 했다.
“그렇게 미생물부터 곤충과 짐승을 거쳐 드디어 인간에 이르기까지, 무려 3천 년이나 고통을 받았던 거외다.”
“음, 여기까진 이해했다. 잘 설명해줘서 고맙다. 그런데...”
루카스는 지난 이야기와 현재 상황과의 연결점이 보이지 않는 고로 부득불 질문해야만 했다.
“그가 어떻게 일곱 천신의 사도가 된 거지?”
“그야 당연히 일곱 신들께서 간택했기 때문이 아니겠소이까?”
“?”
마야키니를 포함한 일곱 천신이 초월자 라호나바스를 상대하기 위해 사용한 편법은 ‘일곱 쌍둥이’였다. 태중의 일곱 쌍둥이에게 권능을 각각 부여한 뒤, 선별된 한 명을 제외한 나머지의 태아를 순차적으로 강제 유산시킴으로써 6개의 권능을 남은 한 명에게로 이양시키는 꼼수를 쓴 것이다.
“편법도 좋고, 몰빵도 좋고, 다 좋았는데 이 방식에는 한 가지 큰 난관이 있었소.”
“음, 그 중첩된 권능을 견딜만한 그릇이 마땅찮았겠군.”
“오오, 정확하시오! 과연!”
일곱 신의 권능과 힘을 오롯이 다 감당할 수 있는 그릇을 물색하던 천신들은, 윤회의 형벌을 끝마치고 몇 가지 선택의 기로에 놓여있던 항사룡에게서 희망을 찾았다.
“근데 마법사도 한 명 있지 않았나?”
“아, 그 양반은 제안을 거절하고 자신이 본래 속한 영역으로의 환생을 택했다 하오. 다시는 천신들과 엮이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외다.”
“...납득했다.”
두 번 속느니 차라리 무던한 다음 생을 기약한 것이리라. 약 3천 년동안 ‘착하게 살자’란 교훈을 영혼 속 깊이 때려 박았으면, 이전의 기억이 말소된 채로 환생한다 해도 악인의 길을 걷지 않을 가능성이 농후할 테니까 말이다.
어쨌든 일곱 천신들은 적당한 사탕발림으로 항사룡의 회유에 성공했다고 믿었었다. 그러나 그것은 지난 수천 년간 누적된 그의 복수심을 얕잡아본 실책이었다.
대대적으로 축복받은 신체로 다시 태어난 항사룡은 20년 넘게 묵묵히 힘을 기르며 순종했다. 뒤로는 계약의 허점을 찾아 일곱 천신들을 제대로 물 먹일 방법을 강구하면서 말이다.
이후 천신들의 지시사항을 대충 혹은 의도적으로 지나치게 마무리한 그는, 라호나바스와의 결전을 치르기 직전까지 남은 시간을 제멋대로 활용키로 했다.
‘이제 때가 됐다!’
당연히 일곱 천신들은 그 꼴을 그냥 놔둘 리 없었고, 애초부터 보복이 목적이었던 항사룡은 그것에 완강히 저항했다.
천신들은 갖은 수단을 강구했지만 뾰족한 해결책이 없었다. 힘으로 찍어 누르기엔 항사룡의 무력은 이미 반신 이상이었고, 또 그가 협의된 조항을 딱히 어긴 것도 아니었던 터라 계약위반시의 강제력도 발동되지 않았던 것이다.
“때문에 천신들께서 부랴부랴 권능들을 속히 회수하셨으되...”
“그 육신 자체에 부여된 것들은 그대로 남아있겠군.”
“그렇소이다. 지금의 그는 초월자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라 하셨소. 아마 모르긴 몰라도 선계의 허용규격 이상으로 창조된 내 육체에 비견될 게요.”
루카스는 주소걸의 어투에서 심하게 격앙된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내가 잘못 느낀 건가? 그대는 무척 기대하고 있다, 그와의 만남을.”
“허허허, 잘 보셨소.. 솔직히 그와 붙어보고 싶어서 애간장이 닳았소이다. 나와 비슷한 세계의 인물인데다가, ‘천마’라는 아주 오만한 별호를 지닌 무인이라 하니, 오히려 내 심장이 안 뛰면 그게 비정상 아니겠소이까?”
사람 좋게 웃어 보인 주소걸은 본론을 조심조심 꺼냈다.
“해서 말인데...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 일은 내게 우선적으로 맡겨주셨으면 하외다.”
“과한 친절의 이유가 바로 그거였나?”
“에이~, 본인들의 실수를 본인들 선에서 마무리 지으려는 거 아니겠소? 덕분에 나도 사심을 좀 채우고 말이오, 으허허허헛!”
루카스의 촉은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은 중요한 사실이 있음을 감지했다.
“그만 웃고, 속에 숨기고 있는 거나 마저 털어라. 너와 아드퍼드로스의 친절엔 내가 무조건 개입할 거란 전제가 깔려 있다.”
“커흠... 보기보다 예리... 흠흠! 암튼 항사룡이 규모가 큰 왈패조직을 접수한 목적이 좀 거시기한데... 그으... 이걸 뭐라고 풀어서 설명해야 하나...”
앞뒤 정황상 주소걸이 대답을 망설이는 이유를 루카스도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설마... 이프리티아를 노리는 건가?”
“...크흠, 그렇소. 보다 정확하게는 왈패들을 시켜 필멸자로 태어난 여신을 찾고 있다 하오. 여신에게 부과된 형량이 아직 남았다는 사실이야 그가 제일 잘 알고 있었으니 말이외다.”
“필멸자가? 그건 불가능할 텐데?”
부아가 치밀기에 앞서 의문부터 드는 루카스였다. 신격도 잃고 선계의 기억마저 봉인된 상태로 윤회한 여신을, 그것도 별 볼 일 없는 필멸자가 무슨 수로 찾아낼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악의적으로 창의적인 인간에게 한계란 없었다. 현실의 냉혹한 장벽에 부딪친 항사룡이 결국 비인간적인 차선책으로 눈을 돌린 것이다.
“그래서 모든 가능성을 죄다 없애기로 작정했다 하더이다.”
“?”
“이 땅의 인간 중 태생적으로 기형이거나 불치병을 앓는 20세 이상 25세 미만의 여인을 찾아 다 죽이려는 모양이오.“
“......”
“벌써 일주일 만에 넷이나 납치하여 끔찍하게 살해했소. 아마도 이렇게 서방 대륙의 온 나라를 다 뒤지고 나면, 곧장 동방 대륙으로 넘어가 잔혹한 참살을 이어나갈 심산 같소이다.”
세상의 모든 가능성을 제거하여 본인의 원한을 풀겠다란, 그야말로 정신 나간 불굴의 집착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하면 아주 불가능하지도 않았다. 비정상인에게 불친절한 현 시대의 습성과 생태를 고려하면, 몸이 불편하게 태어난 자가 성인이 되는 비율은 현저히 떨어지기 때문이었다.
또한 동네에서 이름난 바보나 불치병 환자라고 해봐야 큰 마을에서도 대개 한두 명에 그쳤고, 여기에 젊은 20대 여성이란 단서까지 덧붙이면 지방단위로 따져도 몇 명 내외일 것이 분명했다.
더군다나 이들에 관한 개인정보는 민감도가 매우 낮은 편이라, 큰 수고를 들이지 않아도 정보획득이 가능하다는 장점 역시 한 몫 거들어줄 것이다.
“후우...”
깊은 한숨으로 마음을 다스린 루카스의 시선이 주소걸에게 닿았다.
“좋다. 너희가 처리하고 싶다면 굳이 말리진 않겠다. 내가 먼저 너흴 방해하는 일은 없을 거다.”
“양보해줘서 고맙소이다.”
“오해마라. 이건 양보가 아니다.”
그는 경계선을 정확히 그었다.
”무조건 빨리 해결하는 게 좋을 거다. 만약 그 미친 놈이 내 눈에 먼저 띄면, 나는 지체 없이 손을 쓸 거다.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했나?”
“감사하오, 그 조건으로 만족하리다.”
“잘 가라. 유용한 정보는 고마웠다.”
“음? 어디 가시오?”
복잡하게 뭉쳐진 감정들이 루카스의 얼굴 위로 얼룩졌다.
“한동안 계속 외면하던 곳으로 향한다. 난 너희가 이 일을 끝낼 때까지 그곳에 머물 꺼다.”
“?”
주소걸 머리 위에 떠오른 느낌표가 순식간에 물음표로 바뀌는 모양새로 봐선, 아드퍼드로스가 로비샤에 대해선 아직 그에게 알려주지 않은 것 같았다.
그렇다고 그것을 친근하게 설명해줄 의리는 없었던 고로, 루카스는 그저 면담시간이 종료됐음만을 선언했다.
“대화는 여기까지다. 그 미친 놈을 수습하고 나면 이곳의 요정족을 통해 소식 전해주길 바란다.”
“음, 알겠소. 내 반드시 그리하리다.”
뒤돌아선 루카스의 발걸음이 초조했다. 딜레-둠브라의 본거지인 시토 사막이 헤트만 영역 내에 있는 만큼, 근시일 내에 로비샤가 항사룡의 목표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아서였다.
그는 로비샤의 근처에 얼씬거리지 않으리라 했었던 다짐을 돌이켜야 했다.
‘미안합니다, 아리사엘 님. 그녀의 고통스런 윤회는 이번 생에서 마무리되어야 합니다.’
지금 이 상황을 두고 뜨악할 아리사엘이 내심 염려됐지만 별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고, 그의 예상처럼 이것을 관찰하던 아리사엘은 즉시 바닥에 드러누웠다.
“에이씨! 나 안 해!!!”
- 작가의말
격리 끝나고 정상출근인데...
아... 너무 힘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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