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령과 악령의 상관관계 (2)
바위계곡 사이로 벌겋게 치솟은 몇 가닥의 화염.
이때 포탄처럼 하늘로 치솟은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실제로도 때 아닌 불구경하던 사람들은 루카스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저, 저게 괴수여, 사람이여?!”
어느 산적의 말마따나 집이 최소 4m는 너끈해 봬는 흑곰을 루카스가 공중에서 걷어차는 광경은 누가 봐도 확실히 기이했다.
- 뻐걱!
“꾸허엉!”
얻어맞아 추락하는 괴수에게서 새어나온 울음소리는 다분히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땅에 떨어지자마자 몸을 곧장 추스르는 흑곰의 재빠른 몸놀림만 봐도, 방금 전의 충격량은 아주 치명적이진 않은 듯 싶었다.
“크항-!”
반격의 의지를 굳게 다진 흑곰이 몸을 움크렸다. 이제 막 낙하하기 시작한 루카스가 적당한 사정거리에 들어오면 지면을 박찰 기세였다.
그러나 그에 앞서 루카스의 측면을 노리고 솟구치는 괴수가 있었다.
- 다다다다닷, 파앗!
덩치가 흑곰에 전혀 꿀리지 않는 늑대 괴수였으나, 멀리서 지켜보는 관찰자의 입장에선 주인이 하늘로 멀리 던진 장난감을 야무지게 낚아채려는 사냥개의 모습으로 비춰졌다.
“크와아아앙!”
그렇게 얽히고 섥혀 덩어리진 사람과 짐승이 중력에 따라 산비탈로 강하했다. 그래도 엘로디와 같이 그 광경에 집중한 사람이라면, 지면 충돌 직전에 옴짝달싹 못하게 된 건 오히려 늑대의 목덜미란 사실을 알아챌 수 있을 터였다.
- 와지끈!
“케헹-!”
애꿎은 몇 그루의 나무줄기가 뚜둑하고 요절이 났다. 하지만 놀랍게도 싸움은 끝이 아닌 시작이었다. 겨우 이 정도 타격은 우습다는 듯 용수철처럼 팍하고 튀어오른 늑대와, 이때만을 기다린 흑곰이 서로 연계하여 루카스에게 달려들었던 것이다.
“크하앙-!”
“아과과과곽!”
루카스와 괴수 두 마리의 난타전은 구경꾼들로 하여금 손에 땀을 쥘 정도였다. 그러나 최근 루카스 덕에 돌아가신 조상님과 덕담을 나눴던 엘로디는 머리 위로 물음표를 큼직하게 띄웠다.
"어, 어째서 저 남자는 프라나를 직접적인 공격에 사용하지 않는 거야? 나한텐 잘만 휘둘렀었잖아?!"
베스퍼 또한 엘로디와 동일한 의문을 품었었는데, 다행히 메토와 레이첼이 선뜻 나서서 가설을 제시했다.
"음... 제 생각엔 루카스 형님께서 자제하시는 것처럼 보입니다. 한 마디로 적당히 어울리고 계신 거죠."
"저 역시 같은 의견이에요. 루카스 님은 종속된 괴수의 시청각 정보가 그 주인에게도 공유된다는 사실을 염두하시곤, 일부러 저런 식으로 이목을 집중시키는 걸로 추측돼요."
메토와 레이첼이 내놓은 추론으로 인해 다른 두 사람의 동공이 흔들리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맙소사."
“보통 인물이 아닌 건 알았지만...”
그런 그 때, 고릴라 같이 생긴 대형 괴수 1마리가 싸움에 가세했다.
“크헝!“
“아우우우!“
“우오후오우!“
- 퍽! 퍼억! 퍽! 퍽!
이렇듯 흑마법에 의해 변이된 세 마리의 괴수와 맨몸으로 치고받는 루카스를 물끄러미 지켜보고 있노라면, 인간과 3마리 짐승의 싸움이라기 보단 4마리 맹수들의 영역싸움을 관전하는 느낌이 강했다.
- 땡! 땡! 땡! 땡! 땡!
한편, 이 짐승들의 다툼과는 별개로 바위계곡 전역에 시커멓고 매캐한 화재연기가 시시각각으로 자욱해졌다. 그리고 여러 사람의 목소리 또한 날카로운 종소리에 섞여 동굴 안으로부터 시끌시끌하게 흘러나왔다.
"침입자다! 침입자!"
"불! 불이야!!!"
"ㅆ발! 다 깨워! 깨우라고! 연기 마시고 뒤지기 싫으면 일어나라고 해!"
- 퍼, 펑!
"야! 부, 불부터 꺼! 침입자는 괴물들에게 맡기고 불부터 잡아! 자칫 폭약에 옮겨 붙으면 우리 아주 그냥 다 ㅈ되는 거야!!!"
도저히 대자연의 아침이라곤 생각할 수 없는, 불 타오르는 광경과 뭉그러진 고성이었다. 그리고 이 장면은 멀리서 대기 중이던 루카스의 지인들에겐 누가 뭐래도 차고 넘치는 신호임에 틀림없었다.
"흠흠!"
괜스레 의기양양해진 레이첼은, 싸움구경에 넋을 빼앗긴 엘로디를 향해 마치 자기자랑처럼 어깨를 으쓱했다.
"잘 보셨나요? 어때요? 이게 루카스 님의 신호... 응?"
어째 전신까지 부르르 떠는 엘로디의 전율은, 레이첼을 비롯한 다른 이들의 감탄과 그 궤를 남달리하고 있었다.
"와, 완전!"
"?"
지금 그녀의 눈엔 루카스는 그야말로 순수한 힘의 집합체였다. 그런 그녀의 머릿속에 새겨져 있던 루카스의 이미지가 '자신에게 굴욕을 안겨준 전사'에서, 동경해 마지 않는 ‘이상향’으로 탈바꿈되는 데엔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내 스타일!"
“”"?!!!"””
엘로디의 뜬금없는 탄성에 베스퍼는 흠칫했고, 레이첼은 당혹했으며, 메토는 어이가 없다는 듯이 되물었다.
"뭐, 뭐요, 아가씨?"
"남자가 어쩜 저리도 용맹하고 강인할 수 있을까?! 저 위풍당당함! 너~무~, 멋져!"
“......”
지극히 야생적이고 폭력적인 짐승들의 육탄전에 사로잡힌 엘로디. 그녀의 하롱하롱한 눈빛과 깍지마저 낀 두 손은, 거기서 뭘 더하고 뺄 것도 없이 첫사랑에 빠진 소녀의 눈망울 바로 그 자체를 발하고 있었다.
"아아, 나의 루카스 니임~!"
도대체 어떤 취향에 무슨 콩깍지를 덧씌워야 이같이 기묘한 상승효과를 불러일으킬 수 있을까?
만일 그 원인이 혹시 사랑의 신 큐피트가 부린 잔재주에 있다고 한다면, 그는 엘로디에게 장난감 화살이 아닌 공성용 쇠뇌를 발사체로 쏘아낸 게 틀림 없을 것이다.
"...어후, 환장하겠네."
메토는 어느 샌가 돌변한 루카스의 호칭을 들으며,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지부에 남아서 영주성이나 지키라고 끝까지 뜯어 말렸어야 했는데... 아이고, 루카스 형님을 이제 무슨 낯으로 봐야할런지 원."
"쯧, 그러게요. 괜히 데려왔네요."
"...?"
그가 자신의 혼잣말에 동조하는 목소리에 고개를 문뜩 돌려보니, 그곳엔 몹시 귀찮아졌다는 표정의 레이첼이 엄지손톱을 질근질근 깨물고 있었다.
* * * * *
같은 시각, 흐나파스 영주성 내의 가장 높은 첨탑에선 레플로가 영주와 의견을 나누고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레플로가 끊임없이 인내심을 발휘하는 중이었다.
"레플로 지부장, 그렇다고 마법 장벽까지 가동시킨 일은 너무 과한 처사가 아닐까 싶습니다."
"하하, 웹스터(Webster) 자작님. 거듭 말씀드리지만 이번에 소요된 마나석 비용의 절반은 저희 지부에서 부담할 것입니다. 저희도 이 영지의 보호를 받는 일원이니 당연한 일이지요."
"아아, 아무리 생각해봐도 좀 지나치지 않나~ 싶어서 이야기하는 겁니다. 이건 아주 작정하고 장기간 농성을 벌일 때나 사용하는 방어수단이잖습니까?"
이쯤에서 말을 멈춘 웹스터 자작은 서쪽 창문 근처로 다가가 주변 마을에서 급히 피난 온 행렬을 내려다봤다. 그리곤 자신의 영지 전역에 우산처럼 펼쳐지고 있는 반투명 방벽을 응시하며 다시금 속내를 털었다.
"앞으로 보름 동안 빠져나갈 비용의 절반이면, 자그마치 1년 군역세에 버금가는 금액인데... 후우..."
"자작님, 이렇게 단단히 방비해서 나쁠 게 없습니다. 적어도 지원 병력이 당도할 때까지 이 방벽을 유지하셔야 여러모로 안전합니다."
"허허, 솔직히 지금 재정은 사망이 확인된 병사들의 식솔에게 지급할 위로금마저도 빠듯합니다. 비상사태를 사유로 계속 늦추곤 있긴 하나... 아무래도 이로 인해 다른 병사들의 사기까지 영..."
"하지만 주요 전력이 듬성듬성 빠진 현재로썬 이게 최선의 방책입니다. 먼저 저희 비축분을 가져다 사용하십시오. 추후 정산 시에도 매달 분할청구하여 영지의 재정부담을 최대한 줄이겠습니다."
"커허흐음!"
"하하, 제 마음 같아선 모든 비용을 처리해드리고 싶지만, 아시다시피 이게 제 사유자산이 아닌 지라... 부디 아량을 베풀어주셨으면 합니다."
이렇듯 레플로가 차근차근 설득하고 또 조곤조곤 달래려 노력해도, 웹스터 자작의 뚱한 불만은 좀처럼 사그라들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에잉! 한창 대목인 이 시기에 스스로 고립시키는 수단이 최선이라니... 난 이게 도무지 마음에 들지가 않아요! 게다가 이곳으로의 적습이 확실시된 것도 아닌데 이런 과한 액수를... 어휴~, 올해는 어찌어찌 넘긴다 쳐도 내년엔 또 어떻게 해야할 지......"
있는 놈이 더 하다더니만 웹스터 자작의 앓는 소리가 딱 그 짝이었다.
'아오! 왕비의 친척이고 뭐고 확 엎을까?!'
능글맞은 눈빛의 웹스터 자작의 얕은 노림수가 무엇인지 익히 아는 레플로였다. 하지만 걱정이 이만저만 아닌 그였기에 오늘따라 표정관리가 참 곤혹스러웠다.
'아니다. 아직은 때가 아니야.'
그는 당장이라도 빵 터질 것 같은 육두문자 주머니를 진정시킨 뒤, 웹스터 자작이 처음부터 듣고 싶어하던 말을 해줬다.
"자작님, 이번 일이 해결되고나면 세금 면제에 대한 상소를 올리시지요."
"어이쿠~,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웹스터 자작은 오늘 레플로를 만난 이래 처음으로 반색했다.
"비록 외곽지역 뿐이었으나 몇 개의 마을이 초토화되었고, 거기에 고급 전력의 피해가 막심한 것 또한 사실이니, 향후 3년 간 세금 면제는 충분히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그래도 왕실에서 조사단을 따로 보내어 최종심사가 이뤄질 텐데... 과연 제가 거기에 유연하게 대응을 할 수 있을 런지는..."
"제가 밀접한 관계자로써 왕실조사단에게 의견을 최대한 피력하겠습니다. 만약 '자작님의 덕망'에 힘 입어 저와 안면이 있는 '수코파(Sukopa)' 단장이 직접 파견 나오게 된다면 4년? 아니 운 좋으면 5년 간 세금면제도 가능할 것도 같습니다."
"?!"
레플로의 '니가 연줄로 왕비를 구워삶아 여건을 마련해주면, 나도 적극적으로 떠 먹여주겠다'는 제안은, 자작의 짙은 울상조차 언제 그랬냐는 듯이 돌이켜 춤추게 했다.
"어허허헛! 지부장께서 그렇게까지 각별히 신경써주신다면야, 저도 이제 별 근심 없이 영지의 안전을 위해 전력을 기울일 수 있겠군요! 아하하핫!"
"잘 아시겠지만, 저는 약속을 참으로 잘 지키는 사람입니다."
"예, 제가 잘 알다뿐이겠습니까? 핫핫핫!"
본인이 판만 잘 깔면 재산을 왕창 불릴 수 있는 기회를 획득한 웹스터 자작은, 어느새 내심 민망해졌는지 은근슬쩍 화제를 돌리려 했다.
"흠흠, 혹시 포도주 한 잔 하시겠습니까? 지난번 왕도에 들렸을 적에 왕비께오서 42년산 귀부 와인을 친히 하사하셨..."
- 우웅... 우우웅...
하지만 이들 바로 옆에서 공간이 일부 어그러지는 통에 자작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이, 이게 무슨?!"
"디마우스?"
갑자기 나타난 침입자로 인해 웹스터 자작은 깜짝 놀라 몇 걸음 뒤로 물러난 반면, 레플로는 이 영지에 위기가 닥쳤음을 직감했다.
"누, 누구냐?!!!"
지금까지 문 앞에서 목석처럼 서있던 3명의 호위기사들이 칼을 빼들며 외쳤고, 침입자는 곧장 고개를 숙였다.
"이거 죄송합니다. 너무 긴급한 상황이라서 실례를 무릅썼습니다. 전 디마우스 오하버라 합니다."
"아, 자작님! 이 자를 경계하실 필욘 없습니다. 이번에 절 도와주려고 타미아르에서부터 선뜻 날아온 친구입니다. 공식적으로 7성 마법사이지요."
"...7, 7성?"
고위 마법사들의 위세가 대단하긴 타미아르보다 헤트만이 더 심했다. 당장 대마법사의 분류기점 바로 아래인 6성 마법사 레플로만 해도 국내의 후작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실정이었다.
현실이 이렇다보니 그보다 더 뛰어난 마법사를 두고 웹스터 자작의 눈가가 휘둥그레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모, 모두 칼을 거둬라!"
빠르게 호위기사를 물린 웹스터 자작은 공손한 인사로써 눈도장을 찍으려 했다. 그러나 정작 그 대상인 디마우스는 한시가 급했다.
"영주님, 인사는 나중에 하시고 일단 저길 확인하셔야 합니다!"
"?"
디마우스의 부추김에 이끌려 북쪽 창문으로 자리를 옮긴 웹스터 자작의 눈에 멀리서 몰려오는 먼지구름이 들어왔다.
'저건 또 뭔데?'
이때 눈치 빠른 어느 호위기사 한 명이 망원경을 집어 오만상을 찌푸리던 자작에게 내밀었다.
- 두두두두두...
"뜨헉!"
먼지 속 까만 점들은 지난번 모건이라는 생존자의 기억파편에서 확인했던 괴수들을 닮아 있었다. 심지어 눈대중으로 적당히 셀 수 있는 숫자도 아니었다.
"저게 다 마수라니!!!"
"속히 피난행렬을 안으로 들이고 성문을 닫아야 합니다! 시간이 부족합니다!"
"아, 알겠습니다!"
수 백 마리 마수들의 맹렬한 기세에 질겁했다가 디마우스의 언질에 정신을 번뜩 차린 웹스터 자작은 괜히 호위기사들을 향해 윽박질렀다.
"뭐해? 뭘 그렇게 뚱하니들 서 있어?! 니넨 저거 안 보여?! 퍼뜩 튀어나가!!!"
""""옛!!!"""
-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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