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외] 정답은 따로 있다. (2)
여전히 투덕거리고 있던 그녀들은 느닷없는 알랭의 인기척에 화들짝 놀랐다.
“어?”
“앗!”
”단장님!”
다소 데면데면하게 걸어오는 그에게 말문을 먼저 건넨 건, 역시나 이들 중 짬밥과 경력이 가장 심후한 페이였다.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알랭 단장님?”
“커흠, 깊이 생각 좀 할 거리가 있어서 겸사겸사 순찰중이었다.”
“아, 그러셨습니까?"
"뭐 그렇지."
"근데 언제부터 거기 계셨습니까? ...느흐흐흐응~, 혹시~ 처음부터?”
“......”
페이의 민감한 촉은 알랭 또한 숨은 애청자였음을 어렵지 않게 간파해냈고, 알랭 또한 딱히 숨기고자 했던 일이 아니었던 지라 그 혐의을 담담히 인정했다.
“험험,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다. 그래도 음침하게 몰래 엿들으려던 의도는 아니었다. 그저 이 외진 장소에 누가 모여있는지, 그리고 퍼져서는 안 될 기밀이 누설되고 있는지를 확인하느라 잠시 몸을 숨겼던 거니까.”
“아하~, 그러셨구나아~! 단장님께선 불시순찰 중이셨구나~.”
“......”
알랭은 순간적으로 눈동자에 능글능글한 야욕을 드리운 페이를 보며 마지못해 운을 뗐다. 지금 당장 아쉬운 건 본인인지라 어쩔 수가 없었다고 하겠다.
“큼큼, 페이야.”
“넵! 단장님!”
“좀 전에 그거 마저 해다오.”
샌더스 총통을 제외하면 상관 중의 상관이건만, 한 번 욱하면 루카스한테도 들이박는 페이의 간덩이는 엄청나게 비범했다.
“에이~, 맨입으로요? 다 아실만큼 아시는 분께서~. 이히히힛~.”
“...오냐, 알았다. 잠시만 기다려라. 내가 곤히 잠든 보급담당을 깨워서라도 이것저것 좀 얻어오마.”
“앗, 잠시만요!”
“음?”
“헤헷, 간식은 됐고요~.”
상관이 모처럼 딜을 선뜻 걸어왔는데, 겨우 과자 부스레기 따위로 만족할 페이가 아니었다.
“으으음... 3박, 아니아니 2박 3일 휴가권은 어떠세요? 복귀해서 받게될 특별휴가에 덧붙여서요!”
“흠...”
고작 2박 3일의 휴가권.
특수전 사령관직과 총통의 직할부대 단장직을 겸하는 알랭의 권한과 재량을 생각하면 아주 소박한 요구사항이었으나, 무리수로 공치기보단 무난하게 해쳐먹고 쏙 빠지겠다는 그녀의 얄팍한 계산이 반영된 제안이었다.
그리고 그녀의 소심한 선택은 탁월한 성공으로 이어졌다. 실화가 바탕인 막장극은 알랭으로서도 그만큼 참기 힘든 유혹이었던 것이다.
“좋다. 네가 중간에 안 끊는다는 조건으로 거기에 4일을 더 얹어주지. 총 6박 7일 휴가권 추가다. 그렇게 되면 넌 복귀 후 거의 한 달 꽁으로 쉬게 되는 거나 마찬가지다. 어떠냐, 딜?”
“우오호홋! 오케이, 코오올! 무조건 딜!”
이로써 얄궂게 중단됐던 페이의 단막극이 재개되었는데, 유급휴가에 신바람 난 그녀의 연기는 이전보다 과장된 면이 없잖아 있었다.
- 아아, 루카스 님! 저도 루카스 님을 오랫동안 흠모해왔었답니다~!
- 험험! 미안하지만 거절한다, 폴라. 그 마음 도로 넣어둬라.
- 흑흑, 너무 하세요! 제가 어렵사리 용기 냈는데!
- 그래도 어쩔 수 없다. 네가 이해하고 용서해라.
- 싫어요! 저도 제 마음을 어떻게 할 수가 없다구요!
과연 난잡한 치정극은 꿀잼이었다. 아마 이것에 견줄만한 구경거리는 시정잡배들의 진흙탕 개싸움 외에는 없을 것이다.
- 서방님, 나빠요! 왜 우리 폴라를 울리시는 건데요! 베스퍼 씨도 그만 울고 이걸로 눈물 닦아요!
- 감사합니다, 로비샤 영애님.
- 존칭은 빼요. 앞으론 저도 둘째라고 편하게 부를 테니까, 베스퍼도 절 맏언니라고 불러요. 우리 폴라도 눈물 뚝~.
- 아니, 로비샤. 어째서 내 의견은 무시되는 겁니까?!
- 서방님은 가만히 계세요! 지금 뭘 잘 했다고 역정내시는 건데요!
- 미, 미안합니다. 그렇지만 이 문제는 아무래도...
- 됐어요! 꼴도 보기 싫어요! 제 방에서 당장 나가세요!
- 아, 알겠습니다. 그러면 나중에 다시 차분하게 대화를...
- 뭐예요?! 나가란다고 진짜로 나가시려는 거에욧!
- 어... 저기... 음... 그... 미안합니다.
그렇게 한참을 이어지던 페이의 메소드 연기는, 로비샤 앞에서 하염없이 찌그러지는 루카스의 몸짓을 끝으로 막을 내렸다.
“...그래서? 그래서 그 다음은 어떻게 됐지? 폴라는 셋째 부인으로 확정된 거냐? 영애님과 루카스 님은 서로 화해는 하셨고?”
“저도 거기까진 몰라요, 단장님. 폴라가 하도 눈총 주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퇴장했거든요. 이게 끝이에요.”
“아~, 이런! 궁금해 미치겠군!”
페이는 새하얗게 드러난 치아를 손으로 살짝 가리며 히죽였다.
“히히힛, 쬐끔만 참으시죠? 제가 이따가 해 뜨고 나서 폴라한테 가볼게요. 걔 표정만 봐도 대충 견적 나오지 않겠습니까?”
“오냐, 아무리 늦어도 점심 먹기 전까진 내게 와서 필히 보고해라. 중간에 딴데로 새면 한 달 휴가고 뭐고 없다, 알간?”
페이는 알랭의 엄중한 경고를 정확히 이해했음을 빡센 경례자세로서 표현했다.
“넵! 확인 즉시 보고드리겠습니닷! 단결! 단결!”
“오케이, 굿! 그럼 내일 보자. 다들 가서 쉬어라.”
“”“단결! 안녕히 주무십쇼!”””
그렇게 관람 마친 청중들은 아침을 기약하며 때늦은 취침소등에 들어갔다.
* * * * *
시간이 유유히 흘러 새벽 2시경. 침실 발코니 난간대를 꼼지락꼼지락 만지작대던 로비샤가 뜬금없이 혼잣말을 했다.
“저어... 서방님?”
되돌아오는 말이 없이 찬바람만 쌩했지만, 그녀는 그것에 전혀 개의치 않고 재차 떠들었다.
“언제나 가까운 곳에서 절 지키고 계신 거 다 알아요. 그러니까 얼굴 좀 보여주세요.”
애정과 애증이 반반 섞인 듯한 목소리가 또 한 번 애잔하게 퍼졌다. 그리고 몇 초 지나지 않아 좀 전과는 다른 실바람이 로비샤의 오른뺨을 살랑 스쳤다.
- 스르륵.
루카스가 방안으로 들어왔음을 확신한 그녀는 뒤로 돌아섰다.
“서방님.”
“듣고 있습니다, 나의 로비샤.”
“아까는... 제가 말이 심했어요. 너무 지나치게 흥분했던 거 같아요. 그래서 꼭... 사과 드리고 싶었어요.”
로비샤의 음성은 물 먹인 솜처럼 무거웠다. 그리고 그 표면에서 느껴지는 감정의 종류 또한 좀 전보다 훨씬 복잡 다양했다.
슬픔•실망•이해•자괴감•두려움•원망•사랑•걱정•억울.
지난 몇 시간의 내적 갈등이 빚어낸 결과물답게 대체로 부정적이었고, 그 다채로운 덩어리를 모두 삭혀낸 그녀의 혀가 어렵사리 다음 말을 이었다.
“...제가 잘못했어요, 서방님.”
이렇듯 그녀의 잘못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먼저 무릎 꿇고서 주눅 들어야 하는 불합리함은 온전히 시대상 탓이었다.
- 털썩.
안 그래도 강력한 신분제와 거기서 파생된 가부장제•일부다처제 등이 만연한 세상이었다. 각 나라마다 경중은 있으되, 여자를 소유물로 인식하는 성향이 사회 밑바닥에 깔려있는 건 어딜 가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신분과 성별에 따른 인권이 엄격히 차별된 시대. 왕족이나 귀족 혹은 뛰어난 마법사와 같은 경우가 아닌 이상, 일반 여성의 자기주장은 고사하고 무조건적인 순종이 으레 당연시 되는 시대.
그런 안타까운 사회 속 천민출신의 로비샤는 본인의 위치를 잘 자각하는 편이었다.
“용서해주세요! 다시는 감히 서방님께 큰소리치지 않을게요! 부디 제가 싫어졌다면서 버리지 말아주세요!”
“아닙니다, 나의 로비샤.”
루카스는 어깨부터 미약하게 경직된 상태의 그녀를 조심조심 일으키며 말을 계속했다.
“내가 어떤 변명을 갖다붙여도 외도는 외도입니다. 그것은 당신의 정당한 분노와 서러움이었습니다. 오히려 사죄는 내가 당신에게 해야 합니다. 나는 판단을 가볍게 했고, 안일하게 약속을 남발했습니다. 그렇게 내가 경솔했던 탓에 그대에게 큰 상처를 안겼습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서방님...”
“음... 그런데 사실...”
“네?”
루카스는 멋적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지금 이런 표현을 사용하긴 좀 그렇긴 하지만... 당신이 화를 냈을 때, 나는 다른 한 편으론 무척 기뻤습니다.”
“...?”
”당신의 분노 크기는 곧, 날 향한 애정의 크기이지 않습니까?”
“...모, 몰라요.”
“고맙습니다, 로비샤. 타오르는 불길처럼 질투해줘서.”
“피이...”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빵빵하게 부풀어 있던 나쁜 감정들이, 그녀의 입소리를 따라 바람 빠지며 쭈글쭈글해졌다.
비록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말끔해지지 않았을 지라도, 루카스의 품으로 와락 뛰어들어 그의 목에 매달릴 정도로는 충분히 누그러들었다.
- 쪽.
가벼운 입맞춤으로 화해의 물꼬를 튼 그녀가 말했다.
“서방님께서 다른 여자들을 만나셔도 꾹 참을게요. 하지만... 딱 한 가지만 욕심부리고 싶어요.”
“?”
루카스는 문득 그녀가 알고 있다던 애인 다섯에 관해 묻고 싶었다. 그러나 기껏 푸근해진 분위기를 묵사발 낼 정도로 눈치가 아주 없진 않았으므로 잠자코 그녀의 말에 귀 기울였다.
“서방님의 첫 번째는 언제나... 저였으면... 좋겠어요.”
“흠, 안 됩니다.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
한 치의 망설임 없는 그의 응답에 로비샤의 눈언저리가 딱딱하게 굳어지려는 찰나, 루카스의 다음 말이 이어졌다.
“이미 첫 번째인 사람을 어떻게 또 첫번째로 삼을 수 있습니까? 후훗, 난 그런 방법을 모릅니다.”
“...진짜 얄미워. 내 마음을 막 들었다 놨다 하고...”
- 쪼옥.
한 번 더 입맞춤을 선사한 로비샤는 그 이상의 것을 나누기를 원했다. 하지만 루카스가 그녀를 살포시 떼어놓았다.
“오늘은 참읍시다. 나날이 약해지는 당신의 체력이 나는 몹시 걱정됩니다. 당신은 앞으로 무리하지 말고 세심하게 관리해야 합니다.”
“전 괜찮은데... 이게 의외로 통증이 심하진 않거든요.”
“내가 안 괜찮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고통이 밀려올 수 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더욱 면밀히 신경 써야 합니다. 당신이 아프면, 나 또한 무척 아픕니다.”
”치이... 비겁해.”
입술을 삐쭉 내밀던 그녀가 무언가를 떠올렸는지 손뼉을 '짝'하고 쳤다.
”앗, 맞다! 맞다! 잠깐만요!”
“?”
그녀는 서둘러 작은 목함을 하나 가져오더니만, 그 안에서 엄지손가락만한 유리약병을 하나 꺼냈다.
“엇...?”
목함 겉면의 상표 문양과 내용물의 연분홍 색감만으로도 충분히 감잡은 그였으나, 최종확인 차원에서 그 출처를 물었다.
“혹시 그건 베스퍼가...”
“네! 맞아요! 아까 둘째가 뇌물이라면서 제게 선물해줬어요! 요정족들도 찬양하는 연금술사께서 특별히 저를 위해서 제조해주신 최고급 영약이랬어요!”
“하하, 도핑은 반칙인데...”
“네?”
“아, 아닙니다. 아무 것도.”
루카스는 로비샤가 좀 전에 꼴깍 삼켜낸 그것이 최근 출시된 ‘다우린:W’ 계열의 의약품이라 믿어 의심찮았다.
‘...밤이 길어지겠군.’
그의 예상대로 원기가 잔뜩 충만해진 로비샤는 새벽 공기를 아주 뜨겁게 달궈냈다.
-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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