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벌적 윤회 (6)
* * * * *
4인의 긴급회의는 로비샤의 대역설정으로 가닥이 잡혀갔다.
“별 거 아닌 정보수집 따위에 반응해버리면 그들은 오히려 이상하게 여길 겁니다.”
“음, 그 말은 일리가 있다. 하지만 너희가 이곳에 상시주둔하고 있다는 점. 이미 그것을 수상하게 여기고 있진 않을까?”
“아 그 부분은 염려치 않으셔도 됩니다. 처음부터 몇 가지 가능성을 고려하여 ‘개인경호’가 아닌 ‘영지방어’에 초점을 두고 경호임무를 수행해왔습니다. 외부 시선에선 저희가 이 영지 자체에 관심을 두고 있는 것으로 여길 겁니다.”
“훌륭하군!”
무릎을 탁 친 루카스의 행동만 봐도 그가 얼마나 감탄했는지를 가늠할 수 있었다.
“하여 그 쪽으론 아주 무심한 척 관망하는 편이 시간벌이에 더 좋다고 생각됩니다. 안전을 위해 영애의 대역을 세워놓고서 말입니다.”
“과연 너희 종족은 유능하다! 장생 종족이라 그런지 경험과 생각의 깊이가 남다르다!”
“하하, 후한 평가에 감사드립니다.”
”아, 그런데 로비샤의 대역은 누가 맡지?”
“당연히 저희 병력 중에서 체형이 비슷한 몇 명을 차출해야겠지요. 어떤 실력자가 무슨 경로로 침투해올지 아무도 모르는 상황이지 않습니까?”
“그래, 고맙다! 덕분에 내가 로비샤에게 노출될 위험이 줄었다! 이 빚은 절대 잊지 않겠다!”
“별 말씀을요, 하하하.”
그런데 가장 최선이라 여겨졌던 리코우의 계획은 엄한데서 난항을 맞이했다. 로비샤 본인이 그동안 평화적 시위를 끈질기게 훼방해온 리코우의 뜻에 반기를 들었던 것이다.
“흥, 싫어요. 거절하겠습니다.”
“...예? 로비샤 영애님?”
“싫.다.고.요.”
“......”
리코우가 간신처럼 머리를 조아려도 그녀는 요지부동이었다.
“저기 영애님, 믿을만한 정보통에 의하면 예고된 사태가 매우 심각합니다. 부디 재고해주십시오.”
“못할 것도 없지요. 리코우 님께서 제 간청을 재고해주신다면요.”
“으으... 중간에 낀 제 입장이 불쌍하지도 않으십니까?”
“알아요, 염치도 없고 너무 죄송스러워요. 하지만 살 날이 3년도 안 남은 제 처지도 헤아려주셨으면 합니다. 낭군을 다시 뵙고자 하는 제 바람이 그렇게나 지나친 욕심인가요?”
로비샤의 입장은 완고했고, 절대로 의지를 꺾지 않았다. 이번 기회가 아니면 자신의 뜻을 영영 관철시키지 못하리란 걸 인지했기 때문이었다.
“영애님. 제가 거듭 말씀드립니다만, 당사자가 극구 거부하고 계신 것을 저라고 무슨 뾰족한 수가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제 의사를 서방님께 전달만 해주시고, 제 금식행위를 일절 방해하지 말아달라는 부탁이잖아요!”
“어허이, 그건 안 될 말입니다. 영애께서 잘못 되시는 날엔 제가 그 뒷감당을 못합니다.”
“괜찮아요. 유서에 리코우 님께 잘못이 없다는 내용도 써놨습니다.”
“아, 진짜... 유서는 또 어느 틈에... 아, 아무튼! 제가 안 괜찮습니다!”
“그러면 제가 리코우 님께 협조하는 일은 절대 없을 거에요!”
“으아아아아! 제발 저 좀 살려주십쇼, 영애님!”
“...죄송해요, 본의 아니게 곤란하게 해드려서 정말 죄송해요. 진심이에요.”
“부디 입으로만 죄송해하지 마시고 쫌...”
“진짜 죄송해요. 하지만 아무 능력 없는 제겐 이렇게 고집피우는 일 말곤 다른 선택지가 없다는 거 잘 아시잖아요.”
“......”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속을 까맣게 태운 리코우는, 영주성 지하밀실 중 한 곳에 자리잡은 루카스에게로 찾아가 어떻게 좀 해보라며 하소연했다.
“저기... 그냥 윗층으로 걸어 올라가셔서 몇 마디만 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흠... 그건 불가하다. 아! 차라리 나한테 다른 여자가 생겼다고, 그러니 마음 접으라고 전달하는 편이 좋을 거 같다.”
“...영애께서 기어이 첨탑으로 올라가 투신하시는 꼴을 보고 싶으신 겁니까?”
“그, 그렇다면 내가 자필로 편지를...”
“제가 그걸 전한다고 믿겠습니까? 무조건 루카스 님께서 직접 하셔야 합니다! 일부러 마음에 상처를 입히시든, 좋게좋게 다독이시든! 그 뭐가 됐든 간에 말입니다!”
“......”
“후, 직접 대면이 정히 껄끄러우시다면, 차라리 마법통신으로 깔끔하게 끝내시죠. 폴라에게 듣자니 이미 휴대용 통신구를 하나 갖고 계시다죠?”
“오!”
그의 생각에도 리코우의 제안이 제일 합당하게 느껴졌다.
“알겠다. 네 의견대로 하겠다. 바로 조립해두겠다.”
“예, 그럼 저는 영애님께 가서 아주 어렵게 연결했다고 전하겠습니다.”
“고맙다. 그리고 번거롭게해서 미안하다.”
“에휴, 아닙니다. 그저 이걸로 마무리되기만 바랄 뿐입니다.”
결과부터 먼저 말하면 이 섣부른 미봉책은 대실패였다. 로비샤의 눈썰미를 그들이 간과했던 것이다.
비상대피소로 운용되는 지하밀실은 도적떼로 돌변한 용병단이 설칠 때마다 그곳으로 숨어야 했던 그녀에겐 너무나 친숙한 장소였다고 하겠다.
“어?! 거기 지하금고 옆방 맞죠? 그렇죠?!”
<그, 그걸 어떻... 아니, 아닙니다! 이곳은 아주 멀리 떨어진...>
“꼼짝 말고 기다리세요!”
<어엇, 그러면 안 됩니다! 그대는 내려오지 마십시오!>
“역시 그 방안에 계시단 거네요?!”
<헛...>
“서방님께서 도망치고 싶으시면 그렇게 하세요! 어차피 제가 드리고픈 말은 전부 유서에 적어놨으니까!”
<......>
더 이상 잃을 게 없는 로비샤의 의지는 매우 확고부동 했고, 그것은 루카스의 발목을 단단히 붙잡는 덫이 되었다.
그래서일까?
로비샤가 방에서 뛰쳐나온 시각, 오랜만에 나디아의 코앞에 뽀얀 문자들이 생겨나 그녀의 시야를 그득그득 채웠다.
<< 긴급 임무 : 주변인의 도움을 받아 대상과 통신하세요! >>
“핫! 천사님???”
<< 긴급 임무 : 어서! 당장! 급해! >>
실시간으로 타들어가는 아리사엘의 애간장과는 달리, 나디아의 임무진행은 순조롭지 못했다. 정말 공교롭게도 평소 보모 노릇을 하던 레이첼이 파렐 스톤에게 불려가 신경전을 벌이는 중이었던 것이다.
<< 긴급 임무 : 꼬맹아! 빨리!!! >>
“천사님, 저 이거 쓸 줄 몰라요.”
<< 긴급 임무 : 수정구 옆에 녹색 단추를 꾹 눌러! >>
메디오스페라 전역엔 마법통신기구가 공용으로 골목마다 비치되어 있어 통신수단 확보자체는 쉬웠지만 그 다음부터가 지독한 난항이었다.
“여보세요~.”
<네에~, 교환원입니다~. 어디로 연결해드릴까요?>
“저희 아빠 좀 부탁 드려요~.”
<응?>
“저희 아빠랑 통화하게 해주세요!”
<에이~, 공공자원으로 이런 장난치면 못 써요~.>
아리사엘이 징계를 받기 전이었다면 통신구에 직접 간섭하여 루카스가 소유한 것과 직통으로 연결시켰을 것이나, 일정기간 권능제약에 걸린 그녀는 다른 방법을 사용해야 했다.
<< 긴급 임무 : 통신교환원에게 다음을 알리세요! >>
교환원이 나디아의 통신구를 원격으로 비활성화시키려는 찰나, 아리사엘이 알려준 고유번호와 통신좌표를 나디아가 크게 읊었다.
“앗! 잠시만요! 이렇게 전하래요! sec98193-x1231-y5422-z90765!”
<다, 다시 천천히 말해주겠니?>
”sec98193. x1231. y5422. z90765 이에요!”
<응? 가만... 앞자리가 sec이면?>
안보부 요원에게나 지급되는 암호화 통신구 고유번호였다. 심지어 해당좌표를 조회해보니 연결마저 가능한 활성상태였다. 그러나 웬 꼬마가 부탁했다고 하여 일개 교환원이 순순히 응해줄 리는 없었다.
<너, 넌 대체 누구니?!>
“아! 저는 나디아라고 해요! 잘 부탁 드려요!”
<아니, 네가 이런 건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천사님이 제게 알려주셨어요!”
<......어... 그래. 끊지 말고 거기서 조금만 기다려줄래?>
“네에~.”
그렇게 놀이터에서 흙장난하던 나디아는 무서운 요정족 아저씨들에게 긴급 체포되어 감금 당했고, 이 소식을 전해들은 페이와 레이첼이 헐레벌떡 도착하여 해명하고 나서야 가까스로 풀려날 수 있었다.
“힝~, 죄송해요, 천사님. 저도 열심히 노력은 했는데...”
<< 돌발 임무 : 아! 됐어! 이젠 나도 몰라! 될 대로 되라지! 젠장! >>
아리사엘은 루카스와 로비샤의 재회 속에 한껏 뜨거워진 밀실의 영상을 신경질적으로 걷어차며 흩어버렸다.
“에이씨! 좋다고 엉겨 붙은 꼬라지하고는! 드럽게시리!”
“왕! 왕! 왕!”
“야, 브래드! 저런 추잡한 번식행위 따윈 네가 굳이 감시 안 해도 되거든?!”
“왕! 왕! 아르르르릉...”
“너어, 진짜! 안 그래도 속상해 죽겠는데 너마저 나한테 이럴 거야?! 어?! 너 한번 제대로 혼나볼래?!”
“끼잉... 끼잉...”
우연히 이 장면을 목격하게 된 가브리엘은, 하루가 멀다 하고 과민해지는 성향의 아리사엘을 두고서 깊은 죄책감을 느꼈다.
* * * * *
세상을 가득 메운 칠흑도 작은 등불에 스르륵 밀려나는 것과 같이 어둠은 결코 빛을 이기지 못한다.
마계 최강자로 불려도 이상하지 않을 루카스가, 신격을 잃고 나약한 필멸자와 진배없는 로비샤에게 쩔쩔 매는 상황 역시 이와 비슷한 맥락일지도 모르겠다.
“서방님은 정말 나빴어요.”
간이 침대 위에서 남녀간의 애틋한 시간을 보낸 로비샤가, 루카스의 품에 안긴 채로 톡 쏘아낸 서운함이 몹시 따가웠다.
“그으... 다시 말하지만 나는 당신을 위해 멀어진 겁니다.”
“제 귀엔 편리한 핑계로만 들리는데요? 단물만 쏙 빼먹고 버리는 사내들이랑 서방님이랑 대체 어디가 어떻게 다른 거죠?”
“어... 음... 개, 객관적으로 그렇게 보일 수 있...”
“상황이 갑자기 바뀌었다며 언제 그랬냐는 듯이 절 매몰차게 버리셨던 거 맞잖아요! 제 몸과 마음을 다 가져가 놓으시고선! 하룻밤 만에 소박맞은 여자라고 사람들이 얼마나 뒤에서 수군거렸는지 아세요? 보는 사람이 없으면 성내 하녀들조차 절 무시할 정도라고요!”
“...그 부분엔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번에도 똑같은 변명으로 저를 내팽개치실 건가요?”
“......”
서운함을 투정으로써 풀어내던 로비샤는 그가 절대 아니라고 말해주길 바랐지만, 그의 입장에선 그럴 수가 없었다.
“나는 진심으로 당신을 원합니다. 당신이 본래의 위상을 되찾는 전날까지만이라도 그러했으면 좋겠습니다. 정말입니다.”
“그럼 그렇게 하시면 되잖아요. 남들이 저를 하찮게 보는 거야 아무래도 상관 없지만, 서방님께 버림 받는 건......”
“나는 최악의 경우를 고려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선계의 최고신들이 몰려올 가능성도 무시 못합니다. 전에도 말했듯 당신의 본질은 여신입니다. 그것도 격조 높은 상급의 존재란 말입니다.”
“그게 제 귀엔 얼마나 얼토당토 않은 이야기로 들리는진 아시나요?”
“물론입니다. 하지만 꼭 알아줬으면 합니다. 그 사실을 가장 부정하고 싶은 존재가 바로 나입니다. 그대가 여신만 아니었어도 나는 항상 당신을 데리고 다녔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피이...”
루카스의 굳건한 눈동자는 로비샤의 마음을 복잡하게 헤집었다. 그렇게 불만이 쌓인 그녀는 그의 품속으로 더욱 파고들며 말했다.
“재차 확신했어요. 서방님이 나쁜 게 맞아요.”
“그렇습니다. 이 모든 것은 당신에게 반해버린 내 잘못입니다.”
“....모, 몰라요! 그렇게 말씀하신다고 그냥 넘어갈 줄 아세요? 흥,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로비샤의 손길이 매우 자극적으로 변했다.
“읏... 당신은 체력이 약해진 상태입니다. 무리하면 안 좋습니다.”
“후후, 안 돼요. 이건 그동안 저를 힘들게 하신 벌이라고요~.”
맛간의 소강상태를 맞이했던 밀실의 공기가 또 한 번 후끈 달아올랐다.
-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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