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이후 (1)
* * * * *
드레프타 내에선 마물습격사건으로만 알려진 트로돈의 침공시도가 있은 지도 어느덧 2일이 지났다.
날이 밝은 사건 당일 아침엔 워프게이트 인근의 커다란 분화구 때문에 말들이 꽤 많았었지만, 이튿날 요정족들이 흑마법사들의 악행을 저지한 것으로 공식 발표한 이후로는 아무도 가타부타 떠들지 않았다.
이유는 사람들이 그런 논쟁을 계속 붙잡고 있기엔, 각 개개인이 추슬러야 할 인적상실과 자산피해가 매우 심각하다는 데에 있었다.
"아이고, 이 놈아! 네가 먼저 이래 가면 우야누... 나 보고 어찌 살라고... 이 놈아... 이 놈아아...!"
"이게 다! 후작 부인 때문이여! 지 새끼들이랑 살겠다며 성문을 콱 걸어 잠가버린 바람에! 안 죽었을 사람들까지 이렇게 죽게 된 거라고!"
어떤 이는 슬픔에 젖어 눈물을 광광 쏟았고, 또 어떤 이는 우글거리는 분노를 이기적인 대처로 인명피해를 불린 영주 부인에게로 돌리며 민란의 불씨를 흩뿌렸다. 거기에 도시 전역에 걸쳐 심심찮게 발생하는 약탈과 노략질은 덤이자 우수리였다.
이렇듯 분위기가 흉흉한 건 드레프타의 영주민들뿐만은 아니었다.
샌더스 수장이 조심스레 우회적으로 언급했던 최악의 각본이 현실로 확인됨에 따라, 요정족 원로회 또한 혼돈의 도가니에 빠졌다. 그나마 트로돈 선발대가 워프게이트 강탈에 실패했기 때문에 간신히 제 정신을 챙길 수 있었다고 봐야 했다.
그리고 그렇게 가까스로 안정을 되찾은 그들은 도망친 트로돈 황자 아르카니토의 행방을 추적하며 동분서주했으며, 되도록 자세한 사항이 일반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게끔 정보통제에 각고의 노력을 들였다.
한편, 은밀하게 자리한 어느 토굴 밑에선 또 다른 동맹이 형성되려는 조짐이 있었다.
- 취익... 취이익...
붉은색 점액으로 가득찬 수조에서 유일하게 보이는 파충류의 코가 숨을 길고 차분히 내뿜었다. 만약 그 주변을 둘러싼 많은 인원이 없었더라면, 동면을 시작한 무언가로 오해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봐,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 거지? 치료는 다 끝났다고 말하지 않았나?"
아르카니토의 오른팔인 비가아르가 참다못해 한 마디 투덜거렸다. 그러자 바로 옆에 있던 창백한 회색빛 피부의 사내가 덤덤한 어투로 그를 다독였다.
"외상과 내상은 모두 완치됐습니다. 이제 정신이 안정되기만 하면 곧 깨어나실 겁니다."
"쯧! 지금으로선 별 다른 방법이 없으니, 당장은 너를 계속 믿어보겠다."
"맹세코 후회하시지 않을 겁니다."
"정말로 그러길 바란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헛...!"
냉소적인 콧방귀를 뀌던 비가아르의 시야에 수조 안에서 꿈틀거리던 주군의 움직임이 포착됐다.
"아, 아르카니토!"
"끄으음......"
"어서 붙잡아 드려라! 거기 조심! 더 조심해!"
트로돈의 전사들은 아르카니토를 침상으로 옮긴 후, 마른 천으로 그의 몸에 남아있는 점액들을 얌전히 닦아냈다.
"이만... 됐다."
의식을 완전히 회복한 아르카니토가 손을 휘휘 저어 부하들을 물리곤 천천히 일어나 앉았다.
"비가아르, 내가 얼마나 이러고 있었지?"
"2일만에 깨어나셨습니다. 아르카니토."
"...그랬군."
그의 지친 눈동자가 위기에서 구명해준 세력의 우두머리를 향했다.
"목숨을 빚졌군."
"정식으로 인사 드리겠습니다. 현재 비스마우어 일족을 이끌고 있는 드레이크 블라딘이라 합니다. 부디 편하게 드레이크라 불러주시길."
"알았다. 드레이크."
"헌데 어디 불편한 데는 없으십니까?"
"왼쪽 눈알이 시큰하지만 견딜만하다."
"그건 재생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일겁니다. 앞으로 일주일 정도 흐르면 적응되어 괜찮아질 겁니다."
"음... 그건 그렇다 치고......"
본론으로 넘어가려는 그의 말에 공기의 흐름이 약간 달라졌다.
"오드노아의 계파인 너희가 어째서 나를 구했지? 그대의 목적을 말하라."
"그보다 먼저 잘못된 정보부터 올바로 잡고자 합니다. 위대한 아르카니토."
"듣고 있다."
"저흰 더 이상 오드노아 계파가 아닙니다. 과거 한때 오드노아에 '속했었던' 계파입니다."
이 말을 들은 아르카니토는 토굴 안을 주르륵 둘러봤다. 그는 여러 가지 시험과 마법의 흔적들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었다.
"...추방당했군."
"그렇습니다."
"혈마법이 원인인가?"
"아닙니다. 저희 일족은 저주를 받아 추방당했기 때문에, 부득이하게 선택한 방법이 혈마법이었을 따름입니다."
"그래? 그럼 추방의 이유는 뭐지?"
“......”
아르카니토가 잠깐 답변을 망설이는 드레이크를 보며 말했다.
" 뜸들이지 마라. 거짓으론 내게서 그 어떤 것도 결코 얻지 못할 것이다."
"...알겠습니다. 이미 오래된 과거의 일이니 솔직히 아뢰겠습니다."
"말하라."
"저희 일족은 마계의 마왕을 이 땅에 소환하려 했었습니다. 그래서 영구히 추방 당한 겁니다."
"?!"
드레이크의 이야기는 아르카니토는 물론 트로돈의 전사들 모두가 놀라는 가운데 계속 이어졌다.
"과거 저의 아버님과 동조자들은 진절머리 나게 반복되는, 이 쫓고 쫓기는 굴레를 끊고자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분들께선 그 해법을 보다 높은 차원의 존재에게서 찾으셨지요. 고만고만한 힘들을 모아봤자, 초월자에겐 전혀 미치지 못 했으니까 말입니다."
"크흠... 그렇다면 지난 번 우리 관측자들이 발견한 마나 폭풍이 바로 그......"
"예, 그렇습니다. 하지만 최근에 이루어졌던 그것은 엄밀히 따지자면 두 번째 시도였습니다. 그리고 마왕이나 마족 등이 출몰했다는 소식이 아직까지 없는 점을 고려하면, 이번에도 실패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첫 시도는 언제였지?”
”처음은 약 800여 년 전이었고, 그땐 뜻밖의 내부 밀고자로 인해 게이트에 적용시킨 마법진의 활성화도 못 해보고 끝났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어이없게 붙잡힌 저희는 그렇게 저주받은 채로 쫓겨나게 되었지요."
"흐음......"
아르카니토는 자신의 왕국과 초월자 라호나바스에게 맞서기 위해 마계의 문을 열려 했었다는 황당한 이야기를 듣고는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이미 지난 과거는 과거일 뿐, 현재를 살아가야 하는 그의 침묵은 잠시간에 그쳤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묻겠다, 드레이크.”
“예.”
”나를 구한 그대의 목적은 무엇인가?"
"저희의 염원은 하나입니다. 바로 오드노아의 멸종입니다."
"......"
"오늘날 오드노아 계파 전체의 멸족을 원합니다! 저희 일족의 고결한 희생과 숭고한 결의를! 쓰레기 헌신짝처럼 팽개친 그들의 철저한 파멸을 갈망합니다!"
하얀 목에 핏대마저 벌겋게 일어난 드레이크의 외침엔 원한이 진하게 서려있었다.
"또한 저흰 그들이 고통에 울부짖으며 트로돈 백성들의 식탁 위로 오르는 꼴을 지켜보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훗, 헛된 꿈을 꾸는군."
그러나 아르카니토는 웃음을 냉소적으로 흘린 후에 말을 이었다.
"너 역시 목격했듯, 나는 처참하게 실패했다. 정체 모를 화신과의 전투에서 대다수의 병력과 기술자 전부를 잃었다. 앞으로 나는 왕위를 노리며 앞다투며 찾아올 후순위권자들을 그저 낙오자의 입장에서 바라봐야할 신세다. 그러니 너는 이런 내게서 얻을 것이 하나도 없다."
"아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
분위기를 날카롭게 싹둑 잘라낸 드레이크의 단호함이, 뒤이어진 그의 말에 모두가 귀를 기울이게 만들었다.
"저희가 위험을 무릅쓰고 당신을 구해낸 이유는 단순명료합니다. 평소라면 불가능한 당신의 신뢰와 자비를 얻기 위함이었습니다."
"신뢰와 자비?"
"저희 일족을 거두어주십시오! 저희가 당신 곁에서 싸우겠나이다!"
"푸훗, 너는 방금 내가 한 이야기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모양이로군. 다시 한 번 나의 처지를 설명해줘야 알아듣겠는가?"
드레이크는 체념 섞인 웃음을 한숨처럼 내뱉은 아르카니토의 말을 재빠르게 끊었다.
"아르카니토 님! 저희가 당신께 게이트를 바치겠나이다!"
"뭐라?!"
"저희에겐 게이트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지혜가 있고, 또한 오드노아들의 모든 것에 해박합니다. 저희라면 충분히 당신께오서 어느 경쟁자보다 먼저 트로돈의 본대를 불러드릴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 바칠 수 있습니다."
"...굉장히 과신하는구나."
"허언이 아닙니다! 이번 일로 보안에 날을 세울 오드노아들에게서 게이트를 온전히 빼앗을 수 있는 건 오직 저희 뿐일 것입니다!"
겉으로 내뱉는 말과는 다르게 아르카니토의 눈과 귀는 이미 번쩍 뜨여 있었다.
"그래... 오드노아는 언제나 까탈스런 먹잇감이었지. 그래서 사냥하는 맛도 있었던 거고. 크크큭..."
"복수는 물론이고 저희 일족의 사활마저 걸었습니다. 어느 정도의 승산이 계산되지 않았더라면, 애초에 당신을 구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아르카니토는 드레이크의 확신에 찬 표정을 통해 다시금 투지가 펄펄 끓어오름을 느꼈다.
"좋다. 보다 자세한 계획을 듣고 싶구나, 드레이크 블라딘."
"허면 저희 일족을 받아주시는 겁니까?"
"일단 먼저 너의 일족이 세운 계획부터 듣겠다. 그리고 그게 정말로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되면 내 심장을 걸어 서약하겠노라."
"기,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르카니토 님!"
* * * * *
같은 시각, 세계수의 그림자 부대가 야영지를 구축한 게이트 인근. 이곳에도 나름의 이유 때문에 고뇌로 가득 찬 인물이 한 명 존재했다.
"정말로 그 자가 혼자서, 그 트로돈 정예 전사들을 괴멸시켰단 말이에요?"
그 존재는 큰 나무책상 하나를 사이에 두고 미라이와 리사의 반대편에 마주 앉은 레이첼이었다. 물론 그녀의 바로 뒤편에 특별임무 수행 중인 폴라와 페이도 참관 중이었으나, 위아래 입술을 딱 붙이고 서서 듣기만 하는 그녀들은 처음부터 병풍으로 취급해야 옳았다.
"네, 이미 앞서 알랭 단장님께 보고 드렸던 그대로입니다."
"솔직히... 믿기 어려운 이야기네요."
샌더스 수장의 연락 이후 무리하게 거의 날듯이 달려온 탓인지, 레이첼의 얼굴에 선명한 눈 그늘이 퀭하게 배어있었다.
"저흰 목격했던 사실을 가감 없이 진술했습니다. 리사랑 제가 따로 격리되어 작성한 보고서를 비교해 보시면, 내용에 거짓이 없다는 것쯤은 바로 아실 텐데요?"
"...여러분의 증언에 대한 신빙성 자체를 의심했던 건 아니었어요."
레이첼이 편집증적인 면모를 보이는 것도 이해는 됐다. 그만큼 역사적 사실과 이번 사건 진실 간의 괴리가 너무 컸던 것이다.
사실 트로돈의 '게이트 탈취시도' 행위는 용맹의 증명이자 일종의 즉위식이었으며, 상대적으로 오드노아보다 비교열위에 있던 공간마법을 극복하고자 하는 트로돈의 자구책에서 비롯된 전통이었다.
그렇기에 왕좌와 즉결된 이 중요한 기회를 획득하려는 트로돈 왕족이 어중이떠중이들을 데리고 전력을 구성할 리가 없었으며, 실제로도 오드노아 종족이 과거 역사에서 부딪쳐온 선봉대의 전투력은 '세계수의 그림자' 부대를 중심으로 전력을 대대적으로 갈아 넣어야 간신히 무게 추를 맞출 만큼 대단히 강력했다.
그러니 레이첼이 필요 이상으로 편집증 증세를 보였다기 보단, 그녀에게 편집증 증세를 불러일으켜졌을 만큼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난 셈이라고 판단해야 정확했다.
"그럼 정말 마지막으로 딱 한 가지만 더 물어볼게요. 그 루카스란 남자가 어디로 갔는지를 진짜로 모르시나요?"
"네, 몰라요."
"모릅니다."
이 물음에 대한 그녀들의 즉답은 거두절미했다. 너무나 단호한 나머지 레이첼의 직감이 쉽게 수긍하지 않을 정도였다.
"진짜 모르는 거 맞나요?"
"저기요, 문득 궁금해서 그러는데요. 혹시 저희가 지금 어떤 범죄혐의로 조사 받는 중입니까?"
"...아니요, 그렇게 느끼셨다면 죄송합니다."
"그럼 이만 가봐도 되겠죠? 당신 덕분에 시설 복구 작업이 계속 지체되고 있거든요."
"......"
"가자, 리사."
"어, 어. 응!"
"......"
의구심은 여전히 잔재처럼 남았으나, 현재의 레이첼로써는 그녀들을 강제적으로 붙잡아둘 방법이 없었다.
그녀의 소속이 감찰부나 작전실행부서도 아니었을뿐더러, 엄밀히 따지자면 리사와 미라이는 위협에 굴하지 않고 마지막까지 게이트를 지켜낸 자랑스런 공로자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아이씨... 뭔가 숨기는 게 확실한데......"
뚱해질 대로 뚱해진 그녀가 답답함을 풀어낼 길이 없을 무렵, 막사 문이 펄럭 젖혀지며 반가운 얼굴이 나타나 말을 걸어왔다.
"뭘 그렇게 꽁해있는 거야?"
"엇?! 가, 가르!!!"
-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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