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툰 오해 (4) + 속상한 혼잣말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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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아침.
조식을 간단히 때운 뒤 대형막사 안으로 옹기종기 모인 연맹 집행부의 간부들과 총장 사이에 대형 폭탄이 떨어졌다.
"원인은 비스마우어 일족입니다."
"””?!"””
폭탄을 투척한 인물은 폴라였다. 그녀는 충격과 공포를 마주한 청중 앞에서 담담히 말을 이어나갔다.
"몇 가지 확인이 더 필요하나, 저는 100% 확신합니다."
"””!!!"””
아카반 총장은 몹시 혼란스러워 무슨 말부터 꺼내야 할 지 갈피 못잡는 간부들과는 달리 차분한 물음을 던졌다.
"허허허. 저희도 그 가능성을 우려하여 이미 대대적으로 탐색했었습니만, 탐지망에 걸리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래도 폴라 양께서 이렇게 단정하시는 까닭은 요정족들이 이미 경험한 사례이라서겠지요?"
"...그렇습니다."
"보다 자세한 설명을 요청드리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아카반 총장님. 답답하시겠지만 이 공적인 자리에서 제가 모든 내용을 해명을 하긴 어렵습니다. 그러나 약 700년 전에 유사한 참극이 서방대륙에 있었다는 사실만큼은 밝혀드리는 바입니다."
"크허흠..."
총장은 물론 많은 이들의 심기가 불편해졌다. 하지만 본인의 발언이 오드노아를 대변하는 공식발언이 되는 그녀의 입장에선 가급적 말을 아낄 수 밖에 없었다.
"그런가?"
그리고 루카스 또한 그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듣고 앉아있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으므로, 그녀를 적당히 옹호해줄 겸 대뜸 나섰다.
"그렇다면 그 부분은 넘어가고."
“”“?!”””
아직 그에 대한 악감정이 상당한 간부들, 특히 집행부 부장 '지르츠 푸치티스(Girts Pucitis)'은 귀에 거슬릴 정도로 못마땅해 했다.
"아니, 지가 뭔데 넘어가고 말고를 결정하는 건데!"
"참으셔야 합니다, 지르츠 부장님. 저희 총장님께서도 가만히 계시잖습니까?"
"ㅆ발..."
그러나 루카스는 그것을 성난 귀뚜라미의 울음소리쯤으로 치부하며 자기 할 말만 계속했다.
"그래서 대응책은? 혹시 치료법이나 해약이 존재하나?"
"죄송합니다. 제 지식범위 내에선 전무합니다."
“””!!!”””
장내가 술렁인 것도 잠시, 회의 참석자들은 루카스와 폴라의 질의응답에 정신을 집중했다.
"음? 그 이유는?"
"일반적인 전염병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뭐지?"
"감염성 질환 등으로 오인해선 안 됩니다. 이건 끔찍한 저주입니다. 음... 보다 정확하게는, 기존의 저주가 뒤틀리면서 예기치 않게 발생된 일종의 부작용이나 변이에 가깝습니다."
"...그렇군. 그럼 해결책은 있나?"
"제가 배운 사태종결 방안은... 오직 한 가지 뿐입니다."
여기서 한 박자 숨을 돌린 폴라는 무거운 표정과 목소리로 이야기를 마저 이었다.
"최초의 저주발현자. 즉, 숙주를 포함한 모든 감염개체의 말살입니다."
저주실패가 낳은 잔재. 그 혼돈의 산물이 처참하게 비틀어진 것도 모자라 강력한 전염성까지 띈다면, 일반적으로 필멸자들이 취할 수 있는 선택지는 극도로 한정적이었다.
“기록에 근거한 가장 이상적인 조치는, 장례를 치를 때처럼 마지막 한 조각의 뼈까지 재로 만드는 겁니다.”
"그건 당연히 변이가 아직 덜 된 피해자. 그들을 포함하는 거겠지?"
"네, 루카스 님. 저주를 돌이킬 수단이 없는 이상... 예외는 없습니다."
치료법이 전무한 상황에선, 눈 딱 감고 환자에게 평안한 죽음을 선사하는 게 오히려 자애롭고 이성적인 처사였다. 대책없이 감염자를 방치하는 행위는, 발동시간이 임박한 폭탄을 곁에서 지켜보는 꼴이기 때문이었다.
- 끄덕, 끄덕.
마계에서 각종 저주에 대한 개괄적인 지식을 쌓아올린 루카스는 바로 수긍했다. 그러나 상식의 범주가 다르고 열의로 가득찬 참석들의 반응까지 그와 꼭 같을 순 없었다.
"나는 인정 못합니다!"
폴라의 답변이 끝나기 무섭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고함지른 첫 타자는 바로 지르츠 부장이었다.
"뭐요?! 당신은 항구도시 키자쿠크의 인구가 대체 몇 명인 줄이나 알고서 그런 이야기를 지껄이는 겁니까?! 자그마치 8만입니다, 8만! 해상에서 유입되는 상인단들을 제외하고서라도 말입니다!"
다른 몇몇 간부들도 지르츠의 행동에 뒤따라 목에 핏대를 세우며 동참했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그리고 이미 배 타고 망망대해로 탈출한 사람들 중에 감염자가 있으면 어쩔 건데?!"
"이건 결국 우리에게 대량학살을 자행하란 의미잖아! 우리 동료들까지 살처분해야 한다고!"
"웃기지마! 치유방법이 없을 리 없어! 정말로 그게 저주가 원인이라면 각 신전에서 고위사제를 모셔와 해주하면 치유가 가능할지도 모르는 일이야!"
"설마 당신네들의 실험 중에 발생한 사고라서 숨기는 거 아냐?! 당장 과거사례와 자료를 모두 빠짐없이 공유해!"
피로에 찌든 간부들은 반론제기를 너머 원색적인 비난까지 폴라에게 퍼부울 기세였다. 그러자 이 현장 분위기를 보다못한 루카스가 발언대 앞으로 천천히 걸어나왔다.
- 스윽.
그의 행동 양상은 취객들이 폴라에게 치근덕댔을 때와는 완전히 결이 달랐다. 궁지에 몰린 폴라에게로 다가가 자신의 뒤편으로 숨긴 루카스는, 발언대 위의 단상을 주먹으로 거침없이 내리찍었다.
- 콰직!
이에 목재 단상의 처절한 단말마가 좌중을 가로지르며, 뻘겋게 달아올랐던 회의장 분위기를 차갑게 식혀냈다.
"모두 주둥이 다물어라."
“”"뭣이?!"””
"지금부터 멋대로 지껄이는 놈은 혀를 뽑아버리겠다."
“”"......"””
실제 대꾸하고픈 사람은 많았으나 루카스가 풀풀 쏘아낸 살기에 쫄아든 관계로 용감하게 대꾸해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연신 씩씩대던 지르츠 역시 지인들의 만류에 못 이겨 다시 착석했다.
그렇게 어느 정도 분위기가 정리되자, 루카스는 본격적으로 이빨을 드러내며 보다 강한 압력을 행사했다.
"대체 이 친구가 뭘 잘못했지? 내가 보기에도 아주 유용한 정보를 너희에게 무료로 제공했다. 그리고 본인이 아는 선에서 해결책을 알렸고 조언까지 해줬다. 근데 뭐가 문제지? 원흉이 이 친구가 아닌데, 어째서 니들한테 맹렬한 비난을 받아야 하지?"
이어서 루카스는 아카반 총장을 향해 시선을 똑바로 고정한 채로 선언하듯 말했다.
"나는 용병이다. 다시말해서 내겐 손에 피묻히는 건 별 문제가 아니란 소리다. 조건만 맞으면 너희가 꺼려하는 무차별 학살도 실행해줄 수 있다."
"""......"""
"남은 회의는 너희끼리 진행해라. 나는 이만 막사로 돌아가겠다. 그리고 이번 일을 정말로 종결짓고 싶어졌을 때. 바로 그때, 대표자들이 날 찾아와라."
"""......"""
"만약 오늘 중에 찾아오는 의뢰자가 없으면, 난 미련 없이 이곳을 떠나겠다. 이상이다."
청중의 복잡다양한 반응을 즐길 생각이 없던 루카스는, 그대로 폴라의 손목을 쭉 잡아 이끌었다.
"가자. 너도 여기 더 있을 필요 없다."
"아... 네..."
강압적으로 이끌려 퇴장하는 어정쩡한 그녀의 모양새였으나, 그래도 이렇다할 저항 없이 쪼르르 딸려나갔다.
'뭐... 생각보다 괜찮은 구석도 있네. 흥, 흥.'
오늘따라 유달리 루카스의 등판이 널찍하고 든든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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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속상한 혼잣말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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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반 총장이 지르츠와 베스퍼만 대동하여 루카스를 다시 찾아온 시각은, 점심시간이 훨씬 지나 저녁식사 준비가 한창인 오후였다.
"아카반 총장님, 드디어 결심을 했습니까?"
"하하, 아직 그 정도까진 아니고 기본 방침만 합의된 상태입니다. 생존자를 최대한 구해야 한다는 젊은 친구들의 의지가 워낙 강경해서 말이죠. 허허허."
"타인의 생명을 소중히 하는 것. 그것은 비난 받을 일이 아닙니다."
"저 또한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습니다. 냉혈한 보다야 인간미 넘치는 사람을 좋아하지요."
"어쨌거나 나는 궁금합니다, 당신의 구체적인 의뢰내용."
총장은 사뭇 딱딱하게 변한 그의 사무적인 태도에 신경쓰면서 말했다.
"음... 의뢰에 앞서 루카스 님의 동료분께 몇 가지 더 여쭤보고자 합니다."
"그 과정이 반드시 필요합니까?"
"예. 사태를 정확히 파악해야 올바른 의뢰를 할 수 있을테니까요. 물론 동료분을 아까처럼 곤혹스럽게 만들진 않겠다고 약속드립니다. 이보게, 지르츠?"
“...예, 총장님.”
이름 불려 한 발짝 앞으로 나온 집행부 부장이 머리를 넙죽 숙였다.
"아까는 제가 감정이 너무 앞섰습니다. 정식으로 사과드립니다. 무례를 용서하여 주십시오."
지르츠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는 꼴을 보니, 아카반 총장의 압력에 못이겨 사죄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흠..."
루카스는 물끄러미 시선을 돌려 결정권을 넘겼다. 상처 받은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폴라였기 때문이었다.
“괜찮습니다. 지난 일은 잊었습니다.”
다행히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용서와 더불어 수락의 의사를 밝혔다.
"그리고 저의 비공식적인 견해라도 상관 없으시다면, 총장님의 질문에 답변 드릴 용의가 있습니다."
"비공식적이라..."
"네. 변명같이 들리시겠지만, 저는 샌더스 총통 각하의 직할대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때문에 인가받지 않은 발언은 매사 주의해야 하며, 사실 이마저도 어느 정도의 징계를 각오해야 하기 때문에... 아카반 총장님과 연맹 측의 너른 양해를 바랍니다."
“그렇군요. 입장이 그러하시니 선택의 여지가 달리 없겠군요. 허허허.”
다행히 아카반 총장은 생각이 유연한 인물이었다.
“좋습니다. 비공식이긴 하나 정보의 신뢰성이 높다는 것에 만족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무엇보다 먼저 이 역병의 원인이 저주라고 하셨던 이야기에 대해 보다 상세히 알려주시겠습니까?"
폴라는 지금쯤 원로회 내에서 공개여부를 두고 한창 심의중일 정보를 용기 있게 꺼냈다.
"이 저주의 기원은 2대 정령왕이십니다."
"저, 정령왕의 저주라니..."
첫 시작부터 이 행성의 끝판왕이 거론되다 보니, 아카반 총장의 안색이 어두워지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마계 마왕을 소환하려 했던 비스마우어 일족에게 내려진 형벌이라고 생각하시면 이해가 한결 수월하실 겁니다.”
“허허...”
화가 난 정령왕이 내린 저주는, 시체처럼 싸늘하게 변이된 외관상의 문제 따윈 귀여운 장난 축에 속했다.
저주받은 일족은 거머리처럼 다른 생물의 핏속에 담긴 생명력을 지속적으로 흡수해야 목숨을 유지할 수 있었고, 햇빛에 장시간 노출되면 서서히 말라다가가 끝내는 신체조직들이 괴사해버리기에 언제나 음습한 그림자 속에 숨어 살아야했다.
게다가 이는 세대를 거듭하여 이어지도록 그들의 피에 각인된 저주인지라, 그들의 자식들도 세상으로부터 철저히 격리된 삶을 평생에 걸쳐 살아야 했다.
그나마 이들이 마계마족 엔마노의 힘을 빌려 저주의 방향성을 조정해 막강한 신체능력을 얻었기에 망정이지, 만약 그렇지 못했다면 병약한 자손들만 낳아다가 종국엔 멸족했을 것이다.
"...(중략)... 저희쪽 연구자들은 2대 정령왕께서 소멸되지 않는 한, 또는 그보다 강력한 존재가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는 한, 사실상 해주는 불가능하다고 파악했습니다. 설령 당대 정령왕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다른 행성으로 도망치더라도 최소 수십 세대에 걸쳐 잔존하게 된다고도 전해지지요."
폴라의 친절한 풀이는 청중으로 하여금 고개를 절로 끄덕이게끔 했다.
"어이구... 소름 돋을 정도로 너무 가혹하군요. 하기사 이 세계를 초토화시킬 뻔한 중죄를 지었으니..."
- 흠칫.
대화에 심취한 네 사람이 살짝 움찔한 루카스를 인지 못한 가운데 폴라의 이야기가 본 궤도에 올랐다.
"하지만 귀측에서 현재 맞서고 계신 저주는, 앞서 설명드린 것과 결이 조금 다릅니다.”
-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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