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와 그 남자의 고충 (3) + 편법, 꼼수. 그리고 잔머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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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다섯에 요정족 셋. 이들이 오드노아의 수도, 메디오스페라로 향하는 여행길은 가히 최고라고 말해도 허언이 아닐 만큼 순탄했다.
무엇보다 오드노아 측 외무전담부서가 빠릿하게 움직여 경로상에 있는 실권자들에게 방문과 협조를 미리 구해놓은 까닭에, 모든 검문절차의 생략은 물론 숙식과 관련된 자잘한 불편함마저 찾아내기 힘들 정도였다.
그래서일까? 한 번은 연일 지속되는 단조로운 나날에 신물난 페이가 장난기를 표출하기도 했었다.
"뭐, 뭐라고요?! 다시 말씀해주세요, 페이 씨!"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녀에게 저격 당한 표적은 일행 중에 가장 만만했던 레이첼이었다.
"앗... 아아, 모르셨군요. 제가 괜한 말을 했네요, 레이첼 양. 못 들으신 걸로 하시죠."
"잠깐만요, 페이 씨! 그러니까 루카스 님께서 야스민 양을..."
"쩝... 거의 매일밤 힘으로 거칠게 몰아붙이곤 한답니다. 이건 저 뿐만이 아니라 폴라도 같이 목격한... 틀림없는 사실이죠."
"세상에, 어쩜 그럴 수가!"
"으휴... 저희가 중간에 여러 번 만류도 했었지만... 야스민 양이 오히려 루카스 님을 두둔했더랬지요. 자신이 원해서 하는 일이라고, 그러니까 괜찮다고... 쩝... 그때 제 가슴이 얼마나 뭉클하고 찡~ 했었는지..."
실상은 강도 높은 훈련의 두루뭉술한 묘사였으나, 레이첼의 머릿속에서 이뤄진 해석은 페이의 노림수대로 진행됐다.
"이, 이 파렴치한 짐승! 내가 그냥 확!!!"
'크하핫! 월척이닷!'
이후 극으로 분노한 그녀가 한창 저녁식사 중인 루카스를 찾아가 심한 말에 삿대질을 곁들인 모습과, 차후 오해가 풀린 레이첼이 페이를 향해 게거품 무는 광경은 쉽사리 잊기 힘든 추억이자 회자거리로 승화했다.
"이쒸! 페이 씨! 거기 안 서욧!"
"느으이히히힛!"
물론 이렇게 술안주로 두고두고 곱씹힐 사건이 페이와 레이첼 사이에서만 일어났던 것은 아니었다.
여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보름은 족히 지났을 어느 날, 페이의 든든한 동료인 폴라에게도 일기장에 따로 기록할 일이 발생했다.
"어이, 이봐. 이제 슬슬 말해봐라."
"네? 갑자기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야심한 시각에 폴라만을 따로 불러낸 루카스는, 지금까지의 이동경로가 표시된 헤트만 군사지도를 그녀에게 휙 던져주며 말했다.
- 풀럭~.
"앗!"
"어째서 멀리 돌아가는 거지?"
"이, 이런 정밀지도는 대체 어디서..."
"그건 알 거 없다. 그보다 너는 내가 좋게 대해줄 때 그 꿍꿍이를 털어놔야 할거다."
루카스가 대뜸 불러서 정곡을 찌를 줄 몰랐었던 폴라는, 정신이 순간 아찔해졌다. 그러나 알랭 단장이 우수대원 중에서도 특별히 손꼽는 그녀답게 냉철한 이성을 놓지 않았다.
"아, 안 그래도 내일 모레쯤 정식으로 부탁 드리려 했습니다."
"시답잖은 변명은 그만. 너흰 내게 무엇을 원하지?"
"......"
폴라는 단호한 루카스의 추궁 앞에선 오직 진솔함만이 최선의 대처라고 판단했다. 하여 그동안 전전긍긍해왔던 자신의 속내를 고백했다.
"...현재 정령왕의 조각이 봉인된 지역 중 한 곳으로 이동 중입니다. 그곳의 재봉인을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지난번 나셴-바실커스 때와 같이 해주신다면 더 바랄 게 없고요."
"음? 뭐지? 기존 봉인에 결함이 있나? 왜 줄줄이 문제지?"
"맹세코 결함은 아닙니다. 본래라면 앞으로 3천 년 동안은 이상이 없었어야 했거든요. 최근 저희 지도부 측에선 누군가의 악의적인 훼손을 확인했고, 최선을 다해 집중조사 중입니다."
"흠..."
"저희 나라에 호의를 베풀어주실 순 없겠습니까?"
되돌아온 루카스의 반응은 오드노아 지도부와 그녀의 예상대로 심드렁하기 짝이 없었다.
"거절한다. 나는 이 기회에 분명히 밝히겠다. 가장 중요한 봉인수정은 내 마음대로 얻을 수 없다. 그건 신탁자인 나디아에게 먼저 물어봐라."
"그럼 재봉인할 적에 도움이라도... 아니면 하다 못해 돌발상황 발생시에 지원만이라도 부탁 드립니다."
"솔직히 말하면 귀찮다. 게다가 내가 굳이 도울 이유도 모르겠다. 너희 종족은 충분히 뛰어나고, 나는 너희가 보유한 전력을 적극 운용한다면 모든 문제를 너끈히 해결할 수 있다고 본다."
"그거야 최대한의 전력보존이 절실한 상황이라 그렇습니다! 더욱이 현재 감당해야 할 전장이 너무나 많고, 심지어 넓은 범위로 분산되어 있어 신속한 연계작전도 불가능에 가깝..."
"마법은 뒀다가 뭐 할 거지?"
"누군가는 눈치챌 겁니다. 각 나라마다 뛰어난 마법사는 존재하니까요."
"그렇다면 외교문제일 뿐이군. 사전 양해를 구하면 될 일이다."
"그럼 더는 비밀작전이 아니게 됩니다!"
"내 알 바는 아닌 것 같다."
"읔..."
"너희에게 고집부릴 여유가 남았다는 건, 덜 긴급하다는 반증이다."
"......"
발끈한 감정을 잘 추스른 폴라는 논점을 돌렸다. 허나 계속되는 루카스의 철벽도 만만찮았다.
"아, 당연히 루카스 님을 공짜로 부려먹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괜찮다. 나는 딱히 필요한 거 없다. 그냥 안 받고 안 할 거다."
'아잇! 진짜!'
페이가 이 자리에 있었으면 냅다 들이받았을 정도로 루카스의 입장은 확고부동했다. 그렇다고 폴라는 이대로 포기할 수도 없었다. 총통의 명령이 직속으로 하달된 이상, 그녀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교섭을 원만히 이뤄내야 했던 것이다.
'훗날 갑자기 생길 지 모르는 긴급상황을 고려하면, 워프게이트나 막대한 자원이 소모되는 행성이동용 웜홀생성기의 사용권을 처음부터 제시해선 안 돼. 그건 동맹체결을 위해서라도 무조건 남겨야 하는 최후의 카드야. 으음... 우선 중요도가 낮은 미끼로 이 인간의 흥미를 끌자. 적당히 간을 보는 거야.'
그녀는 야스민을 훈련시키는 와중에 야금야금 얻어낸 정보를 토대로 준비한 대책. 그 몇 개의 얄팍한 당근들 중 하나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저기... 우연히 들었습니다. 로비샤 양에 대해서요."
"...그 말이 왜 지금 나오지?"
돌연 매섭게 정색한 루카스의 표정은 폴라의 기대치를 아득히 상회하는 수준이었다. 그렇기에 폴라는 기껏 유도한 그의 관심이 분노로 고정되기 전에 재빠르게 말을 덧붙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절대 나쁜 의도로 꺼낸 이야기가..."
"그녀에게 수작부리지 마라. 그랬다간 나는 진심으로 화낼 거다. 너희 종족을 사악한 이교도와 똑같이 취급할 거다."
"수, 수작이라니요, 당치 않습니다! 전 그저 루카스 님께서 재봉인 문제해결에 도움을 주시면, 최소 1개 분대 이상의 병력이 자히드 남작령에 파견되도록 상부에 건의하려 했습니다. 순수한 선의와 우호의 표현으로써요!"
"?!"
로비샤의 안전문제는 루카스의 귀를 번쩍 뜨이게 했다.
"이 파견부대의 주임무는 로비샤 양의 호위가 될 것입니다. 아실지 모르겠지만 트로돈 침략부대의 공간도약은 지역 곳곳에서 무작위로 발생중입니다. 로비샤 양이 머물러 계신 지역이 언제까지고 안전하리란 보장은 그 어디에도 없잖습니까?"
"......"
"현재 고도로 훈련된 저희 전투병력의 운용이 매우 팍팍한 실정이긴 하나, 만약 루카스 님께서..."
- 텁.
루카스가 폴라의 어깨 양쪽 위에 두 손을 뜨근하게 올려놓았다. 그의 진중한 눈매에서부터 비롯된 중압감은 실로 엄청났다.
'아뿔싸! 밑밥깔기용으론 너무 예민한 사안이었나?'
본인의 경솔함을 자책한 폴라가 잔뜩 긴장하여 몸을 움츠렸으나, 결과적으로 그것은 무의미한 심력소모,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내, 내게 맡겨라! 아니, 내가 꼭 하고 싶다!!!"
그녀의 예상과는 전혀 다르게 루카스는 굉장한 열정을 내비치고 있었다. 급하게 빠져 나오느라 로비샤에게 아무 것도 챙겨주지 못했던 지난날의 과오가, 그의 심장과 이성을 마구 뒤흔들었던 것이다.
이런 의외의 맹점은 루카스에게서 아쉬운 소리마저 뽑아내는, 실로 놀라운 업적까지 일궈냈다.
"절대적으로 부탁한다! 적극 협력하겠다! 그러니까 방금 그 약속은 반드시 지켜줬으면 한다! 아! 이왕 하는 김에 경제적 지원도 해줬으면 좋겠다! 물론 그 대신 두 번이고 세 번이고 너흴 돕겠다!"
본인의 어휘력을 최고조로 발휘하는 루카스. 그 덕에 두 번째, 세 번째 미끼를 입 속 사탕처럼 굴리고 있던 폴라가 몹시 당황한 나머지 이성이 뚝뚝 끊길 지경이었다.
"...아... 네, 뭐... 저희 총통 각하께서 가급적 최대 3회의 도움을 희망하시긴 했습니다."
"그거 전부 내가 하겠다! 나만 믿어라!"
"......진심...이십니까?"
폴라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루카스의 일회성 협력이라도 너무나 간절했던 그녀의 입장에선 너무나도 큼직한 성과였던 것이다.
"맹세코 내가 문제를 제거하겠다! 혹시 너희들의 재봉인 그거 잘 안 되면 아예 영멸시키겠다! 그 위협 자체를 지워주겠다! 영원토록!"
"...가...감사합니다. 지금 즉시 저희 총통 각하께 해당 내용을 그대로 전달하겠습니다."
"나야말로 감사하다! 덕분에 근심 덜었다! 고맙다!"
"...아... 네에..."
이날 쓰여진 그녀의 일기장엔 '근육돼지가 의외로 순정파였다.'와 '몇 날 며칠 속앓이 했던 자기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다.'으로 요약되는 허탈한 심정이 나열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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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편법, 꼼수. 그리고 잔머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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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트만 본성, 3층 접견실.
"아슬라니(Aslani) 경! 베르섹(Bercek) 경!"
왕가의 복식을 갖춘 젊은 청년이 자신 앞에 무릎 꿇은 두 명의 노신을 향해 버럭 성을 냈다.
"왜들 이런 일을 벌이셨습니까? 정녕 제 정신들이십니까?"
"고정하시옵소서, ‘샤하브(Shahab)’ 저하."
"지금 제가 고정하게 생겼습니까?!"
"소신들의 충정을 헤아려주십시오!"
"이게 어딜 봐서 충정이란 말씀이십니까!"
현재 장내에는 묘한 위화감이 흐르고 있었다. 그 첫째 이유는 노신들의 위세가 헤트만 2황자인 샤하브를 오히려 압도한다는 것이었고, 둘째 이유는 중무장으로 접견실 벽면을 에워싼 십수 명의 근위병들의 기세가 오히려 샤하브를 압박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당장 중지시키세요!"
"불가하옵니다, 저하."
"뭐, 뭣이?!"
"이미 돌이킬 수 없사옵니다."
샤하브가 다시 한 번 윽박질렀다.
"이는 명백한 반역행위입니다! 그러고도 그대들이 이 나라의 대들보인 제후들이라 하실 수 있습니까?!"
하지만 작정하고 사달을 벌인 노신들에게 있어 샤하브의 고성이란, 잔뜩 겁먹고 우짖는 하룻강아지 소리 정도로 밖에 여겨지지 않았다.
"말씀이 지나치십니다, 저하. 반역이라니요? 저희는 단지 월권을 넘어 폭거 중이신 칼리드 저하를 막고 나라를 구하고자 함입니다."
"저하, 베르섹 경의 말이 옳습니다. 부디 저하께오선 냉정히 헤아리십시오. 저희 제후들의 충성서약은 오직 헤트만 국왕을 향한 것! 제 분수도 모르고 폭정을 일삼는 칼리드 왕자가 아니옵니다."
"...기, 기어이..."
차분한 말투과 태도로 따박따박 대꾸하는 제후들과 달리 샤하브의 괄괄한 목청은 미지근하게 식을 줄을 몰랐다.
"안 됩니다! 아무리 그래도 찬동할 수 없습니다! 형님을 추살하겠다니요!"
"허허이~, 그럼 샤하브 저하께오선! 저희 헤트만이 망해가는 꼴을 손놓고 수수방관하겠단 말씀이십니까?"
"......아직 그 정도까진..."
"이미 칼리드 저하의 행보는 폭군이나 다름 없습니다! 충신들의 거센 반대에도 불구하고 뻔뻔하게 시행중인! 칼리드 저하의 무분별한 강병책들을 보십시오!"
노회한 신하들의 압박은 샤하브의 젊은 혈기를 한풀 꺾어 내렸다.
"...구, 군사력 증강이라는 게 꼭 나쁜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타미아르에서도 군비증강에 열을 올린다는 첩보도 있었고 하니, 국경을 맞대고 있는 저희 나라 역시 그에 준하는..."
"정신차리십시오, 샤하브 저하!"
이제는 당근 대신 채찍을 휘드르는 쪽으로 가닥을 잡은 제후들의 음색이 날카로워졌다.
"뭐든지 정도라는 게 있습니다! 하지만 무려 80만의 병력증강입니다, 80만! 이 평화로운 시대에! 그게 진정 말이나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칼리드 저하께선 지금 정복전쟁을 준비하고 계심이 틀림 없사옵니다!"
"......"
"그러니 야욕을 만천하에 드러내기 전에 확실히 뿌리 뽑아야 합니다!"
"허, 허나... 어찌..."
"부디 무리한 정복전쟁 중 도탄에 빠질 나라살림과 무고한 백성들을 생각하여 주십시오! 현재 저희 나라가 나아갈 방향은 내실을 다지고, 상단들을 키워 경제를 성장시켜야 하는 것이지, 결코 침략전쟁이 아니란 말입니다!"
명분에서 확 밀려버린 샤하브의 이야기가 다소 옹색해지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부, 분명 오해일 겁니다. 뛰어난 예언능력과 지혜를 십분 활용하여 나라의 국고에 천금을 쌓아 올리신 칼리드 형님이시잖습니까? 그러니... 조, 조금만 더 차분히 지켜보심이 어ㄸ..."
어떻게든 동생이 형을 감싸려 했으나, 해가 갈수록 유명무실해지는 칼리드의 예언능력 따윈 딱히 유의미한 고려대상이 아니었다.
"거듭 말씀드리오나 불가합니다. 칼리드 저하께서 소수의 호위만을 대동하고 급히 출궁하신 지금이야말로, 천신들께오서 우리 왕실에 안배해주신 기회이옵니다!"
"그렇습니다. 베르섹 경의 말 그대로입니다. 칼리드 저하가 외부 병력과 합류한다 한들 쉰 명이 채 안 됩니다. 제아무리 그들 각각의 기량이 뛰어나다 해도, 이미 파견된 3천의 왕실군을 당해낼 순 없사옵니다."
"......"
아슬라니 제후는 극비리에 이뤄진 칼리드의 출어와 세부사항까지 꿰뚫고 있었다는 사실을 넌지시 강조하며, 샤하브에게 이제 슬슬 현실을 받아드리라는 말을 덧붙였다.
"부디 저하께오서 왕좌에 올라 나라의 기강을 바로 잡아주십시오!"
"으으..."
샤하브는 이제 돌이킬 수 없는 사태가 됐음을 직감했다. 이 이상 본인이 어찌할 방도가 없음 또한 깨달았다.
'내가 너무 안일했다. 결국... 칼리드 형님께서 옳으셨던 거야.'
-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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