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률을 읽는 소녀 (3)
* * * * *
한편 항만조합 하급관리인 개러스는, 매형의 소개로 찾아온 루카스의 사정을 들은 뒤 본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을 찾고자 이런저런 질문들을 던졌다.
"꼭 니시올로로 순례를 가셔야만 하는 겁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틀렸습니다. 나는 이야기 배웠습니다, 거기가 아비세르툼과 가장 가깝다고."
"큼, 그렇다고 한다면... 아하! 그럼 차라리 '이넨카(Inenka)'행을 알아보시는 건 어떠십니까?"
"이넨카?"
"솔직하게 말씀드려서 니시올로 보단 인기와 유명세가 뒤쳐진 순례 지역입니다. 하지만 이 섬에서 속히 벗어나고자 하신다면 그 편이 여러모로 괜찮지 않을까 싶네요. 니시올로와 거리를 비교해도 대충 보름 밖에 차이가 안 나는 데다가, 그쪽 배편이라면 제가 연줄을 좀 써서 연결해드릴 수도 있거든요."
"오, 그렇습니까?"
"네. 라구루 연합이 제멋대로 건드리지 못하는, 이 섬에서 몇 안 되는 배편 중에 하나라고 보시면 됩니다."
"아하! 나는 진실로 그것을 원합니다."
개러스는 루카스에게 약간이라도 보탬이 되고자 유용한 정보를 하나 더 덧붙였다.
"하하하, 좋습니다. 가급적 내일 오전 중에 출발하는 일정으로 알아봐 드리겠습니다. 아, 참고로 이넨카에 도착하신 후 '인디나(Indina)'로 길게 이어지는 '비아반(Viavan)' 대교를 이용하시는 여행경로를 추천합니다. 크~, 거기 경치가 상당히 멋드러지거든요! 몇몇 상인들은 성지순례의 숨은 명소라며 적극 권장할 정도랍니다."
"오오! 거듭 감사합니다!"
"에... 다만 한 가지 흠이 있는데... 이게 제후령 직할로 운영되는 범선이라 다른 배편보다 값이 2배 가까이 비싸다는 겁니다."
"아아, 다행히 그건 내게 아무 문제되지 않습니다."
루카스는 러셀이 뇌물로 찔러줬던 돈주머니 중 하나를 대충 뒤적여 대은화 5닢 가량을 꺼냈다. 그리곤 그것을 개러스의 겉주머니로 슬그머니 밀어넣었다.
"헉, 너무 많습니다! 구, 굳이 이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안 그래도 어제 저희 누이를 도와주신 것에 대한 보답을 꼭 하고 싶었던 터라..."
"아닙니다. 당신 덕분에 나는 시간과 노력을 많이 아꼈습니다. 나는 잊지 않겠습니다, 당신의 친절을."
"...아하하, 제가 딱히 이런 걸 바라고 한 게 아닌데..."
"합당한 보상입니다. 뱃삯을 제외한 나머지는 당신의 시원한 술값입니다."
"에고고~, 그럼 감사히 받겠습니다."
그렇게 둘 사이의 훈훈한 실랑이가 마무리될 때쯤이었다.
"이게 어딜 도망가!"
"꺄-악-!"
어느 앳된 여자의 머리카락을 움켜진 사내는 다짜고짜 그녀의 뺨부터 매섭게 후려쳤다.
- 짜악-!
"악!"
"아오, 생각할수록 열 뻗치네! 니 년 때문에 우리 손해가 얼만지나 알아?!"
"아아악! 사, 살려주세요!"
"야, 이 년아! 니 동생 년은 또 어따 팔아먹었어?!"
"모, 몰라요!"
"확 씨! 당장 오늘부터 밤낮없이 굴려지고 싶어?! 하룻밤에 백 명씩 상대하게 해줄까, 앙?!!"
"아악! 잘못했어요!"
"그러니까 어서 바른대로 말해, 이 년아!"
“전 몰라요!”
- 웅성웅성.
벌건 대낮에 펼쳐지는 광경치곤 상당히 우악스러웠다. 가녀린 여인을 대하는, 특히 덩치와 더불어 인상마저 험악한 사내의 태도가 몹시 사나웠다.
"...쯧쯧."
개러스는 저항도 제대로 못한 채 연신 얻어맞는 아가씨를 측은히 바라보며 혀를 씁쓸하게 끌끌 찼다.
"에잉, 저것들이 이젠 때와 장소도 안 가리고 벌건 대낮에 저 ㅈ랄을 떠는군요."
"저들이 이 섬에서 이름난 라루구입니까?"
"네, 경비병들마저 조용히 자리 뜨는 걸로 봐선 확실합니다. 저어기~ 보이시죠? 어깨에 라구루 문신이 있는 저 인간이 간부인 게 틀림없네요."
"흠......"
썩 못마땅한 표정의 루카스를 본 개러스는, 재빨리 그에게 몇 마디의 언질을 덧붙여줬다. 루카스의 의미심장한 눈빛과 유별나게 도드라진 체형까지 고려해볼 적에, 그가 왠지 저 난리통에 대뜸 참견할 것만 같은 촉을 강하게 느껴서였다.
"저기... 루카스 씨. 외람되지만 계속 못본 척하시는 편이 여러모로 이롭습니다."
"......"
"이 예덴 섬에서 라구루 패거리와 안 좋게 엮인 사람치고, 그 다음날 물고기밥이 되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겁니다. 뚜렷한 증거는 없지만서도... 암튼 괴담은 하루아침에 허투루 생겨나진 않잖습니까? 게다가 루카스 씨는 어젯밤에도 엮이셨는데, 괜히 지금 나서셨다가는 좋은 꼴 못 보실 겁니다."
"크흠, 신이시여......"
루카스가 창조주까지 찾으며 탄식했다. 만약 그가 기사단장 바리온이었을 시절이라면 즉각 땅속 뿌리까지 파헤칠 사안이었기에, 그의 속내는 마구잡이로 뒤엉킨 실타래처럼 베베 꼬여만 갔다.
그러나 상상을 행동으로 옮기진 않았다. 그의 처지가 그 옛날과는 상당부분 달라져 있는 까닭이었다.
『 못된 짓 좀 하면서 살아줘! 명세기 대악마의 직계자인데, 평소 행실이 착하디착한 순둥이면?! 내 수하들이 과연 나를 어찌 생각하겠나, 응? 』
막말로 오늘날의 그는 명실상부한 고위마족이었다. 향후 마계로 돌아가 통일과 지배를 논해야 하는 그에겐, 조건 없는 이타적인 선행이란 결코 있어선 안 될 치명적인 결함이나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지난 러셀과의 인연에서, 한순간의 선행이 어떤 혼선을 초래하는지 경험한 바도 있었으므로 그는 이를 악물어 자제했다.
'불의를 모른 척 외면해야 한다. 철저히 방관해야만 한다. 나는 이기적인 마족이다. 나는 이기적이고 약아빠진 더러운... (하략)...'
뿐만 아니라 마계차원문 연구에 대한 디마우스의 적극적인 협력를 약속받은 지금으로썬, 루카스가 끝까지 책임지지 못할 일에 이리저리 간섭하는 일 또한 부적절하기도 했다. 단순히 술집에서 시비 붙는 것과 백주 대낮에 일어나는 조직범죄에 얽히는 것 사이에는 매우 극명한 차이가 존재하는 까닭이었다.
"후우... 알겠습ㄴ..."
끙끙 앓던 루카스의 사고회로는 이내 떨떠름한 결론으로 마무리 되려 했다. 그러나 그때 새로운 돌발변수가 ‘짠!’하고 등장했다.
- 다다다다다...
"아찌이-!"
"...?"
맞은 편 골목에서 툭하니 나타난, 생전 처음보는 어린 소녀가 그를 향해 알 수 없는 외마디를 꽥 지르며 죽자살자 달음질해온 것이다.
하지만 그 소녀의 빼죽한 외침을 들은 라구루 간부 또한 나디아의 얼굴을 단박에 알아보고서 고함쳤다.
"...어? 어? 엇?!!! 야! 저, 저 계집애! 야! 야! 야-! 저 계집년 잡아! 무조건 잡아!!!"
이후 죽을 힘을 다해 루카스에게 매달린 소녀의 목소리는, 부하들을 향해 고래고래 성깔부리는 간부보다도 컸다.
"아, 아찌이이-!!!"
"?"
물론 아무리 그랬다손 치더라도 초면인 소녀에게 옷자락 붙잡힌 루카스의 당혹감보다는 작았다.
"아찌이! 아아! 우우우리이! 어언니이! 아찌이! 사려어어!"
"......"
아이의 말 자체는 정확히 알아들을 수 없었으나, 소녀가 붙잡혀 얻어맞는 처녀를 연거푸 가리키며 울부짖는 모습만으로도, 이 여자아이가 자신에게 무엇을 이야기하고파 하는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크크크, 이 쬐깐한 년이 아주 약아빠졌군! 이게 어디서 잔대가리를 굴려?!"
어느 폭력배의 말따라, 나디아의 판단은 주변 구경꾼들조차 쉽게 납득할 정도로 매우 적절해보였다. 실제로 이 근방 무리 중에 가장 잘 싸우게 생긴 덩치꾼을 꼽으라면, 그것은 의심의 여지도 없이 단연 루카스였기 때문이었다.
"이리 와! 아오, 이참에 네 년도 저 년이랑 같이 혼쭐을 단단히 내줘야겠구나, 크으흐흐흐!"
"놔아아! 이거어 놔! 아찌이! 아찌이-!!!"
"......"
루카스는 눈을 질끈 감았다. 한 달음에 뛰어와 소녀를 우악스럽게 잡아끄는 선원의 거친 행동과, 살려달라며 최후의 최후까지 발악하며 몸부림치는 소녀가 몹시 불편해서였다. 더군다나 이 상황을 어렵지 않게 해결할 수 힘을 소유한 그였기 때문에, 스스로에게 모멸감마저 들려 했다.
'나는 마족이다. 나는 부정한 존재이다. 나는 잔혹하기 짝이 없는 대악마 루치펠의 직계자다. 나는 극도로 이기적인 ㅁ...'
그는 독백에 독백을 거듭하며 현실을 애써 외면했다. 더불어 나디아가 기를 쓰며 억지로 그의 손에 쥐어준 쪽지마저도 매몰차게 털어버리려 했다.
“...?!”
하지만 새삼 느껴진 고급 양피지 특유의 부드러운 촉감이 그를 당황케 했다. 아니, 보다 정확하게는 이 천조각에 짤막하게 새겨진 천상 언어로 인해 그의 사고가 잠깐 마비된 것이라 하겠다.
『 내 판관을 도와라, 이 더러운 마귀의 종자야! -아리사엘- 』
루카스 손바닥 위의 양피지 조각은 그가 내용을 끝까지 읽어내림과 동시에 푸석푸석한 미세먼지가 되어 서서히 사라졌다.
"...그래, 그런 거였군."
당연하게도 산산히 바스러진 것은, 한낱 양피지 조각 뿐만이 아니었다. 천상의 언어로 쓰여진 아리사엘의 전언. 이는 루카스의 완고한 태도를 돌변시키기에 모자람이 없었다.
"하하핫! 과연 하늘의 계시로구나! 이 또한 창조주의 인도하심이라! 아멘!"
- 텁.
어느샌가 루카스의 오른손은 나디아에게 손찌검을 하며 거칠게 질질 끌던 사내의 어깨 위에 올려져 있었다. 이게 너무나 갑작스러운 행동이었던 지라 개러스가 미처 만류할 틈조차 없었다.
"뭐, 뭐야, 새꺄?! 우리가 누군지 모, 몰라?"
루카스의 엄청난 완력에 크게 당황한 사내가 애써 태연한 척 성질 부렸으나, 안타깝게도 전투태세로 돌입한 상태의 루카스는 기본적으로 대화가 불가능한 존재였다.
- 뻐억-!
"웈!"
일언반구 없이 선원의 의식을 대뜸 끊어버린 루카스는, 기절한 피해자를 그대로 바다를 향해 휙 집어 던지며 보다 완벽한 마무리를 대중 앞에 선보였다.
- 풍덩!
이에 화들짝 놀란 인근 군중들은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질 세라, 신선하게 피어난 갈등을 두고 좌우로 빠르게 우르르 물러났다.
"저, 저 놈의 새끼가 쳐돌았나! 우리가 라구루 연합인 거 알면서도 저 ㅈ랄한 거 맞지?"
"씨ㅂ 놈의 시끼가 아주 뒤지려고 환장했구만?!"
잠시간 어리둥절했던 맞은편 라구루 폭력배들은 상황을 뒤늦게 인지하고서 크게 분개했다. 그러나 선뜻 달려들진 못했다. 사실 그들의 동료가 이렇다할 반항도 제대로 못한 채, 부두와 정박한 범선 사이의 바닷물 속으로 자석처럼 딸려 들어간 모습은 그만큼 놀라웠던 것이다.
그러던 그때, 한데 똘똘 뭉친 라구루 무리 중 몇 명이 루카스의 행색을 살피다가 지레 손뼉을 '탁' 쳤다.
"어? 저 새끼 저거, 저거! 2항사님! 어제 술집에서 우리 애들 건드렸던 놈입니다!"
"뭐? ㅆ발?!"
부하의 고자질을 듣자마자, 왼쪽 목덜미에 문신이 새겨진 2항사의 얼굴가죽이 우들투들 뒤틀렸다. 여느 때 같았으면 부하들에게 일단 쑤시고 생각하란 명령부터 내렸을 터였다.
하지만 그리하기엔 루카스에게서 풍겨나오는 기세가 너무나 흉흉했다.
'씨부랄! 설마 이게 그 프라나인가 뭔가하는 그 뭐시기 아냐?’
스멀스멀 피어난 경각심은 잔뜩 부푼 그의 성질머리마저 이성적으로 차분하게 가라앉힐 정도였다.
'몇 급 전투사인지는 몰라도 확실히 예삿놈이 아니야. 거기다 연달아 시비 거는 일도 어쩌면 혹시... 그래! 다른 조직의 사주를 받고서 의도적으로 작업치는 거야!''
우선 시간을 끌어야 한다며 생각을 정리한 그는, 가급적 능청스럽게 루카스와 대화를 주고 받는 가운데, 뒷짐진 양손으로 가까운 부하에게 지원요청 수신호를 보냈다.
"누, 누가 보낸 거냐?!"
"......"
"막말로 우리가 대로변에서 사람한테 칼침 놓은 것도 아닌데, 이리 대놓고 끼어든 걸 보면 경비대 소속은 아닌 것 같..."
모름지기 전투 중 대화란 사치에 지나지 않으며, 그 나불대는 맛간은 매우 훌륭한 찬스였다.
- 팟!
그리고 루카스는 이런 호기를 잘 이용하는 인물이었다.
"읔! 비, 비겁한 새ㄲ..."
- 퍽! 퍼벅!
"어억!"
"2항사님!"
- 뻐걱! 빡!
"케흑!"
"자, 잠깐! 잠깐만!"
- 빡!
“커헉! 아아악!”
루카스의 몸놀림을 보고 있노라면, 혀를 놀리는데 사용될 호흡과 힘을 아껴 한 대라도 더 때리는 행위가 막싸움에선 얼마나 대단히 효율적인가를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끄으윽... 이, 이 새끼 너! 너는 설마 '네부칼(Nebcal)' 쪽에서 보낸...!"
- 빠악-!
"으뤩!"
그래도 찰지게 두들겨 맞는 이들에게 다행인 부분이 있었는데, 그것은 다름 아닌 루카스가 그들 묵숨까지 갈취할 작정은 아니란 사실이었다.
"멍 때리지 말고 어서 지원 불러, ㄱ새뀌들아! ...흐거컥!"
- 작가의말
인기 폭망이지만 연중은 안 합니다.
손절하기엔 너무 많이 써놨... 암튼! 현재 목표는 완결작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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