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상한 혼잣말 (10)
* * * * *
대지가 영주성을 온통 집어삼키던 시각. 제3접객실에서 죽치고 있던 루카스 또한 이 다음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몸을 풀기 시작했다.
- 우드득. 우드득.
그의 근육들이 천천히 풀리며 뽐내는 소리가 베스퍼의 귓가엔 그렇게나 자극적이었다.
‘참나, 좀 있으면 곧 마흔인데 콩깍지라니...’
스스로도 주책이라 생각됐지만, 이미 마음 된통 빼앗겨 주체할 수 없게 된 심장은 일종의 불가항력이나 마찬가지였다. 어쩌다 루카스의 눈길이 자신을 스칠 적마다, 그녀 특유의 냉소적인 표정을 유지하기도 벅찼다.
‘왜 이제와서...’
누구나 인정하는 학계의 권위자가 되기로 결심한 이후로, 하루도 쉬지 않고 끊임없이 정진해온 그녀였다.
완벽을 추구하는 자로써 마치 잘 벼린 칼날처럼 실적을 쌓았고, 한 치의 오차도 타협하지 않았으며, 남들이 꺼려하는 궂은 업무를 도맡아 충실히 임했다.
비록 그 과정에서 쌍욕이 절반가량 함유된 ‘빙녀’라는 꼬리표가 따라붙었을지라도 전혀 개의치 않고 최선에 최선을 다했었다.
그리 짧지 않은 삶. 그녀의 주변을 맴돌다 지레 질려서 떠나간 인연도 있었고, 업무와 연구에 방해가 되기에 맴도는 것조차 허락치 않았던 경우도 있었다.
때론 외로움에 사무쳐 이성을 만나보기도 했었으나, 관계를 6개월 이상 지속해본 적도 없었고, 심지어 연애 같은 연애는 11년 전이 마지막이었다.
‘에구... 어쩌면 나도 세월에 지쳐버린 걸까?’
최근 들어 본인 재능의 한계를 깨달았기에, 마음가짐이 이전과 달라졌는지도 몰랐다. 흡사 불씨만 남은 모닥불이, 어둠을 환히 비추던 지난밤을 그리워하듯이 말이다.
밤낮 없이 필사적으로 노력하면 8성도 능히 가능하리라 믿었던 본인의 기량은 아직 6성에도 닿지 못했고, 그래도 남은 평생을 제물로 바치면 대마법사의 반열인 7성은 어찌저찌 가능하지 않겠냐란 자신감도 묽게 희석된지 오래였다.
‘그래서 듬직한 누군가에게 기대어 쉬고 싶어졌는지도...’
이렇게 스스로의 내면을 성찰하던 그녀의 상념은, 기름 램프에 불을 붙이던 루카스에 의해 깨졌다.
“괜찮습니까, 베스퍼 양?”
“후훗, 네. 덕분에요.”
겨우 몇 발자국 거리에선 여전히 괴물들이 결계를 마구 두들겨 대고 있었다. 더욱이 건물이 봉쇄되면서 엄습한 어둠 때문에 야간순찰용 램프의 빛이 아니면 코앞의 사물도 판단키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러니 그녀가 공포에 짓눌려 까무러친다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하지만 베스퍼는 왠지 두렵지가 않았다. 오히려 평소와 다름 없이 차분해지기까지 했다.
그리고 그 이유야, 그녀 자신 또한 익히 잘 알고 있었다.
‘그래! 지금이 아니면 안 돼!’
오늘과 같은 기회가 다시 찾아오지 않을 거라 생각한 그녀는, 용기 있는 고백이란 선택지를 과감히 골라 실행했다.
“저기 잠깐만요, 루카스 씨.”
“?”
“이번 일이 전부 잘 마무리되면 저녁식사 어떠세요? 단둘이서만요.”
워낙 부끄러운 기색이 뚜렷하다보니, 루카스조차 그녀의 의중을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었다.
“음, 이것은 데이트 신청입니까?”
“네, 맞아요. 고민 끝에 엄청 용기내봤습니다. 혹시 적극적인 연상녀가 불만이시라면 솔직히 말씀해주세요. 깔끔하게 포기할께요.”
“하하하!”
“......”
"아아, 이걸 오해해선 안 됩니다."
루카스는 베스퍼가 방금 전 자신의 웃음을 곡해하기 전에 재빨리 해명했다.
“당신은 나보다 연상이 아닙니다. 그래서 웃었습니다.”
“호호호, 좋게 봐주셔서 고마워요. 하지만 제가 열심히 관리하며 살아와서 그렇지, 이래봬도 내후년에 마흔이랍니다.”
“풉.”
“왜, 왜 그러시죠?!”
”아, 미안합니다. 내가 내 의지대로 살았던 날만 골라 따져도, 당신의 3배가 넘기 때문에 헛웃음이 나왔습니다.”
“!”
깜짝 놀란 베스퍼의 머릿속엔 정상적인 의문들만이 들어차진 않았다. 가령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지? 의지대로 살아온 날은 또 뭐고? 아닌 날도 있나?’와 같은 반문이 쌓이기도 했지만, 그녀는 그것보다 산뜻하게 번뜩인 희망에 정신이 확 쏠렸다.
‘그 말인즉슨! 내가 연하? 앗싸! 그럼 나도 가능성이 있는 거잖아!’
그러나 그것도 잠시. 연이은 루카스의 부가설명은 그녀를 금방 시무룩하게 만들었다.
“안타깝지만 나는 거절해야 합니다."
"......"
"나는 이미 사랑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앗... 네에...”
어느덧 나락으로 추락한 그녀의 기분을 눈치챈 루카스가 몇 마디의 위로를 보탰다.
“당신은 사려도 깊고 매우 매력적입니다. 또한 사치 싫어하고 똑부러지며 자기 사람들을 많이 아낍니다. 만약 내가 로비샤를 만나지 못 했었더라면, 나는 당신의 고백을 듣는 순간, 아주 기쁘게 호응했을 겁니다.”
“...빈 말이라도 고마워요.”
“그냥 하는 말이 아닙니다. 나는 이런 걸로 거짓말 안 합니다. 내가 좋은 걸 좋다고 표현했을 따름입니다.”
“치이~, 이런 경우엔 정직하지 말아주세요. 차라리 노처녀라 싫다고 하셨으면 미련도 안 남았을 건데...”
"...어... 음... 사과합니다. 나는 이쪽 방면으론 대단히 취약합니다. 용서를 청합니다."
베스퍼는 영 마뜩찮은 기분을 떨궈낼 겸, 진심을 가득 섞은 농담을 던졌다.
“피~, 그럼 제가 애첩이라도 상관 없다고 고집부리면, 혹시 받아주실 건가요?”
“...그것도 어렵습니다. 내 마음은 하나입니다. 그래서 한 번에 한 사람만 마음에 담을 수 있습니다.”
“아...”
능력이나 재력에 비례한 일부다처제가 보편적인 세상이어서일까? 베스퍼가 별 거 아닌 루카스의 대답 속에서 받은 충격과 아쉬움이 상당했다.
“그 로비샤라는 분, 직접 못 만나봤지만 몹시 부럽네요. 설마... 요정족?”
“아니, 그렇지 않습니다. 그녀는 요정족이 아닙니다. 참고로 나는 만나본 요정족 중 대다수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네? 왜요? 여신들도 질투한다는 호평이 나돌 정도로 아름다운 종족이잖아요?”
“그건 지금의 내겐 큰 의미가 없습니다. 물론 나도 그들의 외견은 인정합니다. 허나 나를 대하는 그들의 마음이 순수하지 않습니다. 시작부터 서로 계산적인 관계입니다. 당신의 경우와는 완벽히 반대입니다.”
“와~, 진짜 대단하시네요. 보통은 욕망을 못 이기고 유혹에 홀딱 넘어갔을텐데... 막말로 루카스 씨의 위치라면 육체적인 쾌락을 거래조건으로 요구할 수도 있는 거잖아요?”
“다소 어렵습니다. 나는 여러 가지로 별납니다.”
“호호호, 확실히 그렇긴 해요.”
루카스는 제대로 알아듣지 못한 그녀의 이해를 돕기 위해, 허리춤의 단검을 쓰윽 뽑아 맨손으로 칼날을 움켜쥐었다.
“베스퍼 양, 이걸 보십시오.”
- 쩌정-! 파사삭... 뚜둑!
“...?!”
순식간에 부스러기가 된 칼날에 이어 손잡이까지 손쉽게 아작낸 루카스는, 반대로 너무나 멀쩡한 본인의 손바닥을 탁탁 털어내 보이며 말했다.
“내가 힘을 잠시도 통제하지 않으면 대부분은 이렇게 망가집니다. 물건과 사람 할 것 없이 나는 늘 많이 긴장해야 합니다.”
“그 말씀은...”
“맞습니다. 이것은 육체적인 관계를 맺을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깜박 실수한 순간, 상대방은 불구가 되거나 목숨을 잃게 될 겁니다.”
“......”
“때문에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욕구를 채우기 힘듭니다. 그런 성관계 중에 받게 될 스트레스는 쾌락보다 훨씬 더 클 겁니다. 나는 때때로 잔인하지만, 그렇다고 살육을 즐기는 정신병자가 아닙니다. 이제 설명이 됐겠습니까?”
“...네, 무슨 말씀인지 확실히 이해했어요.”
“하하, 그렇다고 너무 심각해하진 마십시오.”
그는 진중한 반응을 보이는 그녀 앞에 램프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슬슬 움직여야 합니다. 준비됐습니까, 베스퍼 양?”
“네, 말씀하시면 바로 해제할께요.”
“......음?”
루카스는 접이식 지팡이와 마나석 7개를 꺼내던 베스퍼의 행동에 직설적으로 태클을 걸었다.
“잠깐. 그거 뭡니까?”
“아, 이거요? 레플로 지부장님께서 빌려주신 마도구에요. 잉고르펜의 지팡이라고 130년 전 대마법사 잉고르펜이 남긴 유산인데, 생긴 건 이래도 마나효율 극대화와 위력을 증폭...”
”아니아니, 그게 아니라 나는 그 잔돌 부스러기를 말합니다. 그건 마나석 중에 가장 싼 거 아닙니까?”
“네, 맞아요. 비교적 구하기 쉬운 최하등급의 마나석이죠.”
“그럼 마정석은 어쨌습니까? 나는 분명히 연맹에게 전리품을 나눠줬습니다. 이번 일에 쓰라고 무상으로 그냥 줬습니다. 그런데 아카반 총장이 당신에겐 마정석을 하나도 분배 안 했습니까?”
“아니에요. 출발 전에 받았어요. 위험한 임무에 투입된다고 특별히 10개나 주셨는 걸요?”
“근데 왜 그거 안 씁니까?”
“왜긴요, 아깝잖아요.”
“......”
“지난번 정령왕 사건 이후로 지부의 예산이 많이 쪼들려서요. 사망자 가족에게 위로금을 지급하고 나니까, 지부 인원들이랑 고용인들의 주급을 감당하기 빠듯하기도 하고... 오호호호....”
베스퍼가 사람 좋게 빙긋 웃으며 상황을 대충 넘어가려 했지만, 루카스는 입장을 단호히 했다.
“불가합니다! 마정석을 사용하십시오, 당장! 그리고 최선을 다해 보호막을 겹겹이 생성하십시오!”
“안 돼요! 이게 얼마짜리인데! 이 최상품 마정석이면 저희 지부의 살림살이에 엄청난 보탬이...”
"절대 허락 못합니다. 나는 쓰라고 나눠준 겁니다. 당신에게 전부 쓰라고는 강요 안 하겠습니다. 하지만 최소한 1개는 사용하십시오."
"싫어요, 이젠 제꺼니까 쓰고 안 쓰고는 제 마음이잖아요?!"
“동의 못 합니다. 고정된 결계와 이동가능한 보호막의 성질은 엄연히 다릅니다.”
당연하게도 지정 설치된 결계보단 보호막의 '마나소모량 대비 강도'가 더럽게 뒤떨어질 수밖에 없었고, 루카스는 이 사실을 지적하며 문제삼는 것이었다.
“걱정마세요. 굳이 마정석까진 안 써도 된다니까요? 잉고르펜의 지팡이로 보조도 할 거라서 괜찮아요!”
”불가합니다. 나는 절대로 안전과 타협 안 합니다. 나는 변수가 생기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만약 당신이 마정석을 안 쓰겠다면, 나는 여기서 임무를 중도 포기하겠습니다.”
“너, 너무하세요! 지금 겨우 이런 일 가지고 절 협박하시는 건가요?!”
”확실히 그렇습니다! 그깟 마정석보다, 그 몇 푼의 돈보다, 나는 당신의 목숨이 훨씬 더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
약 3초간 말문이 턱 막혔던 베스퍼가 이내 입술을 빼쭉 내밀어 실룩댔다.
“...알겠어요. 마정석 하나 쓸께요. 신경써줘서 고마워요.”
“훌륭한 변심입니다.”
”근데 앞으론 표현에 신경을 좀 써주셨으면 좋겠어요.”
“?”
”루카스 씨에게 고백했다가 차인지 아직 5분도 안 된 거 아시죠? 그런데 갑자기 ‘당신이 더 소중하네 어쩌네’ 하시면 제 마음이 어떻겠어요?”
“아...... 이해했습니다. 나는 사과합니다.”
“호호호, 아셨으면 됐어요.”
지금 그녀의 입가에 드리운 미소 어딘가가 쌉싸름하게 느껴지는 건, 결코 기분탓만은 아닐 것이다.
* * * * *
싸울 사람은 싸우러 튀어나갔고, 조용히 뒤따를 사람은 걸음만 차분히 옮겼다. 그리고 지금 뒤따르는 인물이야 당연히 베스퍼였다.
그녀는 150cm 쇠막대기 끝에 주먹만한 쇠구슬을 붙여놓은 듯한 금속 지팡이를 들고 이동했는데, 광원마법의 동력원으로 사용된 싸구려 마나석이 그 지팡이 머릿부분에 조악하게 묶인 상태로 주변을 훤히 비춰주고 있었다.
오일 램프 따위 보다 무려 2배 이상 밝았지만, 오히려 그 덕에 베스퍼의 표정이 2배 가량 메스꺼워보였다.
- 절벅, 절벅.
발밑에서 찰박거리는 썩은 피웅덩이와 뭉그덕대는 시체조각들은, 그녀의 한 걸음 한 걸음마다 비위를 괴롭혔다.
“으으...”
그녀가 자신의 코와 입을 가린 손수건을 꾸준히 매만지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래도 어디까지나 심하게 엮겹기만 했을 뿐, 공포나 두려움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었다는 점이 다행이었다.
물론 저 멀리에서 끊김 없이, 그리고 가늘게 메아리 치는 괴물들의 괴성으로 인해 그녀의 심장이 가끔 쫄깃해지기는 했다.
- 카학! 카학! 카학-!
하지만 거의 동시에 들리는 파열음과 그것에 딸린 의미를 잘 알고 있었던고로 금방금방 진정되곤 했다.
- 쿵. 쿵. 콰직! 뚜득! 퍼버벅!
- 끄에에에에엑!
그녀가 보기엔 결계를 박차고 전투에 돌입한 루카스는 한 줄기의 강렬한 회오리 바람이었다. 경로상 걸치적대는 물체들을 얼마나 깨끗하게 초토화시켰던지, 바닥에 흥건한 자취만 쫓아도 그녀 홀로 미아가 될 가능성이 제로일 지경이었다.
“정말 대단하네. 어쩜 머리가 멀쩡히 달려 있는 시체가 하나도 없ㅇ...”
“그래, 빌어먹게 대단하더군.”
“?!”
별안간 머리 위쪽 부근에서 들리는 차가운 목소리. 이에 화들짝 놀란 베스퍼가 소리를 쫓아 천장을 바라봤을 땐, 이미 그림자 하나가 그녀를 향해 쏜살같이 덮쳐오는 중이었다.
- 터엉-!
보호막이 심하게 꿀렁였다. 분명 일반 변이체들의 공격도 무난하게 버티던 결계와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는 강도였는데도 말이다.
- 파직! 치지직!
보호막의 에너지 공급처인 마정석에서 마나가 줄기차게 빨려나갔다. 싸구려 마나석이었더라면 10초만에 고갈됐을 심히 막대한 소모량이었다.
“쯧, 보기보다 좋은 마도구을 갖고 있었군!”
“...흐읍!”
시전자인 베스퍼 본인도 최선을 다해 대응했다. 기습에 실패한 그림자가 더는 힘으로만 결계를 뚫으려 하지 않고 보호막 자체에 간섭하기 시작한 탓이었다.
“훗, 놀랍군. 연맹이 이런 실력자를 미끼로 풀었을 줄이야!”
“흐으으읍!”
“크하하핫! 그러나 인간의 한계를 초월한 나를 이길 수 있을까?”
- 찌직... 쨍-!
보호막이 기어이 한 꺼풀 벗겨졌다. 그러나 미간을 크게 좁힌 건 오히려 그림자 쪽이었다.
“젠장! 아직 4겹이나 남았다고?! 대체 그 마나 소모량을 어떻게 전부 감당을... 아아, 마정석을 쓴 건가?”
“......”
베스퍼는 상대방과 함께 말을 섞기보다 방어막 통제에 더욱 집중했다. 조금 전 기습에서 하마터면 마법의 주도권을 빼앗길 뻔했기 때문에 방심은 금물이라 여긴 것이다.
”하긴, 나와 같은 5성 마법사를 버림패로 사용하는 건 제법 큰 손실이니까.”
베스퍼는 광원마법의 영역 안쪽으로 들어온 공격자의 정체가 쉬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토, 토르페?”
“?”
뜬금없이 정체가 탄로난 그림자는, 어느덧 코와 입을 가렸던 손수건을 풀어낸 그녀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베스퍼?”
- 작가의말
아... 이런 오탈자가 많네요. 근무 중에 짬날 때마다 수정해놓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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