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솔함이 빚어낸 결실 (1)
* * * * *
류드라 마을에서 일어난 대형참극은 국가 권력자들 사이에 두 가지의 사실을 공통화두로 끌어올렸다.
“뭬이? 신탁자?!”
“기아니크의 페테르 이바네크 공작이 신탁자에게 손댔다가 천벌을 받아?”
“와, 신탁자가 한 명이 아니라 둘이라고?! 에이~,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지!”
이 시대에 점술가나 예언자는 마법사들만큼이나 많았으나, 천신의 신탁자란 존재는 굉장히 드물었다. 신들도 많고 그에 따른 종교종파는 훨씬 더 많았지만, 교주나 대사제들 모두가 신들의 간택을 받은 성인, 성녀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들은 각자가 받들어 모시는 천신으로부터 치유 등의 몇몇 권능을 빌리는 행위는 허락 받았을지언정, 신의 목소리를 직접 듣거나 옮겨 적을 만큼의 애정은 전폭적으로 받지 못한 경우가 태반이었다.
그리고 이 부분은 선계 최고신들이 계율과 규칙을 수정하지 않는 이상, 그들보다 서열 낮은 천신들로선 바꿀 수 없는 현실이었다.
실제로도 사기꾼이 아닌 신탁자는 8성의 인간마법사만큼이나 희귀한 존재들이었다. 알쿤다 자매의 정보가 공개되기 전까진, 파마길드의 수장인 ‘바로소 트리파(Barroso Trepa)’ 외엔 신탁자로 불릴 수 있는 인물은 없었다.
물론 서방대륙 내의 유일한 단일종교 국가인 반트리슨에선 한 세기에 1명 꼴로 바스코르디아의 신탁자가 나타나긴 했으나, 당대의 신탁자는 몇 해 전에 노환으로 생을 마감하여 현재까지 공석인 상태였던 것이다.
“당장 진상을 파악해야 한다! 혹 그녀들이 자애로운 치유의 여신, 바스코르디아의 신탁자라고 한다면 응당 우리나라로 모셔와야...”
“저어... 아니랍니다, 대사제님.”
”...어... 음? 아니야? 진짜? 정말로? 아, 왜에-!”
“뮤티움 공의회는 물론이고, 헤트만 왕실에서도 확실히 아니라고 못 박았습니다. 특히 헤트만에선 언강생심 넘보지도 말라는 엄중한 경고까지 보내왔습니다. 저희쪽에서 간 보는 시늉만 해도 즉시 전면전 선포할 꺼래요.”
”쳇! 텄네, 텄어!“
어쨌든 알쿤다 자매의 인적사항이 나돌기 시작함에 따라 그녀들의 보호자 또한 자연스럽게 거론될 수밖에 없었는데, 이게 또 불러 일으킨 파장이 어마어마했다.
“트, 특급?!”
“특급 전투사란 건 요정족들의 전래동화 아니었냐? 그런 자가 실존하고 있다고?”
“참나~, 어이가 없네. 그게 말이 되냐?”
“그럼, 난데 없이 튀어나온 2명의 신탁자는 말이 됐고?”
“...둘 다 거짓 정보이라는데, 저 자식의 오른 손모가지를 걸겠어.”
“야! 내 손목을 니가 왜 걸어!”
풍문 초기엔 단순한 연막작전이나 정보교란으로 치부하던 자들도, 기아니크의 수배령을 피해 각국으로 도망친 생존자들의 증언을 듣고서 그게 아주 헛소리가 아님을 눈치챘다.
“그 소문 진짜였음. 확실함. 내가 파마 길드에 정식의뢰해서 답변 받았음.”
“헐, 대박!”
소문의 여신을 떠받드는 정보집단의 공신력은 많은 세력들이 발벗고 움직이게끔 했다.
“커험! 하루 속히 접촉해야 한다! 잘만 되면 신탁자와 전설적인 특급 전투사를 한꺼번에 얻을 수 있는! 앞으로 다시 없을 기회다!”
“훗, 느려! 난 이미 오른팔 녀석을 파견시킴!”
“아이씨~, 님아! 매너 좀요!”
그러나 실상을 까보니 모두가 뒷북치는 상황이었다. 아무리 궁리해봐도 이미 거하게 침 발라놓은 채 철벽을 전개중인 오드노아를 넘어설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흐흐. 크크. 죄송."
“아오! 경쟁 참! 뭣같이 하네!”
본인이 가질 수 없으면 차라리 부셔버려야 직성이 풀리는 자들도 왕왕 있었으나, 워낙 상대가 상대인지라 글러먹은 자신들의 성질머리를 꾹꾹 억제해야 했다.
“차라리 방해전술을...”
“쯧쯧, 게임 끝났어. 며칠 안으로 걔네 본토에 도착한디야~.”
“이런 우라질!”
“야야, 무조건 니가 참아. 안 그럼 기아니크 꼴 난다?”
“...에이썅......”
요 근래 기아니크의 국제적 입지는 바닥을 설설 기다 못해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었는데, 그 발단은 뮤티움을 대상으로한 기아니크 국왕의 전면전 선포였다.
[ 기사들이여, 무기를 들어라! 감히 우리 왕실을 능멸한 뮤티움에 복수의 철퇴를 휘둘러 세계 만방에 본을 보일지어다! 병사들이여, 진군하라! 우매한 놈들을 짓밟아 흩어버려라! ]
기아니크의 왕은 국가전쟁을 운운하기 전에 조금 더 심사숙고해야 했다. 제아무리 부모를 잃은 왕비의 등쌀과 짜증이 극심했다곤 한들 그래야 했었다. 그의 섣부른 몇 마디 발언이 결과적으로 기아니크 왕실의 몰락을 부추긴 꼴이 됐기 때문이었다.
시발점은 뮤티움과 기아니크의 전쟁소식이 서방대륙에 널리 퍼지고, 양국의 군사분계선을 기점으로 대규모 병력이 실전배치되던 어느날 아침이었다.
“어이~, 기아니크야~.”
“?”
기아니크 국왕이 딱히 신경쓰지도 않았던 세 국가가 임박한 전쟁무대 위로 대뜸 발을 뻗었는데, 해 뜨기가 무섭게 첫 포문을 열어젖힌 나라는, 다름 아닌 헤트만이었다.
“내가 따로 좀 조사시켜 봤거든? 근데 너희 장인이 우리 꼬꼬마 예언자님을 납치했었던 일이 발단이란 이야기가 내 귀에 꽂히네?”
“아아, 헤트만의 젋은 국왕이여! 그건 내 장인이 간계에 휘말린 것으로 우리측에선 조금도 인지하지 못했던...”
“ㅈ까세요~. 가해자가 지랄하지 마시고요~.”
”커흠! 그 부분에 관하여 심심한 유감을 표하는 바...”
“됐고, 나도 참전한다! 목 깨끗이 씻고 기다려라. 내가 예쁘게 썰어줄께.”
“!”
이렇듯 남쪽 국경을 일부 맞댄 헤트만이 뮤티움 편에 서는 일도 골치 아플진대, 그날 점심무렵엔 오드노아까지 이례적으로 생난리를 쳤다.
”안녕하세요~. 저희도 참전합니다~.”
“...아니, 님들은 왜요?”
“님쪽에서 먼저 우리 귀빈들을 건드렸잖아요. 현재 페테르 이바네크 공작이 딜레-둠브라의 수뇌부와 결탁하고 일을 벌였단 사실까지 파악 끝났어요.”
“그야... 그건 뮤티움이 물밑에서 더러운 수작을 벌인 결과로써...”
“님아~, 헛소리 그만~. 뮤티움은 완전 무관계였어요. 암튼 우리 사절단에게 사사로이 통행료를 요구했던 문제는 좋게좋게 짬시켰었는데, 이건 도저히 못 참겠네요. 뮤티움을 전폭적으로 지원할 꺼니까 그리 아세요.”
“어? 그거 제가 시킨 게 아닌데요? 아랫 놈들이 멋대로...”
“꼬리자르기 작작하세요! 너님이 왕이시잖아요!”
“우, 우리 대화로 풉시다!”
”닥쳐! 넌 우리 종족에게 모욕감을 줬어!”
이에 엎친데 덮친 격으로 노을 진 저녁 무렵엔 타미아르까지 옳다구나하며 끼어들었다.
“뭐라?! 정말이냐? 헤트만과 오드노아가 전쟁에 참여했다고?!”
“그, 그렇소이다, 타미아르의 국왕이여! 이건 지나친 오지랖과 간섭 아니오? (오드노아를 제외한) 군사력 최강이신 타미아르께서 부디 쟤들에게 한 말씀해주셈!”
”허허이! 우리 타미아르는 오드노아의 끈끈한 동반자이자, 헤트만의 굳건한 동맹으로써 도무지 좌시할 수 없구나!”
“...엥? 지금... 뭐라고...”
”고로 뮤티움에 대규모 병력파견과 더불어 물자 지원을 결정하노라! 땅. 땅. 땅.”
“너까지 진짜! 아! 쫌! 나한테 왜 그러세요!!!”
“하핫, 사실 이참에 내 말 안 듣는 귀족들을 전쟁에 쑤셔넣고 길들이면 좋겠다~ 싶어졌지 모얌~. 흐흐. 크크. 네 마음이 상했다면 미안~, 헤헷!”
“%@#$^!#!@!!!”
명실공이 세계최강 오드노아, 그리고 서방대륙 인간 문명의 양대산맥 격인 타미아르와 헤트만. 이렇듯 전력이 깡패수준인 세 국가의 이따른 등판소식은, 기아니크 국왕의 즉각적인 ‘입장 번복’과 ‘정식 사과문’이란 초유의 사태로 이어졌다.
“형님들! 제가 경솔했습니다! 허위보고한 놈들 싹 족쳐서 성채 정문 위에 수급 달아놨어요! 제발 한 번만 봐주십쇼! 그리고 저기... 뮤티움아...”
“?”
”우리 무승부로 하지 않을래?”
“...뭐래, 아직 칼도 안 뽑았거덩?”
이런 국왕의 한심한 모습은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던 대귀족들에게 맛좋은 먹잇감이자 명분으로 활용됐다.
“줏대도 없고, 배짱도 없구나! 우린 저 나약한 왕을 인정할 수 없다!”
“심지어 통치도 개판! 하루가 멀다하고 사치스런 연회를 벌이는 왕실의 금고엔 거미줄만 가득하더라!”
”국고에 동전 한 닢 없는 게 말이 되냐?! 국왕은 재물 대신 쌓여 있는 채무증서들에 대해 즉각 해명하라!”
그야말로 기아니크의 국내 상황은 당장 뒤엎여도 이상치 않을 정도로 불안정해졌으며, 한소끔 끓어오른 전쟁열기는 어느 순간 기아니크 내부로 한정됐다.
“야야! 니들 귀족들이 아니어도 나 무지 힘들거든?! 충성의 맹약은 대체 어따가 갔다 버렸니? 응?”
“충성은 잘나고 잘났던 니 할애비한테 했지, 무능력한 너한테 하진 않았음. 좋게 말로 할 때 왕관 내려놓으셈.”
“싫어! 안돼! 죽어도 내 왕관 못 잃어!”
몇 가지 불운과 정치적 상황이 어우러지며 생겨난 침울한 결과였으나, 루카스와 알쿤다 자매를 넘보던 다른 왕들의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는덴 모자람이 없었다.
‘ㅈ나 가만히 있어야겠다.’
’신탁자도 욕심나고 특급 전투사도 탐나지만, 승률 희박한 도박에다 목숨 걸순 없지.’
’암암. 뱃속에 칼 숨긴 새끼들이 친인척 중에서만 몇 명인데, 까딱하면 강대국 셋을 적으로 돌린 짓을 뭣하러 해?’
왕좌를 호시탐탐 노리는 경쟁자에게 빌미를 주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지키는 첫걸음이었고, 앞선 기아니크란 이상적인 표본을 구경한 왕들은 손 놓고 관망하는 태세를 일제히 취했다.
‘신탁자의 동향을 예의주시하면서 특급이랑 척만 지지 말자.’
’어쩌다 낼름 주워 먹을 기회가 생기면 그때 다시 저울질해도 전혀 늦지 않아.’
모처럼 발발하려 했던 국가전쟁 위기는, 위와 같은 수수방관 분위기 속에서 싱겁게 막을 내렸다.
헌데, 생뚱맞은 부정적 여파가 서방대륙을 휩쓸었다. 그것은 마왕을 소환하려는 흑마법사 세력의 재출현도 아니었고, 트로돈의 본격적인 침공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것은 모처럼 서방대륙에 피어났던 ‘국가 총력전’이란 전쟁양상이 ‘일정조차 불투명한 내란’으로 대폭 축소되면서 붉어진 사회문제였는데, 이는 권력자들이 강 건너 불구경에 과몰입하다가 깜박 놓쳐버린 불씨에서 비롯된 사태였다.
그 첫 번째는 전쟁특수를 노렸던 중소상인들의 괴멸. 그들의 막심한 피해는 정보상을 통해 고급정보를 구입 및 분석하여 조심스럽게 접근했던 대상인들과는 궤를 달리했다.
“으어이고~, 난 망했네, 난 망했어! 있는 밑천, 없는 밑천 박박 털었고만!”
단기간 천정부지로 솟았던 특정 품목들의 시세는 밑바닥이 어딘지도 모른 채 매일매일 폭락을 거듭했다.
“얌마, 넌 그래도 두고두고 팔 수 있는 광물을 매입했잖냐! 반면에 식량을 위주로 사들인 나는... 나는... 하아... 원금은 고사하고 이자를 어찌 갚을런지...”
“혹시 빚까지 땡긴 거냐?”
“......으, 응. 예산이 쪼매 부족해서 집이랑 땅을 저당 잡았... 흑흑...”
”쩝... 힘내.”
전쟁소식이 들리자마자 닥치는대로 웃돈을 얹어가며 사재기했던 상인들 중, 어느 하나 파산을 면피한 자가 없었다.
“자, 여기 인수계약서. 여기에 지장 꾹꾹 찍어라.”
“허억! 이 금액은! 해도해도 너무하지 않습니까요?!”
“싫음 말고. 난 딱히 너 아니어도 되거든? 자진해서 우리집 개가 싶은 놈들이 밖에 널리고 널렸어. 그건 너도 잘 알지?”
“......멍멍!”
그나마 규모가 있던 상인들은 대부분 거상들의 산하로 흡수편입 되었고, 그 외 나머지는 모든 가산을 빼앗긴 채 노예신세로 전락하거나 야반도주를 택하곤 했다.
한 지역을 초월한 대상인의 출현. 그것은 엄청난 자본력으로 영지 혹은 나라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새로운 계급의 등장을 예고하는 듯 했다. 마치 헤트만의 오마르 가넴을 롤 모델로 삼듯이 말이다.
그런데 이보다 더 심각하고 직접적인 두번째 문제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용병단들의 ‘난동’과 ‘약탈’이었다.
“참나, 어이가 없네! 우리 지금 헛걸음한 거냐?”
“예, 단장님. 제대로 허탕쳤습죠. 여비만 잔뜩 탕진했습니다요.”
“에라이~, 술이나 빨러 가자!”
“두목, 아니 단장님. 그랬다간 저희 나라로 되돌아갈 돈이 부족한뎁쇼? 이제부터라도 무조건 아껴야 합니다.”
“새꺄! 우리가 돈이 없지, 칼이 없냐?”
“아하!”
- 작가의말
이미 눈치 채신 분들도 계시겠습니다만,
[확률을 읽는 소녀] 에피소드 이래로
1부 줄거리를 뼈대만 남기는 식으로 압축시켜 연재중입니다.
이 내용을 굳이 지금 언급하는 건
앞으로 더욱 줄일 계획이라서 그렇습니다.
이는 인기가 아무리 없더라도 완결을 찍기 위함이며,
갑자기 연중하지 않겠다는 제 다짐이자 변명이라 하겠습니다.
어쨌든 코로나에 걸려서 컨디션이 말이 아닙니다만,
그래도 최대한 무난하게 1부를 마무리 짓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회사랑 집만 오가는 찐따인데... 왜... 어째서... 어떻게 코로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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