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 문과 닫힌 문 (4)
“저, 저럴 수가!”
“뮤티움 보고서의 내용이 사실이었다니!”
“오오, 맙소사! 신이시여!”
그 어떤 마법현상의 전조도 없었기 때문에, 마법에 자부심이 대단한 장로들의 충격이 유독 큰 축에 속했다.
하지만 그들의 놀라움은 곧 두려움으로 탈바꿈됐다.
{모리에리! 네 죄를 네가 알렸다!}
아리사엘의 흉흉한 시선으로 불경한 생각을 품었던 장로를 응시하자, 갑자기 그의 피부가 화상을 입은 것처럼 벌겋게 부풀어 올랐다.
“...어억!”
그의 살이 푸석푸석 문드러지며 떨어져나가는 증세가 중증 나병환자를 꼭 닮았는데, 지도층의 일원이 될 정도로 지식이 풍부한 사람들은 이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처, 천형병(天刑病)!”
“틀림 없어! 천형병이야!”
“하늘이 내린 벌...”
“무, 물러나! 전염성을 띄는 경우도 있어!”
경험상 과거 정령왕의 저주를 떠올린 사람들은, 몹시 기겁하여 모리에리와 거리를 멀찍이 벌렸고, 졸지에 병균신세가 된 그는 주위를 둘러보며 목놓아 울부짖었다.
“아, 안 돼! 도, 도와줘! 제발 도와줘! 도와달라고!”
{시끄럽구나! 그 더러운 입 다물라!}
“...허으으읍! 웈! 커흑, 켁... 웨에에엑...”
아리사엘의 의지에 따라 모리에리 장로의 혀와 성대가 곧바로 썩은 살점이 되어 내뱉어지는 광경은, 그와 그 인근의 군소리마저 모조리 잠재워버렸다.
{이 배은망덕한 필멸자들아! 의심 가득한 불신자들아! 내 말을 새겨 들어라!}
끔찍한 본보기의 효과는 확실했다. 사람들은 아리사엘이 야스민의 입을 빌어 쏘아대는 단어 하나하나를 소중히 귀담아 들었다.
{내일 해질녘까지 이 자리에 가만히 머물러라.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안배한 경계선을 넘어서지 말지어다. 이 명령을 어기는 자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 속으로 던져지리라!}
여기 모인 오드노아 종족들 중 켕길 것 하나 없는 샌더스가 그녀 앞에 대표로 당당히 나왔다. 그리곤 한쪽 무릎을 꿇어 경외를 표하며 아뢨다.
“저희 일족이 삼가 하늘의 뜻을 받드나이다!”
{흥! 그 말, 어김이 없어야 할 것이다!}
근엄하게 경고를 끝마친 아리사엘은 빙의를 해제하려고 했다. 그런데 나디아가 쭐래쭐래 나와서 말을 거는 통에 그러질 못했다.
“핫! 잠시만요, 천사님!”
{?}
”저 할아버지요, 저 할아버지를 그만 용서해주시면 안 되나요?”
{......}
아리사엘은 나디아의 당돌한 부탁이 어이가 없었다. 그동안 신규 시스템을 테스트한다는 핑계로 이 소녀와 너무 허물없이 지내왔었나란 회의감마저 일었다.
{불가하다. 저 필멸자는 나를 마귀에 빗대어 나의 신성성을 모독한 대죄를 범했다. 그리고 내 신성성을 부정했다는 말인 즉, 내게 숨을 불어넣어 창조하신 분을 모독한 것이나 다름 없다.}
“힝... 이번 한 번만요. 너무 아파하고 있잖아요.”
{흥, 이미 충분한 자비를 베풀었노라. 저 자의 영혼에 죄인의 낙인을 찍으려다가 이 정도 선에서 참은 것이다.}
“그치만... 너무 불쌍해요. 다시는 안 그러실 거에요.”
차가운 겨울을 끝맺는 것은 언제나 따스한 햇살이었다.
{끄응... 내 판관의 간절한 부탁이니 어쩔 수 없지. 좋다, 특별히 딱 한 번만 선처해주마.}
“정말 감사합니다!”
{그 대신에 너는 앞으로 내 말에 더더욱 순종해야 한다.}
“네, 천사님! 저 진짜 말 잘 들을게요!”
이로써 아리사엘의 두번째 발현은 비교적 긍정적으로 마무리됐다.
"엇, 새 피부가 돋아났어?! 원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오오! 신탁자 님께서 천신의 진노를 돌이키셨다!"
이후 알쿤다 자매의 명성이 하늘로 치솟은 현상은 자연스런 수순이었고, 엉겁결에 샌더스 총통의 지지기반 또한 대단히 굳건해졌다.
“어마맛! 나디아 님께서 나를 보셨어!”
“아아, 샌더스 총통 각하! 신탁자님들의 존엄을 꿰뚫어보신 당신은 도대체...”
* * * * *
라호나바스의 힘으로 종의 진화를 완성한 아르카니토. 화룡족답게 붉은 외피가 인상적인 그의 첫행보는 역시 정복전쟁이었다.
침략행성의 원주민 국가 한 곳을 정벌하여 그 나라의 왕성을 라호나바스의 새 제단으로 선물하는 절차가 즉위식을 갈무리하는 마지막 관례이기 때문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다시 웜홀생성기를 찾았다. 그가 본성으로 복귀할 때는 혼자였지만, 첫 전투를 진두지휘하기 위해 나아가는 지금은 달랐다. 수많은 장군들과 작전참모들이 큰 무리를 이루어 그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본성에서 웜홀까지 늘어진 병사들의 제식 또한 눈에 띄게 달라졌다.
“전군 동작 그만! 새로운 왕, 아르카니토께 무한한 영광을!”
“”“아르카니토께 무한한 영광을!”””
- 처저저적!
그들은 일제히 진군을 멈추고 아르카니토가 웜홀 안으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경례자세를 유지했다.
“경하 드립니다, 저의 왕이시여!”
“경하 드리옵니다, 주군!”
“하하하, 일등공신들의 얼굴을 다시 볼 수 있어서 매우 좋구나. 둘 다 고생 많았다. 비가아르, 그리고 드레이크.”
그는 말로만 공치사를 하는 위인이 아니었다.
“비가아르.”
“옛! 왕이시여!”
“너는 나를 목숨으로 섬겼다. 하여 나는 너를 총사령관직에 임명하며, 그 외 전사들은 모두 친위대로 들일 것이다.”
“아, 아르카니토...”
아르카니토는 비가아르의 감동과 기득권의 비통함이 교차하는 가운데 말을 계속했다.
“그리고 드레이크.”
“예! 주군!”
“너와 너희 일족은 역경을 딛고 일어설 발판을 내게 제공해줬다. 이 큰 공로를 치하하기 위해 나는 너희 일족을 트로돈 백성으로 인정하는 바이며, 그 모든 권리를 내 이름으로 보장한다.”
“감사합니다! 주군!”
“지금과 같이 앞으로도 내 곁을 보좌토록 하라!”
한낱 식용가축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황당한 사건이 일어난 셈이었으나, 초월자 라호나바스를 뒷배경으로 절대 군림하는 왕의 명령, 그것도 첫 번째 어명에 반발할 용자는 없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우리더러 상한 음식 따위를 상전으로 받들란 말인가!’
‘실로 통탄할 일이로다!’
아르카니토는 주위의 심경변화가 잿빛으로 변하건 말건 개의치 않고 다음으로 넘어갔다.
“비가아르, 현재 병력상황은?”
“웜홀을 건너와 자리잡은 전사들의 총원은 35만, 툼베르는 17만이 조금 안 됩니다.”
“전사들의 숫자가 예상보다 적군. 익룡도 몇 마리 안 되어 보이고.”
“도중에 물자보급을 잠시 우선했습니다. 웜홀게이트의 동력원을 미리 확보해두는 편이 좋겠다는 드레이크의 의견을 적극 수용하여 겸사겸사 진행시켰습니다.”
“그래, 너희 둘이서 현명하게 처신했을 거라 믿는다.”
“감사합니다.”
“지금부터 집계숫자를 예의주시하다가 충분한 병력과 자원이 쌓이면 내게 와서 보고하도록.”
“아.”
아르카니토의 의중을 지레짐작한 비가아르가 물었다.
“위대한 라호나바스 님께 새 제단을 바치려 하심이군요? 왕께서 염두하고 계신 나라는 타미아르이십니까?”
“글쎄.”
아르카니토가 고개를 모로 꼬며 말을 이었다.
“타미아르가 우리가 파악한 원주민들의 나라 중 가장 큰 대국이나, 그 분께선 사막의 기후를 더 선호하시는 것 같단 말이지.”
“음, 그렇다면 헤트만이겠군요.”
“그래. 하지만 이에 대한 최종결정은 잠시 미룰 것이다. 나는 내 눈에 거슬리는 저 오드노아들부터 치워버리고 싶구나.”
“옛! 당신의 명을 받들어 전투를 준비하겠나이다!”
총사령관으로 급부상한 비가아르는 자신의 호언장담대로 맡은 바를 충실히 수행했고, 아르카니토는 비가아르의 지휘아래 재정비되는 군조직과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는 군세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몹시 뿌듯했다.
그러다가 트로돈의 전사 숫자만 60만 명을 넘어선 시점부턴, 남쪽 부근에서 포진하여 제자리를 지키는 오드노아들이 측은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쯧쯧, 어리석은 가축들 같으니. 걸친 갑옷까지 다 내던지고 줄행랑을 쳐도 모자를 판국에...’
물론 천신들의 존재는 여전히 큰 걸림돌이었으나, 종의 진화를 성공적으로 끝마친 지금의 그는 자신만만했다.
‘왕가의 신물들까지 챙겨온 이상, 정령왕조차 내 상대가 아니다. 천신의 사도와 화신체의 존재가 심히 껄끄럽지만... 여차하면 라호나바스께서도 친히 출전하시겠노라고 공언까지 해주셨으니 크게 두려워할 건 없다.’
- 파츠츠츠츠...
사고는 대개 긴장을 풀고 안심하는 순간에 일어나는 법. 원인 모를 과전류 발생에 기술자들이 동분서주하기 시작했다.
- 치직! 치지지직!
이상현상은 웜홀생성기에서 주로 발생됐는데, 문제는 기계장치들의 상태가 모두 정상이라는 점이었다.
‘어, 어떻게 이런 일이!’
웜홀을 유심히 살피던 아르카니토의 두 눈이 부릅 떠졌다. 용족의 눈으로 남들보다 더 많은 정보들을 읽어낸 결과는 놀라움 그 자체였다.
- 치지지지직-!
두 행성을 잇는 통로가 왜곡되고 있었다. 그것도 누군가에 의해 강제로 흐름이 조작되는 형태를 띄는 중이었다.
‘이건 불가능한 일이다!’
이미 완성된 웜홀의 경로조작, 심지어 서로 상이한 차원과 차원을 임의로 연결하는 일은 그가 등에 엎은 라호나바스조차 엄두도 못 낼 기적이었다.
‘서, 설마...’
하지만 이것은 잘못된 착시가 아니었고, 그렇다면 보다 상위의 존재가 개입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그렇기에 그는 용족이 된 뒤에 라호나바스가 알려준 비밀을 떠올렸다.
{나 역시 섬기는 주인이 있다. 지옥의 72권좌 중 한 분이신 ‘키리쿰플라토(Kircumplato)’ 님의 직계자, ‘라트로키(Latroki)’ 님이 바로 그 분이시지. 나는 라트로키 님의 명에 따라 키리쿰프라토 님께서 지옥의 족쇄를 떨치실 수 있도록 현세강림을 돕는 것. 바로 그것이 내가 일궈내야 할 숙명이니라.}
그러나 아르카니토는 그 가능성을 부정했다. 대악마나 마족의 간섭이 예정됐더라면 라호나바스가 미리 귀띔해주지 않았었을 리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대체 어떤 존재가...’
푸르렀던 웜홀의 색감이 검게 물들어갈수록 그의 의문 또한 깊어졌다. 그러나 그가 취할 행동은 반대로 명확해졌다.
“비가아르! 지금 즉시 전 병력을 무장시키고, 웜홀생성기 시설 일대를 포위해라! 허나 내 명령이 있기까진 선공을 절대 금한다!”
“예! 아르카니토!”
영문도 모른채 완전무장을 걸치게 된 트로돈 전사들이었으나, 인상을 찌푸린 자는 없었다. 그만큼 웜홀생성기 시설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세가 범상치 않았던 것이다.
- 프츠츠츠츠츠... 치익, 칙. 파지직.. 크과과과과...
기계 통제장치가 완전히 먹통이 되는 순간, 키가 훤칠한 2명의 여인이 새로 재구성된 웜홀 통로에서 빠져 나왔다.
“정말로 성공했군요, 메티.”
“써먹기 딱 좋은 행운까지 따라줬네요. 물론 제 출중한 실력이 한 몫 거든 건 틀림없는 사실이지만요, 오호호호!”
이들은 루카스를 데리러 온 마계 마족이었다.
-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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