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외] 의외로 치명적인 (3) + 형벌적 윤회 (1)
순간 어리둥절해진 페이가 되물었고, 베스퍼는 한숨을 쉬며 대답해줬다.
“야스민 양이 여기에 없잖아요!”
“에이~. 난 또 뭐라고~. 그 뭔 말도 안 되는...... 어라?”
언뜻 듣기엔 웃기는 망상이었으나 가만 돌이켜 따져볼수록 페이는 단언할 수가 없었다.
이 자리의 그 누구보다 루카스의 옆구리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왔고, 그의 따뜻한 보살핌과 관심 속에 살아왔으며, 무엇보다 그가 특별히 경계하지도 않는 결혼적령기의 여성이 바로 그녀였기 때문이었다.
‘...생각해보니 이미 홀딱 빠져있다고 하더라도 전혀 이상하지가 않잖아! 이, 이런! 존재감이 너무 없어서 까맣게 잊고 있었어!’
초기엔 루카스를 껄끄럽고 부담스럽게만 치부했던 레이첼조차 어느 순간 저 지경이 됐을진대, 하물며 목숨이 오락가락하던 처지에서 덥썩 구원받은 야스민이야 오죽하고 여북할까 싶어졌다.
“그, 그건 어디까지나... 가, 가능성일 뿐인 이야기...”
"야스민 양이 최근 들어서 절 많이 경계하던데요? 아니, 못마땅해한다고 표현해야 하나?"
“!”
페이가 뒤통수를 된통 얻어맞은 듯한 표정으로 어떻게든 반박해보려 시도했지만, 베스퍼의 추가타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좋아요, 페이 양. 그럼 제가 질문을 다르게 해보죠. 야스민 양은 지금도 루카스 씨를 ‘여보님’이라 부릅니다. 여러분도 이미 알다시피 신분위장은 옛날 옛적에 종료되지 않았나요? 이 부분은 제가 어떤 식으로 이해하고 해석해서 받아들여야 할까요?”
”어... 음... 아하! 그건 몇 달 간의 습관이 입버릇처럼 남은 경우로써...”
“그 버릇을 고칠 의향이 그 본인에게 눈곱만큼도 없습니다만?”
“어엇...”
”상황이 이런데도 끝까지 우기시겠다면야, 저도 더 이상 만류하진 않겠습니다. 야스민 양이 작정하고 훅치고 들어오는 순간, 의미무색해지는 그 서열정리. 어디 한 번 계속 해보세요.”
“......”
베스퍼가 대뜸 일깨워준 환경변수는 페이를 비롯한 전원에게 묵직한 상태이상을 불러일으켰다.
* * * * *
“너무 초조해마세요, 여보님.”
낳은 정보다 키운 정이라 했던가? 친자식을 가져보지 못한 루카스의 입장에선 키운 정이 전부인지라 그런 경계가 없었다.
“불안하다. 그들이 우리에게 약속했던 시간이 훨씬 지났다.”
“아직 10분 밖에...”
“아니다. 틀렸다. 10분이나 지난 거다.”
“......”
야스민은 진득하게 한 자리에 서 있지 못하고 이리저리 안절부절못하는 그의 모습에 기가 막혔다기 보단, 그 진솔된 마음 씀씀이에 뭉클한 감동이 앞섰다.
“여보님, 정말... 감사해요.”
“?”
“덕분에 이런 행운을 누릴 수 있었어요. 저희가 여보님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훗, 마음 쓰지 마라. 우린 하늘이 맺어준 운명인 거다.”
“하, 하늘이 매, 맺어준 우, 운명......”
실제로도 아리사엘이 강제로 맺어주긴 했으니 루카스의 농담 같은 표현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래, 너희와 나는 그런 관계인 거다. 그러니까 일어나지 않은 현실을 두고 더 이상 신경 쓰지 마라.”
“...네에.”
불현듯 고개 돌린 야스민이 코까지 작게 고로롱~ 거리며 새우잠 자는 에시야를 괜히 한 번 더 챙겼다. 감동으로 흠뻑 젖은 눈망울을 은근슬쩍 감추려는 노력의 일환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눈물 몇 방울을 눈치챈 루카스는 다른 물음으로 화제를 돌리며 나름의 배려를 해줬다.
”그보다... 너희도 이제 내 진짜 정체를 알았다. 그런데도 내가 안 무섭나?”
“아니요! 전혀요! 하나도요!”
그녀가 말은 이렇게 했어도 그때 당시 루카스에게서 퍼져 나왔던 마기는 지금 다시 떠올리기조차 소름이 돋을 정도로 끔찍했다.
“후후후, 그건 그것대로 가슴 아픈 대답이다.”
“네? ...아!”
어찌 보면 공포와 두려움의 상징으로 손꼽히는 마족의 면전 앞에서 ‘너 따윈 조금도 무섭지 않아!’라며 야스민이 대놓고 맞선 격이긴 했다.
“그, 그건 좀 경우가 다른...”
“흐흐, 물론이다. 방금은 내가 너 놀린 거다.”
“...가끔 보면 여보님께선 너무 짓궂으세요.”
”염려 마라. 아무한테나 그러진 않는다, 아하하하!”
“.......”
붉어진 그녀의 뺨을 봤는지 못봤는지, 호쾌한 웃음을 한껏 풀어낸 루카스가 이어 말했다.
“근데 나도 너희를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 너희가 나를 멀리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요! 앞으로도 그런 일은 없을 거에요!”
악마나 마족보다 더 사악하고 잔인한 인간들을 경험해본 그녀로서는 허울뿐인 빈말일 수가 없었다.
“여보님께서 저희를 이토록 아껴주시는데...”
루카스는 뒷말 흐린 야스민의 머리를 가만가만 쓰다듬었다.
“후후후, 이제 그만 감동해라. 너희가 많이 노력하니까 나도 잘 대해줬던 거다.”
“......”
”모름지기 이쁜 짓을 해야 이쁨을 받는 거다. 부모자식도 아닌데, 당연하게 예쁨 받는 건 있을 수 없다. 그게 세상의 이치다.”
“...네, 더 노력할게요. 앞으로도 부디... 많이... 예뻐해...주세요. 헤헤헤...”
“훗, 그래. 네가 원한다면 이제부턴 너도 날 아빠라 불러도 된다. 나는 너 같이 차분한 딸도 좋다고 생각한다.”
“딸은... 싫어요.”
“그래? 그건 상당히 안타깝다. 하지만 나는 네 뜻을 이해하고 존중하겠다.”
“저기... 딸보다는... 으음... 그으...”
“...?”
우물쭈물하는 야스민의 입가엔 풋풋하고 수줍은 진심이 맴돌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샌가 선잠에서 깨어나 있던 에이샤가 대뜸 끼어든 탓에 그녀의 서툰 고백은 미수로 그치고 말았다.
“주인님! 저는요! 저는요! 저는요! 저도 예쁜 짓 많이 했어요! 저도 주인님의 이쁜 딸 할래요!”
“아아, 너는 쫌...”
“왜에에요오오오~!”
“너는 좀... 그렇다.”
“이쓍! 어째서요!”
”많이 버겁다. 지나치게 씩씩해서 내가 감당하기 어렵다. 너와 나는 그냥 이대로 지내자.”
“흐앙! 주인님 너무해! 나도 딸 시켜줘요!”
루카스는 사납게 어리광부리는 에이샤를 다독였다.
“나는 다 안다, 괜히 좋아 보여서 너도 따라 하려는 거. 나중에 딸 보다 더 좋아보이는 게 생기면 또 조를 게 뻔하다.”
”시러어어어어! 나도 할래에에에~! 나도 딸 시켜주세요오오! 아이이이이잉!”
에이샤가 루카스의 바지춤을 붙잡고 칭얼대는 사이, 그들이 그동안 열리고 열리기만을 고대했던 커다란 미닫이문이 스르륵하고 움직였다.
“언-니이-!”
“앗? 나디아!”
재생시술이 성공적으로 마무리된 나디아의 발음이 또렷하기 그지 없었다.
“야스민 언니야!”
그녀는 자신의 잘린 혀를 볼 적마다 깊이 자책하던 야스민의 품으로 먼저 뛰어들었다.
“봐봐! 나 똑똑히 말할 수 있어!”
“아아, 정말... 정말 믿겨지지가...!”
”저기 선생님들이 교정작업만 몇 번 더하면 된 댔어! 그러니까 이제 나 땜에 몰래 울지마, 언니!”
“감사합니다, 선생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정말로 감사합니다!”
야스민은 흐뭇한 표정을 짓고 있는 시노토 계파의 의료진들을 향해 연신 고개를 조아렸고, 반면 나디아는 그런 그녀의 품을 유유히 벗어나 루카스를 향해 최고 속도로 돌진했다.
“아빠아앙-!”
“으핫핫핫, 나디아야!”
“우와왕! 축하해요! 작은 주인!”
치료결과가 매우 만족스러웠던 루카스는, 어물쩍 분위기 타고 나디아와 한 묶음으로 폴짝 안겨온 에이샤까지도 꼬옥 안아줬다.
“아빠! 저 이제 발음 안 새죠?! 잘 하죠? 그쵸?”
“그래, 그래! 정말 잘 됐다! 나도 엄청 기쁘다! 이젠 네가 나보다 공용어를 더 잘하게 됐다. 축하한다, 하하하!”
“고마워요, 아빠! 사랑해요! 하늘만큼 땅만큼!”
“으구구구~! 나도 사랑한다, 나의 나디아!”
에이샤는 이번에도 틈새시장을 어김없이 공략해왔다.
“저도 사랑해요, 주인님!”
“...어? ...어, 그래. 알겠다.”
“뭐야! 온도가 다르잖아요, 온도가! 너무하세요, 진짜!”
“너는 조금 천천히 알아가고 싶다.”
“이쓍! 주인님, 미워! 미워!!!”
“하하핫! 농담이다, 농담!”
모처럼 루카스의 장난기와 웃음이 헤픈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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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형벌적 윤회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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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후천적 장애를 앓아야 했던 나디아. 그녀의 혀는 오드노아 의료팀의 정성 속에 본연의 기능을 되찾았다.
“결손된 신체조직은 성공적으로 재생됐습니다. 하지만 환자의 연령대를 감안하면, 꾸준한 관심을 가지고 상태를 살펴봄이 현명합니다.”
루카스는 돌고래가 인간크기의 이족보행 육지생물로 진화한듯한 시노토 계파 전문의와 눈높이를 맞추기 위해 허리를 살짝 굽히며 말했다.
“고맙습니다. 나는 당신과 당신 동료들에게 깊은 감사를 표합니다. 그런데 방금 말한 향후관리는 며칠이나 소요됩니까?”
“제일 바람직한 건... 환자의 성장이 마무리될 때까지입니다만...”
“......”
“어흠흠...”
루카스는 정기검진을 사유로 장기체류를 유도하는 수작을 모른척 눈감아줬다. 나디아의 수술결과가 상당히 흡족하기도 했거니와, 안 그래도 시기가 시기인 만큼 알쿤다 자매의 거취를 신중하게 고민하고 있었던 까닭이었다.
‘헤트만은 마음에 안 드니까 열외. 인간적으로 가장 마음에 드는 선택지는 레벨티오 부부이나... 안전문제를 고려하면 최선으로 할 수는 없고...’
그의 마음은 나디아가 완치된 다음날 오전에 더욱 번잡해졌는데, 일부러 나디아의 예후검사 시간에 맞춰 찾아온 레이첼이 그 계기였다.
베스퍼에게 나디아의 보호자 역할을 부탁한 루카스는, 의료건물 내의 VIP대기실에서 레이첼과 대화를 나눴다.
“조만간 시토 사막으로 떠나신다면서요?”
“거기에 처리할 일이 좀 있다. 근데 그 말은 누구한테서 들었지?”
“제 아버지께서 원로회 대장로이시라고 예전에 설명을...”
“음, 그랬었나? 미안하다. 기억에 없다.”
“......”
기억 못한다기 보단 그닥 관심 없는 정보라서 금방 잊혀졌다고 봐야 했다.
”...그나저나 신탁자님들도 함께 데리고 가실 생각이신가요?”
“고민 중이다.”
“위험하지 않을까요? 심지어 사막 중의 사막인데...”
“그래서 고민 중이란 거다.”
”그으... 떠돌면서 견문을 넓혀도 좋긴 하죠. 그런데 그것도 기본지식이 탄탄한 상태란 전제가 뒷받침 돼야 효과가 만점인 법이라...”
“난 단순한 거 좋아한다, 레이첼. 괜히 돌려 말하지 마라.”
“...네.”
비록 루카스의 말투는 틱틱댔지만 그의 귀는 연신 팔랑거리고 있었다. 현 시대의 문화와 상식에 일말의 관심조차 없는 루카스 입장에선, 나디아의 교육문제가 알게 모르게 큼직한 고심거리긴 했던 것이다.
”감히 장담하건대 이 행성 어딜 가시더라도 이곳만한 교육시설은 없을 겁니다. 기초부터 전문가 양성과정까지 완벽하죠. 그 부분은 루카스 님께서도 내심 인정하고 계실 겁니다.”
“그래서 너희가 자진해서 아이들을 맡아주겠다는 건가?”
“네, 아직 제 개인적인 생각일 뿐이지만요. 그래도 루카스 님께서 동의해주시면, 관계자들을 100% 설득할 자신이 있답니다.”
그녀의 반짝이는 재치에서 비롯된 제안은 들으면 들을수록 상당히 매력적이었다.
”아! 그리고 지금이라면 야스민 양과 에이샤 양의 전투훈련까지 체계적으로 도와드릴 수 있을 거 같아요!”
“?”
“사실 저희가 동맹국의 전력향상을 위해 마련한 커리큘럼이 있거든요. 저희 측 전사육성과정을 인간 종족에 맞춰 조율한 건데, 실효성 검증은 아직 못한 상태죠. 쉽게 말씀드리면 야스민 양과 에이샤 양이 시범적용 대상자로써 선정되게끔 조치해드린다는 말입니다. 어떠신가요?”
“...미끼가 제법이군. 잠시 못 본 사이에 네 수완이 많이 좋아졌다.”
“헤헷, 칭찬 감사해요.”
여러모로 이득이 많았던 만큼 그로선 거부하기 힘든 제안이었다. 아닌 말로 오드노아 수뇌부가 미치지 않고서야 아이들에게 해악을 끼칠 염려는 없었기에, 그들의 속내가 뭐가 됐든 모른 척 속아줄만했다.
”좋다, 아이들을 너희에게 맡기겠다.”
“잘 생각하셨어요!”
“근데 아이들의 숙식은 어디서 하게 되지?”
“우선은 최근에 신축된 ‘국제 마법사 초등 영재교육원’측 기숙사에 공실 여부를 확인해볼까 합니다. 저희 집에 들일까도 생각했었는데, 아무래도 같은 인간끼리 섞여 지내는 편이 심리적 부담감이 적지 않을까 해서요.”
“그렇군.”
삐딱한 시각에선 그의 약점들을 한데 모아 관리하려 한다는 억측도 생겼으나, 얄팍한 심증만으로 상대방의 배려를 폄하할 순 없었다.
“흠... 그보다 에드와 샤비는 잘 지내고 있나?”
- 작가의말
마지막 연참이었습니다.
글이 잘 안 써져서 앞으로는 연참이 어려울 거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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