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는 순례자 (3)
"오우~, 세상에! 연기가 아주 제법이시오! 크하하하핫!"
"...연기?"
"아~, 상당히 놀랍소. 마냥 바보인 줄로만 알았던 ‘페그(Pegg)’ 남작, 그 친구가 이제보니 잔머리가 의외로 잘 굴러가는 인간이었구먼! 으허허허!"
"그건 무슨 말입니까?"
"허허, 어쭙잖은 수작질은 그만 됐소. 당신이 무슨 짓을 하건 내가 실토할 일은 없으니까. 피차 서로 시간낭비하지 말고 이쯤에서 끝냅시다."
"......"
그제야 루카스는 중년사내가 자신을 괴한들과 한통속으로 오해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에고고... 그래도 마지막 유언삼아 하나만 부탁합시다. 저 가방엔 어른 손바닥 크기의 가죽물통이 3개 들어 있소. 외관상 딱히 별거 없어 보이지만, 실제 내용물은 개당 금화 15개씩이나 하는 값비싼 치유물약이지."
"......"
"그 중 2개는 당신 몫으로 갖고, 딱 하나만 저 친구에게 줬으면 좋겠소. 어떻소? 이만하면 썩 좋은 거래 아니오?"
중년인은 생명이 꺼져가고 있는, 민머리에 거무튀튀한 살색을 가진 청년에게 향했던 측은한 시선을 다시 거두며 말을 이어갔다.
"페그 남작이 원하는 건 내 목숨과 거래장부뿐이잖소. 주인복 없는 불쌍한 저 친구에겐, 부디 자비를 베풀어주시구려."
"으휴..."
대꾸할 기운조차 아까운 루카스는 중년인이 언급한 가방에서 물통 3개를 주섬주섬 꺼냈다.
"내 이름은 루카스입니다."
자기소개를 간략히 마친 그는 물통 중 하나를 의식이 없는 청년의 입에 흘려 넣는 가운데, 중년사내 품속으로 또 다른 한 병을 던졌다.
"그리고 나는 당신을 돕겠습니다."
"......"
루카스는 이게 뭐하는 짓이냐는 중년인의 표정을 무시하했다. 그리곤 상태가 위중한 부상자에게 더욱 신경을 쓰며 말했다.
“당신이 안 믿어도 좋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순수한 나의 선의입니다.”
“......”
그는 먼저 부러진 뼈를 올곧게 맞추고 지혈을 했다. 또한 환자에게 먹이고 남은 빨간색 물약을 상처에 덧뿌렸다.
다소 서투른 감이 없진 않았으나, 그동안 연금술사 포리스트의 집에서 더부살이 중에 어깨너머로 아름아름 배운 응급처치법은 이 상황에서 꽤나 쓸모 있었다.
물론 무장괴한들 중 누군가가 이따금씩 정신을 차릴 때마다 그 인간을 다시 꿈나라로 되돌려 보내는 꼼꼼한 중간처리도 빼먹진 않았다.
“으으으... 대체 어떤 놈ㅇ...”
- 따악-!
“엌!”
한편, 맞은편에서 치유물약을 홀짝홀짝 삼키는 중년인의 못미더운 눈빛은, 루카스의 모든 것을 읽어낼 기세로 그의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샅샅이 훑어내리고 있었다.
"......"
* * * * *
적절한 조치 후에 환자를 둘러업은 루카스는 중년인의 안내를 받으며 창고에서 유유이 벗어났다.
"자자, 이쪽이오."
그들이 향한 곳은 이 도시의 번화가와 빈민지역을 경계짓고 있는 매음굴이었다. 그들이 개미굴보다 번잡스런 골목 사이로 들어서자, 상당히 많은 수의 매춘부들이 중년인과 흑인 청년의 얼굴을 알아봤다.
"어맛, 러셀 님! 괜찮으세요? 헉?! 마, 맙소사! 하자르 님!"
"맙소사, 릭!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괜찮네, 괜찮아. 그보다 자넨 '폴(Paul)'에게 가서 전하게. 지금 당장 의사를 데리고 식량 저장고로 튀어오라고 말이야. 아, 최고급 치료물약도 꼭 챙기라고 해줘. 그리고 자네는 '라케타(Raketa)'를 불러주게. 가급적 인원들 다 끌고 오라고 꼭 당부하고!"
"네, 러셀 님."
"알았어요, 릭!"
각자의 친분정도에 따라 이름과 애칭으로 불린 중년사내는, 자신들을 걱정하는 창부들에게 몇몇 간단한 지시를 내리곤 다시 루카스에게 눈짓하여 이동했다.
응급처치도 마다한 러셀이 기를 쓰고 움직여 어느 언덕 앞에 다다랐을 무렵, 반대편에서 헐레벌떡 달려오는 약 50여 명의 무리가 있었다.
"허억, 허억! 최대한 빨리 달려왔습니다. 러셀 님!"
"아아, 라케타. 우선 창고부터 열게. 하자르부터 마저 치료하면서 이야기함세나."
"헌데 이 자는..."
라케타라 불린 곱슬머리의 백인 청년은 뒷말을 흐렸다. 러셀이 불쾌하지 않도록 자신의 우려를 우회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오늘 나와 하자르를 구해준 은인일세."
"아! 이거 실례했습니다!"
라케타는 루카스에게 꾸벅 인사한 뒤 수하들에게 손짓하여 루카스에게서 하자르를 건네받도록 지시했다. 그리곤 듬성듬성 이끼가 묻은 어느 암석을 한 쪽으로 치웠다.
잠시 후 그가 바닥 표면에 작게 새겨진 마법진의 흙을 대충 털고서 문자 하나하나를 만지작 거리자, 환영마법에 가려졌던 두꺼운 강철문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 스스스스스...
이어서 2개의 열쇠를 양쪽 열쇠구멍에 넣고 돌리며 두 번째 잠금장치를 해제했다.
- 달깍.
별 다른 이상이 없음을 확인한 라케타가 고개를 끄덕이자, 무거운 철문 한쪽에 5명씩 각각 달라붙어 안쪽을 향해 낑낑 밀었다.
- 드드드드... 철커덕!
"가시죠. 루카스 님."
"...알겠습니다."
이건 아닌데 싶으면서도 분위기에 그만 휩쓸려 버린 루카스는, 당당히 앞장 선 러셀의 뒤를 따라 쭐래쭐래 들어가게 됐다.
흡사 커다란 인조 동굴이라고 해도 좋을 이 창고를 얼마나 걸었을까? 돌연 멈춰선 러셀이 루카스에게 심심한 양해를 구했다.
"이거 죄송합니다, 루카스 님. 저는 잠시 급한 일을 좀 처리하러 가보겠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충분한 대비를 해야할 것 같거든요. 최대한 빨리 정리하고서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아... 예..."
"라케타, 루카스 님께서 편히 쉬시도록 자네가 직접 신경써주게."
"맡겨주십시오, 러셀 님."
주인이 이렇듯 극도로 예의를 갖추니, 그에 종속된 자들도 자연스럽게 루카스에게 '님'자를 붙이며 고개를 숙였다.
"이쪽입니다. 루카스 님."
"...갑시다."
식량창고라 불린 이곳에는 단순히 건식량만 보존되고 있는 건 아닌 듯 했다.
들이쉬고 내쉬는 공기 중에 은연히 섞여 있는 유황과 화약 특유의 냄새, 그리고 뒤따르던 무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갖가지 무기를 챙기는 쇳소리는, 루카스 자신이 일반인을 구해낸 건 절대 아니라는 사실을 재확인시켰다.
"사정상 이런 누추한 곳에 모셔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 창고 내에선 여기가 가장 깨끗하고 넓은 방이니, 부디 너그럽게 이해해주십시오."
앞선 라케타를 따라 당도한 방은 마치 말끔하게 치워진 구금시설에 가까워 보였다.
"...충분합니다."
"곧 식사와 함께 잡다한 시중을 맡을 아이들을 보내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배려 고맙습니다."
"아닙니다, 배려라니요. 저희 러셀 님과 하자르 님을 구해주신 일은 평생을 다 갚지 못할 은혜입니다."
"그것은 아주 우연한 선행이었습니다."
"에... 그보다 죄송합니다. 제가 직접 루카스 님 곁에서 시중을 더 들어야 마땅하지만, 아무래도 나가서 밖의 상황을 살펴야 할 것 같습니다."
"나는 아무렇지 않습니다. 당신은 고생하십시오."
그렇게 라케타가 떠나가고 약 1시간 정도 지나자, 무척 앳된 아가씨 둘이 따뜻한 식사를 가져왔다. 그런데 그녀들의 하늘하늘한 차림새와 부끄러워하는 몸짓으로 볼 적에, 식사대접을 넘어선 융숭한 봉사까지 준비해온 모양이었다.
‘이건 좀 아닌 것 같군.’
순간적으로 꺼림칙한 기분이 든 루카스는, 스스로 생각해도 말 같지도 않은 옹색한 변명으로써 그녀들을 돌려보냈다.
"나, 나는 순례자입니다. 미안합니다, 나는 정결해야 합니다."
성욕은 둘째치고 음지 세력으로 추정되는 이들의 호의를 무작정 받아들이기엔 어딘가 찜찜했거니와, 바네사 또래에게 음흉한 손길을 뻗는다는 것 자체를 용납하기 어려웠다.
‘악마도 16살 미만의 소녀는 성적대상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뭐, 식자재나 제물로써 좋아라 하는 건 별개지만...’
이후 급한 용무를 끝마치고 온 러셀과 다시 마주할 수 있었던 것은, 그로부터 1시간 가량 지난 뒤였다. 그런데 돌아온 러셀은 혼자가 아닌 큰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어허허, 이거 직접 대접하진 못할망정, 이토록 오래 기다리게 해드려 송구스럽습니다."
"정말로 나는 괜찮습니다."
"너그러운 아량에 거듭 감사드립니다."
러셀이 방안으로 들어와 루카스가 앉은 탁자 맞은편에 자리잡는 동안, 그를 뒤따라온 인파들은 누군가의 지시가 없었어도 각기 알아서 삼삼오오 짝을 지어 창고 구석구석으로 조용히 흩어졌다.
헐벗은 것과 진배없는 소년과 소녀, 싸구려 분과 야한 옷으로 치장한 매춘부, 허드렛일로 손이 거칠고 잔상처가 수두룩한 노인.
루카스가 보기엔 이 도시의 빈민가 중에서도 먹이사슬 최하위에 있는 대부분이 모여 온 것은 아닐까란 생각마저 들었다.
다만 이상한 점이라면 각기 저마다 자리를 잡은 그들의 얼굴에선, 좀처럼 긴장이 풀릴 기미가 조금도 안 보인다는 것에 있었다.
"아차, 아직 정식으로 인사를 드리지 못했군요. 저는 '러셀 그린왈트(Russell Greenwald)'라고 합니다."
"나는 루카스입니다. 성은 없습니다."
"저야 하찮은 귀족가문 출신에 불과하니, 부디 제 신분에 개의치 마시고 편하게 러셀이라 불러주십시오."
"알겠습니다."
낯선 곳에서의 낯선 인연. 이런 것에 겸연쩍은 루카스가 이제 무슨 말을 주고받아야 하나 고민하는 가운데, 러셀이 대뜸 말문을 텄다.
"으음, 그나저나 루카스 님께는 제가 또 한 번 사과드려야겠군요."
"나는 귀족 아닙니다. 존칭은 필요 없습..."
"아뇨, 아뇨! 겸양이 지나치십니다! 어찌 감히 제가 레벨티오 자작령의 영웅을 하대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뭐라고..."
"아아, 이제는 ‘뮤티움(Mutium) 공화국’이었지요?"
설명을 요구하는 루카스의 눈빛에 러셀의 어깨가 으쓱해졌다.
"바로 이 때문에 앞서 사과드렸던 겁니다. 제가 이 나라 저 나라에서 이런저런 사업을 많이 벌이다보니, 도통 의심이 많을 수밖에 없어서요. 더군다나 생존이 걸린 사안이라 뒷조사는 불가피했습니다. 너그러이 양해해주시길."
"......"
"그나저나 값비싼 통신용 마법도구를 비치해놓은 보람이 있었네요. 아참! 캐서린 부인께서 안부를 꼭 전해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서로 압니까?"
"이따금씩 거래하곤 합니다. 굉장히 소심하고 꽉 막혀서 상대하기가 까탈스러운 고객 중 한 분이랄까요?"
러셀의 잘못돼도 심하게 잘못된 평가를 들은 루카스가 순간 발끈하여 그것을 지적했다.
"거짓말. 당신은 캐서린을 모릅니다. 그녀를 직접 만나본 적도 없는 겁니다."
"푸헛! 이럴 수가! 정말로 레벨티오의 영웅이셨군요!"
"...어... 음..."
"사실 방금 전까지도 계속 긴가민가했었습니다, 파하하하!"
그제야 루카스는 러셀이 일부러 거짓을 섞어 자신을 떠봤음을 깨달았다.
"휴~, 루카스 님이 가짜가 아니라서 천만다행입니다. 가뜩이나 시간도 없는데 외견상의 특징만으로 정체불명의 인물을 찾아내기란 상당히 고역이니 말입니다."
"······"
"더욱이 지금의 저는 페그 남작이 보낸 하급 기사들을 우습게 처리하는 무력을 지닌 사람을 감당할 여유도 없고 말이죠. 하하하!"
"당신의 급한 용무는 내 뒷조사였습니까?"
이해는 하지만 용서는 쉽지 않았던 탓인지, 러셀은 루카스의 표정에 잔뜩 서린 불만을 쉽게 읽을 수 있었다.
"절반 정도는 그랬습니다. 인맥을 전부 동원해봤지요. 물론 그게 최우선 순위는 아니었지만 말입니다."
"최우선은 뭐였습니까?"
"든든한 조력자께 도움의 손길을 청했습니다. 이대로 당하기만 하면 억울해서 말이죠. 어떤 분인지 가르쳐 드릴까요?"
"거기까지. 나는 자세히 알고 싶지 않습니다."
"흠... 미리 아시는 편이 도움될 겁니다. 여기 밖에 있는 친구들은 루카스 님이 진짜라는 가정 하에 데려왔으니까 말이죠."
"뭐, 뭔...?"
조금도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스런 루카스의 말문이 막혔다.
"허허, 어디서부터 설명을 드려야 하나...? 오, 고맙네, '미샤(Missha)'. 안 그래도 내가 독한 술이 무척 간절했거든!"
러셀은 술병과 잔을 가져온 30대 후반의 여인의 양볼에 가볍게 입 맞췄다. 얼굴의 2/3를 차지한 심한 화상자국만 아니었더라면 미인이란 소릴 귓가에 달고 살았을 여인이었다.
하지만 러셀이 지금 이런 식으로 과장되게 그녀와 나눈 인사는 단순 친교의 의미라기 보단, 흥분한 루카스의 주위를 잠시 분산시킨다는 느낌이 강했다.
"루카스 님께서도 한잔 받으시죠!"
"나는 필요 없습니다."
"흠흠, 그럼 최대한 간략하게 설명 드리지요. 저는 이 영지 관할에서 어떤 경작사업을 벌이고 있습니다. 페그 남작과 그 윗줄에게 일정부분을 꼬박꼬박 상납하면서 말이죠."
"······"
"그런데 그들은 그동안 받아온 금액에 만족하지 못했던 모양입니다. 맛간을 활용해 잠깐 파헤져 봤더니 아예 모조리 꿀꺽 삼키려는 욕심이더군요."
"...더 듣고 싶지 않습니다."
루카스의 싫은 표정과 고갯짓에도 굴하지 않고 러셀은 자기 이야기를 계속이었다.
"예정보다 며칠 빠른 기습으로 원래는 제가 비명횡사해야 했습니다만... 크크크, 정말 웃기게도 페그 남작에겐 또 다른 꿍꿍이가 있었지 뭡니까?"
"관심 없습니다."
"그 멍청한 귀족이 주제도 모르고 간계를 부리더군요. 제게서 자기 상관인 '대니얼 에반스(Daniel Evans)' 자작의 밀무역 거래장부를 빼앗아, 그것을 볼모로 협박하여 그 모든 걸 혼자 독식하려 한 겁니다. 뭐 그런 과욕 덕분에 루카스 님과 인연이 닿아 이렇게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지만요. 으허허헛!"
"......"
"험험, 서론은 이쯤하고 본론으로 넘어갈까요?"
러셀은 자신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말없이 뚱한 표정 짓고 있는 루카스에게 물었다.
"얼마를 원하십니까?"
"필요 없습니다."
"그럼 뭐가 필요하십니까?"
"있어도 당신 껀 싫습니다."
"음... 이런... 아무래도 구체적인 상황설명이 추가로 필요한 시점 같군요."
"......"
꿀렁꿀렁 잔에 반쯤 채운 독주를 한 모금 마신 러셀이 다시 입을 열었다.
"사실 지금 저희가 있는 장소는 이 남작령에서 가장 안전한 장소가 아닙니다."
"?"
- 작가의말
오늘부터 1일 1연재입니다.
다만 아레나 종료까진 일요일도 연재토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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