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벌적 윤회 (3)
루카스는 포리스트의 유쾌한 과거사를 듣고서 호쾌하게 웃어젖혔다.
“선생은 아주 잘 지내신 것 같습니다. 큰 문제가 없어서 다행입니다.”
“하하, 그게 다 루카스 씨 덕분 아니겠습니까?”
“?”
“제 눈치가 어디 보통입니까? 이주 초기에 요정들이 루카스 씨에 관해 이것저것 캐묻는 순간 느낌이 팍 왔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그들이 바네사와 저를 이곳으로 불러들이는 귀찮음을 감수할 이유가 전혀 없었으니까요.”
“음, 본의 아니게 미안합니다. 당신에게 사과합니다.”
”아이고~, 아닙니다. 되레 저희가 엎드려 절해야지요! 덕분에 샤비와 에드를 바로 곁에서 돌볼 수 있었잖습니까요!”
“선생이 그렇게 생각을 긍정해준다면 천만다행입니다.”
포리스트의 예리한 관찰력은 루카스의 망설이는 의중까지도 정확하게 짚어냈다.
“에... 루카스 씨. 그런 의미에서 제가 도울 일이 있다면 기탄 없이 말씀하십쇼. 그리 눈치 보며 주저하지 마시고요.”
“하하, 정말이지 당신의 눈썰미는 못 당하겠습니다.”
“흐흐, 그렇지요? 이게 나름 직업병 아니겠습니까, 하하핫!”
루카스는 지하에 창고와 연구실까지 두루 구비된 포리스트의 번듯한 5층 건물을 구경한 이래로 불쑥 생겨난 속내를 툭 털어놨다.
“나와 함께 온 아이들 셋. 혹시 선생이 맡아줄 수 있겠습니까?”
“단순히 며칠 데리고 있어달란 말씀은 아닌 듯 하군요.”
약 2년 간 그와 동고동락했었던 포리스트는 이 다음에 이어질 루카스의 말을 내심 짐작하고는 있었다.
“그렇습니다. 바네사와 샤비와 애드처럼 당신이 든든한 후견인이 되어주기를 희망합니다. 참고로 그 아이들은 이 도시에서 요정족들에게 교육받을 예정입니다.”
“흐음... 건물에 남는 방이야 많습니다만...”
루카스는 포리스트가 현재 우려하는 바가 뭔지를 잘 알았기에 부차적인 설명을 재깍 덧붙여줬다.
“에이샤란 아이는 조금 유별나지만, 특별한 문제가 되진 않을 겁니다. 갓난아기 때 납치되어 질 나쁜 생체실험의 대상이 됐을 따름입니다. 그래서 종국엔 인간이 아닌 키메라에 가깝게 변하게 된 겁니다.”
“...에고고, 그랬군요.”
“하지만 천성은 매우 착한 아이입니다.”
”쯧쯧, 저런... 불쌍하기도 하지.”
“내가 보증합니다. 결정은 다음에 내려도 됩니다. 나는 한동안 자리를 비울 예정이기 때문입니다. 머잖아 멀리 다녀올 겁니다.”
“그동안 실제로 겪어보면서 숙고해보란 말씀이시군요.”
“그렇습니다. 다시 만난 그때 결정하십시오. 당신이 설사 거절해도 나는 충분히 납득하겠습니다.”
“네, 그렇게까지 말씀하시니 한 번 같이 지내보겠습니다. 혹 그 외에 제가 더 알아둬야 할 사항들이 있을까요?”
루카스는 괜스레 알쿤다 자매가 아리사엘의 대리자들이란 정보까지 지금 알려서 포리스트의 부담을 가중시킬 필요는 없다고 판단했다.
“으음... 딱히 없습니다. 나머지는 차차 알아가면 될 일입니다.”
“예, 알겠습니다.”
중요 화제가 일단락됐다고 생각한 포리스트는 앉았던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어이차~, 잠시만 기다려주십쇼.”
“?”
“연구에 써보라고 값비싼 마정석을 몇 개나 선물로 주셨는데, 저 또한 뭐라도 내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괘념치 마십시오. 그건 집들이 선물이었습니다.”
”하하하, 마법사들이 그 말을 들으면 서로 이사하겠다고 난리 칠 겝니다! 암튼 금방 돌아오겠습니다.”
그렇게 지하 연구실로 내려갔다온 포리스트의 두 손엔, 가로 길이가 세 뼘, 세로 너비 및 깊이가 한 뼘쯤 되는 나무상자가 들려져 있었다.
- 딸깍, 딸깍.
잠금 장치를 풀고서 열어젖힌 상자엔 연분홍색 액체로 가득 찬 시험관들이 빼곡 들어차 있었다. 이내 포리스트는 그 나무상자를 루카스가 아닌 베스퍼 쪽으로 주르륵 내밀면서 말했다.
“선물입니다. 받아주십시오.”
“어머, 감사해요. 그저 따라왔을 뿐인 제가 염치 없이 받아도 될지... 근데 이게 뭔가요?”
“에... 이것도 제가 의도치 않았던 실패작이었습니다.”
“?”
포리스트는 루카스를 향해 눈가를 찡끗하며 이야기했다.
“신제품 다우린:D... 아아, 이번엔 여성용이니까... 에... ‘다우린:W’정도로 명명되어 출시되지 않을까 싶군요.”
“!”
“요정족 사이에서도 체력이 배우자에게 많이 못 미쳐서 고민인 아내들이 꽤 있다더군요. 아마 그분들에게 요긴한 처방으로 쓰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어멋...”
”요정족들의 안전성 기준을 전부 통과하고 조만간 판매예정인 비약이니 안심하셔도 좋습니다.”
“...가, 감사...드려요.”
”하하, 딱 절반씩만 복용하시길 권장합니다. 일일 섭취량이 요정족 기준에 맞춰진 거라서요. 그리고 보관은 와인창고처럼 그늘지고 서늘한 장소에 하셔야 합니다. 또 1년 이상 지나면 변질의 위험이 있으니 반드시 폐기하시고요.”
“......네에.”
이어지는 상세설명을 귀담아 듣는 베스퍼의 두 뺨은 빨갛게 달아올랐고, 루카스는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몰라 헛기침만 뱉었다.
”에... 그리고, 그리고... 아! 원료가 전부 천연성분이지만은 각성제와도 같은 약이니, 일주일 이상의 장복은 신체에 영향을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가급적 이틀이나 사흘에 한 번 정도로 간극을 유지하시길 권장 드리옵고... (하략)...”
“크험! 흠흠!”
그날 밤.
루카스가 실제 체감한 비약의 효능은 그의 막연한 상상을 크게 웃돌았다.
< 당신을 위해 다 우려냈습니다! 다우린 :D! >
* * * * *
오드노아 수뇌부는 루카스의 시토 사막행이 빠른 시일 내에 이뤄지도록 적극 협조했다.
당연히 순수한 동기는 아니었고, 본인들이 통제 불가능한 고위마족을 한시라도 빨리 그들의 영역 바깥으로 내보내고픈 열망이 강해서였다.
그런다고 마계차원문 연구협조에 대한 최종결의가 뒤집어지는 건 아니나, 불만이 많은 반대측을 조금이나마 다독이고자 하는 미봉책의 일환이었다.
“헐... 계약한 정령들을 전부 풀어서 시토 사막을 샅샅이 훑으라 굽쇼? 그것도 2주 안에요?”
“응? 기한이 너무 여유로웠나? 허허, 의욕이 충만한 아해들이로구나! 좋다, 그럼 일주일!”
“저희 그만두겠습니다, 부장님.”
“뭐? 남은 삶도 관두겠다고? 헛헛헛! 안보부랑 직통으로 연결시켜주면 그걸로 만족하겠느뇨?”
“...잘못했습니다. 살려만 주세요.”
“쯧, 이것들아! 이건 샌더스 총통님의 특별지시야! 그러니 일주일 후에도 멀쩡히 숨쉬고 싶으면 알아서 처신해!”
“흑흑... 네.”
그렇게 뛰어난 정령술사들을 닥달하여 겨우 6일 만에 딜레-둠브라 본거지를 알아낸 지도부는, 루카스에게 안내역은 물론 오드노아의 전략적 이동수단인 익룡 ‘케프테릭스’까지 대절해줬다.
“이 아이가 타미아르 내의 대사관과 거점을 거처 헤트만의 임시 대사관까지 모셔다 드릴 겁니다. 복귀할 때도 똑같이 이용하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근데 이 녀석의 이름은 따로 있습니까?”
“네, 이 아이는 ‘리켄페나(Rikenfena, 자유로운 날개짓)’입니다.”
“흠, 멋진 이름입니다.”
루카스가 실제로 타본 케프테릭스는 단점을 찾기 힘든 훌륭한 이동수단이었다.
당장 지적할 건덕지라고 해봐야 이륙에 사지를 모두 사용하는 데서 오는 잠깐의 출렁임이 전부였는데, 사실 그것을 단점이라 치부하기도 뭐했다.
비단 케프테릭스 뿐이 아니라 대부분의 익룡은, 새들처럼 뒷다리의 힘만으로 이륙하지 않고, 체중의 20%를 차지하는 앞다리로 지면을 힘차게 박차서 무거운 신체를 공중으로 도약시키는 까닭이었다.
이러한 신체구조적 특징만 이해하고 너그러이 받아들이면 그 외의 나머진 장점들 투성이였다.
쉴 새 없이 날개를 퍼덕일 필요도 없이 잠깐씩 큰 날개를 힘차게 퍼덕임으로써 고속순항이 가능한데다가, 지능이 돌고래보다도 뛰어나 탑승자의 명령을 쉽게 알아들었고, 근육량부터가 조류와 다르기 때문에 체중의 60% 무게의 짐도 가뿐히 실을 수 있었으며, 여타의 조건만 맞으면 대륙횡단도 황당한 꿈이 아닌 수준의 강력한 비행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아닌 말로 탑승자가 하루에 고기를 약 45kg나 섭취하는 케프테릭스의 식성만 감당할 수만 있다면, 그 어떤 이동수단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때문에 최근 오드노아 정부가 동맹국에 대사관 및 거점을 설치함에 있어, 자원수급이 원활한 대도시만으로 위치 선정하는 데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라 하겠다.
물론 누가 뭐래도 타의추종을 불허하는 이 시대의 최고의 이동방편은, 공간이동마법과 워프게이트였다.
그러나 구축비용 및 운영비를 생각하면, 또 요즘처럼 공간이동마법을 차단하는 본토의 방어전략까지 고려하면, 차라리 대도시 변두리에 목장을 사서 케프테릭스와 조련사들을 배치하는 방안이 현재로선 최선의 선택지인 것이다.
어쨌거나 루카스의 눈엔 세월낭비를 혁신적으로 줄여주고 있는 케프테릭스가 그렇게 예뻐 보일 수가 없었다.
“리켄페나, 너는 생각보다 승차감이 무척 좋구나. 이제 보니 익룡도 용이 맞는 거 같다, 아하하핫!”
“끼르, 끼이르륵!”
“옛다, 오늘도 고생 많았다!”
“촤잡! 촵, 촵, 촵. 끼르르! 끼르!”
그가 얼마나 마음에 쏙 들어 했는가 하면, 저녁 무렵 비행을 마친 리켄페나의 상태를 꼼꼼히 살피는 일이 그의 마무리 일과로 자리매김했을 정도였다.
“여기가 많이 뭉쳤군.”
“끼-! 크르르르!”
“어떠냐? 이제 시원하냐?”
“끼-아르-!”
“옳지, 옳지. 착하다.”
이와는 반대로 길잡이로 따라붙은 폴라의 시선은 영 곱지 못했다. 멋진 비행탈것에 푹 빠진 루카스에게서 환심을 사기가 그만큼 쉽지 않았던 것이다.
‘내, 내가... 익룡의 애교에 밀리다니!’
보통 인간이라면 거대한 익룡의 근처에 얼씬거리지도 않았을 터이나, 드래곤도 몸길이가 30m 미만이면 헤츨링 취급하는 마계의 출신은 역시 뭔가 달라도 한참 달랐다.
‘절호의 찬스인데...’
파렐 스톤 대장로에게 몰래 꼰지르는 치사한 수단까지 동원하여, 레이첼로부터 안내역을 어렵사리 쟁취해낸 그녀의 입장에선 통탄을 금치 못할 일이었다.
‘하필 또 덩치가 제일 큰 케프테릭스을 대절해줄 건 또 뭐람! 담당자들이 눈치가 없어요, 눈치가!’
비행을 핑계 삼아 그의 허리를 뒤에서 꽉 껴안는 등의 므훗한 분위기를 유도하고 싶어도, 애초에 4인용으로 설계된 전용안장 위에선 너무 속보이는 짓이었다.
‘여러모로 신중해야 해. 조급해선 안 돼.’
엘로디란 훌륭한 선례를 똑똑히 목격했던 폴라였기에, 무차별적인 애정공세 전략은 도리어 스스로 무덤을 파는 꼴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처음으로 루카스 님의 관심분야를 알게 된 거나 마찬가지잖아. 이건 시시콜콜하게 웃고 떠들면서 친밀감을 높일 기회인 거야.’
그런 발상의 전환은 성공적이었다. 그녀가 케프테릭스를 주요화제로 삼기 시작하자, 그동안 적막하기만 하던 자투리 시간이 급격히 풍요로워졌던 것이다.
“루카스 님, 혹시 그거 아세요?”
“?”
“케프테릭스는 원래 트로돈 전사들이 애용하던 탈것이었답니다.”
“오, 그래? 그 부분은 조금 더 자세히 듣고 싶다.”
“과거 저희 조상님들이 전쟁 중에 우연히 포획한 익룡의 새끼들을 시험 삼아 사육했었던 일이 시작이었다해요. 그런데 그 중에서 케프테릭스 종이 유독... (하략)...”
“오호라... 그래서 그 다음엔 어떻게 됐지?”
인생에 무쓸모인 경험은 없다고 했던가? 주적 트로돈의 생태를 반강제적으로 암기해야 했었던 그녀의 과거가, 이런 식으로 유용하게 빛을 발하게 될 줄은 아무도 예측 못했으리라.
‘참 잘했어요, 과거의 나!’
- 작가의말
.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