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코 다시 전쟁 (2)
* * * * *
한편, 베라가 들뜬 마음으로 향하는 술집 내에선 땀내나는 남정네들의 술판이 거하게 벌어지고 있었다.
"위하여!"
“”"위하여!"””
누가 누굴 위하는지도 모르는 추임새였지만, 그런 세세한 것까지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루카스와 제프리와 메토. 이들에겐 그저 쭈글쭈글하게 찌그러진 맥주잔을 거듭 맞부딪치며 입 속으로 털어 넣는 흥겨움이 중요할 뿐이었다.
"크하~! 루카스 형님! 한 잔 더?!"
"그래, 동생. 나 더 마실 수 있다."
"제프리 선생님도?"
"으하하핫, 제가 술은 절대 거절 안 합니다!"
메토가 지닌 상남자 특유의 털털한 친화력과 매력은, 겨우 6일만에 이들과의 관계를 찰떡 같은 우정으로 발전시켜 놓았다.
"크으~, 당장 내일부턴 형님이 기도문 외우는 소릴 못 듣겠네요. 이거 좀 시원섭섭합니다."
"하하, 그럴 리가! 나 홀로 중얼거림. 그건 별로 보기 좋지 않았을 거다."
"아뇨, 형님! 진짭니다, 진짜! 다시 꼭 연락 주십쇼! 절 잊으시면 원망할 겁니다!"
"오냐, 알겠다. 메토."
"대충 흘려 듣지 마시고~, 차라리 이왕 말 나온 김에 약속을 딱 잡으시죠!”
“?”
”헤트만에서 볼 일 다 보시면 저희 수도로 오십쇼! 타미아르의 심장도 한 번쯤은 구경해보셔야지 않겠습니까?"
"수도?"
"예! 일단 오시기만 하시면 제가 모시는 주인나리를 소개시켜 드리겠습니다. 저희 주인 양반이 말은 더럽게 많은 게 흠이지만은, 누가 뭐래도 이 나라에선 첫째가는 마법사로 손꼽힙죠!"
"오오, 꼭 가겠다! 약속하겠다!"
"아휴~, 형님께서 마법 쪽에 관심이 지대하시다는데 ,이 아우가 당연 도와야 않겠습니까? 헛! 잔이 비었네? 험험, 주인장! 주인자앙~! 여기이이~!"
- 티잉~.
벌떡 일어나 대동화를 엄지로 튕겨낸 메토는, 그것을 공중에서 낚아챈 술집주인과 굳건한 눈빛을 교환한 뒤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그때 루카스가 갑자기 메토의 어깨를 장난스럽게 툭 치며 말했다.
"어? 저기 왔다, 네 여자친구. 어서 가봐라."
"예? 여자친구는 제가 무신..."
메토의 시선이 루카스의 손가락을 따라 자연스럽게 가게입구를 향했다. 그러나 그의 인지능력은 어느 누군가를 발견하기에 앞서, 번쩍 튀는 푸른 불꽃과 처절한 비명소리를 먼저 인식했다.
- 파지지직!
"으허허헝!"
중요한 남성성을 붙잡고 고꾸라지는 술꾼 때문에 가게 안이 일순간 고요해졌다. 하지만 취객이 여자에게 찝쩍대다가 호되게 당한 상황임이 파악되자, 마치 언제 그랬냐는 듯이 왁자지껄한 분위기로 재차 되돌아왔다.
다만 이전과 달라진 게 있다면, 사내들의 눈이란 눈이 매혹적인 요정족에게서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는 점일 것이다.
"엇? 베라 양?"
"메토 씨!"
작은 막대기를 쥔 채로 손을 흔드는 그녀의 한 마디는 메토의 심장을 두근세근 뛰게 만들었다.
‘...헤헤, 이쁘다.’
흉악범도 움츠리며 비켜가는 그의 겉모습인지라 상당한 괴리감이 느껴졌으나, 쿵쾅쿵쾅 요동치는 설렘을 도무지 주체할 수가 없었다.
“휴~, 메토 씨를 찾는 게 어렵지 않아서 다행이에요. 내심 걱정했거든요.”
“저, 저를...요? 아, 그나저나 어쩐 일이신지...?”
"내일... 떠나신다고 들어서요. 그 전에 인사를... 꼭 드리고 싶어서..."
"아휴, 그런 거야 내일 오전에 하셔도 되는데... 베라 양처럼 아리따운 분이 이렇게 야심한 시각에 혼자 거니시는 건 진짜 위험하십니다."
"...이 정도는 괜찮아요."
마주선 남녀의 풋풋함. 둘 사이의 썸씽은 금세 부끄러움으로 변질되었고, 이내 전염병처럼 주변으로 쫙 퍼져나갔다.
‘퉤잇, 가지가지한다.’
‘ㅈ랄도 풍년이네. 아주 서러워서 썅.’
‘쩝... 그래도 드럽게 부럽다.’
우악스런 남정네들의 오열이 비산하는 가운데, 텁텁한 맥주와 함께 닭살을 탈탈 쓸어낸 제프리가 루카스에게 눈치를 줬다.
"크험험, 우리는 따로 한 잔하러 가십시다."
"훗, 나는 그것에 동의합니다. 전적으로."
루카스 역시 이 정도의 분위기 파악도 못하는 머저리는 아니었던 지라, 손에 흥건히 묻은 맥주를 바짓자락에 슥슥 문지르며 일어났다.
"내일 보자, 메토."
"엇, 벌써 가시려고요? 같이 계셔도 되는데 말입니다."
"흐흐, 나도 최소한의 눈치가 존재한다. 여자친구나 잘 챙겨줘라. 우린 어차피 조만간 다시 보게 될......"
간만에 능글맞았던 루카스의 표정이 갑자기 심각하게 꼬였다. 메토 또한 자신을 배려해주던 루카스의 불편한 침묵을 읽어내곤 덩달아 불안해졌다.
"음? 형님? 갑자기 안색이 굉장히 어두우십니다?"
"...아, 메토. 잠깐만, 조용히."
"?"
제프리와 메토가 고개를 모로 꼬는 반면, 인간종족보다 청각이 훨씬 예민한 요정족 베라의 반응은 상당히 격했다.
"꺄악-!"
"어이쿠, 괜찮습니다. 괜찮아요. 제가 여기 있잖습니까? 근데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투... 투... 툼베르...”
두려움의 원인은 도시 외곽 저 멀리서부터 울려 퍼져오는 툼베르의 사나운 울음소리였다.
"어? 그 도마뱀들이요?!"
"네! 맞아요! 소리가 절대 한두 마리가 아니...... 헉?!!! 리사! 미라이!"
지금도 작업장에 남아있을 친구들이 문득 떠오른 베라는 곧장 루카스를 올려다보며 애원했다.
"도, 도와주세요! 제 친구들이 아직 시설 작업장에 남아있어요! 만약 상대가 툼베르만이 아니라면, 간이 결계만으론 절대 못 버틸 거에요!"
"저어... 형님! 아직 뭐가 뭔지 모르겠지만 저도 간곡히 부탁 드리겠습니다."
정든 메토의 긴한 부탁을 루카스가 모른 척 외면할 리 없었다.
"나는 작업장, 너는 이 아가씨와 영주성. 제프리 선생도 메토랑 함께 대피. 이해했습니까?"
"알겠습니다, 형님!"
"그, 그리하겠습니다!"
이후 황급히 술집을 메토 일행은 먼저 여관방에 들려 각자 무기를 챙겼다. 어느덧 메토의 귀에도 들릴 정도로 가까워진 툼베르의 괴성으로 볼 적에, 영주성으로 도망칠 때까지의 안전을 장담할 순 없어서였다.
하지만 그들의 우려와는 다르게 복병은 정작 다른 곳, 즉 성문 쪽에 있었다.
- 쾅! 쾅! 쾅!
"야! 나 '더스틴(Dustin)' 경비대장이야! 빨리 열어, 새끼들아!"
"죄, 죄송합니다! 더스틴 경비대장님. 지금 성문은 절대 열 수 없습니다."
"뭐?! 뭐 이 새꺄?!!!"
경비대장이라고 밝힌 군인은 철의 요새를 방불케 하는 높은 성벽과 굳게 닫힌 성문을 올려다보며 길길이 날뛰었다.
"뭔 개소리야?! 빨랑 안 열어?!!! 야! 너 내 성격 알아? 몰라?!"
"살려주십쇼, 경비대장님! 하지만 이건 후작 부인께서 영주 대리로써 명령하셨습니다. 후작 부인의 명령 없이 멋대로 정문을 여는 자는 즉결 사형이라고..."
"ㅆ발! 그럼 당장 가서 불러와! 아니면 병력지원이라도 명령하라 그래! 이대로 가면 우리 애들 싹 뒤져! 죄다 뒤진다고!"
경비대장에 비하면 바짝 쪼그라든 성벽 위의 병사의 목소리는 겨우 들릴까 말까였다.
"그게... 후작 부인께오선 도련님과 아가씨를 데리고 지금 지하 금고 안으로 대피하셨습니다."
"에라이, 옘병! 딱 지들만 살겠다 그거네!"
"죄, 죄송합니다, 더스틴 경비대장님! 저는 벤 크리브드 후작님께 충성을 맹세한 기사로써 명령에 불복할 순 없습니다!"
"썅! 임마, 너만 기사야?!!! 그리고 죄송하면 끝나냐? 하다못해 여기 모인 시민들이라도 성안으로 들여보내!"
"죄, 죄송합니다!"
"니미럴! 그 놈의 죄송은, ㅆ발!!!"
- 땅강!
바닥에 내동댕이쳐진 더스틴의 투구가 정신 사나운 소음을 일으켰다. 그리고 그것을 잽싸게 다시 주워든 그의 부하들은 잔뜩 흥분한 경비대장을 진정시키고자 노력했다.
"이만 포기하시죠, 대장님! 저 놈들이 뭔 죄겠습니까?"
"맞습니다. 그보다 이럴 때가 아닙니다!"
"망할 년! 썩을 년! 젠장맞을 년! 뭔 사고가 터져도, 하필 후작님이 부재중이신 이때 터져서! 하, 진짜! 주옥 같네!"
- 끼에에에!
한층 가까워진 툼베르의 울음소리를 들은 메토는, '이제 더는 안 되겠다.' 싶은 판단에서 피난민 무리 앞쪽으로 성큼성큼 걸어나왔다.
"여보십쇼. 이곳에서 더 지체해선 안 됩니다. 이렇게 탁 트인 지형은 너무 불리합니다. 서둘러 사람들과 함께 이동해야 합니다. 근데 혹시 사면이 튼튼한 돌로 이뤄진 석조건물 같은 건 없습니까? 이를테면 무기창고라던지..."
경험에서 우러나온 그의 조언이었으나, 안 그래도 열머리 뻗치던 더스틴은 도리어 메토를 향해 쌍심지를 켰다.
"하... 씨... 닌 또 뭔데? 어디서 굴러먹던 개뼈다귀가 갑자기 튀어나와서 나한테 이래라 하는..."
그가 울컥 차올랐던 화를 절반도 쏟아내지 못했던 그때, 어두컴컴한 건물 그늘 속에서 툼베르 4마리가 덜컥 튀어 나왔다.
"카하-학-!""
듣도 못했던 괴수들의 출현은 곧 도피행렬의 혼란으로 이어졌다.
"꺄악! 마, 마물이다!"
“맙소사! 벌써 여기까지 왔어!”
"으아악! 어서 도망쳐!"
"어서 성문 좀 열어주세요!"
- 쾅. 쾅. 쾅. 쾅. 쾅.
기겁한 사람들이 아무리 두들기고 흔들어도 성문은 꿈쩍하지 않았다. 이 같은 분위기에 휩쓸려 혼비백산하지 않는 인물들은, 툼베르를 이미 겪어본 유경험자들뿐이었다.
"아오, 썅!"
뒤가 없는 현실을 덤덤히 받아들인 메토는 타미아르 대마법사의 정성스런 마법이 깃든 신상품을 거머쥐고 냅다 휘둘렀다.
"이 도마뱀 새끼들이 뭘 꼬나봐!"
- 뚜왁! 텅! 터엉! 부~웅~.
날뛰던 3마리의 툼베르가 삽시간에 다리뼈 하나씩을 잃었다. 그러나 운 좋게 메토의 용맹한 공격을 피하고 남은 1마리가 그의 빈틈을 뚫고 약삭빠르게 어깨쪽를 공략했다.
"어, 어쭈?"
메토는 짓눌린 무게에 옆으로 휘청하면서도, 메이스의 손잡이 부분을 툼베르 주둥이에 가로로 밀어 넣으며 날카로운 물어뜯기 공격을 저지했다.
"으씨... 너 이 새끼 쫌 한다?"
“끼이이이! 카하아아아칵!”
메토가 어떻게든 스스로 떨쳐내려 했지만, 그가 빠져나가는 순간이 바로 자기 제삿날이 될 것임을 본능적으로 직감한 툼베르의 버티기도 만만찮았다.
"헛! 제가 돕겠습... 헙! 아니, 이것들이!!!"
이때 제프리가 도끼를 휘두르며 급히 돕고자 했으나, 메토와 그 사이엔 깐깐한 장애물이 건재했다.
"아오, 곧 뒈질 놈들이 왜 이리 ㅈ랄발광이야!"
그의 욕설처럼 해당 경로 위에 널부러져 있는 툼베르들이 문제였다. 어찌나 사나운지 분명 다리뼈가 빠그러져 정상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그것을 헤쳐낼 수가 없었다.
그러던 그때 베라가 새로운 변수를 만들어냈다. 메토의 위기를 멀뚱멀뚱 지켜볼 수 없었던 그녀의 조급함이 트라우마를 극적으로 이겨냈던 것이다.
"메, 메토 씨이-!"
제프리의 도움 속에 메토 곁으로 도착한 그녀가 마법봉을 추켜올렸다.
"유바르-마누비아(Jubar-Manubia, 별의 섬광)!"
술식 회로를 따라 빠르게 완성된 마법은 막대기 끝에 응집된 마나를 거세게 방출시켰다.
- 팟-! 파지지지직!
“끼이에에에에에-!”
인공적으로 발현된 번개줄기는 주둥이를 쫙 벌린 툼베르의 눈꺼풀 밑을 강렬하게 꿰뚤었다.
- 치지지지지직···!
그녀의 공격마법은 기어이 툼베르의 뇌까지 웰던으로 까맣게 튀겨버렸다. 그렇게 신경 중추기능이 상실된 파충류의 몸뚱이는 힘을 잃고 풀썩 허물어졌다.
- ...쿵!
"헉, 헉.. 하하... 하하하···"
머리통이 뜯길 뻔한 위기를 가까스로 모면한 메토는, 내면의 공포를 극복해낸 베라를 향해 쌍따봉을 날렸다.
“진짜 멋졌습니다, 베라 양!”
"꺅! 내, 내가 해냈어요!"
기뻐하며 메토의 품에 매달린 그녀의 미소가 더없이 행복해 보였다.
한편, 이들 너머로 보이는 제프리는 남은 툼베르 3마리의 숨통을 철저히 끊어냈다.
"죽어! 죽어! 죽어!"
- 퍽, 퍼억! 퍽! 퍽!
""“꼬에에에... 끄르르에에...”""
겨우 4마리에 불과한 성과. 허나 삶을 갈구하며 생난리 치던 사람들을 진정시키기엔 아주 넉넉하고도 남았다.
"...자, 잡았어?"
“에그머니나! 세상에...”
“과연 요정족의 마법...”
“어머머, 저 기사님은 어디 누구시래? 혹시 너 알아?”
삽시간에 일어난 문제와 그 해결과정을 모두 관람한 더스틴 경비대장은, 좀 전과 달리 대단히 겸허한 자세를 취하며 메토에게 다가왔다.
"저어... 선생님. 대피와 방어는 어떤 식으로 진행하면 되겠는지요?"
- 작가의말
벌써 아레나 10일 차입니다만, 흥행지수가 대단히 처참하군요. 너무 예상대로라서 딱히 놀랍지도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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