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Root : 대악마의 직계자

전쟁유발자 (1)

* * * * *

3명의 세라핌과 대악마 하나, 그리고 자멸방지 차원에서 또다시 뎅그러니 속박된 채 망연자실한 표정의 아리사엘.

가브리엘이 선물했던 의복과 목걸이를 벗어내는 등의 준비를 마친 루카스는, 이들을 배경삼은 강도진을 바라보며 아쉬운 작별을 고했다.

"스승님, 제가 먼저 떠나려니 마음이 불편합니다."

"야야, 정말로 괜찮다. 너도 알잖냐? 선계에서 날 기다리는 거라곤 내 몸뚱이 짓누를 바윗덩어리뿐이다.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더 늦게 돌아가고픈 심정이니까, 나는 신경 쓰지 말고 먼저 가도록 해라."

"...네."

"네 성격으론 당도하자마자 신명나게 싸움박질할 건 뻔하니까 꼭 몸조심하고."

"예."

"그리고 아무리 약한 놈들이라도 방심하지 마라. 그런 놈들일수록 으레 뾰족한 바늘 하나씩은 갖고 있는 법이니 말이다."

"그동안 스승님께서 가르쳐주신 지혜들을 틈날 때마다 되새기겠습니다."

"그래그래. 그리고... 무에는 끝이 없ㄷ... 하아...... 아니, 아니다! 이거 나도 제자 생겼다고 푼수같이 잔소리만 늘었구나. 이쯤 할 테니 어여 가거라."

"예, 스승님. 부디 기체후일향만강(氣體候一向萬康)하시옵소서."

"오냐, 오냐."

강도진이 머물던 세상의 예법대로 큰절을 올린 루카스의 시선이 마지막으로 루치펠을 향했다.

"저는 준비됐습니다."

"짐의 성실한 계약자이자, 굳건한 믿음의 후계여!"

"...그건 좀 낯 뜨거우니까, 그냥 편히 말씀하시면 안 되겠습니까?"

민망한 그의 손사랫짓에 루치펠은 사탕 뺏긴 아이처럼 시무룩해졌다.

"큼큼, 그래. 마계 어디로 보내주랴?"

"음? 어디든 가능한 겁니까? 이왕이면 시간도 아낄 겸 적진 한복판이 좋겠군요."

"가만, 가만... 그래도 베엘제불의 영향력이 강하게 뻗친 곳은 피하는 편이 좋겠다. 사실 하려면 못할 것도 없는데, 만일 그랬다간 천계의 감시망에 딱 걸려서 저 친구들이 제법 난감해질 테니까 말이야."

"그건... 좀 아쉽군요."

루치펠은 실망한 기색으로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는 루카스에게 다른 제안을 건넸다.

"그보다 먼저 들릴 데가 있지 않나?"

"?"

"모디얼."

"음... 그 이름은 현재 마계의 타천사 군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만?"

"맞아, 맞아. 더불어 베엘제불의 직계자들이 데거렝젤을 아무 제제 없이 무사통과할 수 있게끔 길목을 활짝 열어준 아주 괘씸한 놈이기도 하지."

"!"

"요약하면 그 놈과 그 휘하 친위대는 베엘제불에게 붙어버린 변절자들이라고나 할까?"

- 뿌드득!

말뜻을 그제야 이해한 루카스가 어금니를 빠드득 갈았다.

"아아, 그 표정을 보아하니 더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 같구만. 그럼 디르세마니로 향하는 길을 열도록 하지."

"...반드시, 무조건. 그곳으로 부탁드립니다."

"파하하하!"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루치펠은, 마계와 연결된 차원문을 가브리엘이 앞서 감시회피용으로 생성해놓은 집채만 한 결계 안쪽에 생성시켰다.

- 위이잉~.

"참고로 모디얼은 지금 성채감옥 내에서 죽치고 있을 게다. 베엘제불 부하들의 수작에 제대로 당해서 정신이 온전치가 않거든."

"...정보 감사합니다."

"아참! 내가 딱 한 가지만 더 당부하겠네!"

루치펠은 입가에 묘한 웃음을 머금은 채 말했다.

"저기... 이런 부탁하기가 민망하지만... 앞으론 못된 짓 좀 하면서 살아줘."

"?"

"거 내 입장 좀 헤아려주게나! 자네는 명세기 대악마의 직계자가 아닌가? 그런데도 자네의 행실이 착하디 착한 순둥이라면, 내 수하들이 과연 날 뭐라고 생각하겠나! 설마 천상으로 승천한 최초의 마족으로 기록되고자 마음 먹은 건 아니겠지, 응?"

"......"

"그 뭐냐... 심성 고약한 놈들의 등을 쳐먹는다라던가, 아니면 하다못해 자네 심기 불편하게 건드린 놈들은 그 자리에서 머리를 뜯는다던가! 어차피 마족과 마물들이 썩어나는 마계이니 자네가 조금만 양보하면 능히 할 수 있는 일이 꽤 많지 않겠느냐 이 말이네! 아하하하!"

"최대한... 노력은 해보겠습니다."

"그래, 그래! 잘 생각했어! 아무쪼록 잘 부탁하네!"

“저기... 저도 한 가지만 여쭙겠습니다.”

이번엔 반대로 루카스가 가볍게 어깨를 툭툭 치며 물러서던 루치펠을 불러 세웠다.

"마족을 모조리 영멸시키겠다는 계약조건. 제가 그것에 특별한 기간을 걸진 않았더랬지요?"

"뭐... 확실히 그랬었지."

"그렇다면 한동안 제가 도망치는 적은 구태여 뒤쫓지 않고, 저를 방해치 않는 아군은 살려둔다 한들 별다른 문제 없겠군요."

"...음?"

루카스는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하는 루치펠에게 설명을 보태줬다.

"큼큼, 별 거 아닙니다. 당장에 눈에 보이는 대로 쓸어봤자, 마귀새끼들이 바퀴벌레처럼 순식간에 증식한다는 것을 이젠 저도 깨달았을 뿐입니다."

"허허..."

"계약사항이 딱히 변한 건 없습니다. 이렇게 마족으로 다시 태어난 제가 제 입으로 말하는 것도 우습지만, 저는 여전히 악마와 마족을 경멸합니다. 단지..."

"단지?"

"서로 편을 나누고, 파벌을 갈라서 악마들의 힘과 결속력을 분산시킨다는 당신의 방책이, 현재 상황에선 그 어떤 수단보다 월등히 효율적이라는 것을 인정했을 따름입니다."

"......"

"아무튼 특이점이 생기기 전까진, 무작위 마귀섬멸은 당분간 보류토록 하겠습니다."

"...고맙네! 정말 고마워! 허허허!"

"이젠 진짜로 가보겠습니다."

말을 마친 루카스의 모습이 차원문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졌다. 그리고 남겨진 루치펠은 차원문을 묵묵히 응시하며 잔잔한 감격을 음미했다.

그리고 그 모습은 수분의 시간이 지나, 강도진이 가브리엘을 향해 입술을 뗄 때까지 계속됐다.

"가브리엘 님, 저도 슬슬 마음의 준비를 끝냈습니다."

"그래, 선계의 초월자여. 그대는 내 기대를 웃도는 성과를 이뤄줬다. 그에 대한 보답을 위해서라도 자네가 더욱 감형 받을 수 있게끔 최대한 힘써보겠노라."

"헛! 아이고오~, 이거 너무 감사해서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염치없지만 꼭 좀 부탁드립니다! 다시 봉인석 밑으로 끌려들어가 앞으로 1천하고도 6백 년이나 더 깔려 있을 생각에 제 심정이 아주 죽을 맛인지라... 아하하핫!"

"뭣이?! 그게 웬 말인가?!"

""?""

어느새 소소한 감동의 도가니에서 벗어난 루치펠은, 과장된 언행으로써 대뜸 이들 대화 사이에 끼어들었다.

"아니! 자네 같이 뛰어난 재목이 도대체 왜?!"

"아, 그게 나름의 사정이 살짝... 아하하..."

명함크기의 카드 한 장을 꺼낸 루치멜은, 잊을만하면 떠올리게 되는 흑역사로 겸연쩍어하는 강도진의 겉옷 주머니 속에 그것을 뇌물처럼 쓰윽 밀어 넣었다.

"허허, 쯧쯧쯧! 이보게, 혹시 신선놀음이 지겹다거나 하면 언제든지 연락하게나! 자자, 이걸 반으로 쫙 찢으면 내재된 술식이 발동되서 언제든 나와 연락이 닿을 것이네. 내 사정이 여의치 않을 땐 믿을만한 심복이라도 꼭 보낼 것이라 약속하지!"

"...예?"

이 장면을 실시간으로 목격 중이던 미카엘이 즉시 정색하여 딱 잘라 말했다.

"형제여,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겐가?!"

"어흠, 어흠흠! 아니... 난... 그으... 내 정말로 안타까워서 꺼낸 말이었지!!! 그냥 뭐 '여차하면 다른 길도 있다~' 그런 비슷한 조언라고 설명하면 되려나? 으허허허허!"

한풀 꺾인 악마의 속삭임이 눈에 쌍심지를 켠 천사장 앞에서 한동안 머쓱하게 웃었다.

* * * * *

마계 특유의 꾸물꾸물한 날씨는 여느 때와 다르지 않게 디르세마니 전역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그 영역 요지에 위치한 성채를 자세히 살피면, 평소와 다른 점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 피이이이이이이이......

구름 위에서부터 지표면을 향해 일직선으로 하강하는 10m 크기의 검은 물체가 있었다. 그것은 두 말할 것도 없이 본질적인의 형상으로 현현한 루카스였다.

- 파앙-! 파앙-!

허공을 연속으로 박차며 가속에 가속을 거듭하는 그의 비장한 모습에선, 걱정이나 염려가 들기보단 오히려 전율이 느껴졌다.

- 드드드드드...

아니나 다를까. 성채의 방어결계는 이런 루카스의 맹렬한 압도를 심각한 위협으로 판단하여 겹겹이 부르르 떨었다.

- 지이잉~.

그렇게 겉표면으로 비눗방울과 같이 미끈하고 탱탱한 반사광이 표면에 전개되며 반응이 끝났을 무렵, 루카스는 아리사엘과 겨룰 때 사용했던 물건을 소환했다.

{포르투스 클라베스(Portus Claves, 피난처의 열쇠).}

루치펠이 직접 명명하기까지한 이 유물은, 제니티아가 스스로를 희생하여 독립시킨 영역을 열고 닫는 것이 본래의 주요 기능이었다.

그러나 루치펠이 이 열쇠를 일부러 양날검의 형태로 제작함으로써 무기로 사용가능했다. 또한 겨우 2종류(대검, 장검)에 불과하나, 그래도 사용자의 신장에 비례한 형태변환이라는 약간의 부가기능이 포함되어 있기도 했다.

객관적인 측면에선 대악마가 공들여 창조했다기엔 능력이 대단히 빈곤하기 짝이 없는 유물이라고도 폄하할 수도 있는 그런 물건이었다.

하지만 그 외의 별다른 기능이 없기 때문에 되레 상대적으로 유별난 강점이 존재했는데, 이 신물의 주인이 된 루카스는 이 한 가지 장점을 굉장히 마음에 들어 했다.

- 크과과과과과!

천계 최상급 무구에 버금가는 포르투스 클라베스의 괴이한 강도.

이 강점은 어거지로 결계막을 무효화시키려는 루카스의 의지를 넉넉히 뒷받침해줄 만큼 굉장히 단단했다.

- 투확-!

진즉에 모디얼의 과민증에 영향을 받아 제니티아가 군림하던 시절보다 3배 가까이 두터워진 결계였지만, 루카스의 맹렬한 공세 한 방을 견디지 못했다.

- 쿠웅!

기어이 결계를 뚫어내고 외벽 안쪽에 착지한 그의 포효가 성채를 온통 뒤흔들었다.

{모오오오디이이이이어어어어얼!!!!!!!}

그의 위압에 녹아있는 대악마 루치펠의 권능은, 근방의 모든 타락천사들을 본능적으로 위축시켰음에도 기세가 좀처럼 사그라들지 않았다.

"치, 침입자다!"

이변에 천지가 깜짝 놀란 것도 잠시, 결계가 희미하게 무력화되고 있는 하늘 밑으로 전투병력들이 해일처럼 밀려왔다.

- 두두두두두...

뜀박질하거나 날아드는 전투원들의 숫자가 루카스의 시야에 가득했다. 그러나 성채구조를 알 리 없는 루카스에겐 오히려 방향지시등과도 같았다.

'저 첨탑인가?'

그가 추켜든 칼이 어느 타락천사 부대를 겨눴다. 그 행동은 이곳에서 가장 강한 정예 무리야말로 모디얼의 친위대일 거라는 추론에 근거하고 있었다.

- 팟! 스아아악-!

무자비와 속전속결. 사라졌던 루카스의 모습이 다시 드러냈을 땐, 일흔 일곱 개의 적군 허리가 처절하게 양분된 직후였다.

"끄아아악!"

다른 전투원들은 아등바등 신체회복에 힘쓰는 동료를 보면서 기겁했고, 약 10m 크기로 현현한 루카스의 위세와 그로부터 느껴지는 낯설지 않은 존재력에 또 한 번 경악했다.

"이, 이건... 마치... 왕의...!"

마치 그들이 루치펠의 분노를 직접 마주한 듯한 착각에 정신이 팔려 있는데, 맹수가 으르렁거리는 것과 같은 루카스의 음성이 문득 울려 퍼졌다.

{비켜서라. 그러면 살 것이다.}

까마득한 공포. 루카스가 선사한 분노에 멈칫해서 한 발자국 물러난 이들이 있는가 하면, 오히려 무기를 겨누며 용맹을 뽐내는 투사들도 있었다.

그래도 타락천사들 중에 정예라 불릴 만한 강자들이 모인 집단이라서 그런지, 두려운 침입자에게 맞서고자 하는 무리가 훨씬 더 많았다.

'...어쩔 수 없나?'

단체를 홀로 상대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누가 뭐라해도 그들에게 제대로 된 본보기를 보여주는 것이다. 앞선 몇 놈을 악독한 수법으로 공개처형해버리면, 잔당들의 전의가 우야무야 꺾여 통제하기 쉬운 까닭이다.

루카스의 선택 또한 마찬가지였다.

'가급적 영멸만큼은 참아주겠다.'

그는 두려움에 맞서는 타락천사들이 기특했으나, 그렇다고 시간과 힘을 낭비하고픈 마음은 일절 없었다.

기습의 요점이 시간싸움이기도 하거니와, 여기서 조금만 더 지체하면 그로서도 감당 못할 병력수준으로 불어날 가능성도 배제해선 안 되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그가 중품 천사에 견줄 만큼 강해졌다지만, 적진 한복판에서 괜한 도박을 행할 만큼 정신이 풀어지진 않았다.

- 팟!

또 한 번 자리를 박찬 루카스는,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전투원들을 향해 참격을 날리기 시작했다.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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