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여지책 (2)
* * * * *
이틀 후 아침.
타미아르 파병대 측 임시 야영지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 ‘비리디아(Viridia)’.
- 땡! 땡! 땡! 땡! 땡!
"맥스웰 젱킨스 남작 영지의 주민들은 모두 나와 들으시오!"
노인과 아이까지 다 합쳐도 2천 명이 채 못 되는 이 도시의 광장에 종소리가 시끄럽게 울려 퍼졌다.
"맥스웰 젱킨스 남작 영지의 주민들은 모두 나와 들으시오!"
이 종 같은 푸닥거리는 나랏일의 공표가 있을 적마다 왕왕 겪어왔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저마다 졸린 눈을 비비며 집에서 나와 광장으로 모여들었다.
"흐아아암~, 꼭두새벽부터 뭔 일이래요? 아오오으으으~! 점심 무렵에 와주면 어디 덧나나..."
"글쎄, 귀족들에게 그런 배려심이 있을 리... 어이쿠, 영주님께서 직접 행차하셨네! 뭔 일이 크게 터졌나?"
영주도 영주였지만, 마지 못해 끌려 나온 대중들의 눈꺼풀이 희번뜩 떠진 이유는 따로 있었다. 바로 닭둘기 무리 속 도도한 공작새와 같은 기품을 뽐내는 인물들이 대거 등판했기 때문이었다.
"어머?! 어엄~청~! 잘 생겼어! 저기 저 귀족나리는 대체 어느 댁 뉘시래? 혼인은 하셨을라나? 어마마마, 나도 주책이지~. 오호홍홍홍~."
"어후~, 요정족이라니! 오오, 맙소사! 잠이 확 깨는구먼!"
"아니, 이 양반이 지금 어딜 쳐다보는 거야?! 앙?!"
"이 여편네가 왜 나한테만 성질이야? 지는 되면서 왜 난 안 되는데?"
"뭐, 뭐라고요? 확 그냥?!"
"아아악! 자, 잘못했어! 마눌님아, 용서해줘! 으악!"
가르디엔과 요정족의 빼어난 용모 덕분에 대중이 상당히 왁자지껄 해지자, 체구가 몹시도 넉넉한 맥스웰 남작이 직접 나서서 경종을 때렸다.
- 땡! 땡! 땡! 땡! 땡!
"조용! 조용!"
남작의 단호한 행색을 본 주민들은, 눈치 빠르게 분위기를 파악하곤 겁에 질려 꼬리말은 들개처럼 정숙해졌다.
"가르디엔 님. 자, 이쪽에 서시면 됩니다."
"고맙습니다. 젱킨스 경."
맥스웰의 깍듯한 안내를 받고 임시 단상에 오른 가르디엔은 대중을 향해 목청을 높였다.
"나는 가르디엔 고든! 하워드 고든 백작의 아들이자, 우리나라 최고의 대마법사 디마우스 오하버의 수제자다! 나는 특별한 임무를 수행해줄 지원자를 찾고자 오늘 이곳에 왔노라!"
청중들은 범상찮은 가르디엔의 신분을 들었을 때부터 뭐라고 떠들고픈 말이 압안에 한껏 고인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두 눈에 힘을 팍 주며 데굴데굴 부라리는 영주가 두려워 차마 입밖으로 꺼내는 사람은 없었다.
"잘 들었겠지? 여기 가르디엔 님께선! 산길에 해박한 자를 찾으신다! 적절한 보상을 내릴 것이니 최대한 많이들 지원하도록!"
그런데 '적절한 보상'을 운운한 남작의 발언 이래로, 호기심 가득했던 주민들의 반응은 양동이로 얼음물을 콱 흩뿌린 것과 같이 쌀쌀해졌다. 평소 짠내 풀풀 나기로 유명한 남작이 보수를 언급할 정도라면, 그것은 보통 위험천만한 일이 아님을 경험상 잘 아는 까닭이었다.
'쩝... 남작의 평소 품행이 어땠는지 알만 하군.'
이런 시큰둥한 대중의 반응을 살펴본 가르디엔은, 하는 수 없이 다시 한 번 외쳤다.
"비리디아의 영지민들이여! 상황이 다급하니 진실을 숨기지 않고 밝히겠노라! 이 마을, 아니 맥스웰 남작의 영지 전역은 현재 역병의 위협에 처해 있다!"
"여... 역병!!!"
"오, 신이시여! 제발!"
주민들이 하나둘씩 저도 모르게 탄성을 흘렸다. 가르디엔은 이 웅성거림이 더 커져 공황 상태가 되기 전에 서둘러 외쳤다.
"피난 가기엔 이미 늦었다! 주변 산중엔 이미 흑마법사들의 흉포한 키메라들이 도사리고 있는 중이다! 우리의 용맹한 근위대와 요정족이 상호 협력하여 퇴치 중이긴 하나, 아직 토벌이 절반도 완료되지 않은 실정이다! 다시 말해 나 혼자 살겠다며 지금 도망가 봤자 헛되이 죽음을 맞이할 가능성이 매우 크단 뜻이다!"
- 웅성웅성.
"어, 엄마... 나 무서워."
"아빠, 우리 어떡해요?"
무서운 괴담에서 빠지지 않는 흑마법사들과 합성괴물이 언급되자마자, 개중에 딱딱하게 얼어붙은 아이들도 있었다. 그렇기에 가르디엔은 이쯤에서 대중을 향해 한 줄기 희망을 투척했다.
"하지만 주민들이여! 역병을 막을 기회가 있다! 이는 여기 요정족 분들이 혼신의 노력을 다하여 치료제를 완성해냈기 때문이다!"
그는 다소 누그러진 사람들의 분위기를 놓치지 않았다.
"그러나 이 치료제의 주재료인 '샤로커스(Charocus)'의 뿌리가 턱없이 부족하다. 맥스웰 남작은 이미 내게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나, 기존의 재고만으로는 다른 영지에서 조달해오기 전까지 버티기도 힘든 실정이다."
잠시 숨을 고르며 장내를 살피는 그는 목소리에 다시금 힘을 실었다.
"하여 나는 약초지식이 있으며, 산 지리에 익숙한 자들의 지원을 받고자 한다! 확실히 말해두건데, 이는 강제가 아니다! 그러나 내 가문의 명예를 두고 맹세한다! 반드시 그에 대한 걸맞은 보상을 하겠노라! 그러니 용기 있는 자들의 많은 지원을 바란다! 자, 앞으로 나서라!"
가르디엔은 짐짓 머쓱해졌다. 이렇게 애원하다시피 유하게 열변을 토했건만, 선뜻 응하여 자원하는 이가 한 명도 없었던 것이다. 어쩌다 나서려던 사람도, 아내나 부모의 눈총 속에 제재 당하기 일쑤였다.
"어디 내가 한 번..."
"야, 죽을래?"
"팍씨, 이게 하늘 같은 남편한테 '야'라니!"
"그럼 날 과부 만들겠다는 놈을 칭찬해주리? 나대지 마라."
"......넵."
정적이 몇 분 단위로 이어지매, 가르디엔의 머릿속에도 서서히 나쁜 생각이 드리울 수밖에 없었다.
'젠장, 이렇게 되면 결국 맥스웰 남작을 닦달해서 강제차출을 .. 음?'
그가 남모르게 독한 결심을 내리려던 그때, 북적이는 인파 속에서 여린 팔 하나가 빼꼼 올라왔다.
"......저, 저기! 저기요!"
아주 잘 쳐줘야 열댓 살이나 먹었을까? 가르디엔은 오른손을 치켜 올린 채로 걸어 나오는 흑갈색 머리색의 소녀를 응시했다.
"저어, 공자님! 외람된 질문이오나... 자원하게 되면, 보상은 구체적으로 얼마나 받게 되나요? 혹시 돈 이외의 것을 말씀드려도 괜찮을까요?"
"어, 그래. 물론이다. 각 지원자마다 원하는 것을 들어본 후에, 내 여력으로 가능한 범위 내에선 모두 해결 주겠다."
"그, 그럼 제가 하겠습니다!"
"...뭐?"
이런 상황 자체가 어이없는 가르디엔은 소녀를 향해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하하, 미안하지만 이 위험한 일에 지원하기엔 네가 너무 어리구나. 너의 기특한 마음만큼은 고맙게 받으마."
그러자 소녀가 발끈하듯 몇 걸음 앞으로 나오며 목소리를 높였다.
"저 어리지 않아요!"
"그래? 그럼 올해 몇 살이지?"
"여, 열 셋입니다!"
"하하핫! 보통 그걸 어리다고 표현한단다! 게다가 이번처럼 건장한 사내의 목숨마저도 오락가락하는 일이라면 더더욱 그렇고 말이지."
"그렇지만 약초에 대해선 이 지역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고 자신합니다! 게다가 여기 산맥 지리도 아주 잘 알아요!"
"하하하, 그렇구나. 하지만...엉?"
다 닳고 해진 옷을 입고 있는 소녀의 당돌함을 그저 한낱 웃음거리로 넘기려던 가르디엔이었다. 그러나 그의 예리한 관찰력이 이 소녀를 두고 상당히 불쾌해하는 맥스웰 남작을 발견해버렸다.
'뭐야, 영주의 표정이 왜 썩어 들어가?'
덕분에 그냥 지나칠 수 없는 호기심이 발동됐다.
"참으로 용감한 아이로구나. 먼저 네 이름을 알려주지 않으련?"
혹시나 해서 찔러봤던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은 과연 역시나였다.
"저는 '바네사 캐플랑(Vanessa Kaplan)'이라 합니다."
"캐플랑?"
통상적으로 최하층민에겐 이름이 없었다. 그러니 이름도 없는데 성이 있을 리 없었다. 그런데 겉보기에 누추한 복장의 이 소녀는 이름은 물론 성도 가지고 있었다.
'심지어 꽤 낯설지 않은 성이란 말이지...'
타국에서부터 각 항구도시를 통해 흘러 들어오기 시작한 '이름 지어주기' 문화가, 타미아르 일반백성들 사이에서 놀이처럼 퍼져 십여 년 전부터 대중적으로 안착해오긴 했다. 그러나 이러한 놀이에서도 '감히' 성까지 만들어 붙이진 않았다. 당연하게도 유서 깊은 가문을 자랑스러워하는 높으신 분들의 후한이 두렵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서, 가르디엔 앞에 있는 여자아이는 귀족가문의 후손이 틀림없다는 것을 의미했다.
'아...! 채드웍 캐플랑(Chadwick Kaplan)!'
마침내 가르디엔이 약 8년 전, 투병생활 중에 세상을 등진 자작을 떠올렸을 무렵, 바네사가 당차게 몇 걸음 더 앞으로 나오며 그에게 협상을 걸어왔다.
"호, 혹시요! 제가 잘 말린 샤로커스 뿌리 73kg를 구해다 드린다면! 저를 안내역으로 뽑아주실 수 있을까요?!"
"...뭣?!"
순간 자신의 귀를 의심한 가르디엔이 바네사에게 또박또박 되물었다. 만일 그녀가 제시한 물량을 진즉에 확보할 수 있었더라면, 이렇게 돌아다니며 번거로운 구인행위까진 하지도 않았을 터였기 때문이다.
"지금 샤로커스 뿌리 73kg라고 했니?"
"네! 그렇습니다!"
"으음... 바네사라고 했지? 얘야, 이건 무척 중요한 일이란다. 그러니 비록 네가 기분 상할 지라도, 난 지금 네가 거짓말을 한 건 아닌지 다시 되묻지 않을 수가 없구나."
"정말입니다! 믿어주세요! 캐플랑 가문의 이름 걸고 맹세해요!"
"좋다. 확인 후 네 말이 사실이라면, 지원자로 받아주는 것은 물론, 후한 보상 또한 내려주겠다."
"감사합니다. 그럼 지금 바로 가져올게요!"
"나도 같이 가자꾸ㄴ......"
그는 말을 마치지 못했다. 바네사가 가르디엔의 마음이 바뀔세라 그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자리를 박차고 쏜살같이 뛰었던 것이다. 그리고 당돌한 바네사의 뒷모습을 본 레이첼이 슬그머니 가르디엔 옆으로 다가와 속삭였다.
"가르, 우리도 따라가자. 시간이 넉넉지 않아."
"그래. 저 아이 말이 정말로 사실이라면 향후 일정을 다시 짜야 할 정도니까. 나도 한시라도 빨리 확인해보고 싶군. 저 아이가 다른 뭔가를 착각했을 수도 있고 말이지."
그는 여전히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는 맥스웰 남작에게 말했다.
"남작님께선 여기 남아 주민들을 달래주고 잘 안심시켜 주십시오. 차후에 자택에서 뵙겠습니다."
"예,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자, 그럼 나머진 나를 따르도록."
총 10인 남짓한 가르디엔 무리는 시장골목으로 사라진 바네사를 찾는데 큰 어려움이 없었다.
"끙...! 끄응...차!"
전문적인 추적술조차 딱히 필요치 않았다. 한적한 골목, 여린 소녀가 2층으로 된 건물 안팎으로 분주하게 움직이는 모습이 그만큼 눈에 확 띄었기 때문이었다.
가르디엔이 볼록한 부대자루를 낑낑 거리며 손수레에 싣는 것에 열중하는 바네사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이~야~, 정말로 이게 다 샤로커스라니!"
"헉! 언제 오셨..."
"하하하, 이런 내가 본의 아니게 놀랬켰구나. 사과하마."
"아, 아닙니다. 안 그래도 지금 가져다 드리려고......"
"우선 나와 내 친구들이 조금 살펴봐도 될까?"
"네! 여기요! 차근차근 보고 계세요. 제가 얼른 가서 나머지도 곧 가져오겠습니다!"
호다닥 사라진 바네사를 바라보던 가르디엔은 수레에 실린 자루를 하나씩 끌러, 바짝 건조되고 잘게 썰린 뿌리를 무작위로 몇 개씩 레이첼에게 건네며 말했다.
"하~, 평소엔 흔하디 흔했던 약초가 이렇게 금보다 귀하게 느껴질 때도 다 있네. 그나저나 이것들 상태는 좀 어때? 꽤 손질이 되어 있는데 약효에 지장은 없겠어?"
"오우! 이건 꽤 좋은데?"
"어? 진짜?"
"이건 굉장히 숙련된 연금술사가 전문적으로 처리해 놓은 거야! 틀림없어! 이것도, 저것도... 오오, 전부 다! 더없이 완벽해! 이거라면 추가가공도 필요 없겠어. 제조시간이 많이 단축될 거야!"
"하하하, 그것 참 희소식인 걸?"
"그런데... 에... 조금... 이상해."
레이첼이 모든 포대를 일일이 확인하며 몹시 기뻐했던 것도 잠시였다. 갑자기 미간을 좁힌 그녀는 약초와 물약 그림이 그려진 허름한 상점 간판을 훑으며 의문을 표명했다.
"이 크지도 않은 마을에, 그것도 이런 작은 상점에서 대량의 샤로커스를 구비해놨다? 손질까지 완벽하게? 난 이 점이 상당히 거슬려."
"크흠..."
"솔직히 이 약초가 흔해빠지긴 했어도 일반적으로 수요나 가치가 높은 편은 아니잖아?"
" 확실히... 네 말처럼 이게 좀 생뚱맞은 양이긴 하지."
"이것에 비하면 가르가 인근 영지들에게서 긴급 동원한 양은 별 게 아닌 수준이야."
"음? 창고에 샤로커스가 몇 수레는 될 텐데?"
"뿌리만 잘라서 똑같이 처리한다고 가정하면 이게 더 많은 거야. 그 아이가 약속한 73kg 전부가 이만한 수준이라면... 아무리 못해도 약 4.758배 분량을 더 확보하게 되는 셈이고."
거진 5배란 수치는 가르디엔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다.
"허허, 그 정도씩이나?"
"쉽게 말해서 이건 내 눈엔 마치 역병을 예견하고 미리 대비했던 건 아닐까... 싶을 수준의 물량이라고만 해둘게."
"......"
- 작가의말
이 소설을 즐겨주시는 독자님들이 계셔서 천만다행입니다. 감사합니다. 사실 너무 유별난 데다가 호흡까지 긴 소설이라 아무도 안 읽을 줄 알았거든요.
아참! 메리 크리스마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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