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벌적 윤회 (5)
* * * * *
폴라에게 대략적인 설명을 해준 루카스는, 휴대용 통신구를 하나 빌린 뒤 자히드 남작령으로 빠르게 향했다.
그가 신경써야할 일행도 없고, 또한 초행길도 아닌 탓에 그의 이동속도는 갓 쏘아낸 석궁의 투사체보다도 몇 배는 더 빨랐다.
그렇게 천상과 선계의 주목을 받지 않을 선에서 주파를 완료한 그는 제일 먼저 영주의 침소로 숨어들었다.
“헛! 누, 누구ㄴ... 으읍!”
“오랜만입니다, 파르하드 영주님.”
“웁! 웁!”
“쉿, 이건 비공개 방문입니다. 먼저 나의 무례를 깊이 사과합니다. 당신은 나와 조용한 대화를 나눌 수 있겠습니까?”
- 끄덕, 끄덕.
파르하드 영주를 천천히 풀어준 루카스는 다시금 사과한 후 낮은 음성으로 조용히 물었다.
“혹시 당신의 영지에 수상한 외부인이 최근 방문하진 않았습니까?”
파르하드는 ‘니가 지금 제일 수상하다!’라며 낭낭하게 지적하고 싶었으나, 그 대상이 천년 묵은 괴물을 시원하게 때려잡은 인물이란 점을 재빠르게 상기했다.
“...그, 글쎄요. 한 달 전 쯤에 질 나쁜 용병단 족속이 여럿 나타나 날뛰긴 했습니다만, 그때마다 요정족 전사들이 즉시 처리해줬습니다. 에... 그 외엔 특별히 기억나는 일은 없군요.”
“처리된 용병 중에 딜레-둠브라 소속이 있었습니까?”
“아니요. 그냥 시정잡배나 다름 없는 건달들이었습니다. 근데 어째서 그 흉흉한 폭력조직을 언급하시는 건지요?”
“그들이 로ㅂ... 아, 잠시만.”
말을 하다 멈춘 루카스의 형체가, 거짓말처럼 기둥 뒤편 그림자 속으로 스스륵 사라졌다.
“......?”
파르하드 영주가 꿈 같은 기현상을 두고 어리둥절했는데, 때마침 누군가가 밖에서 침실 문을 두드렸다.
- 똑. 똑. 똑.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영주님. 리코우와 에벨린입니다.”
“...아, 열려 있으니 들어오십시오.”
영주가 예의상 겉옷을 하나 두르는 사이에 요정족 2인이 방 안으로 들어섰다.
“밤 늦게 실례합니다. 긴히 드려야 할 이야기가 생겨서 불가피하게 찾아 뵈었습니다.”
“험험, 괜찮습니다. 근데 무슨 일이신지요?”
“조금 전 대사관측으로부터 루카스 님께서 이곳으로 출발하셨다는 통신을 받았습니다. 아무래도 며칠 내에 도착하실 거 같은데, 그 전에 영주님의 고견을 청해 듣고자 합니다.”
“그, 그러셨군요, 하하...”
영주는 루카스가 이미 도착해서 이 대화를 듣고 있음을 알기에 바싹 긴장했다. 그가 뒤가 구린 짓을 딱히 하진 않았으나, 사람의 심리가 원래 그런 탓인지 이마에 식은땀이 줄줄 흐르는 생리현상을 자의적으로 멈출 수가 없었다.
“안색이 창백하시군요. 혹시 감기 기운이라도?”
“그, 그런가 봅니다. 벼, 별 거 아니니 신경 쓰지 마십시오.”
“저희 측 의료담당자에게 언질 해두겠습니다. 내일이라도 진료를 한 번 받아보시지요.”
“배,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
리코우는 파르하드 영주의 얼어붙은 태도가 마음에 영 거슬렸지만, 그래도 이왕 목적의식을 갖고 결례를 무릅쓴 만큼 곧장 본론으로 돌입했다.
“어쨌거나 이번 루카스 님의 방문사실은 비공개로써 처리하라는 게 저희 상부 측 권고사항입니다. 하지만 전 개인적으로 로비샤 영애께만은 알려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영주님의 의견은 어떠신지요?”
“그, 그렇게나 거, 건강이 안 좋아진 겁니까?”
“예, 영애님의 건강상태가 말이 아닙니다. 저희가 주기적으로 영양제를 투여시키곤 있습니다만, 반발이 심하셔서 그것조차 슬슬 한계로 보입니다. 이러다 행여 큰 일을 치를까 싶어 심히 우려하고 있습니다. 이럴 바에야 차라리...”
“이봐, 그건 무슨 말이지?”
“헙?!”
“히익!”
어둠 속에서 불현듯 튀어나온 루카스의 모습에, 리코우는 물론 부관 에벨린까지 실금할 뻔 했다.
“뭐? 로비샤의 건강이 어떻다고?”
어느덧 파르하드 영주와 똑같은 몰골로 구슬땀을 흘리기 시작한 리코우가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구구절절이 읊었다.
“두, 두 달 전부터 다, 단식투쟁을...”
“무슨 소리냐? 단식? 투쟁? 더 상세히 설명해라.”
“다, 다름이 아니라... 부, 부디 루카스 님을 마, 만나게 해달라고... 하다못해 토, 통신이라도 하, 하게 해달라 하시면서...”
로비샤가 본인의 의지를 관철시키고자 단식투쟁에 돌입했다는 이야기에, 돌연 뭉클해진 루카스의 심장이 찢어질 듯 아렸다.
“......정말 미련하고 참으로 고지식하다. 누가 순둥이 여신 아니랄까 봐... 젠장...”
“...예?”
“아니다. 혼잣말이었다. 그보다 그녀는 지금 어떻지?”
“깊이 잠들어 계십니다. 저희가 영양제를 투입하려 할 적마다 심하게 저항하셔서... 어쩔 수 없이 수면마법을 사용했어야 했습니다.”
“...그랬군. 그녀는 어디에 있나?”
이에 대한 답변은 파르하드 영주가 대신 해줬다.
“이전 방 그대로입니다, 루카스 님.”
“음, 당신의 친절에 고마움을 표합니다.”
로비샤를 양녀의 지위에 계속 놔둔 데에는 파르하드 영주 나름대로의 계산이 밑바닥에 깔려있는 것이나, 그래도 어쨌든 고마운 건 고마운 일이었다.
“저희가 안내 드리겠습니다. 저희 외에 루카스 님을 당장 알아볼 경비대 인원이 없기 때문에 자칫 곤란해지실 수 있으니까 말입니다.”
“알겠다. 부탁하겠다.”
그렇게 리코우와 에벨린을 앞장 세워 로비샤의 침실로 향한 루카스는, 의자 하나를 침대 곁에다 바짝 끌어다가 놓고 앉았다. 그리곤 전에 비해 몹시 앙상하게 여윈 그녀의 체형과 거칠게 푸석푸석한 피부를 바라보며 얼마간 말을 잇지 못했다.
“후우... 이 미련퉁이...”
분위기상 2~3분 정도 묵묵히 기다려준 리코우가 슬그머니 운을 뗐다.
“수면마법을 해제시킬까요?”
“...아니, 아니다. 그러지 마라. 이대로 놔둬라.”
가까스로 충동을 참은 루카스는 마지막으로 봤을 때보다 수척해진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혼잣말로 웅얼거렸다.
“후... 나를 잊으라고 분명 말했습니다. 그런데 왜 당신은 이렇게까지... 이렇게까지 하면서 내 말을 무시합니까? 나란 존재는 당신에게 매우 해롭다고 분명히 경고했잖습니까...”
““......””
엉겁결에 관전모드로 강제 전환된 리코우와 에벨린을 문득 의식한 루카스는 잠시 그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흠흠, 이만 가봐도 좋다. 다만 너희와 영주에게 꼭 할 말이 있다. 내일 오전 중에 다같이 봤으면 한다.”
“그럼 아침식사가 끝난 직후에 저희가 영주님과의 면담을 신청해두겠습니다. 그 시간으로 괜찮으시겠습니까?”
“난 괜찮다. 너희가 모여 있으면 내가 알아서 찾아가겠다.”
“예, 그럼 이만. 아, 참고로 수면마법은 일출 전까지 유지될 겁니다.”
“...고맙다.”
리코우와 에벨린은 로비샤의 손등 위로 먹먹하게 입맞추는 루카스를 뒤로하고서 조용히 밖으로 빠져 나왔다.
어느덧 숙소에 다다른 에벨린은 뭐가 그리 마음에 안 드는지 연신 구시렁거렸다.
“끄응... 도대체 왜 저러는 걸까요?”
“응? 뭐가?”
“보니까 완전 죽고 못사는 거 같은데, 하는 짓이 진짜로 궁상 맞잖습니까? 일방적인 짝사랑이었으면 제가 그러려니~ 하고 이해를 했겠지만 이건 마치... 음... 마치... 아! 마누라랑 사별한 남편이랑 똑같지 말입니다?”
“야, 아서라. 모름지기 남녀관계는 제3자가 가볍게 떠들 게 아냐. 뭔가 싶은 속사정이 있는 거겠지.”
“...어라? 조장님께선 뭔가 더 알고 계신가 봅니다? 부디 이 충성스런 부관에게도 살짝 귀띔 좀 해주십쇼! 예? 예?”
리코우는 에벨린의 같잖은 추궁을 두고 피식 웃었다.
“크크크! 야, 말이 되는 소릴 해라! 너나 나나 이런 외딴 곳에 처박혀 있는 신세인데, 내가 더 알아봤자 뭘 알고 있겠냐?”
“그래도 조장님은 차기 부단장으로 내정된 폴라 선배님이랑 꽤 친하시지 않습니까? 끈끈한 동기 사이면 알게 모르게 전해 듣는...”
그는 손을 휘휘 저으며 그녀의 말을 싹뚝 끊었다.
“쨔샤, 아무리 그래도 기밀사항은 예외야. 어느 날 폴라가 미쳐 돌아서 내게 넌지시 알려준다 쳐도 내가 먼저 귀 닫고 안 들을 꺼다.”
“엇? 정말이십니까?”
”당연하지! 그러다 내사에 걸리면 최소 6개월 감봉이거덩.”
“에이~, 조장님은 보기보다 과감성이 살짝 부족하시지 말입니다.”
“새꺄, 니가 아직 봉급 까인 경험이 없어서 그래! 난 2개월 후에 정식으로 임무 교대하는 그 날까지 쥐 죽은 듯이 지낼 꺼다. 정 그리 궁금하면 니가 직접 연락해서 물어보던가!”
“히~, 까마득한 선배님께 어떻게 제가 감히 먼저 통신을 요청합니까?”
“참나~, 그럼 폴라의 동기인 나는? 너는 내가 막 우습지?”
버럭 성내는 리코우 따윈 에벨린의 상대가 아닌 듯 했다.
“느으흐흐흥~, 왜 이러십니까~. 리코우 조장님이야 제가 존경해 마지않는 직속상관이시잖습니까아~.”
“하~, 이 놈의 주둥이가 말이나 못하면! 아오, 계집애 정강이를 콱 걷어찰 수도 없고...”
“히히, 더 꾹꾹 참아주십쇼~! 이렇게 능력 좋은데다 귀엽고 깜찍한 부관은 어딜 가도 흔하지가 않지 말입니다~.”
“......”
그는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더 능글맞아지는 그녀의 미소를 보며 인상을 박박 구겼다.
“됐고. 가서 발 닦고 잠이나 자라. 느낌상 왠지 내일부터 빡세질 거 같으니까. 아~, 빨리 다다음 달이 돼서 어여 해방됐으면 좋겠다으아~.”
“예입~, 늦은 시간까지 고생하셨습니다! 그럼 제 꿈 꾸십셔~, 조장님! 충성충성!”
“헛소리 말고 꺼져!”
“히힛-! 내일 뵙겠습니닷~! 단결!”
리코우는 쫑쫑쫑 사라진 에벨린이 자신에게 호감을 갖고서 꾸준히 밑작업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진 않았다. 그러나 100살이 훨씬 넘는 부담스런 나이차 때문에 그의 기분은 마냥 좋지 않고 어수선했다.
“쬐깐한 게 으딜 넘보고 있어! 상사와 부하 간의 로맨스 금지는 역사적 불문율이거늘! 이러다가 내사과에 ‘강압적 관계요구’ 어쩌구 저쩌구로 불려가서 조사받는 거 아냐? 어휴~, 내 팔자야! 본토로 복귀하자마자 맞선이나 보던지 해야지 원!”
현실적인 걱정이 앞선 노총각은 풋풋한 영계의 해맑은 감성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 * * * *
다음날 루카스는 이해관계자들을 만나 몇 가지의 정보를 공유했다.
“헛! 알랭 단장님이 부상을 당하셨단 말입니까?”
“맙소사! 그런 괴물이 딜레-둠브라를 접수했다고요?”
기겁하는 리코우와 파르하드 영주. 루카스가 보다 더 많은 정보를 풀고 싶어도, 청중들이 그것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안 된 터라 적당한 수준에서 끊어야 했다.
“맞습니다. 그리고 그 자가 나의 로비샤를 노리고 있습니다.”
“아니 어째서 말입니까? 도통 이유를 모르겠군요. 제가 양녀로 들이기 전에 파마길드에 조사 의뢰했을 때만 해도 이렇다 할 특이점이 없었습니다.”
“음... 파르하드 영주님. 당신은 후회 안할 자신이 있습니까? 현 상황이라면 내가 진실을 알려줄 수도 있습니다.”
“정말이십니까?”
”단, 목숨을 건 비밀엄수가 전제조건입니다.”
“......”
툭 터놓고 말해서 로비샤가 여신 이프리티아란 사실은 그렇게까지 대단한 비밀은 아니었다. 그녀에게 부과된 처벌내용에 ‘필멸자에게 정체를 들켜서는 안 된다’란 조항이 내포되어 있진 않는 까닭이었다. 막말로 본인조차 곧이곧대로 안 믿을 판에 누가 그 사실을 믿겠는가?
그러나 항사룡이 눈에 불을 켜고 그녀를 찾고 있다는 현재의 위험도를 고려하면, 적어도 이 상황이 종료될 때까진 그녀의 실체에 대해 아는 사람은 소수로 한정해야 옳았다.
덕분에 궁금증이 폭발해 있던 에벨린조차 ‘니들이 감당할 수 있겠냐?’란 루카스의 진지한 표정과 물음 앞에서 섣불리 입술을 떼지 못하는 중이었다.
‘아씨! 되게 궁금한데, 진짜로 죽이고도 남을 위인이라 눈 딱 감고 과감히 지를 수가 없네!’
비록 짧은 인연이었되 루카스가 한 번 내뱉은 약속은 반드시 지킨다란 교훈을 얻는 데엔 모자람이 없었던 것이다.
“흠, 다들 딱히 안 궁금한 걸로 알겠습니다. 그러면 지금부터 대책을 세웠으면 합니다. 당신들의 지혜를 한데 모아주십시오.”
“””......”””
막간의 정적을 깨고 루카스에게 물음을 던진 인물은 리코우였다. 주둔비용을 줄이기 위해 최근 파르하드 영주와 협약을 맺고서 영지방어와 병력훈련을 주도하는 이가 바로 그였기 때문이었다.
“루카스 님, 상대방의 정체가 딜레-둠브라라는 것 외에 유용한 정보가 더 있는지요?”
“음, 그들은 많은 곳을 돌아다니면서 특정조건을 수소문하고 있다. 그러니 그런 수상쩍은 외부인을 예의주시하면 될 거라 생각한다.”
“그 조건이라 하심은...”
“나이 스물 이상 스물 다섯 미만의 여자. 그리고 선천적 장애 또는 난치병 보유자. 이 조건만 맞으면 전부 납치해서 죽인다. 희생자가 벌써 4명이라고 했다. 겨우 일주일 만에 말이다.”
리코우는 자신의 구레나룻을 살살 긁으며 또 한 번 질문했다.
“어... 제 예상보다 무척 자세해서 그런데... 그 이야기의 출처를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혹시 파마길드?”
“아니다. 아드퍼드로스다.”
루카스를 제외한 세 사람이 시선을 빠르게 교환했으나 하나같이 고개를 도리도리 흔들었다.
“죄송하지만 모르는 정보상이군요. 저희가 그 명칭을 듣고 기껏 떠오르는 거라고 해봐야 ‘추수와 번영의 신‘ 밖에ㄴ...”
“맞다. 그 천신이다.”
“?”
“그가 내게 알려준 거다.”
과거 소왕 나셴-바실커스가 일방적으로 폭행 당하는 장면을 목도하지 않았더라면, 리코우가 이렇게 되묻지 않았을 것이다.
“...잘못 들었습니다?”
“다시 말한다. 정보출처는 천신 아드퍼드로스다. 정확하게는 그가 화신체를 통해서 나에게 알렸다.”
“...어... 음...”
“못 믿겠으면 폴라에게 연락해봐라. 아니면 칼리드에게 확인해도 된다. 아드퍼드로스의 화신인 주소걸이 그 녀석과 한패이기 때문이다.”
“......?”
헤트만 국왕으로 추정되는 이름이 떡하니 언급됨에 따라, 파르하드 영주도 한 마디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저어... 좀 전의 칼리드라 하심은... 설마 저희 나라의...”
“그 설마가 맞다. 칼리드 구르... 구르파...? 에... 뭐였더라... 암튼, 그 놈이다.”
“아, 잠깐! 잠시만!”
앞선 두 인물의 상태를 관찰한 에벨린은 차마 끼어들기가 두려워 입술을 꾹 봉했다. 여기서 마음 가는 대로 진실이 뭐냐며 한 마디 캐물었다간, 자신 또한 저들 사이에 동참하게 될 것만 같아서였다.
‘그냥... 겁나 가만히 있어야겠다.’
본래 용기내지 않는 자가 무난하게 살아가는 법이었다.
-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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