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여자와 그 남자의 고충 (2)
가르디엔은 아버지와 함께 퇴청하는 순간부터 마음속으로 한숨을 계속 뿜었다. 이때다 싶어 한데 뭉친 귀족파의 승리가 진심으로 아니꼬워서였다.
'사병제한의 한시적 해제라... 빌어먹을, 끝내 최악의 시나리오로 흘러갔구나. 쯧, 상황이 안 좋아. 트로돈과의 전력차도 극심한데, 이따구로 통제가 중구난방인 조직을 데리고선 필패야, 필패! 놈들의 본대가 넘어오기 전에 병력을 적어도 국가단위로는 통합시켜야 하는데...'
그의 고민은 전이마법진을 거쳐 백작가로 되돌아온 순간까지도 멈추질 않았다.
'자꾸 어깃장 놓는 인간들은 그냥 과감히 확 버릴까? 크흠... 그러기엔 놈들이 가진 자원과 병력이 너무 아깝단 말이지. 못해도 70% 이상은 쪽쪽 뽑아 먹어준 이후에... 어?'
진이 다 빠진 그와 공작을 반갑게 맞아주는 무리 중엔 의외의 인물이 섞여 있었다. 그 해당 인물은 고든 백작을 향해 정중한 인사와 몇 마디 담소를 나눈 뒤 그에게 총총총 다가왔다.
"이여어~, 가르디엔~. 오랜만!"
"아,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엘로디 양."
엘로디는 정식 인사예법를 갖추는 가르디엔의 어깨를 툭툭 때리며 실눈을 떴다.
"짜샤~, 내가 그냥 엘로디로 괜찮다고 일전에 그랬잖아!"
"하핫, 그게 말처럼 쉽지 않네요. 사실상 오늘로 겨우 2번째 뵙는......"
"에이~, 편하게 생각해, 편하게! 서로 찐하게 한바탕 싸우고 나면 원래 다 친구 먹고 그러는 법 아니겠어? 서로 딱딱하게 굴지 말자."
"...엘로디 양께선 여전하시군요."
"음하하핫~, 내가 변할 일이 있겠어?"
가르디엔은 어머니 뱃속에서 중요한 신체부분을 떼어놓고 나온 듯한 엘로디의 호탕한 웃음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런데 갑자기 어쩐 일이십니까?"
"음... 저, 저기..."
"?"
"나, 나 좀 도와주라!!!"
"......"
그는 갑자기 어울리지 않게 고개부터 넙죽 숙이며 들어오는 엘로디의 태도가 매우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그으... 일단 접객실로 자리를 옮기실까요?"
"좋아!"
그는 먼저 부모에게 양해를 구한 뒤 엘로디를 조용한 접객실로 안내했다. 그리곤 뜨거운 차를 후후 불어 한 모금 마신 다음 슬슬 운을 뗐다.
"아하하하,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과연 엘로디 양께 도움이 될 수 있을는ㅈ..."
"아냐, 오직 너만이 가능해!"
"잉? 저만이요?"
"응! 네가 디마우스 님을 좀 설득해줘!"
"...?"
"그러니까 그게 지금 내 상황이 어떻냐고 하면... (하략)..."
가르디엔은 엘로디의 소원과 부가설명을 귀담아 들으며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그러니까... 요컨대 '루카스란 사람의 위치를 파악하려고 노력했지만 죄다 허사였다. 그래서 그 사람과 연줄이 있는 스승님께 간곡히 부탁해봤으나 번번히 퇴짜만 당했다.'는 말씀이신 거죠?"
"웅! 맞아! 정확해! 내가 디마우스 님의 집무실에서 하루 종일 드러누워 봤는데 눈길조차 안 주더라고! 매정하게시리, 쳇!"
"......."
엘로디는 '넌 다른 의미로 답이 없는 인물이구나.'하는 가르디엔의 눈빛을 통상 그래왔듯이 가볍게 무시했다.
"일단은 그분께서 현재 헤트만에 계시다는 정보 외엔 모든 게 불명확한 상황이야. 국내라면 내가 어떻게 해봤을 텐데, 하필 우리 가문의 영향력이 미미한 국외라서 항상 몇 발자국씩 늦어! 출발하려고 진작에 싸둔 짐꾸러미가 폭삭 썩었을 지경이라니까?"
"에... 그러면 차라리 그 방면으로 특화된 외부단체 쪽으로 문의를 해보시는 편이 현명합니다. 파마 길드의 정보료가 다소 비싸지만..."
"아오! 야! 걔넨 말도 꺼내지 마! 안 그래도 우리 영지에 있는 파마 길드 지부 건물을 박살내고서 여기로 찾아오는 길이니까!"
"...박살내셨다고요?"
"어. 내가 위약금 안 받는 대신에 좀 밟아줬어! 이 잡것들이 의뢰한 지 벌써 한 달이 지났는데 '조금만 더 기다려주십쇼~.'란 헛소리를 되풀이하더라니까?! 평소에 지들이 그렇게 잘났다고 우쭐대지나 말던가!"
'음? 그건 좀 이상한데?'
그는 파마 길드 내부적으로 어떤 문제가 발생됐으리라 직감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범국가적으로 유명한 정보단체가 고작 여행자 한 명의 행적을 파악하지 못해 절절 매는 사태를 납득하기 어려웠다.
'어쩌면 이미 알고는 있지만, 그것을 선뜻 배포할 수 없는 나름의 사정이 있다던가... 어? 잠깐만.'
자신을 간절히 쳐다보는 엘로디를 바라보다 문득 괜찮은 생각이 떠오른 가르디엔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래!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은 있었어!'
파마 길드에게서도 얻을 수 없는 정보의 가치란 적절한 거래조건으로 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따라서 그는 이를 이용하여 현재 애매해진 국면을 지혜롭게 타파키로 했다.
"좋습니다, 엘로디 양. 하지만 그 전에 저부터 도와주시겠습니까? 어차피 저도 그 사람의 행적을 수소문 하는데에 시간이 소요되니까요."
"응? 뭘?"
"하하, 엘로디 양께선 국내 각 지역의 유명 용병단들과 인연이 있으신 걸로 압니다."
헬퍼드 가문은 라이언 공작이 가주로 등극한 이래로 타미아르 각지에서 이따금씩 출현하는 괴수와 도적떼 토벌을 전담하고 있었다.
물론 처음부터 그래왔던 것은 아니었다. 최초 몇 회는 실전훈련이 절박하다는 라이언 공작의 등쌀에 못이긴 그레이엄 국왕의 양보였으나, 백성들의 열렬한 지지와 칭송이란 뜻밖의 부수적인 효과가 나타나는 바람에 왕명으로 고착화된 경우라 하겠다.
그리고 얼마 전까지 가문의 후계자였던 엘로디는, 공무로 바쁜 라이언 공작을 대신하여 무려 6년 동안이나 그 토벌의 선두를 이끈 장본인이었다.
"맞아. 싸움 좀 한다는 용병대들하곤 한두 번씩 같이 일 해보긴 했지. 잘 나가는 놈들이 자기 평판에 신경써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암튼 의리 있고 성실한 녀석들이 예상 외로 꽤 많더라고. 쓰레기 소모임 같은 듣보잡 용병단하곤 확연히 다르더라."
"오, 훌륭합니다. 부디 그런 용병들과의 계약을 중개해주셨으면 합니다."
"그래? 몇 군데나?"
"엘로디 양께서 알고 계신 전부라면 가장 이상적이겠으나, 그건 제 과욕이겠죠. 그래도 가능한 많으면 많을수록 좋겠습니다."
사병의 상한선 제한이 풀린 지금, 본인이 한발 앞서 국내의 내로라하는 용병단을 모두 사병으로 고용한다면, 즉시 도움 되는 전력을 대거 확보할 수 있다고 판단한 그였다.
'또 겸사겸사 거슬리는 귀족들을 물 먹여줄 수도 있겠지.'
더욱이 계약의 주체를 그의 스승이자 이 나라의 대마법사인 디마우스로 삼는다면, 국왕의 영향력을 깎아 내리려는 귀족파에 대한 좋은 억제제로 작용할 터였다.
그런데 엘로디의 반응이 영 뜨뜻미지근했다.
"어? 야, 그거 국법에 어긋나지 않냐? 비용도 비용이겠지만 유명한 용병대 하나만 고용해도 남작위가 보유할 수 있는 사병의 최대상한선이 위태위태할 텐데? 제일 잘 나가는 용병단의 경우엔 그 단원수가 천 명도 훌쩍 넘는다는 사실은 너도 알지?"
"하하, 물론입니다. 그러나 오늘 폐하의 결정으로 그건 별로 문제되지 않습니다. 사병의 상한선은 내일부로 폐지될 예정입니다. 아, 당연히 한시적 조치에 불과하지만요."
"앗, 그래?"
"예, 게다가 제가 아니라 스승님을 계약주체로 앞세울 겁니다. 그러니 설령 만 명 단위로 모집한다 해도 전혀 문제될 게 없죠. 귀족파들도 쉽게 딴죽 걸지 못할 겁니다. 결과적으로 자기 발목을 붙잡는 꼴이 될 테니까요."
"끄응... 내가 끈 떨어진 연이라 그런가, 이젠 그런 민감한 정보도 몇 다리 건너서 듣게 되네. 쩝..."
가르디엔은 재빨리 말을 이음으로써 엘로디가 필요 이상으로 시무룩해지는 분위기를 막았다.
"엘로디 양께서 알고 계신 단장들과의 만남을 최대한 주선해주십쇼. 편의상 한날 한시에 모아주셔도 상관없습니다."
"끄응..."
"그게 바로 제가 엘로디 양께 드리는 부탁입니다. 작년에 우리 왕실측에서 잠정 추계한 우리나라의 용병수는 17만. 단단히 작정하고 달려들면, 위협적인 대규모 병력편성도 뜬구름 잡는 소리는 아니겠죠."
"야! 너 무슨 반란이라도 일으키려는... 에잇, 아니다, 가문도 빵빵한데다 폐하와 대마법사의 총애를 한 몸에 받는 네가 뭐가 아쉽다고."
"하하하, 과찬이십니다."
"에휴~, 그나저나 걱정이네. 그 녀석들이 후계자에서 밀려난 내 말은 왠지 귓등으로 흘려 들을 거 같거든."
"그러면 딱 중간에서 다리만 놔주십쇼. 그들을 구워삶는 건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철철 흘러 넘치는 가르디엔의 자신감엔 나름의 근거가 있었다. 돈 주고도 구하기 힘들다는, 그러나 트로돈과의 전쟁을 대비해 요정족 본토에 잔뜩 비축되어 있는 오드노아제 마법무구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 무기와 장비를 계약기간 중 무상대여해주겠다란 먹잇감을 그들 앞에서 살살 흔들어준다면, 최소 3년 이상의 기간계약은 따놓은 당상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단순 대여가 아닌, 계약종료 후 소유권 이전을 조건으로 내걸면 선금과 유지비용의 부담도 그만큼 대폭 줄일 수 있을 거다.'
그의 예상에 이만한 시간벌이면 추가 증편된 정규군의 전력이 정상궤도로 오르고도 남았다. 더불어 그 사이 유능한 용병수급에 난항을 겪을 귀족들이 왕권의 위협요소로써 진화할 가능성도 현저히 낮출 수 있기에, 어쩌면 그레이엄 국왕의 은밀한 재정지원까지도 내심 기대할 수 있을 터였다.
"흐음... 결국 내가 전국을 싸돌아 다니며 아쉬운 소리를 해야 한다는 말인데..."
"하하하, 대신 엘로디 양께서 그렇게만 수고해주신다면! 루카스 씨의 위치정보는 물론이고..."
"뭐?!"
가르디엔의 멱살은 어느 순간 엘로디에게 한가득 붙들려 있었다.
"진짜? 루카스 님이 어디계신지 네가 안다고?!"
"아하하하... 이미 아시다시피 제가 요정족과의 연줄이 워낙 끈끈하지 않습니까. 염치 불고하고 몇몇 분들께 간곡히 부탁드리면야 대략적인 위치정보쯤은 가능ㅎ..."
그의 옷깃을 풀어주고서 벌떡 일어난 엘로디는, 가르디엔의 발언을 연달아 짓뭉개며 자기 할 말만 벼락처럼 쏘아댔다.
"가르디엔! 아니, 가르디엔 고든 남작님! 집에서 딱 기다리고 계세요! 어디 가면 안 됩니다?! 알았지, 알았지? 절대 안 돼! 내가 연락할 때까지 마법통신 수정구 앞에 있어! 딱 연락했는데 자리 비웠으면 내 손에 죽... 아니 각오하세요!"
"...아하하, 반말이든 존대든 좋으니까 어느 한 쪽으로 통일하시죠."
“오호호홍~!”
그렇게 가르디엔의 쓴웃음을 뒤로한 엘로디는, 예의상 고든 백작을 찾아가 작별인사만 반짝하고선 바람처럼 자취를 쓱싹 감췄다.
'후후훗, 저 기세를 보아하니 일주일이면 충분하겠어. 밀린 업무만 후딱 처리하고서 자금운용계획을 미리 세워야겠군.'
하지만 이는 가르디엔의 오판이었다. 엘로디의 과감한 행동력은 폭군 수준을 가볍게 상회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정확히 사흘 뒤 아침, 각 지역에서 힘깨나 쓴다는 용병대의 단장들은 라이언 헬퍼드 공작의 이름 아래 전원 집결하고야 말았다.
'맙소사! 자기 아버지 이름을 막 팔고 다녔다고?! 아니, 이 아가씨는 도대체 어디까지 막무가내인 거냐고!'
참고로 그들이 소동을 일으키고 있는 집결지는 디마우스 저택 정문 앞이었다.
"아! 손님 받아요, 손님! 손님 받으라고요!"
- 쾅. 쾅. 쾅.
“아오씨, 미치겠네! 이 여자가 진짜!”
"...제, 제자야?"
느닷없이 우글대는 손님들을 잠옷차림으로 맞이한 디마우스는, 좀 전에 부랴부랴 순간이동 해온 가르디엔을 급히 불러 세웠다.
"얘야, 이게 무슨..."
곤히 자던 중 날벼락 맞은 꼴인 스승과 마주한 가르디엔은, 현 상황이 너무나 곤혹스럽고 송구한 나머지 환장하기 직전의 표정을 하고 있었다.
"죄, 죄송합니다! 스승님!"
그러나 이후 이어진 그의 사과는, 손님 무리 중 선두를 당당히 꿰찬 엘로디에 의해 번번히 제지됐다.
"죄송합니다! 저도 아침 댓바람에 통보를 받았..."
"야! 가르디엔! 나 할 만큼 했어! 너도 빨리 약속 지켜!"
"스승님, 이게 무슨 상황인지 제대로 설명드리겠..."
"야아-! 빨리, 빨리이!!!"
"아우씨, 엘로디 양! 잠깐만요! 딱 5분만!"
가르디엔이 목청을 높였으나, 그녀의 언사와 생떼는 혼기가 꽉 찬 영애의 고상함과 너무나도 거리가 멀었다.
"싫어! 나도 급해! 이틀 내내 이동마법을 주구장창 사용하느라, 내가 얼마나 죽을 똥을 쌌는 줄 알아?!"
"아, 쫌!!!"
"아쒸! 싫어~, 싫다고오! 아~, 빨라앙-! 가르디엔 남작니임아아~, 약속 지키라고오~! 나 빨랑 루카스 님을 만나고 싶다고요오오~!"
"...하아...씨..."
실랑이 벌이는 그들을 보며 앞뒤 정황을 대략 파악한 디마우스는, 이내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며 본인의 침실로 되돌아갔다.
-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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