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은 영주님 (2)
* * * * *
새벽 이슬이 채 마르지도 않는 시각. 개러스는 이른 아침부터 숙소 방문을 두들긴 차석보좌관에 의해 눈꼽 뗄 겨를도 없이 마차로 이끌렸다.
"어서 타시죠."
"자, 잠깐만 기다려주십쇼!"
"그럴 여유 없습니다. 제후께서 앉은 채로 기다리고 계십니다.”
“아주 잠깐이면 됩니다!”
”쯧, 쓸데없이 지체해봤자 이로울 것 하나 없습니다."
내용만 평이할 뿐, 보좌관의 단호한 인상과 까칠한 어투까지 고려하면 불호령이나 다름 없었다.
"아이고! 용서하십쇼! 하지만 제후께오서 반드시 보셔야 할 증거품이 있습니다! 그게 제가 먼 길을 마다 않고 찾아와 면담신청을 한 이유입니다. 그러니 딱 그것만 챙기게 해주십쇼!"
"흠, 알겠습니다. 서둘러주시죠."
"옙!"
차석보좌관은 부리나케 방으로 뛰어올라간 개러스의 모습을 뒤로하며 손수건으로 코를 가렸다.
'쯧! 역겨운 악취가 코를 찌르는군! 빈민가랑 붙어있어서 그런가? 하필 묵어도 이런 데를... 뭐, 하기야 촌구석 하급관리 주머니 사정이야 뻔하긴 하겠지.'
이런 차석보좌관의 추측은 절반만 들어맞았다. 개러스에게 지급되는 수당이 쥐꼬리만한 것은 사실이나, 이 여관이 선택된 이유는 이곳이 러셀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장소이기 때문이었다.
"헉헉, 최대한 빨리 왔습니다!"
"어서 서두르죠."
헐레벌떡 달려온 개러스를 그대로 마차에 싣다시피 태운 보좌관은, 마부를 거듭 재촉한 다음 마차문을 쾅하고 닫았다.
"인사가 늦었군요. 차석보좌관 '누만(Numan)'이라 합니다."
"아, 옙! 개러스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고급진 마차 안에 다 큰 성인 남자 둘만 뎅그러니 있어서 그런진 몰라도, 내부에 흐르는 공기가 서로 데면데면한 그들을 닮아 있었다.
"흠흠, 개러스 씨. 차석보좌관으로써 혹시나 하는 마음에 여쭙겠습니다만, 그 가방 안에 위험한 물건이 들어있진 않겠지요?"
"어이쿠, 절대 아닙니다. 죄다 종이쪼가리 뿐입니다. 날붙이나 폭발성 물질은 전혀 없습니다. 알현시 주의점에 대해선 잘 숙지하고 있는 편입니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군요. 하지만 간밤의 사건 때문에 확인절차가 임시로 몇 개 추가됐으니, 도착 후 부디 당황하지 말고 호위대의 안내를 따라주시길 바랍니다."
"무슨 안 좋은 일이라도...?"
"제후께서 금일 모든 일정을 취소하셨을 만큼, 상당히 불미스러운 사건이 있었다고만 말씀드리죠."
"아... 네."
개러스는 이미 알고 있었다. 새벽녘에 어느 남자가 루카스를 찾아와 탈옥사건에 대해 운운하는 걸 곁에서 같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조용히 바깥 구경이나 하자.’
눈치껏 입을 꾹 닫은 그는 조그만 창문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스치는 길거리 풍경이 한적했다. 어쩌다 보이는 사람들이라고 해봐야, 아침식사 준비 때문에 바삐 움직이는 아낙네나 노예들이 고작이었다.
그러나 고지대에 위치한 제후성으로 이어진 길목에 다다르니 그마저도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진입로의 설계 자체가 원활한 수성전에 초첨을 두고 산등성이를 돌돌돌 둘러 깎아 만든 오르막길이었으므로, 성을 향하고 있다는 기분보단 울창한 숲을 가로지르고 있단 느낌이 강했다.
"하하, 겨우 3일만에 이곳을 다시 지나가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
대략 중턱쯤에 이르렀을까? 불편한 침묵을 살짝 덜어내려던 개러스의 노력은, 작은 화살음으로 인해 묵살당했다.
- 피이이이... 터턱!
"커흡!"
마차 안이라 눈에 보이는 건 없어도, 마부의 숨 넘어가는 소리는 개러스와 누만을 초긴장시키고도 남았다.
"?"
"!"
또한 갑자기 심하게 요동치는 마차의 진동은, 잠시후 그들에게 일어날 이탈사고를 예견해줬다.
- 들컹, 들컹! 터엉~!
""으아악!""
개러스와 누만이 본능적으로 몸을 웅크리기가 무섭게, 단단한 무언가에 바퀴 걸린 마차가 길에서 이탈해 하늘을 날았다.
- 부우웅~.
마부가 말을 계속 다그쳤던 터라, 체공시간과 낙하충격량 또한 어마어마했다.
- 쿠-앙-!
아름드리 나무 서너 그루가 우드득하고 처참하게 부러진 후에야 비로소 마차가 잠잠해졌다.
- 이히히히히힝~.
엉겁결에 자유로워진 6필의 말들이 경기를 일으키며 사라졌다. 모르긴 몰라도 부상을 입었던 마부는 충돌과 동시에 그대로 튕겨져나가 절명했으리라 짐작됐다.
"으어어..."
"아고고고고..."
한시가 급하단 핑계로 귀빈용 마차를 끌고 나왔었길 망정이지, 만약 루카스가 몰았던 추레한 짐수레 비스무리한 걸 타고 이동했었더라면, 그들 역시 저승사자들의 영업실적을 채워주는 꼴이 될 뻔했다.
"괘, 괜찮으십니까, 누만 보좌관님?"
"으으으... 으?! 으헉! 피, 피이? 피가?!"
정신을 차린 그들이 각자 자신의 몸 상태를 확인했다. 다행히 살갗이 조금 찢어진 찰과상 또는 퍼렇게 멍든 신체부위만 몇 군데 있었을 뿐, 두 사람 모두 심각한 부상은 없었다.
"아으으... 이게 무슨 날벼락ㅇ..."
"앗! 누만 님! 지금 나가시면 큰일납니다!"
개러스는 천장과 바닥이 뒤집힌 네모난 객실문을 열고 머리를 빼꼼 내밀던 누만의 허리를 황급히 붙잡아 당겼다.
- 끼이익...
"아니, 그 무슨 뚱딴지 같은 소ㄹ... 어이쿠!"
- 터엉!
"힉!"
단 1초만 늦었어도 두개골에 꽂혔을, 석궁용 볼트를 바라보며 누만이 기겁했다.
"다, 당신!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른 거야?!"
"이르판이 보낸 녀석들이 분명합니다!"
지금까지 루카스 일행은 끊임없이 살수를 뻗친 놈들의 의뢰자를 특정하지 못한 상태였었다.
라구루 연합의 잔당, 나디아를 노리는 세력, 제후의 분노가 두려운 예덴 섬의 관리총관 등. 오히려 암살자를 안 보내면 곰곰히 되짚어 봐야 할 후보진이 몹시 쟁쟁한 까닭이었다.
그러나 이번의 습격을 통해 배후를 확신할 수 있게 됐다고 하겠다.
"뭐? 이르판? 니 근무지인 예덴 섬의 관리총관을 말하는 거야?"
"예! 그렇습니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누만의 말투에선 사무적인 예의범절과 존대 따윈 사라진지 오래였다.
"그 자식이 왜?! 왜 널 죽이려는 건데?! 너 설마 가방에 그거..."
"네, 맞습니다! 이르판의 비리를 낱낱이 밝힐 물증들입니다!"
"야이씨, 미친! 알아야 할 사람은 이미 다 아는 그걸 왜 굳이..."
누만이 차마 뒷말을 잇진 않았으나, 개러스가 후략된 그 핵심을 이해하지 못할 리 없었다.
“어쩔 수... 없었습니다.”
"썅! 왜 들쑤신 거야?! 임마, 너만 깨끗해?!"
하지만 이미 장부와 서류 내용을 세세히 파악 중인 개러스는 그 나름대로 항변할 거리가 있었다.
"그게 아닙니다, 누만 님! 관리총관이 군수물자까지 빼돌려 캄팔베인에 팔아먹고 있었습니다!"
"...?!"
"욕심이 선을 한참 넘은 지라..."
이 항변엔 누만조차 입을 다물었다. 방금 개러스의 말이 사실이라면, 알푸샤리카의 정적들이 쌍수를 들어 환영할 빌미였던 것이다.
그들이 합심하여 '알푸샤리카가 캄팔베인의 힘을 빌려 반란 준비중이다!'라는 정치공작을 펼쳐도 딱히 반박하기 힘든 대역죄였다.
"...니미 ㅆ발!"
기회를 포착한 개러스는 혼란스러워하는 누만을 향해 고개를 조아리며 읊조렸다. 그동안 몇 번이고 연습해왔던 말들로써 쐐기를 박았다.
"누만 님! 저, 저는 알푸샤리카께 충성을 맹세한 신하입니다!”
“......”
”저는 그 분의 명예와 명성을 지켜야 했고, 그렇기에 목숨을 걸어 이곳에 온 것입니다!"
"젠장할! 대단한 충신 나셨네!"
"전 그런 위인이 못 됩니다. 기껏해야 충견에 불과하다는 걸 잘 압니다."
숫자와 전력도 불문명한 괴한들에게 포위되어 생존이 캄캄한 상황. 이런 위기에서의 적절한 발언은 비아냥거리던 누만조차 살짝 감명받게 만들었다.
"...충견이라... 쯧, 그래. 충견은 죽을지언정 제 주인을 물진 않지."
누만은 이런 개러스의 의연함이 100% 믿는 구석이 따로 있어서 나온 것이라곤 추호도 짐작 못했다.
'으으, 루카스 님! 늦지 말아주십쇼! 있는대로 주둥이 다 털었는데, 이대로 허무하게 죽고 싶진 않습니다! 흑흑, 그러니 제발!!!'
개러스의 간절한 기도에 화답하듯, 마차 바깥이 굉장히 소란스러워졌다.
- 퍽! 우득!
"엌!"
그에게 너무나 익숙해진 타격음과 뼈가 어긋나는 소리, 그리고 연달아 울려 퍼지는 피해자들의 비명. 개러스는 이것이 생존의 청신호란 데에 본인의 세 번째 다리를 베팅할 의향도 있었다.
'와, 왔다! 왔어!'
이넨카에서부터 지금까지 하루가 멀다하고 들어본 섬뜩한 그 소리가, 그의 귓가에 그렇게나 경쾌하게 들리긴 또 처음이었다.
‘살았닷!’
과연 그의 예상대로였다. 몰래 숨어서 암살자들의 동향을 살핀 뒤, 적당한 난입 기회를 재던 루카스가 드디어 움직인 것이었다.
"도, 도망쳐! 또 그 괴물이야!"
"망할! 전원 산개해서 튀어!!!"
- 쾅! 쾅! 쿵!
“”"카핰!"””
반면, 차석보좌관 누만은 바깥에서 들이치는 소음이 제후의 군대에 의한 것이라곤 전혀 생각되지 않았다.
'누, 누구지?'
그는 암살자들을 혼비백산하게 만든 인물이 몹시 궁금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부랴부랴 도망치는 무리는, 고도로 훈련된 제후의 경비대원들을 간단히 학살한 실력자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이 녀석이 도대체 누굴 고용한 거야?’
하지만 그렇다고 머리를 내밀어 확인할 용기까진 없었다. 그래서 그는 외부에서 왕왕 울리는 통곡소리에 가만히 집중하기만 했다.
"이힉! 사, 살려주십쇼!"
"나는 경고했었다. 한 번 더 거슬리면 남은 손가락 다 자른다고."
"이, 이번 한 번만! 앞으론 정말로 착실하게 살겠... 아, 안 돼에에-! 이거 놔, 개새ㄲ... 끄아아아아아아아!!!"
이변을 감지한 제후의 병력이 사고현장에 당도한 것은 모든 사태가 말끔히 정리된 후였다.
* * * * *
극대노한 알푸샤리카가 던진 유리잔이 가루가 될 정도로 깨졌다.
- 쨍그랑.
그리고 덩달아 비산한 포도주는 값비싼 초상화에 돌이킬 수 없는 얼룩을 남겼다.
“......”
하지만 주변의 시종들은 제후의 눈치를 보느라 선뜻 움직이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움찔움찔하며 머뭇거렸다.
"이르판! 그 버러지 같은 새끼가 감히 날 엿 먹여?!!!"
크레이그가 기록한 장부.
이르판의 서명이 새겨진 캄팔베인 상단과의 계약서.
이외에도 기타 등등의 빼도박도 못할 물적 증거들이 제후의 양손에서 부들부들 떨렸다.
"이을마즈(Yılmaz)!"
어깨가 떡 벌어진 백발 장군이 제후의 부름을 받잡았다.
"예! 주군!"
"나는... 지금의 예덴 섬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이을마즈는 오랜 세월 알푸샤리카를 보좌해온 최측근답게 반응이 거의 즉각적이었다.
"소신이 직접 병력을 이끌겠나이다!"
"그래. 이참에 예던 섬의 모든 불순분자들을 쓸어버려. 육해군 전부 통틀어 부대 편성하고, 보급계획까지 철저히 세우도록."
"예!"
"내 노파심에 강조하네만 캄팔베인 첩자들이 식겁할 정도로, 아니 왕가나 다른 제후들의 끄나풀들이 척 보기에도 내가 역적의 낌새를 눈치채고 즉결 심판하러 간다는 모양새가 확실히 나와야 하네!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나?!"
"결코 부족함이 없이 이행하겠나이다!"
알푸샤리카는 제후령의 대장군 격인 이을마즈를 내보낸 뒤, 여전히 부복한 상태의 개러스를 내려다 봤다.
'이 비실한 녀석이... 도대체 무슨 수로 이런 중요한 증거들을 빼온 거지?'
제후는 이미 차석보좌관으로부터 '개러스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흔들리지 않을 충신'이란 이례적인 칭찬을 보고 받긴 했다.
그러나 알푸샤리카는 온갖 술수가 난무하는 헤트만의 권력싸움을 치뤄온 사람으로써 미심쩍은 부분을 지레짐작하는 실수는 하지 않았다.
"...그래, 개러스라고 했나? 네가 여러모로 노고가 많았다."
"아닙니다! 천운이 따라줬기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허허, 그런가? 어떤 운이 어떻게 따른 건지 몹시 궁금하구나."
개러스는 무슨 꼼수를 부렸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하란 제후의 의중을 정확히 이해했다.
"라구루 연합 내에 큰 혼란이 발생한 것이 우연히 포착되어, 재빨리 그 틈을 활용해 이 증거들을 확보했나이다."
"음? 그 놈들에게 혼란? 그건 내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인데?"
"송구합니다! 저도 정확한 내막은 알지 못하옵나이다! 다만 하루 아침에 그들 조직이 붕괴될 수준의 난리가 났었다는 것만은 확실히 말씀올릴 수 있습니다. 만약 그렇지 않았더라면, 저는 내륙에 발을 딪지도 못한 채 바다에 수장됐을 겁니다."
"하긴..."
그제야 비로소 납득한 제후의 안색이 인자하게 풀렸다.
"후훗, 알겠다. 이번에 네가 보인 그 충심은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다."
"아닙니다! 제후께 충성을 맹세한 이로써, 지극히 당연한 행동이었습니다!"
"어허허헛! 과연 기특하도다! 흠... 그래, 이토록 충실한 인재에게 고작 금화 몇 푼의 치하로 끝내는 건 합당치 않지! 시종들이 네게 특실을 내줄 것이니 오늘은 이만 돌아가 쉬거라. 가신들과 적절한 보상을 의논한 후에 조만간 다시 부르겠다."
"화, 황공하옵니다!"
"허허허!"
모처럼 알푸샤리카의 입술에 호쾌한 웃음이 걸렸지만, 오늘의 사나운 일진은 그 꼴을 가만두지 않았다.
- 작가의말
좀 더, 조금 더 초연해져야 한다! 목표는 완결!
내용을 압축하는 한이 있더라도 마지막까지 달리자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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