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과 땅 사이 (2)
“네가 쥔 패 너무 신용하지 마라. 항사룡 그 놈 그거 파면 팔수록 완전히 정신병자더라.”
“...흠흠, 저희 반신께오서 조금 많이 괴짜이긴 합니다.”
“그럼 그 자가 흑마법사들과 손에 손을 잡고서 타행성의 침략전쟁을 앞당기려 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나?”
만약 카를로스가 조금이라도 긍정한다면, 코넌은 그를 즉각 처분시킬 작정이었으나 다행히 이에 대한 카를로스의 반응이 불 같았다.
“누가 그런 헛소리를!!!”
“헛소리 아니다.”
“말도 안 됩니다!”
“지난 번 회의 때 내가 직접 들은 내용이다. 붙잡힌 흡혈귀들이 매우 상냥하게 실토해대더군.”
“그건 고문을 피하려고 내뱉은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항사룡 님께선 반드시 새 시대를 열어주겠노라고 굳게 약속하셨단 말입니다!”
카를로스의 열변은 코넌의 빈축만 샀다.
“흠, 어떤 면에선 새롭긴 하겠군. 인간들이 식용으로 사육되는 시대가 열리는 셈이니까.”
“그게 무슨...”
코넌의 충격요법은 카를로스의 혼란을 한층 가중시켰다.
“흑마법사들의 정신적 지주인 그 흡혈귀들은 이미 침략자 선발대와 조약을 맺은 상태라 한다. 그동안 이렇다 할 근거가 없어서 요정족들도 그저 의심만 하고 있었는데, 이번 증언으로 확신하게 됐다더군.”
“그, 그럴... 리가...”
”요정족의 수뇌부가 발벗고 나서서 각국의 왕실에 신속히 전파 중이다. 그들이 지금껏 공식석상에서 허언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는 것쯤은 너도 알 테지?“
“...맙소사.”
본인의 이름이 모든 생명체들의 배신자로써 세계사에 기록될 위기에 놓였다는 걸 깨우친 카를로스는 절망했고, 그것에 일말의 동정심도 느끼지 않는 코넌이기에 그를 한껏 비웃어줬다.
“어리석은 놈. 명예욕에 눈이 멀어 허당으로 전락했구나. 예전에는 참 똘똘했었는데 말이지.”
“......”
“쯧쯧, 10분이고 자시고 고민할 게 있나? 나 같으면 바로 손절했다.”
“......크윽...”
* * * * *
자존심이 가루처럼 빻아진 카를로스가 마지못해 변절하던 그 시각, 로비샤의 침소에선 세 여인의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보다 정확하게는 로비샤와 그녀의 호위로 남겨진 폴라와 페이의 수다였다.
“에고, 이래가지곤 대역은 힘들겠네요.”
”그러게. 이제 와서 옷을 새로 맞추는 것도 웃기고...”
“어머! 그래도 두 분 다 잘 어울리세요!”
로비샤는 자신의 의복으로 갈아입은 폴라와 페이의 자태를 극찬했다. 그녀들의 기럭지가 워낙 우월한 까닭에, 팔목과 종아리가 훤히 드러나 보임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인 맵시가 샤방샤방 살아있었던 것이다.
“우와~, 같은 옷인데 정말 너무하네요. 제가 입으면 이렇게 예쁘지 않은데 말이죠.”
“감사합니다. 과분한 칭찬에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영애님.”
이렇듯 깍듯하게 예의 차린 폴라를 기준으로 삼자면, 페이가 로비샤를 대하는 태도는 매우 가벼운 축에 속했다.
“글쎄요, 제가 느끼기엔 영애님이 훨씬 굉장하신데요?”
“네?”
“키햐~, 내 가슴이 작은 편이 아닌데, 어떻게 품이 이렇게나 널널하게 남을 수가 있지? 와우~, 진짜 장난 아닙니다! 과연 자애로운 여신님! 한 번 안기면 저라도 정신이 혼미해지겠어요!”
“......”
“어쩐지 이전에 대역 맡았던 애들이 뽕을 잔뜩 챙겨야 한다면서 그렇게 호들갑ㅇ...”
표면적으로 드러난 그녀의 크나큰 마음씨를 두고서 깊이 탄복한 페이는, 장난스럽게 쌍따봉을 날렸다. 물론 그 행위는 로비샤의 얼굴을 붉힌 것도 모자라, 폴라로 하여금 등짝 스매싱을 날리게 했다.
- 짜악-!
“끼야얏-!”
“죄, 죄송합니다, 영애님! 어렸을 때부터 각박하게 자란 친구라서 언행이 다소 경박합니다!”
“아, 아니에요! 절 친구처럼 편하게 대해주시는 것 같아서 오히려 기쁜 걸요!”
로비샤의 두둔에 페이의 기세가 곧바로 의기양양해졌다.
“들었지? 우리 영애님도 괜찮다고 하시잖아!”
“으이그, 너는 진짜!”
폴라는 마음 같아선 입안에 맴도는 쌍시옷 된소리들을 몽땅 풀어내고 싶었으나, 로비샤가 진심으로 괜찮다고 발언한 이상 철없는 페이를 향해 으르렁거리는 선에서 마무리 져야 했다.
“풉, 두 분 우애가 상당히 두터우세요. 보기 좋아요.”
로비샤는 침대에 늘어놓았던 옷가지들을 차근차근 정리하며 남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속내 터놓을 친구가 없는 저로선 무척 부럽기도 하고요. 헤헷.”
같은 고아원 출신 여자들은 로비샤에 앞서 이무기의 산 제물로 바쳐졌다. 건강에 하자가 있는 그녀를 제물로 바쳤다가 자칫 이무기가 분노하여 날뛰면, 누가 그 책임을 질 거냐는 중론에 힘입어 자연스레 마지막 차례가 됐던 것이다.
에벨린에게 인수인계 받으며 이러한 과거이력까지 알게 된 그녀들이기에 즉시 숙연해지는 거야 당연했다.
그러나 이후 대처방식은 각각의 성향에 따라 갈렸다. 페이는 더욱 말을 아끼는 폴라와 달리 오히려 친근하게 엉겨 붙었다.
“영애님~, 그럼 저랑 친구하실래요? 오늘부터 1일?”
“어머, 정말요?”
“야, 페이! 너 정말 예의 안 차릴래?”
폴라가 목청을 발끈 높였으나 페이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뭐, 어때! 막말로 여신이랑 친구 먹을 수 있는 기회가 어디 흔한 줄 알아?”
“넌 표현을 해도 꼭...”
“우에헤헤헷!”
“.......”
한껏 자지러지던 페이는 부쩍 시무룩해진 로비샤의 표정을 읽고서 아차 싶었다. 된통 건드려진 그녀의 자격지심을 뒤늦게 인지한 것이다.
“...저기 영애님. 혹시... 제가 여신이라고 자꾸 강조하는 게 언짢으셨나요?”
“네, 페이 씨. 솔직히 많이 부담스럽고 불편해요.”
“에이~, 전 그냥 있는 사실을 그대로...”
“뭔가 오해가 있는 걸 거예요. 제가 그런 대단한 존재일 리 없어요.”
“......”
로비샤는 전신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가리키며 말을 계속했다.
”여기 좀 봐보세요. 정말로 이 사람이 위대한 여신으로 보이시나요? 제 눈엔 어떠한 특별한 능력도 없는, 천민 출신의 불치병 환자로 밖에 안 보이는 걸요?”
“아, 그거야...”
“네네, 저도 들어서 알아요. 하지만 주변에서 떠받들면 떠받들수록 기분이 더 비참해져요. 차라리 멸시와 동정을 받았던 예전이 훨씬 마음 편했었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요.”
“...죄, 죄송합니다, 영애님. 그렇게까지 불편해하실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로비샤는 그 성격처럼 시원하게 사과 때려 박는 페이를 흔쾌히 용서해줬다.
“괜찮아요. 나쁜 의도로 그러시진 않았잖아요. 사과 받아들일게요. 그 대신에... 저랑 친구해요.”
“아휴~, 물론이죠~. 전 언제든 말 놓을 준비가 됐답니다!”
“호호호...”
그녀가 애써 빙긋 웃었지만 방안의 공기가 완전히 가벼워진 것은 아니었다. 때문에 폴라는 로비샤의 등뒤로 천천히 다가가 자신의 양손을 살포시 그녀의 처진 어깨 위에 얹었다.
“글쎄요, 영애님. 제겐 조금 다르게 보입니다만?”
“네?”
“제 경우엔 어떤 누군가의 사랑을 독차지한 예쁜 아가씨가 거울 속에 선명하네요. 물론 의기소침해진 소녀도 아주 작게 보이지만요.”
“아...”
“조금 더 자부심을 갖고 어깨에 힘주세요. 온 세상이 들고 일어나도 이길 수 없는 존재의 마음을 사로잡으신 영애님이세요. 그것만으로도 떠받들어질 자격이 충분하답니다.”
“......”
”그리고 감히 영애님께 손가락질하는 사람이 나타나더라도 제게 맡겨주세요. 제가 절대로 용서치 않을 테니까요!”
“...포, 폴라 씨.”
그녀의 위로에 왈칵 감동한 로비샤가 말했다.
“저기... 폴라 씨께서도 저랑 친구해주실 수 있을까요?”
“아... 저... 그게...”
“부담 갖지 마세요. 전 그냥 폴라 씨와 친하게 지내고 싶을 뿐이에요.”
“여, 영광입니다, 로비샤 영애님!”
페이는 부끄러워 어쩔 줄 몰라 하는 폴라를 골려 줬다.
“이~야~, 우리 폴라 좋겠네~. 맏언니한테 인정도 다 받고 말야~. 이걸로 셋째 자리는 따놓은 거나 마찬...”
“...네? 맏언니라뇨?”
“으헙!”
로비샤는 그저 운 없는 불치병 환자였을 뿐, 그녀의 눈치등급은 이 고달픈 시대의 여느 고아출신 못지 않았다.
“제 서방님을 두고 하신 말씀인 거죠? 그렇죠?”
“아, 저 그게...”
“서방님을 대하는 폴라 씨의 태도가 심상치 않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어요. 하지만 셋째라니...”
“......”
언제나 웃지 못할 비극의 대다수는 작은 말실수에서 비롯되곤 했다.
“두 분께서는 그 둘째가 누군지 이미 알고 계신 거 같네요. 정말 그런가요?”
““......””
“그리고 어감상 폴라 씨와 경쟁관계인 다른 인물이 존재하는 거겠고요? 숨기지 말고 얼른 대답해보세요. 제 어림짐작이 틀리지 않은 거죠?”
““......네에...””
그녀의 날카로운 추궁은 루카스의 수난시대를 예고하는 듯 했다.
”역시나... 자, 두 분 다 여기 앉아보세요. 보다 자세하게 설명 듣고 싶네요.”
““......””
단언컨대 루카스의 석고대죄가 확정 예약된 시발점이 바로 이때였다.
* * * * *
루카스가 이유도 모른 채 로비샤의 침실 출입이 금지된 지도 어느덧 나흘.
그가 머무는 파르하드 영주성은 그의 우울함으로 얼룩져 있었지만, 이곳과 5일 정도 떨어진 지역에선 2개의 하늘이 서로 맞닿는 중이었다.
- 쿠쾅-!
주소걸과 항사룡이 격돌하며 발생된 여파는 지역결계와 보호막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 쩌저적...
“알랭 단장님! 결계의 파손 정도가 심각합니다!”
“수복 속도가 전혀 따라가지 못 합니다!”
부하들의 다급한 외침을 접한 알랭은 저울질을 빠르게 마쳤다. 사실 그가 병력피해와 지역피해 중 무엇을 최소화할는지는 그다지 어렵지 않은 선택이었다.
“젠장! 지역 결계는 포기한다! 생존이 최우선이다!”
“”“옛!”””
분산됐던 마법 자원을 한 곳으로 집약시키자 태풍 속 촛불처럼 위태롭던 아군 진영의 방어막이 안정을 되찾은 반면, 결계란 완충장치가 사라진 인근의 지형지물은 본연의 형태를 잃었다.
- 콰과과과과과......
숲의 나무들은 시시각각 분쇄돼 갈려 나갔고, 남은 밑동들은 뒤집힌 대지와 함께 매장 당했다. 거기에 유유히 흐르던 강물에 새로운 갈래가 생겨나기까지 했으니, 강변의 멋스런 바위가 모래알처럼 바스러지는 파괴현상 정도는 구경거리조차 되지 못했다.
“마이트, 키아라! 똑똑히 봐두거라! 저게 바로 신의 영역에 발을 걸친 필멸자들의 위용이다! 진정 놀랍지 않느냐!”
흥분한 코넌이 감탄을 연발했지만, 정작 키아라와 마이트의 입장에선 크게 와 닿지 않았다.
‘일단 파괴력이 장난 아닌 건 알겠는데...’
‘당최 뭐라도 보여야 감동의 눈물을 흘리든 말든 하지...’
그와 그녀를 포함한 대부분의 관찰자들은 비슷한 심경이었다. 그저 귀로 들리는 건 파열음이었고, 눈앞에 뿌옇게 흩날리는 것은 먼지돌풍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1급 전투사에 버금가는 인물들이 아닌 이상, 이렇다 할 배움은커녕 보호막을 유지하기 위에 이마에 핏대까지 세운 인력들에게 미안한 마음만 눈덩이처럼 불어날 따름이었다.
그러던 그때, 태풍의 눈 속에 진입한 것처럼 그 일대가 고요해졌다.
“크하하하하하!”
이 맛간의 정적을 깨부순 웃음은 바로 항사룡의 것이었다.
-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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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결 찍고나면 내가 맛난 거 사줄게. ㅠ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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