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과 거래와 마왕 (3)
* * * * *
오래 전부터 고차원 존재들이 머무는 곳을 천상계 혹은 천국이라, 그리고 그보다 못한 하급신이나 한계를 초월한 필멸자 혹은 영물들이 발을 들이는 곳을 '올림포스(Olympus)' 또는 '선계'라 불렸다.
물론 이와 상대적 세계 또한 엄연히 존재했으며, 우리가 소위 말하는 지옥과 마계가 바로 그것이었다.
지옥이 천상계에서 추방당한 존재들이 갇혀진 차원이라 한다면, 마계는 선계에서 쫓겨난 초월체들의 유배지이자 부정한 힘에 취한 영물들의 서식지였다.
태초엔 상호간 간섭이나 교류 등은 일절 없었다. 그것은 고위 존재들이 아래차원에 대해 호기심 수준의 관심조차 두지 않았기 때문이며, 반대로 선계나 마계의 초월체들 또한 고차원에 대한 경외심과 두려움을 엿본 이후론 암묵적으로 불가침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신의 대적자들이 지옥에 떨어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악마들 사이에 이상한 소문이 퍼지면서 큰 변화가 생겨났다.
'최하위 차원행성에서의 현세 강림'이 지옥의 족쇄를 완전히 끊어낼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이라고 확신한 악마들이, 그나마 영향을 끼칠 수 있었던 마계에 미친듯이 손을 뻗었던 것이다.
다행히 위기에 처한 선계를 천상의 천사들이 신속히 지원함으로써 안정을 되찾긴 했으나, 그건 그저 아슬아슬한 소강상태에 지나지 않았다.
이후 위기의식을 느낀 선계는 앞으로도 천상의 지속적인 도움을 받길 원했으며, 이렇게 시작된 이들의 유대는 오랜 세월에 걸쳐 지금까지도 끈끈하게 이어져 내려오고 있었다.
그런데 이쯤에서 으레 생기기 마련인 의문.
'창조주의 영광을 배경삼은 천상과 그렇지 못한 지옥 간의 균형은 대충 그렇다고 치자. 하지만 마계는 어째서 여태까지 선계를 괴멸시키지 못하는가?'
통계적으로 어느 차원의 어느 행성이든 간에 악인이 선인보다 두드러지게 많았고, 이와 같은 논리선상에서 두 세력 간의 초월자 혹은 그에 준하는 존재들의 비율 또한 그와 동일했다.
그러니 악마들로로부터 힘까지 얻은 마계의 저력은 선계의 그것보다 월등할 것이 자명할진대, 오래토록 수평을 이룬 천칭과 같이 비등비등한 힘의 균형이 유지되는 이유는 왜일까?
이에 대한 정답은 생각보다 간단명료했다. 그 이유는 마계가 줄곧 지옥 서열 1위를 다투는 루치펠과 베엘제불 추종세력으로 양분, 아니 중립세력까지 포함하여 총 삼등분으로 나뉘어 힘을 하나로 합치지 못해서였다.
혹 마계가 당장 하나로 통합되어 진격한다면, 오늘날의 선계는 풍전등화까진 아닐지라도 굉장히 위태로울 수준으로 내몰릴 만큼 전력차이가 분명했다. 아무리 천상계에서 열심히 뒷바라지해준다손 쳐도 말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선계를 비롯한 다른 차원들은, 상대에게 잡아먹히지 않고 잡아먹고자 지금 이 순간에도 고군분투하는 지옥의 악마 및 마계 추종자들에게 고마워해야 할 것이다.
방금 막 태어난, 마계에 분열과 혼란을 가중시켜줄 새로운 존재를 포함해서 말이다.
- 응애~, 응애~.
마계 '데거렝젤(Degerangel)' 자치령. 이는 과거 루치펠에게 편승하여 반기를 들었으나, 존재의 격이 맞질 않아 지옥이 아닌 마계로 떨어진 하품 천사들이 무리를 이룬 영역 중 작은 일부분이었다.
"으아아아앙~."
그리고 이 우렁찬 갓난아기의 울음이 한 가득 채우고 있는 대저택은 이 데거렝젤 중에서도 가장 외지고도 외진 땅에 위치하고 있었다.
"우와와~, 제니티아(Zenitia) 님! 축하드려요!"
오늘따라 유난히 시끌법적했다. 산파노릇을 맡았던 젊은 여종이 침대 위의 땀에 흠뻑 젖은 여인 앞에서 벅찬 흥분을 방방 표출했던 것이다.
"늠름한 사내아이에요! 아들이요, 아들! 진짜요! 진짜!"
그녀는 감격에 겨운 나머지 콧잔등 위 빨간 주근깨 부근으로 찔끔 흐른 눈물을 긴소매로 재빨리 닦아내기도 했다. 그러다 문득 무언가 떠올랐는지, 그녀는 바깥 창문 너머로 크게 소리쳤다.
"알베른(Albern) 님! 알베른 님!"
이런 그녀의 외침이 끝나기 무섭게 굳게 닫혀있던 방문이 부서질 기세로 발칵 열리며, 짙은 회색빛 두꺼운 금속갑옷을 착용한 남자가 뛰어 들어왔다.
"무, 무슨 일이냐, 타샤(Tasha)?! 혹시 제니티아 님께 별고라도 생긴... 으헉!!! "
그는 타샤의 품에 안긴 고물고물한 아기를 보자마자, 말문이 턱 막혔다.
"보세요! 우리 도련님이세요!!!"
"으오오오오...!!!"
세월이 흐를수록 감정적이 된다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알베른은 주름진 눈가의 물기를 매만지기 위해 투구마저 벗었다.
반면, 타샤는 지친 숨을 고르는 여인에게로 다가가 아기를 조심스레 안겨줬다.
"기뻐하세요. 제니티아 님."
"아아... 드디어......"
짐승도 제 새끼는 그토록 예뻐한다고 했던가? 아기를 품에 받아든 여인은 눈꺼풀 위로 마구 쏟아지는 수마를 훌훌 털어낸 뒤, 따뜻한 물에 적신 천으로 아기의 몸을 구석구석 꼼꼼히 닦아냈다.
그리곤 이마에 살포시 입맞추며 아기의 맑은 눈동자를 뜨겁게 응시했다.
"루카스(Lukas)! 너는 루카스이다! 진정한 제왕의 첫 번째 아들!"
이 말에 알베른은 물론, 주변을 정리하던 여종 또한 손을 멈추고 주인을 바라봤다.
"헤헤, 이제부터 저희에겐 루카스 도련님이 되시겠군요!"
"그래, 무려 루치펠 제왕께서 친히 지어주신 이름이니라."
"어이쿠, 세상에! 왕께서 직접 지어주셨다니! 그게 정말이십니까?"
제니티아는 또 한 번 감격해 마지않는 알베른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 즉시 군주자리에서 물러나 지체하지 말고 이곳으로 은거하라 명하셨던 바로 그날 밤에 말이다."
"어머! 어머!"
"오오... 이리 영광스러울 데가!"
알베른과 타샤가 괜히 푼수처럼 호들갑 떠는 게 아니었다.
그 옛날 많은 지옥의 악마들은 마계를 장악하려 마음먹은 순간부터 호기가 생길 적마다 자손들을 부랴부랴 생산해왔음에도, 오직 대악마 루치펠만큼은 그러지 않았던 것이다.
그것에 대한 진짜 이유는 최측근의 수하들조차 알지 못한 채 지금까지 이런저런 추측만이 난무해었으나, 이제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오늘 이곳에 그의 아들이 남모르게 태어났으니 말이다.
"맙소사! 제가 위대한 제왕의 '직계자'를 모시게 될 줄은 짐작도 못했습니다!"
"이거, 이거 꿈은 아니죠?"
이 아기에 대한 일이 세간에 퍼진다면, 마계에서, 아니 더 깊은 지옥에서도 단연 가장 큰 화두가 되리라는 건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후훗, 이 나 역시도 꿈만 같구나!"
직계자란 악마들의 자식인 동시에, 그들로부터 직접적으로 권능을 부여받은 존재들을 의미했다. 천사들의 방해 때문에 악마들이 마구잡이로 힘을 부여할 수 없었던 터라, 가장 뛰어난 자식들 중에 선별되어 추후에 직계자로 선발되는 일이 보통이었다.
간택된 이들은 비록 여러 제약상 악마들의 한 조각 파편에 불과한 능력만을 얻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힘은 마계의 생태를 뒤엎고도 남을 정도로 대단했다.
이는 기존 마계를 장악했었던 초월체들이 직계자들에 의해 속수무책으로 떠밀려났던 과거의 역사가 이 사실을 명확하게 증명하리라.
"제니티아 님, 그 외에 다른 명이나 언질은 없으셨나요?"
만약 다른 자가 이런 식으로 캐물었다면, 제니티아는 질문한 자를 첩자로 간주해 그 즉시 목을 쳤을 것이다. 하지만 '예속의식'으로써 영혼마저 종속된 타샤와 알베른이었으므로 그녀는 물음에 흔쾌히 대답해줬다.
"글쎄... 베엘제불 휘하에 있는 직계자들의 이목을 최대한 피해서 아이를 잘 키우라는 당부 말씀정도...? 아!"
"?"
뭔가 떠올린 제니티아는 고개를 연신 갸웃하며 말을 이었다.
"아이가 아홉 살이 되는 날부턴......"
"아홉 살이 되는 날부턴요...?"
"그으... 마음 고생이 좀 심할 수도 있을 터인데... 지혜로써 잘 이겨내야 한다...?"
"네?"
"음... 분명... 그렇게 말씀하셨었단다."
"?"
그 말이 뜻하는 바가 정확히 무엇인진 짐작도 못한 주인과 2명의 종자였다.
* * * * *
시간은 마계에서도 유수같이 흘렀다. 그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으나, 그래도 모든 것을 바꿔놓진 못했다.
가령 9년이란 세월은 고물고물했던 젓먹이를 어엿한 사내아이로 성장시켰으면서도, 꾸준하게 관리되어온 저택의 풍경은 크게 변화시키지 못한 것처럼 말이다.
"이제부턴 제가 하겠습니다. 들어가서 조금 쉬세요."
"아니다. 당연히 어미가 곁에 있어야지."
"으휴~, 그럼 후딱 가서 깨끗한 물과 수건을 더 챙겨오겠습니다."
"고맙구나, 타샤."
제니티아는 진땀을 흘리며 끙끙 앓고 있는 루카스의 손을 꼬옥 잡았다.
"아가! 갑자기 왜 그러느냐, 응? 제발 부탁이니 어서 기운을 차려다오."
지금까지 잔병치레 하나 없었던 루카스였다. 하기야 명세기 대악마의 힘을 친히 부여받은 직계자일진데, 허약이란 단어가 그와 공존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런데 갑자기 생일을 앞둔 3일 전부터 루카스가 두통을 호소했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넘겼었지만, 그 다음날 저녁 무렵엔 급기야 머리를 부여잡은 채로 혼절해버렸다.
이에 깜짝 놀란 제니티아는 자신이 아는 가진 방법을 총동원해봤으나, 차도는커녕 원인조차 밝히지 못하고 여태껏 속만 까맣게 태워야했다.
- 똑. 똑.
타샤가 문을 활짝 열고 나간 그대로였으나, 예의상 으레 하는 아랫사람의 노크소리가 들렸다.
"제니티아 님, 알베른입니다."
"그래, 뭘 좀 찾았는가?"
멋쩍게 들어선 알베른이 허리부터 꾸벅 숙였다.
"결계를 수십 번을 확인하고 또 재확인했지만... 여타의 침입흔적 등은 없었습니다."
"하아... 알겠네. 차라리 다행으로 여겨야겠군. 그래도 독이나 저주는 아닌 셈이니까."
"저어... 도련님께선 좀 어떠신지요?"
"후우......"
알베른의 걱정에 제니티아는 먼저 한숨으로 대답을 대신 했다. 그리곤 어느새 돌아온 타샤가 가져온 대얏물과 깨끗한 수건을 이용해서 루카스의 이마에 송글송글 맺힌 땀을 조심조심 닦으며 말했다.
"딱히 이렇다고 말할 게 없어. 아니, 오히려 종종 심해지기도 하지. 아까 숨을 수십 초씩이나 쉬지 않았을 땐..... 어흑... 정말 가슴이 철렁했다네."
"그래도 저는 도련님께서 반드시 이겨내시리라 믿습니다."
"그래, 나도 같은 믿음이야. 직계자이자 내 자랑스러운 아들이 겨우 이 정도에 잘못될 리 없으니까."
"예, 물론입지요!"
"으음... 제니티아 님. 유리아나(Yuriana) 님께 도움을 청해보시는 건 어떨까요? 유리아나 님이라면 분명히... 흡...!"
대화에 끼어든 타샤가 무심코 누군가를 언급했다. 그러나 알베른의 따가운 눈총으로 곧장 합죽이가 된 모습에서, 별로 좋은 의견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래, 확실히 이쪽 방면으로 해박한 유리아나라면 희망을 가져봄직 해. 어쩌면 원인까지 밝혀낼 수도 있을 테지. 아니, 그녀의 특출한 재생권능으로 도움받는다면, 적어도 이 상태를 호전시킬 순 있을 것이야."
"하지만 불가합니다. 그녀는 현 군주 모디얼(Modiel) 님의 직속. 군주의 주요 참모격인 그녀가 홀로 남모르게 이 외진 곳에 당도하는 일도 어렵거니와, 아직 도련님의 존재를 외부로 드러내기엔 너무 위험부담이 큽니다."
"......"
제니티아와 알베른의 오가는 대화 속에서, 실수를 깨달은 타샤는 눈을 호다닥 내리깔고 침묵으로 일관했다.
"모디얼이 겉으론 아닌 척하고 있지만, 소실됐던 내 힘이 되돌아왔을까 내심 우려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런데 만약 내 힘이 약해졌던 원인이, 직계자를 잉태했기 때문이었다는 걸 눈치라도 챈다면... 정녕 달가워하지 않겠지."
제니타아가 수건을 한 번 더 헹궈서 꾹 짜내면서 이야기하자, 알베른이 말을 이어 보탰다.
"그 분의 성정을 생각하면... 아주 여러 가지 수단을 동원하리라 봅니다."
"......죄송해요.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재빠른 타샤의 사과에 제니티아가 고개를 끄덕여줬다.
"이제 알았으면 됐다. 앞으로도 내 아들의 존재는 비밀에 부쳐야 한다. 유리아나를 포함해서. 그 누구에게도. 이해했느냐?"
"...네..."
"이것이 대체 뭔지 알 길이 없다만, 그래도 내 아들은 반드시 이겨낼 것이야. 너는 그저 내가 루카스를 잘 보살필 수 있게끔 지금처럼만 잘 도와다오."
"넵, 제니티아 님."
그녀의 꾸짖음에 이은 용서가, 타샤의 얼굴표정에서 시무룩함을 살며시 밀어내던 바로 그때였다.
"으으으으...."
"?!"
"도, 도련님!"
루카스가 약한 신음과 함께 몸을 가볍게 뒤척였다. 이 작은 떨림에 제니티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의 양 볼을 다정히 감쌌다.
"아가, 정신이 좀 드느냐? 이 엄마가 여기 있다. 날 알아보겠니?"
"끄으으음...... 여, 여긴......"
초점이 또렷해진 그의 눈동자가 주위를 천천히 살폈다. 그에게 의외로 기운이 남아있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루카스는 침대에서 일어나 앉아 비스듬히 벽에 기대기까지 했다.
"이제 좀 괜찮은 것이냐?"
"......어..... 음......"
"아가..."
지금 제니티아의 걱정 어린 목소리가 떨리는 건, 결코 한시름 놓아서가 아니었다. 그것은 루카스의 낯선 표정. 마치 타인을 마주한 것 같은 아들의 스산한 눈빛이 범상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뭐라고 말 좀 해보려무나, 응?”
그녀는 여태 그래왔던 것처럼 루카스가 '엄마앙~'하고 품으로 뛰어들어 어리광부려주길 바랬다. 정말 그런 행동으로써 점점 불어나는 불안감을 사르르 녹여주길 간절히 원했다.
"커흠흠. 여인이여, 나는 괜찮소."
"......"
그러나 루카스가 이윽고 꺼낸 한 마디는, 그녀의 바람을 산산이 부숴버렸다.
-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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