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은 성공, 실패는 반란의 역사 (3)
* * * * *
건물 바깥이라고 사건사고가 없는 건 아니었다. 여관주인 또한 창고 내의 무단침입자 다섯 명과 실랑이를 벌어지는 중이었다.
"돌아가십쇼. 이미 틀렸습니다."
여관주인이 철제지팡이를 무기처럼 손에 쥔 채로 거듭 엄포를 놨으나, 무리의 우두머리도 얌전히 그의 말을 들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당장 비켜서세요, ‘클리프(Cliff)’ 씨!"
"안 됩니다, 공녀님. 들이닥친 병력이 너무 많습니다. 지금은 물러나셔야 할 때입니다. 이렇게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아버님에 이어서 오라버니까지 끌려가게 놔둘 순 없어요! 클리프 씨는 지난날 아버님께 입었던 은혜를 이런 식으로 되갚을 건가요?"
"오히려 그 은혜 갚고자 제가 이러는 거 아닙니까? 이 소수 인원으로 들이대봤자 아무 의미 없습니다.”
“기습하면 어떻게든 될 거라고요!”
”뭐라 말씀하셔도 보내드리지 않을 겁니다. 이만 포기하십쇼."
"클리프 씨!"
"쉿, 누가 듣겠습니다! 여튼 제 남은 다리마저 잃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제가 공녀님께 길 트는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이익..."
대쪽 같이 버티는 클리프였지만, 눈물 글썽이는 공녀 때문에 결국 타협안을 제시했다.
"다만... 다른 사람들까진 구태여 막진 않겠습니다. 제 몸뚱이가 예전 같지 않아서 그럴 여력이 안 되는군요."
이에 공녀라 불린 여인은 자신의 일행 중 여검사를 바라보며 말했다.
"...미안해요, ‘네스티(Neste)’. 제 오라버니를 꼭 구해줘요."
"물론입니다, 아가씨. 저희에게 맡겨주십시오."
"서둘러줘요. 하지만... 무리는 말아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네스티는 나머지 동료들에게 손짓하며 앞으로 나아갔다. 물론 클리프의 옆을 스치는 와중에 감사인사를 나지막이 전하는 일도 잊진 않았다.
"제가 빚을 졌군요, 클리프 대장."
"대장은 무슨, 내가 은퇴한 지가 언젠데. 암튼 됐고, 살아서 갚을 생각이나 해라. 꼭이다."
"후훗, 노력은 해볼게요."
"너 뒈지면 내 손에 죽어. 알겠냐?"
“네.”
구름에 잠시 가려졌던 태양이 포근한 햇살을 흩뿌렸다. 그래서인지 이들이 자아낸 끈끈한 감성이 더욱 멋드러진 낭만이 되어 돋보이기도 했다.
만일 공기를 울리는 천둥소리만 아니었더라면, 먼훗날 누군가에게 꽤나 푸근한 이야깃거리로써 회자됐을 터였다.
- 우르릉... 우르릉... 우르르르...
“뭐, 뭐죠?”
“글쎄요. 비가 내릴 하늘은 아닌데 말이죠.”
마른 하늘에 날벼락은 아니었다. 클리프를 포함한 사람들이 착각의 원인을 찾아 주의를 기울여 보니, 천둥을 닮은 그 소리는 바로 여관내부로부터 터져나오고 있었다.
- 쿵, 쿵, 쿵, 쿵, 쿵.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다섯... 극심한 내부 충격을 받은 건물이 점점 위태위태하게 흔들렸다.
- 쩍, 쩌저적...
이윽고 균열마저 일어났다. 그렇게 심각하게 찢어지고 찢어지던 벽면은, 끊임없이 반복되는 고통을 더이상 버티지 못하고 작은 파편들로 화했다.
- 뚜-쾅-!
"뜨헉! 내, 내 가게가...!"
클리프가 그 길로 창고를 박차고 나갔다. 단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겠다했던 그의 맹세가 무안한 정도의 빠른 이탈속도였지만, 휑휑하게 뚫린 건물 때문에 그의 머릿속은 이미 하얗게 마비된 모양이었다.
"좋았어! 우리도 가보자, 네스티! 자, 어서!"
"앗, 아가씨! 아가씨! 아가씨-!"
얼떨결에 자유로워진 공녀가 얼씨구나하고 뛰쳐나가자, 나머지 일행들은 '아 이게 아닌데' 싶으면서도 그녀를 뒤따를 수밖에 없었다.
잠시후 그들이 최대한 기척을 숨기며 당도한 그 곳. 바로 그 장소에선 흙먼지와 두터운 친분을 나누던 백인대장이 상체를 가까스로 일으키는 중이었다.
"·...우욱! 크어... 헛, 아니?!"
무심코 가슴부위를 매만지던 그는 충격을 금치 못했다. 호흡도 곤란할 정도로의 심한 압박감의 원인이 잔뜩 우그러든 흉갑에 있기 때문이었다.
'분명 맨주먹이었는데?!'
괴한으로부터 주먹질 한 방만 얻어맞았을 뿐이거늘, 기아니크 궁정마법사가 이중삼중으로 마법부여한 판금갑옷의 보호기능은 복구가 불가능할 정도로 유명무실해진 상태였다.
'괴, 괴물 같은 자다!'
그의 생존본능은 도통 믿기지 않는 현실을 어떻게든 이해해보려던 그의 이성을 후순위로 냉큼 밀쳐냈다.
"끄으으으응... 어서... 이곳에서... 벗어나야..."
백인대장은 루카스가 잠시 다른 부하들에게 정신이 쏠려 있는 동안 잽싸게 내빼려고 했으나, 갈빗대 몇 개가 부서진 몸뚱아리가 그의 마음처럼 따라주지 않았다.
"음?!”
루카스는 도망치려다 딱 걸린 그를 향해 주인 잃은 칼집을 냅다 집어 던졌다.
”어딜!"
- 빠악!
"끄엌!"
백인대장은 자신의 투구가 무자비하게 찌그러지는 감각을 느끼며 다시금 지면에서 나뒹굴었다.
"아구구구구..."
그는 골이 빠개지는 듯한 통증을 호소하고 싶었으나, 점점 가까워지는 루카스의 발자국 소리 때문에 목청을 먼저 높여야 했다.
- 저벅. 저벅. 저벅.
"네, 네 놈! 내, 내가 누군줄 알...!"
그는 용맹스런 호통을 이어가지 못 했다. 분노에 두 눈이 빨갛게 충혈된 루카스가 솥뚜껑 같은 손을 그에게 뻗어낸 탓이었다.
- 텁! 꾸아악...
"...끄에에엑..."
소름끼칠 정도의 악력. 단단히 뿔난 루카스의 오른손이 굳게 쥐고 신나게 흔드는 것은, 백인대장의 멱살이 아니라 그의 숨통 같았다.
"사, 살려주ㅅ......"
죽음의 문턱에 다다른 백인대장의 정신상태가 대단히 공손해졌지만, 루카스는 그의 말을 끝까지 들어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무슨 말? 나 주둥이 어눌하다. 그래서 그런가 귀도 잘 안 들린다."
“끄어어어...”
루카스의 말투는 철벽처럼 단호했다.
"네 잘못이다. 이 싸움은 네가 시작했다."
"으으읔으......"
그제야 자신의 실수를 깨우친 백인대장이었다. 상대가 귀족이건 나발이건 대뜸 족치고도 유유히 빠져나갈 수 있는 실력 보유자를 건드린 것에 큰 후회가 밀려왔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항구 떠난 배를 보며 땅을 치고 후회하는 꼴이었다.
"하... 한 번만... 자비ㄹ... 어커거거걱..."
얼굴이 파랗게 질리던 그의 의식이 마침내 완전히 날아갔다. 비록 우려와 다르게 목숨까지 날아가진 않았지만, 이제 이 근방에 널브러진 그 어느 누구보다도 늦게 깨어날 것만은 확실했다.
"쯧, 죽일 가치도 없는 놈."
- 철푸덕.
반면 백인대장을 바닥에 떨군 루카스는 후련해진 자신의 속내처럼 먼지 묻은 두 손바닥을 탁탁 털었다. 그런데 부리나케 뒤뚱거리며 달음질해온 클리프의 절규가 그의 정신을 새롭게 환기시켜줬다.
"으어어어어...! 내, 내 가게가!!!"
이에 화풀이를 끝마친 루카스가 냉정하게 주변을 훑었다.
"아, 이런..."
정문쪽에 임시로 고삐를 묶어놨던 말은 이미 경기를 일으키며 도망친 지가 오래였고, 듬성듬성 파괴된 가게건물은 성난 멧돼지가 실컷 파헤친 감자밭처럼 흉측했다. 또한 여태까지 재주껏 꽁꽁 숨어있던 백성들까지 하나둘씩 구경꾼으로써 기어 나오고 있는 실정이기도 했다.
'이거 망했군. 돈도 몇 푼 없는데...'
루카스가 속으로 이걸 어떻게 변상해주나 고민하고 있는데, 뜻밖의 행운을 맞이한 레벨티오 공녀가 바짝 뒤따라온 네스티를 포함한 수하들에게 명령하는 외침이 들려왔다.
"서둘러라, 어서!"
계산은 물론 눈치까지 빠른 공녀의 행동력은, 한쪽 구석에 바짝 찌그려져 화를 면한 오라버니 일행을 구출하는 것에서만 끝나지 않았다.
"당신도요! 이쪽이에요! 피하셔야 해요!"
"?"
그녀는 엄청난 무력을 선보인 루카스의 옷자락을 쭉쭉 끄는 일도 까먹지 않고 알뜰살뜰하게 챙겼던 것이다.
"어서요!"
"...뭐, 뭡니까?"
"로벨리아!"
"나는 그딴 거 모릅니다."
"...알겠어요. 우선 여기서 벗어나서 이야기해요."
"아니, 난 괜찮습..."
"빨리요!"
"나는 희망합니다. 당신이 내 바짓자락을 놓아주기를..."
"지금 이렇게 한가롭게 떠들 시간 없어요! 이 소식이 휠러백작의 귀에 들어가면 주력부대까지 움직일 거라고요!"
"아니, 나는..."
"알았으니까 이따가 이야기해요!"
"어허, 찢어집니다. 이것은 내 바지, 내 바지입니다."
"아! 가자고요, 쫌!"
쉴 틈없이 몰아붙이는 공세에 덩달아 휩쓸린 루카스는, 귀한 단벌옷을 찢어져라 잡아당기는 그녀에게 거의 반 강제적으로 딸려가다시피 하며 체념했다.
'후우... 신이시여, 이것은 당신의 인도하심입니까? 이 어리석은 종에게 분별의 은총을 허락하소서!'
전체적으로 이 둘의 모양새는 말 안 듣는 대형견을 낑낑대며 산책시키는 여아를 닮아 있었다.
그렇지만 오늘 최고로 우스꽝스런 장면으로는 꼽을 수 없었다. 마족의 기도가 하늘에 닿지 못하도록 막아내기 바쁜 아리사엘의 몸부림이 그녀보다 훨씬 더 처절했기 때문이었다.
"이 마귀자식아! 이건 창조주의 뜻이 아니라! 내 뜻이거든?! 아! 제발 기도 좀 하지 마, 쫌!!! 흐흑... 못된 마귀 새끼... 내 신세가 어쩌다가... 흐어엉..."
* * * * *
해가 먼 산 뒤로 내려앉은 시각. 지하수로 어딘가에 위치한 거대한 창고 안에서 루카스가 한숨을 한 움큼 토했다.
"푸후우......"
"안심하세요. 여긴 고조부께서 만드신 비밀창고랍니다. 휠러 백작은 물론이고, 마을사람들 중에도 아는 사람이 없는 가장 안전한 장소죠."
"에이~휴~."
레벨티오 공녀의 청푸른 눈망울을 상대하는 루카스의 심정이 찹찹하기 이를 데 없었다.
'바지춤이 찢어지든 말든, 그대로 영지를 떠났어야 했다. 아니면 지금이라도 그냥 콱...'
그가 굳게 닫힌 창고문을 뜯어버리는 선택지까지 신중히 고려하고 있을 무렵, 공녀를 쏙 빼닮은 중년 여인이 많은 무리를 데리곤 그의 앞으로 다가왔다. 개중엔 아까 낮에 봤던 세 사람과 여관주인'이었던' 클리프도 함께 섞여 있었다.
"의인을 이렇게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아마도."
"흠흠, 먼저 소개 올리겠습니다. 저는 이 영지의 주인 '크리스(Chris)' 레벨티오의 아내 '캐서린(Katherine)'라 합니다."
"내 이름은 루카스입니다."
"예, 루카스 님. 다른 사람들도 소개드리지요. 이쪽은 의인께서 오늘 구해주신 장남 '프레드릭(Frederic)', 이 딸아이는 둘째 '테리나(Terina)'. 그리고......"
루카스는 정중한 예법으로 인사하는 여인이 왜 자신을 '은인'이 아닌 '의인'이라 불렀는지 의아했다. 굉장히 석연찮은 기분이 들었지만, 그렇다고 딱히 신경 쓰고 싶은 마음이 들지도 않았다.
'나는 마계로 돌아가 베엘베불의 추종자들을 징벌하고, 잔존 세력을 끊임없이 분열시켜야 한다.'
오늘날의 그는 루카스의 직계자. 즉 마족으로 다시 태어나고자 했을 적부터 단단히 마음먹은 목표만이 중요할 뿐이었다. 따라서 새로운 세계에서 허비한 시간은, 낯선 언어와 문화를 익히기 위한 비리디아에서의 세월만으로도 이미 충분하다고 여기는 그이기도 했다.
그러니 발음도 익숙치 않은 세상의 권력다툼 따윈, 그에겐 관심의 건덕지조차 되지 않는 영역이라 하겠다.
'흐음... 늦어도 언제쯤 헤트만 국에서 출발해야 샤비와 애드의 입학식에 늦지 않으려나? 아, 그전에 수도에 들려 메토를 만나 대마법사를 소개 받아야 했었지. 흐음... 거기서 유의미한 수단을 확보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그는 캐서린 자작부인의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한쪽 귀로 흘려들으며, 몇 달 후 요정족 본토에서 이뤄질 입학식까지 남은 일자를 가만가만 셈하는 가운데 나름의 여행일정을 계획했다.
"저어... 어디 불편하신지요?"
캐서린이 도중에 말을 끊고 물었다. 싫든 좋은 사교활동에 참여하면서 자연스레 발달한 그녀의 눈치가, 루카스의 심드렁한 감정상태를 읽어내린 것이다.
"에... 언제쯤? 나 여기서 나갑니까? 밤? 새벽? 동 트기 직전이 가장 좋겠습니까?"
"......"
마음이 콩밭에 가 있는 루카스를 확인한 캐서린의 머릿속이 복잡했다. 그가 명확히 선을 긋고자 또박또박 의미를 전달하는 어투가 그만큼 강렬했기 때문이었다.
'테리나가 매달리다시피 해서 억지로 데려왔다 하더니만...'
이미 만나러 오기 전에 대략적으로 들었었지만, 막상 루카스와 직접 마주하며 체감한 심각성은 그녀의 예상보다도 컸다.
- 작가의말
애초에 선작수도 몇 개 안 되는데, 이제는 그마저도 조금씩 줄어드는군요.
독자의 기대에 한참 못 미치는 내용구성과 필력인가 봅니다.
근데... 송구하게도 이대로 멈추긴 어려울 거 같습니다.
슬퍼하면서 접기엔, 제가 지금 너무 멀리 와 있는 상태라서요. 연중 외의 방법을 찾아 동원해보도록 하겠습니다. ^^;
Comment '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