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애와 편증 (3)
* * * * *
이튿날 오전. 지르츠 부장은 아카반 총장과의 독대를 부랴부랴 신청했다.
“어서오시게, 집행부 부장.”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총장님.”
”그래, 무슨 일인가? 이렇게 방음 결계까지 단단히 치고서?”
“제가 무엇을 여쭙고자 이렇게 왔을진 이미 아시리라 생각됩니다.”
“허허허, 정확히 말을 해야 알아듣지 이 사람아. 내 머리회전이 예전 같지 않다는 걸 잊지 말아주게.”
지르츠는 시치미 뚝 떼는 아카반의 태도가 얄밉기 짝이 없었으나, 아랫사람 된 도리로써 꾹 참았다.
“디마우스가 보내온 용병 중 절반을 조만간 뮤티움으로 이동시키신다고요?”
“그건 아침 회의 때 내가 제대로 설명했잖은가? 변이체 토벌은 사실상 끝났네. 솔직히 예비대로 계속 놔두긴 몹시 과한 병력이지. 그들 식대비용만 해도 한두 푼이 아니고 말이야.”
이 말이 끝나자 지르츠는 즉시 반박했고, 아카반 또한 즉각 대응했다.
“그래도 시기상조입니다. 오늘 새벽 정찰대에 의해 이상징후가 포착했습니다. 전에 없었던 함몰 지형이 해안선을 따라 서너 군데에 생성됐고, 흉측하게 붕괴된 암석지대도 발견됐습니다.”
“아아, 그 부분은 이미 조사를 마쳤네. 비스마우어 일족과는 전혀 무관한 현상으로 판명됐어.”
지르츠의 미간이 와락 구겨졌다.
“저도 이제서야 특이사항을 보고 받은 참입니다. 헌데 총장님께선 이미 관련 조사를 끝마치셨단 말씀이십니까?”
“...그, 그렇다네.”
“그 무슨...”
아카반 총장은 루카스의 공간 전이만 도와줬을 뿐, 토르페가 꿍쳐놓았던 오마르 가넴의 재화들을 루카스가 몽땅 싹 쓸어간 상세정황까진 몰랐기에, 지르츠의 억센 추궁에도 당당할 수 있었다.
“베스퍼가 밤새 돌아다니면서 확인하느라 고생 좀 했어. 아무리 은퇴를 준비한다지만 내가 그만한 변동도 눈치채지 못할 거라 생각했는가?”
“......역시 그랬군요.”
베스퍼의 이름을 듣고 확신이 선 지르츠가 게슴츠레한 실눈을 떴다.
“루카스. 그 자가 배후였군요.”
“...크어흠! 나는 아무 말 안 했네!”
“총장님!”
“목소리 낮추게. 아직 귀 안 먹었으니까.”
”도대체 그 자의 정체가 뭡니까? 장차 총장님의 뒤를 이을 후임자에겐 귀띔 정도는 해주실 수 있잖습니까?”
“내가 자네에게 말해줄 수 있는 건... 절대로 그 자를 적대하지 말란 이야기뿐이야.”
“그건 염려 마십시오. 저도 연맹의 미래를 위해서 알량한 자존심 따윈 버리기로 했습니다. 혹 필요하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그 사람 앞에 무릎 꿇고 조아릴 수 있습니다.”
”흠, 천만 다행이군. 그만한 각오면 충분하네. 과연 차기 총장이야.”
“아카반 총장님!”
”됐네. 이제 이만 돌아가서 자네 일 보도록 하시게나.”
“...알겠습니다.”
아카반은 서운한 기색이 역력한 등짝으로 돌아선 지르츠를 잠시 사적으로 불러 세웠다.
“지르츠야.”
“...네, 선생님.”
“후우... 넌 절대 서약하지 마라.”
“예?”
“아, 글쎄! 하지 말라면 하지마, 이 녀석아!”
“......”
지르츠는 후회가 막심인 아카반의 격동의 눈동자를 마주하고서 잠시 할 말을 잃었다.
* * * * *
한편, 뮤티움 중앙정보국 소속 마법사들의 도움을 받아 레벨티오 저택을 비밀리에 방문한 러셀은, 어느 지하 창고 안에서 기염을 토했다.
“아니! 산처럼 쌓여 있는 이게 다...”
그조차 좀처럼 보기도 힘들었던, 혹은 문서에 기술된 문장으로만 접해보던 국보급 귀물더미에, 그는 좀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어허헛허... 이건 ‘에사이디(Essaidi)의 목걸이’가 아닙니까? 40년 전에 소실된 것으로 세간에 알려져 있었던 보물인데...”
“그거 많이 비싼 건가, 릭?”
“아이고~, 이게 진품이라면 비싼 정도가 아닙니다!”
러셀은 캐서린의 손바닥보다 큰 타란튤라 형태의 장식부분을 가리키며 설명했다.
“설령 진품이 아니더라도 엄청 납니다. 여기에 붙은 보석들이 모두 최상품이니까요.”
“잘 됐군. 처분은 가능한가?”
“에... 결론부터 말씀드리면 일단 가능은 합니다. 허나 이 목걸이와 같이 너무 유명한 보물들은 몇 년을 묵히시는 걸 권장합니다.”
“암시장이라도 그런가?”
“이런 고가의 물품을 수집할 여력이 있는 고객은 극히 한정적인데다가, 그 대부분은 막강한 권력까지 지녔습니다. 출처가 불분명하다는 이유로 값을 반 이상 후려치겠지요. 차라리 보석 따로 떼고, 금은 따로 녹여서 파는 경우가 훨씬 이익일 수도 있다고 감히 말씀드리고도 싶군요.”
“흠... 출처라...”
”하지만 그러기엔 그건 좀 많이 아깝잖습니까? 대충 5년 이상 묵히면서 자금 세탁하듯이 인위적으로 여기저기 흔적들을 만들어놓으면, 훗날엔 충분히 제 값을 받을 수 있다고 자신합니다.”
“알겠다. 전부 믿고 맡기겠다.”
“저, 전부?!”
루카스는 마련된 창고가 좁아 아직 꺼내지도 못한 보물들이 제니티아의 영역에 한가득 남았다란 사실은, 러셀의 혈압을 배려해주는 차원에서 밝히지 않기로 했다.
“가급적 빨리 처분해서 뮤티움의 자금으로 만들면 된다. 이런 대행수수료 평균은 처분가의 30%로 알고 있다. 어떤가? 하겠나?”
“물론입니다! 다만...”
“다만?”
여전히 넋 나간 레벨티오 부부를 보며 머리를 빠르게 굴린 러셀이 말했다.
“뮤티움의 집정관께오서 각 주요도시에 제 지부가 들어서고 활동하는 걸 묵인해주실 수 있다면, 수수료를 절반으로 낮춰드리겠습니다.”
“흠... 크리스, 당신의 의견은 어떻습니까? 나는 릭이라면 믿을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오래 거래해온 캐서린도 동의할 것입니다.”
“...루카스 님께오서 이렇게까지 지원해주시는데 제가 불만을 가질 수야 없지요. 집정관의 권한으로 영주들... 아니, 각 도시 책임자들을 긴급 소집하토록 하겠습니다.”
“좋습니다.”
크리스를 보며 고개를 끄덕인 루카스는 러셀에게 말했다.
“계약성립이다, 릭. 그 목걸이를 착수금으로 하겠다.”
“허허헛~, 그렇다면 무이자로 뮤티움에 운용자금을 융통해드려야겠군요! 변제야 처분가에서 제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크허허헛!”
“서비스가 매우 훌륭하다, 릭.”
“그야 고객께서 후하신 덕분이 아니겠습니까? 껄껄껄!”
“하하하!”
루카스가 모처럼 흡족하게 웃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의 만족감은 지하창고를 벗어나자마자 고작 몇 분만에 와장창 깨져버렸다.
“루, 루카스 님!”
“?”
“나디아 양! 나디아 양이!”
헐레벌떡 뛰어온 테리나의 모습부터 불안하기 이를 데 없었는데, 그녀의 외침에 담긴 내용은 그보다 훨씬 심각했다.
“나디아 양이 괴한들에게 납치되셨습니다!”
“......”
* * * * *
뮤티움 내의 공기흐름이 부쩍 가빠졌다. 정확하게는 중앙정보부 소속 관계자 전원이 발바닥에 땀나도록 뛰어다니는 중이었다.
“젠장! 국내야, 국외야?”
“네넵, 클리프 장관님! 건달랑 폭력조직원 몇 놈 족쳐봤는데 국내 범죄조직의 소행은 아닌 것 같습니다!”
루카스를 조금이나마 겪어본 사람일수록, 그리고 그의 행적을 지속적으로 아름아름 수집해온 높은 직책일수록 속을 새카맣게 태웠다.
“썩을, 설마 기아니크냐?”
“유입경로는 그쪽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만 아직 확실치는...”
“야이... 뭐어? 확실치가 않아? 이런 미친! 닥치고 확인해! 모든 일 다 미뤄! 이게 최우선이야! 현재 위치라도 찾아!”
“지, 진정하십쇼!”
”진정? 진저엉? 이게 바깥에서 일어난 일이냐?! 국내사건이야, 국내사건! 우리집 안방에서 터진 일이라고!”
“그건 그렇지ㅁ...”
”시끄럽고! 하여간 러셀 패밀리보다 뒤쳐지기만 해봐! 그땐 썅! 니들도 나처럼 평생 목발 끼고 살게 되는 거야, 알아들어?!”
부하직원들의 목 멘 애원과 불평 어린 표정도 하등 소용 없었다.
과거 루카스의 무용, 특히 적들의 시체로 이뤄진 동산을 만들고도 일말의 죄책감은커녕 태연하기 짝이 없던 루카스의 모습은 클리프의 뇌리에 각인 되어 있었고, 때문에 그의 언성은 부하들의 불만에 비례하여 거세질 수밖에 없었다.
“야이 새끼들아! 내가 너네들 겁박하는 줄 알아?! 오히려 니들 인생 연장시켜주려고 용 쓰는 거야, 이것들아! 지금 머리끝까지 빡친 인물이 특급이야, 특급! 농담이 아니라 진짜로 싹 다 죽는다고! 그러니까 잔말 말고 비번들까지 비상호출해!”
“네, 넵!”
이런 그의 고성이 얼마나 컸던지 방음처리된 유리문짝을 뚫고서 간간히 새어나갈 지경이었다.
덕분에 해당 건물 아래의 안뜰에서 걷던 이들은 그 세세한 내용은 알 순 없을지라도, 그가 얼마나 흥분한 상태인지는 충분히 가늠할 수 있었다.
“아무래도 저희가 좋지 않은 때에 방문을 드린 것 같습니다.”
“흠흠, 본래 저런 분이 아니시니 부디 오해가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불편한 질문을 회피한 여성 안내역은 방문객 셋을 접객실로 들여보내며 허리를 살짝 굽히며 예의를 갖췄다.
“여기서 기다려주십시오. 곧바로 집행관님께 친서를 전달토록 하겠습니다. 그러나 아까 언질 드렸다시피 언제쯤 면담이 허락될는지는 확답을 드리기 어렵습니다.”
“예, 저희가 운이 없는 거겠지요. 하루 종일이라도 기다리겠습니다.”
“약간의 다과를 준비시키겠습니다. 특별한 용무가 생기시면 고용인을 호출하시어 저 ‘네스티’를 찾아주십시오.”
“예.”
”그럼 이만.”
- 달깍.
네스티의 기척이 멀찍이 사라지자 붉은 머리의 여성이 허리를 쭉 펴며 소파에 기댄 채로 먼저 푸념했고, 검은 곱슬머리 남성이 이에 공감을 표했다.
“끄으으응~, 으구구구~.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더니~. 이게 뭔 일이래~?”
“그러게나 말이다. 흐음~, 그래도 각 도시 책임자들이 한 자리에 모이는 분위기로 봐선 확실히 뭔가 있는 듯해. 괜히 우리에게 수작 부리려는 건 아니라고 봐.”
”차라리 내일 오전에 다시 오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코넌 대장님?”
20대 남녀에게 코넌이라 불린, 신장이 2m 40cm에 육박하는 거구의 중년인은 그녀의 생각에 전혀 동조하지 않았다.
“아니. 무한정 대기한다. 상황에 따라 무력을 행사해야 하는 임무다. 더군다나 목표와 언제 어느 때 마주칠지도 모르는 일이기도 하지. 그러니 당연히 사전에 집정관의 허가를 받아놔야 나중에 외교 문제로 심화되지 않는다.”
“이러다 오늘 하루를 그냥 꽁으로 날릴 수도 있다고요~.”
”칼리드 왕자님의 서신도 있는데 무작정 외면하진 않을 터, 일단 기다려보자.”
“으으~, 대장님은 너무 고지식하셔서 탈이에요~. 안 그래, 마이트?”
“아니. 키아라 네가 너무 대충인 거야. 우리 대장님은 항상 옳으시거든.”
“이~야~! 태세전환 장난 없다, 너?!”
그렇게 시간이 흘러 서로 옥신각신하던 키아라와 마이트의 농담 따먹기도 슬슬 지겨워졌을 때쯤이었다.
- 드드드드드드...
“핫?!”
“어엇?!”
건물를 비롯한 부지 전체가 지진을 맞을 것처럼 부르르 요동쳤다. 너무 놀란 마이트와 키아라는 찻잔이 떨어지는 것조차 대응하지 못했다.
- 쨍그랑.
엉겹결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코넌 역시 창문 너머로 고정한 시선을 어쩌지 못한 채였다.
‘...이, 이건 대체?!’
거대한 공포. 분명 찰나였지만 가늠키 어려운 힘이었다. 심지어 그가 태산같이 높다고 여겼던, 아드퍼드로스의 대변자인 주소걸조차도 이에 비하면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이건 반드시 알아봐야 한다! 어떤 불협화음을 감수해서라도!’
이곳에서 자신이 제멋대로 움직인다면 엄연히 불법침입이자 무력도발이 될 것이나, 지금은 그것을 따질 때가 아니었다. 헤트만의 미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칠 수도 있는 변수를 확인하는 일은 뮤티움의 외교적 항의에 비할 수 없이 중요했다.
“...가자!”
“”넵!””
코넌은 활짝 열린 창문으로 몸을 날렸고, 눈치껏 그의 의중을 알아들은 마이트와 키아라도 가타부타 말 없이 그 뒤에 냅다 따라붙었다.
- 타다다다다다...
그렇게 세 사람이 훨훨 날듯이 몇 개의 건물을 뛰어넘어 기어이 기운의 근원지 앞에 도달했을 때, 코넌이 다른 둘을 향해 넌지시 말했다.
“명심해라. 우린 어디까지나 무시 못할 위기를 감지하고 도와주러 온 거다!”
““넵!””
코넌의 당부를 듣고서 고개를 끄덕인 마이트와 키아라는 방문을 열어 젖히며 동시에 소리쳤다.
- 벌컥!
“무슨 일이...”
“괜찮으십...”
그들의 외침은 완성되지 못했다. 이 세 사람의 두뇌가 방안에 혼재된 빛과 어둠을 인식하기도 전에, 이미 안쪽에 있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리고 말았다.
아니, 굳었다기보단 그들 주변의 시간 자체가 멈췄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쯧!}
죽기 일보 직전의 야스민을 매개체로 삼고 있던 아리사엘이 모든 활동이 정지된 코넌 일행을 보며 혀를 찼다.
{필멸자들이 예상보다 빠르게 몰려오고 있구나. 그러니 그대는 어서 분노를 거둬라.}
하지만 본질의 형상을 취하고 있던 루카스는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며 반항했고, 이에 아리사엘은 점점 언성을 높였다.
{당장 폭주를 멈추지 못하겠느냐! 네 녀석 때문에 내가 천상 규정을 어겼노라! 바로 내가 이 차원에! 이 행성에! 처벌을 무릎쓰고 간섭하고야 말았다! 이 이상 내가 권능을 사용케 하지 마라!}
{......}
{바리온 딘 그레고리! 나는 네게 손가락질할 자격이 충분하다! 천상에서 네게 관심갖지 않도록 애쓰는 이가 나고, 또한 선계의 간섭을 최대한 막아내는 이도 나이며! 이와 더불어 너로 인해 두려워 떠는 행성의 의지를 달래주는 이도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그녀의 호소에도 루카스가 꿈쩍을 않자, 그녀는 마지막 경고를 날렸다.
{정녕 내 모든 노력을 허사로 만들 셈이더냐?! 그렇게나 네 존재를 지고한 대천사님들께 알리고픈 것이냐?! 단언컨대, 그분들께선 너는 물론이고 너와 관계된 모든 존재를 찾아내어 하나하나 허무로 되돌리실 것이다. 진실로 네가 그것을 감당하겠느냐?!}
{......}
그제야 이성이 분노를 앞지른 루카스는 자신의 꽉 쥔 주먹처럼 감정을 억눌러 통제하기 시작했다.
- 우드득.
이윽고 그의 형체가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오매, 아리사엘은 방안에 펼쳐놓은 힘을 일부 회수했다.
그러자 그녀의 권능 아래 통제되던 시간들이 다시금 흐르기 시작했고, 이와 동시에 압제에서 자유로워진 필멸자들은 강한 빛에 발하며 천장에 머리가 닿을만큼 공중에 붕하고 떠 있는 야스민을 목격할 수 있었다.
“시, 신께서 강림하셨다!”
“오오, 맙소사!”
“아아...!”
이후 아리사엘은 주위 사람들, 레벨티오 내외와 러셀를 비롯한 각 도시 책임자들도 알아들을 수 있게끔 야스민의 입과 혀를 빌어 육성으로 직접 이야기했다.
-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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