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인상 (3) + 유적발굴 금지령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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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아침, 폐광 임시 야영지의 장교 막사.
"스승님, 내일부턴 서남쪽 방향으로 수색 범위를 더 넓히는 건 어떨까요?"
이마를 몇 바늘 꿰맨 가르디엔이 디마우스와 함께 지도를 보고 있었다.
"으음... 각 마을의 역병 치료가 순조롭게 진척되고 있으니까, 병력 재조정까진 문제가 아니다. 다만 지난 번 네가 싸운 엄한 것들과 유사한 키메라들이 또 없을 거라 장담을 못하는 상황이라서 골치가 좀 아프구나."
가르디엔은 디마우스가 지도에서 가리키는 범위와 이야기를 잠자코 들었다.
"네가 뜻밖의 전투를 벌인 이곳도 원래는 정찰이 완료된 장소였다. 그런데 네가 말하는 이쪽과 이쪽은 아직 정찰조차 미완료된 지역이야."
"......"
"게다가 듣자니 제레프 님이 이끄는 요정족 토벌대 진척사항도 그렇게 썩 좋진 않더구나. 아무래도 잔여 키메라의 개체 수와 전투능력이 우리 예상을 크게 상회하는 것 같다."
"......스승님, 내일부턴 저도 합류해서 딱 이틀만 더 수색하겠습니다. 지원자들의 생사만 판명되면 그 이후엔 곧장 제레프 님께 합류하여 토벌대를 지원하는 걸로 하고요."
"흠......"
디마우스가 다소 측은한 눈빛으로 가르디엔을 바라봤다.
"얘야, 너무 무리 말거라. 너야말로 충분히 쉬어야 한다. 너와 함께 했던 요정족들도 마찬가지고. 눈에 띄는 외상은 없을지라도 최소 3일은 더 안정을 취해야 한다."
"하지만..."
스승은 제자의 찹찹한 심정을 읽으며 그의 말을 끊었다.
"그래, 나도 네 마음 이해한다. ‘포리스트 칼람(Forist Kalram)’, 그 사람은 연금술사 중에서도 진짜배기 같더구나. 언뜻 봤는데도 대단히 인상 깊었었지."
"약효를 똑똑히 목격했던 레이첼이 제게 귀띔해줬습니다. 아주 보기 드문 강화물약이었다고 하더군요."
"흐음..."
"스승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요정족은 타 종족을 쉽게 칭찬하지 않는다는 것을요. 만약 그의 숨이 붙어있다면 어떻게든 꼭 살려야 합니다. 훗날 어떤 식으로든 이 나라에 보탬이 될 인물입니다."
"...알겠다."
디마우스는 대의까지 들먹이며 확고한 의지를 내비치는 가르디엔에게 항복을 선언했다.
"네가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별 수 없구나. 내일부턴 내가 수색대를 이끌도록 하마. 그러니 너는 이곳을 남아 파병대를 잘 관리하면서 몸을 추스르거라. 말런 장군이 지휘권을 도로 내놓으라며 너한테 딴지 걸진 않을 테니 걱정 말고. 그가 다소 무능해도 바보까진 아니니까."
"...감사합니다. 스승님."
"그래, 그래. 나는 이만 가볼 테니 좀 쉬거라."
"예!"
디마우스는 대충 손짓으로 가르디엔을 침대에 눕게 하곤 탁상 위의 군사지도와 몇몇 서류를 챙겨 막사에서 나갔다. 하지만 스승의 배려에도 불구하고 가르디엔이 편안한 휴식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때로부터 30분도 채 지나지 않아 손님이 들이닥치듯 방문했기 때문이었다.
"가르! 가르!"
"?"
천막 입구를 펄럭이며 뛰어들어온 레이첼의 얼굴은 대단히 상기되어 있었다.
"응? 왜? 무슨 일이야?"
막 쏟아지던 수마가 번쩍 달아난 그를 향해 레이첼이 믿기 힘든 소식을 전했다.
"가르, 가르! 아, 글쎄!!! 그 야무진 꼬맹이가 무사히 돌아왔대!!!"
"뭐?"
기쁨보다 정신적인 충격이 먼저 가르디엔의 머릿속을 강타했다.
'대체 어떻게...?'
포리스트와 바네사의 종적은 키메라 무리의 흔적과 일치한다던 수색대의 보고 이후, 바네사의 생존에 대해선 일찌감치 포기한 그였었기에 온갖 잡생각이 그를 뒤흔들어댔다.
"가르! 지금 우리측 인원들이 역병과 기타 감염여부를 확인하는 중이라고 들었어! 너도 같이 갈 거지?"
"...어? 어! 물론 가봐야지!"
바네사의 생환에 뛸 듯이 기뻐하는 레이첼의 손에 이끌려간 가르디엔.
'흠?'
그녀와 그의 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가르디엔이 그토록 신경 써왔던 포리스트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레이첼이 마음에 들어 하는 바네사도 아니었다.
‘기간토 족인가?’
그의 시선을 사로잡은 건 더러운 모포를 하반신에 대충 둘둘 두른 우람한 근육질의 사내였다. 그리고 그런 그의 감상은 레이첼과 꼭 닮아 있었다.
"헛?! 성장이 미숙한 기간토 족?......은 아니구나!"
그녀는 루카스가 병사들 사이에서 '이빨 분쇄자'로 정평이 난 '쉽 비스킷(Ship Biscuit)'을 바네사가 먹기 좋은 크기로 푸스스 으깨주는 광경을 보면서 말했다.
"우와! 인간치곤 덩치가 아주 무지막지한데? 게다가 힘도 장난 아닌 거 같아!"
"그러게. 단순히 겉모습만 두고 평가하면 저들이 무사히 살아 돌아올 수 있었던 이유가 충분히 납득될 정도야."
"풉, 그치?"
레이첼이 2m가 넘는 루카스의 치밀한 근육을 먼저 주시한 반면, 가르디엔은 그에게서 어떤 기운도 감지할 수 없다라는 사실에 최우선적으로 주목했다.
'상식적으로 짐 덩어리를 둘이나 끼고서 키메라들을 따돌리고 멀쩡히 생환한다는 건 불가능해. 내 식별마법에도 반응이 전혀 없고... 그렇다면 일단 저 자는 내 실력이 닿지 않는 강자란 소린데...'
루카스가 전설적인 수준의 고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심장이 뛰던 가르디엔의 눈매가 어느 순간 양 옆으로 가늘어졌다.
'...음? 흑마법의 기운이? 희미하게 겉돌고 있지만... 거의 확실해. 엇? 그럼 혹시...?'
그는 본인의 추측을 재확인코자 일반 사람은 못 알아들을 요정족 언어로써 레이첼에게 넌지시 운을 뗐다.
"그런데 말이지, 레이첼. 전체적인 상황까지 고려하면 난 도무지 이해불가야. 어떻게 별다른 상처 없이 귀환할 수 있었을까?"
"...글쎄... 엄청난 행운이 따라줘서?"
"저들을 바짝 뒤쫓는 키메라 무리가 있단 보고가 없었더라면 나도 그렇게 생각했을 꺼야."
"음... 그러면 그냥 물어보면 되지 않아?"
"우리가 처한 상황이 상황인 만큼 조심하고 싶어서 그래. 참고로 난 저 사람에게서 음산한 기운 한 가닥 외엔 아무 것도 읽어내지 못했어."
그제야 레이첼은 느닷 없이 요정족 언어를 사용하던 가르디엔의 의도를 이해하고서 싱긋 미소지었다.
"칫, 뭐야~. 결국 나보고 분석해보란 소리였잖아?"
"후훗, 그야 여기선 너보다 뛰어난 사람이 없으니까 그렇지."
"어설픈 아부는 됐고~, 다음부턴 귀찮게 돌려서 표현하지 말아줄래?"
"예이~, 예이~. 분부대로~."
깍쟁이 같은 언행이었지만 이미 가르디엔 지적에 호기심이 콸콸 샘솟은 그녀는, 약 25m 거리에 있는 루카스를 향해 몇 가지 탐색마법을 은밀히 발동시켰다.
"어... 음..."
눈을 감고 집중하던 그녀는 머리를 갸웃했다.
"...뭔가 이상해."
"역시 그건 흑마법의 흔적이었ㄱ..."
가르디엔은 이번 사건의 뒷배이자, 비스마우어 일족이 중추인 흑마법 집단. 그리고 그들에게서 인해 비롯될 수 있는 최악의 가정인 마계 마족을 떠올렸다. 그러나 레이첼은 고개를 세차게 흔들며 그 주장에 동조하지 않았다.
"아니, 아니! 무턱대고 속단하지마! 판단의 근거로 삼기엔 부실해. 저렇게 옅은 흔적은 비스마우어 일족의 키메라와 조우했을 때도 충분히 묻어날 수 있거든! 막말로 저 정도의 기운은 비스마우어 일족의 키메라와 전투를 뜨겁게 치른 우리에게서도 나타날 수 있는 거야."
"휴~, 그럼 다행히 내가 생각한 최악은 아니란 건가?"
레이첼은 이 물음엔 미간의 주름을 만들며 응답했다.
"솔직히... 쫌 애매해. 아니, 애매하다기 보단 특정할 수가 없다는 표현이 정확할 거야."
"?"
"내가 뭘 분석하고 싶어도 애초에 걸리는 게 하나도 없거든."
"너와 계약된 정령들에게도 부탁해본 거지? 그런데도 그래?"
"몰라, 그건 저 남자에게 들킬 것 같아서 못 썼어. 일단 현재로썬 '도무지 생명체로 보이지 않는다'라는 게 내 결론이야."
"현세 강림한 마족, 혹은 특급 전투사이거나."
"......너 진심이야?"
이런 가르디엔의 생뚱맞은 가설은 레이첼이 놀란 토끼 눈을 뜨게 만들고도 남았다.
"아니... 내가 미처 못 읽어낼 정도이라면 그럴 가능성도 있긴 한데! 가르, 진짜로 그렇게 생각한 건 아니지?"
"2급 기사들도 네 마법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사실에 기인하면, 마냥 억측이라고만 할 순 없지 않나?"
"특급 전투사는 우리 요정족 역사 내에서도 절대 흔치 않거덩?! 말 그대로 전설이라고 전설! 더군다나 마족은 진짜 말도 안 되는 소리고!"
"어째서? 현재 정황상 딱 들어맞는 추론이잖아?"
레이첼은 마족과 영웅이란 얼토당토않은 두 가지의 선택지를 두고 고민하는 가르디엔의 머릿속을 반으로 갈라서 열어 보고픈 심정이었다.
"야, 그럴거면 차라리 저 사람한테 가서 '마왕이세요? 아니면 영웅이세요?'라고 대놓고 물어보던가?"
"안 그래도 사실... 아까 너도 흑마법의 흔적을 읽었다고 했을 때부터, 이곳의 전력을 총동원한 기습까지 고려 중이었어."
"......"
가르디엔은 말문이 턱 막힌 그녀로부터 한창 식사에 열 올리는 루카스 일행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저 모습을 가만 지켜보자니, 굳이 돌이킬 수 없는 무례를 범하면서까지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가 있을 까란 생각이 드네."
레이첼 또한 바네사 앞에 놓인 스프 속에 건더기가 줄어들 적마다 다시 차돌처럼 딱딱한 빵을 쪼개어 불려주는 루카스의 세심한 행동을 보며 이내 수긍했다.
"...그래. 좀 비현실적인 모습이긴 해. 마계에서 강림한 마족이라면 저러고 앉아 있을 리 없지."
"흐흐, 그럼 최소 1급 전투사로 상정하고서 잘 살펴야겠어."
이런 그의 확신에 찬 미소를 본 레이첼은 팔짱을 낀 채 자신의 닭살을 마구 비벼댔다.
"아우으... 난 가끔 네가 정말로 소름 끼쳐."
"왜?"
"왜는 무슨 왜야? 그런 표정 지을 때마다 90% 이상은 적중하니까 그렇지!"
"하하하. 어쨌거나 지금 중요한 건 시간과 정성을 들여볼 가치가 있단 사실 아니겠어? 이왕이면 정말로 1급 이상의 강자였으면 좋겠는데 말이지."
"네 친구가 되면 더 좋을 테고?"
"아휴~, 그럼! 그걸 말이라고 해? 간이고 쓸개고 가져다 바쳐야지!"
"질린다, 진짜."
"혹시 모르니까 일단 저 사람의 뒷배경부터 조사해야겠어! 아버지께 말씀 드리고 가문의 힘을 동원하면 길어야 몇 달 안에 확실해질 거야, 아하하핫!"
"하여간 그 놈의 욕심은! 어후, 못 말려."
양껏 식사중인 루카스 무리를 향해 있는 가르디엔의 눈매가 이전과는 다른 의미로 가늘게 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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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적발굴 금지령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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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루카스가 스승에게 가르침을 받으며 임시로 머물렀던 대천사 가브리엘의 개인영역. 무언가 실험에 실험을 이어가던 이곳의 주인이 어느 순간 손을 멈췄다. 그리곤 자신의 영역에 들어온 방문자를 반겼다.
"어서오라, 아리사엘."
"부르심을 받고 달려왔나이다."
아리사엘은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날개로 양쪽 눈을 가리는, 예전과 조금도 차이 없는 인사예법을 취했다. 그러나 날개 뒤로 가려진 그녀의 무심한 눈빛과 메마른 목소리에선, 과거 넘치도록 가득 찼던 경외심을 더 이상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대에게 맡길 일이 있다."
"말씀하십시오."
가브리엘은 껄끄러운 상관을 대하는 듯한 무미건조하고도 지극히 사무적인 그녀의 태도가 마음에 걸렸으나, 이를 딱히 지적하고픈 생각은 들지 않았다.
"미리 양해를 구하겠다. 이 일은 필시 그대의 마음에 들지 않을 것이나 달리 적임자가 없었음을 알아다오."
"당신께선 명령하십시오. 저는 그저 맡겨진 소임을 묵묵히 수행하겠나이다."
"말만이라도 그렇게 해주니 고맙구나. 그럼 명하겠다, 아리사엘."
"듣고 있나이다. 하명하십시오."
"그대는 마계에서 벗어나 최하위 차원으로 떨어진 루치펠의 직계자를 돕도록 하라."
"네, 순명하겠... 예?!"
대충대충 가브리엘을 응대하던 아리사엘의 눈동자가 똥그랗게 부릅떠졌다.
“루카스의 정체가 선계와 천상의 감시망에 걸리지 않도록 하는 일이 그대의 임무이니라. 직접적인 영향력은 기피하되, 부득이한 경우에 한하여 해당 차원의 확률간섭과 조율까진 허락하겠다. 그리고 그를 마계로 복귀시킬 방편은 내가 최대한 빠르게 강구해보겠노라.”
"제, 제가 어째서 그깟 마귀의 뒤치닥ㄱ... 끄응... 아닙니다. 순명하겠습니다."
잠시 흥분했던 그녀의 말투는 다시금 조곤조곤 해졌지만, 떨리는 그녀의 음색 속엔 격동하는 감정이 담겨 있었다. 어쩌면 이것이 그녀의 자아에 변화가 일어나게 된 시발점이었는지도 모르겠다.
-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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