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셔야 하는 독주 (2)
* * * * *
아침 일찍부터 드레프타 워프게이트 시설 일대가 소잡했다.
메토와 꽃단장을 마친 엘로디는 물론, 이 지역의 지배자인 ‘벤 크리브드’ 후작을 비롯한 3명의 심복들도 오드노아 수비대 병력 사이에서 눈치껏 명당자리를 잡았다.
그나마 이 시설 일대가 대사관과 동등하게 오드노아의 소유로써 그레이엄 국왕이 인정해준 영역이었길 망정이지, 하마터면 신탁자들을 구경하겠단 인파들이 마구잡이로 쏠리는 가운데 인산인해를 이룰 뻔했다.
실제로도 오드노아 경비대의 삼엄한 인원통제 하에 고위마법 결계 안쪽으로 발을 들이지 못한 후작 일가 구성원들도 허다했으며, 이 때문에 출입구 부근에서 일어나는 실랑이도 적지 않았다.
“입장불가합니다. 물러나십시오.”
“왜 내가 못 들어갑니까?! 저 미천한 종자놈도 방금 들어갔잖아요!”
“저 분은 명단에 있었고, 당신은 없습니다. 그 뿐입니다.”
“말도 안 돼! 이보세요, 후작님이 바로 내 매제란 말입니다! 근데 저 대마법사의 심부름꾼인가 뭔가하는 종놈 보다 못하다고요?”
“불만은 후작께 직접 고하십시오. 보시다시피 당신은 사전통보 받은 명단에 없습니다.”
“...이익!”
“마지막 경고입니다. 지금 당장 경계선 밖으로 나가십시오.”
- 처저적!
“힉!”
후작의 매제라던 사내는 오드노아측 수비대가 공격태세를 취함과 동시에 쪼르르 도망쳤다.
일찌기 이 시설의 무단침입은 대역죄로 간주한다는 왕명이 엄포된 터라, 설령 그가 이 자리에서 수비병력에게 얻어맞아 불구가 된다손치더라도 막연한 하소연조차 불가능한 까닭이었다.
‘아, 안 되겠다! 물러나자! 이쯤했으면 나도 할 도리는 다한 거 아니겠어?’
비록 자식들과 함께 명단에 들지 못한 후작부인의 눈총으로 인해 그 자신이 총대를 맸다지만, 그렇다고 죽음도 불사하겠다란 만용을 부릴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더군다나 지난 트로돈 습격사건으로 후작과 영지민의 신망을 둘 다 잃은 후작부인이기에, 그 부인의 후광을 입고 사는 자들은 처신을 신중히 해야 옳았다. 일단 그들의 어이없는 실책을 감싸겠노라며 미친 척 나설 기사들부터 전무한 까닭이었다.
이는 좀 전의 추태를 비웃고 서 있는 더스틴 경비대장과 그의 부하들의 표정만 봐도 증명이 실시간으로 가능할 것이다.
‘아휴~, 꼬시다, 꼬셔!’
’속이 다 시원하네! 으크크크!’
‘과연 어디까지 추잡해지시려나~.’
이렇듯 출입구쪽 분위기가 판이하게 갈라진 그때, 돌연 붉은 빛이 일정주기으로 껌벅이기 시작했다.
- 번쩍, 번쩍, 번쩍.
그것은 비상운용 목적으로 워프게이트와는 별개로 조성된, 공간이동 마법진과 긴밀히 연결된 알림등에서 내뿜어지는 신호였다.
“오, 드디어!”
점점 짧은 주기로 격하게 빛을 발하던 알림등이 이윽고 초록빛으로 떨어지며 공간전이 마법의 완성을 주위에 알렸다.
- 유우우우웅... 파앗-!
마나파동이 잠잠해지고 뮤티움으로부터 출발한 8인의 모습이 당당하게 드러났다.
마법시전을 주도한 아카반 총장과 베스퍼가 맨앞줄에 자리하고 있었고, 그 다음으론 루카스, 나디아, 에이샤, 야스민. 그리고 마지막으로 폴라와 페이 순이었다.
당장 8성 대마법사인 아카반 총장만 해도 좀처럼 인연맺기 힘든 거물이었던 지라, 벤 크리드 후작과 가신들은 숨가쁘게 움직여 환영인사를 건네려 했다.
“드레프타에 오신 걸 열렬히 환영ㅎ...”
“루카스 형님!”
그러나 메토가 기쁨의 환호성을 빵 터트린 이래로 아무도 앞서나가질 못했다.
‘뭣? 형님? 내가 제대로 들은 거 맞아?’
‘평범한 종자가 아니었단 말인가?’
그들은 뜨거운 악수와 가벼운 포옹을 나누는 메토와 루카스의 친교인사를 잠자코 들어야 했다.
“하하하! 이게 얼마만 입니까!”
“그래, 나도 반갑다. 안 본 사이에 더 강해진 거 같구나.”
”우헤헤헤, 지난 달 말쯤에 3급으로 올라섰습니다. 제5기사단의 단장이랑 거하게 붙고나서 실전 증명까지 마쳤습죠.”
“오, 이겼냐?”
“헤헤, 안타깝게도 졌습니다. 2급을 코앞에 둔 양반이라서 그런지 프라나 보유량부터 격차가 심했거든요. 확실히 여간내기가 아니었습니다.”
”그랬군. 그럼 이따가 또 한 번 봐주마. 열심히 노력해서 다음엔 반드시 이겨라.”
“옙! 충성충성!”
우선 메토 스스로가 지닌 무력부터가 남달랐다. 좀 전의 말이 진실이라면, 신분과 출신성분 등이 하찮을지라도 섣불리 멸시해선 안 될 수준이었다.
아무리 타미아르가 실력자들이 넘치는 강대국이라 하나, 증명절차까지 공개적으로 끝마친 ‘공식 3급’이란 타이틀은 절대적으로 희귀했던 것이다.
헌데 후작과 가신들의 놀라움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앗! 총장님도 그간 강녕하셨습니까? 와~, 어째 하나도 안 늙으셨습니다?”
“허허허, 그렇게 말하는 네 놈도 변함 없이 팔팔하구나! 아, 그보다 어엿한 3급 전투사가 됐다니 진심으로 축하한다. 그리고 만날 때마다 하는 말이다만, 디마우스 녀석 밑에 있기 싫증나면 언제든 연락해라. 네가 온다고 하면 집행부 부장도 좋아라할 게야.”
“어이구, 감개무량하옵나이다!”
“욘석아~, 나 죽고 나면 종신계약서를 멋대로 빼앗아 찢어줄 사람이 없는 거 알지? 생각해보고 그 전에 결정해."
”으헤헤헷! 말씀이라도 정말 감사드립니다! 그래도 전 지금에 만족합니다. 처음 계약대로 주인 나리께서 돌아가실 때까진 충성하렵니다.”
“허허, 고놈 참~. 니 놈 데려오겠다고 제자 놈더러 일찍 죽으라 할 수도 없고, 이거 원! 껄껄껄!”
서방 대륙에서도 손꼽히는 거물들과의 끈끈한 친분을 가진 메토란 인물은 당연히 재평가 대상이었다.
“...알아서 처리해.”
“네, 후작님. 잡음이 안 생기도록 조치하겠습니다.”
그렇게 그를 한낱 종자라며 대놓고 얕잡아봤던 부류의 이름들은, 후작이 주재하는 점심만찬 참석명단에서 소리소문 없이 삭제통보됐다고 한다.
* * * * *
드레프타에서의 체류는 겨우 몇 시간되지도 않았다. 그나마 영주의 작위가 높았기에 그레이엄 국왕이 마지못해 양보해준 것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점심 한 끼조차 불가능했을 터였다.
당장 저녁식사부터 왕성에서 예정된 고로, 점심 이후의 티타임조차 빠듯하게 이어졌다. 벤 크리브드 후작은 이 기회를 어떻게든 살려보고 싶었겠으나, 그가 루카스 일행에게 얼굴 도장 찍은 것 이상의 성과는 얻지 못했다.
- 아, 그렇습니까?
- 괜찮습니다.
- 나는 공용어가 서툽니다. 이해 못 했습니다.
- 미안합니다. 잘 모르는 분야입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든 루카스의 답변은 위 4가지 중 하나였다. 만약 디마우스가 제발 사정 좀 봐달라라며 루카스에게 미리 부탁하지 않았더라면, 후작은 ‘예’ 또는 ‘아니오’란 단답만 줄기차게 들었을 것이다.
당사자인 후작 본인이야 갑갑해서 돌아가실 지경이겠으나, 루카스의 정체를 알고 있는 아카반 총장과 베스퍼에게 비춰진 시각은 조금 다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고위마족이 별 관심도 없는 낯선 인간과 같이 밥도 먹어주고, 비록 단답형일지언정 묻는 말에 꼬박꼬박 성실히 응해주는 일 자체가 너무나 관대하다며 속으로 박수쳐주기도 했다.
다만 이와 같은 루카스의 철벽응대가 타미아르 국왕 앞이라 하여 변하진 않을 거란 부분이 그들에겐 무시 못할 난제였다.
"그 성격에 과연?"
"어쩌죠? 누구한테 물어보던 뒤끝이 길다는 평판만 자자하던데요?"
좋은 표현에서 거침 없기로 소문난 통치자이자, 타미아르의 권력정점인 그레이엄 국왕. 가급적이면 그가 모멸감을 느끼거나 대차게 삐쳐버리는 최악의 사태만큼은 미연에 방지해야만 했다.
‘그런 의미에서 효과적인 수단은 오로지 한 가지뿐이지!’
이런 두 사람의 의견은 다행히 폴라와 페이와도 합치되었던 바, 그들은 왕성으로 이동하기 직전에 나디아를 따로 꾀어내어 양해를 구하는데 성공했다.
“저기... 강요해서 미안한데... 루카스 님을 위해서 힘내줄래요? 자칫 분위기가 난감해질 수도 있어서 그래요.”
“녜! 열씨미 해보께여! 배슈퍼 아쥼마!”
“...아줌ㅁ... 어, 어쨌든 고마워요.”
그렇게 출격한 나디아의 효력은 100점 만점의 140점이었다.
“허허허! 환영합니다!”
“안냐세요, 패햐! 초뎨애 감샤드려여!”
“어이고~, 참으로 귀엽고 활기찬 신탁자를 뵈옵게 되어 저로서도 큰 영광입니다!”
“히힛, 아삐~! 패햐께서 져 보고 귀여떼여!”
“으하하하, 당신의 안목은 매우 높습니다!”
나디아의 아양은 루카스에게 최고급 윤활유로써 작용했고, 더불어 그녀의 예언능력은 그 어떤 어린아이의 재롱과도 비교불가였으므로, 그레이엄 국왕의 정신방벽 또한 삽시간에 허물어졌다.
“하하하! 어떻게 한 번을 안 틀리시는군요!”
“히힛, 져기 수짜가 졔일 커써요! 패햐!”
“이거 정말 굉장하고 놀랍습니다, 나디아 신탁자님! 하하핫!”
특히 그동안 아들을 낳지 못해 속병을 앓고 있던 왕비의 사랑을 나디아가 독차지하게 된 일은,더없이 고무적인 성과라 할 수 있었다.
“어멋! 그게 정말이신가요, 야스민 신탁자님?!”
“네, 동생이 이번달 이 날짜와 다음달 이 날의 숫자가 제일 크다고 전해드리라 합니... 앗, 나디아! 넌 아직 합방이 뭔지 몰라도 돼!”
“오호홋홋홋!”
백발백중의 예언능력을 직접 목격한 왕비의 입장에선 구원의 손길이나 다름 없었다. 때문에 제시한 조건이 구체적일수록 보다 정확한 확률 도출이 가능하다는 맹점을 왕비가 인지한 이후론, 나디아와 야스민을 거의 옆에 끼고 살다시피했다.
이렇듯 타미아르 왕실과 루카스 일행 사이의 분위기는 꼬마 신탁자의 전방위 활약 아래 화기애애할 수 있었고, 덩달아 역대급으로 관대해진 왕비의 마음씀씀이 덕에 흡사 시체 같았던 시종들의 얼굴에도 생기가 조금씩 돋아나기도 했다.
이 와중에 타미아르 왕성 내에서의 근심을 짊어지고 있는 사람은 정말로 몇몇에 불과했다.
그 대표격으론 루카스가 나디아의 치료 외에 무슨 목적으로 요정족 본토로 향하는지를 미리 전해들은 마법사 3인방(아카반, 디마우스, 베스퍼)과, 루카스한테 용맹스러이 청혼했다가 빛의 속도로 퇴짜 맞은 엘로디를 손꼽을 수 있었다.
그리고 위의 두 가지 사례를 제외하면, 헤트만 사절로 와 있었던 샤하브가 유일하다고 하겠다.
“이런 우연이! 다시 뵙게 되어 기쁩니다, 루카스 님.”
“아니, 난 기쁘지 않다. 너흴 보니까 갑자기 별로다.”
“?”
“지난번에 뒤통수 맞고서 기분이 참 더러웠다. 난 그것을 절대 잊지 않을 거다.”
“...예? 저희 쪽에서 무슨 결례라도?”
“궁금하면 마야키니한테 물어봐라. 어쨌든 다신 얼굴 맞대고 싶지 않다.”
“에... 저기... 이야기를 해주시면 즉각 시정토록...”
”그만 꺼져라. 여기가 남의 집 안뜰이라서 참고 있는 거다.”
“......”
그의 의문 자체는 아드퍼드로스의 화신 주소걸이 사절단의 구성원으로 동행하고 있던 덕분에 어렵지 않게 파악됐다.
“주소걸 님, 대체 무슨 일이랍니까?”
“그으... 마야키니 여신님과 여섯 천신께오서... 본의 아니게 미안하게 됐다고... 그래서 적절한 타계책을 열심히 물색 중이니 기다려 달라고... 그렇게 전해달라 하시는구료.”
“...커흠, 칼리드 형님께서 기절하실 소식이군요.”
”어허이~, 나도 적당히 기회봐서 비무를 청하려 했었건만... 쯧, 틀렸소이다. 지금 비무를 신청했다간 핑계김에 내 숨통을 완전히 끊어놓을 것만 같소.”
“큼... 제가 느끼기에도 확실히...”
결과적으로 처치 곤란한 키메라 에이샤를 루카스에게 대충 떠넘기기로 했던 일곱 천신들의 섣부른 조치는, 마법통신구 너머에 있는 칼리드의 대성통곡이란 부수적인 피해를 야기하고야 말았다.
“아이고~, 여신님! 마야키니 여신님아~. 도대체 왜 그러셨습니까... 흐흑... 어찌하여 이런 시련을! 이런 시련을 제게 주시냐고요오... 크허으어엉~!”
나디아를 오드노아 혹은 타미아르에 빼앗길지 모른단 위기감에서 피어난 불면증은 덤이었다.
-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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