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령과 악령의 상관관계 (4)
* * * * *
한편, 불규칙한 폭음과 여러 사람의 고성으로 물든 흐나파스의 어느 성벽.
이곳에서 약 100m 가량 떨어진 장소엔 누군가의 오른팔이 파괴마법과 괴수들의 살점이 난자하는 전투지의 중심부를 가리켰다.
{나와 뜻을 함께 했던 아이들이여!}
도무지 입속 성대를 거쳐나왔다고 생각되지 않는 거친 음성이었다. 더욱이 이 목소리 주체가 지닌 파리한 혈색은, 오래된 산송장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만약 나병환자처럼 군데군데의 피부가 썩어 문드러졌거나 유실된 살점이 아니었더라면, 햇빛에 장시간 노출됐던 비스마우어 일족이라며 오해했을 지도 모를 노릇이었다.
{내게 충성을 맹약한 이여! 이 한 줌의 제물과, 또 같은 무게의 내 생기를 값으로써 그대들을 억누른 속박에서 잠시나마 해방시켜 주노라.}
그의 명령은 그 손바닥 위의 남색수정을 투과하여 매케한 담배연기처럼 변질됐다. 그러다 어느새 강력한 힘이 깃든 안개로 최종 진화했다.
{오너라! 과거 너희의 지도자의 부름에 응할지어다!}
이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와 성벽 사이로 얕게 퍼진 안개 곳곳에서 고름 빼낸 상처 같은 구멍들이 무더기로 생겨났다.
- 고오오오오오...
이후 찐득한 남청색 기운까지 스멀스멀 뿜어낸 음침한 틈새의 힘은, 이미 끔찍하게 난도질 된 사체로 녹아들어가 꿈틀거렸다.
"헛? 뭡니까, 저거?! 아니, 엘로디 아가씨! 저것들은 잘게 토막내서 쳐죽이면 영영 뒈질 거라면서요?!"
들러붙었던 괴수 한 마리를 패대기친 메토가 범상찮은 주위 현상을 보며 투덜거렸다. 그러나 불만의 표출대상인 엘로디라고 하여 대꾸할 말이 없는 건 아니었다.
"임마, 저기 잘 좀 봐봐, 새꺄! 아까처럼 재생하는 게 아니라, 살덩이가 완전히 쪼그라들면서 괴사하고 있는 거거든?! 저건 괴수 사체를 매개체로 활용해서 뭔가 또 괴상한 걸 소환하고 있는 거라고!"
"그 괴상한 게 뭔데요?"
"아으씨, 나도 몰라! 나라고 다 아는 줄 알아?! 뭐가 됐든 니 불알친구는 아니니까 나한테 불평 터트릴 시간에 괴수 한 마리라도 더 쓸어버려!"
"큭큭, 이미 아가씨보다 많이 잡았는뎁쇼?"
"하? 웃기지마! 되살아나지 못하게 완전히 작살낸 걸로만 계산해야지!"
"그러니까요, 제 말이~."
"뻥치시네!"
지상에서 서로 옥신각신하는 두 사람과는 달리, 공중에서 유유히 지원포격 중이던 디마우스의 표정은 이 새로운 기현상을 두고 심각하게 바뀌었다.
"그래... 이제야 알겠군."
"뭘 말인가?"
"우리가 도대체 뭘 상대하고 있는지를 말이야. 그리고 목적 또한 어느 정도 짐작되기도 하고."
"...?!"
이에 레플로는 평소 3배로 마나를 응축시킨 불덩이를 한 움큼 쏘아낸 뒤, 곧장 또 다른 주문을 준비하며 디마우스를 채근했다. 그는 디마우스와 달리 정령술에 관해 기초이론 외엔 모르는 터라 몹시 답답해 보였다.
"어후, 증말! 자넨 이 난리통에도 그리 뜸들이고 싶은 겐가? 빨리 말해봐!"
"아주 오랜 옛날, 인간을 자연파괴의 주범이자 암덩어리쯤으로 여겼던 정령들이 많았었다는 이야기. 혹시 들어 봤나?"
"그야 물론이지! 헤트만 마법사연맹의 정규과정을 이수한 마법사치고 그걸 모르는 사람이 어딨나? 인간들을 학살하던 1대 정령왕을, 행성의 의지로써 새로이 태어난 2대 정령왕이 요정족과 함께 12등분해서 우리 인간세상에 봉인했... 헉?! 설마! 저게?"
그제야 질문의 요지를 깨닫고 동공이 확장된 레플로의 표정 속엔, 드리워진 경악보단 '믿고 싶지 않다.'는 감정이 그 이상으로 더 크게 서려있었다.
"그래. 커티스 그 미친 놈이 겁을 상실했던 건지, 아니면 연구 중 우연한 실수였는지까진 알 수 없지만, 그 자식이 봉인 하나를 건드린 것만은 확실하다고 생각되네."
"그럼 저기 커티스의 몸을 차지한 영의 정체가 1대 정령왕이라고?"
"흠, 보다 정확하게는 현세에서 2천 년 넘게 봉인되어온 정령왕의 조각이겠지."
"어째서 그렇게 확신하는 근거가 뭔가? 막말로 1대 정령왕과 같이 봉인됐던 6명의 소왕일 가능성도 있지 않은가?"
"딱 봐도 뚜렷한 정령의 특색이 없어. 오히려 어떤 면에선 복합적이기도 해. 각각의 원소를 대표하는 소왕들과는 완벽히 구별된다고나 할까?"
"......"
여기까지 말한 디마우스와 잠시 할 말을 잃은 레플로는, 시전완료된 번개와 화염 마법을 메토와 엘로디의 사각으로 뛰어들던 괴수들에게 각각 발출시켰다.
- 콰과광-!
- 쿠아아아아!
"나이스샷! 감사합니다, 주인 나리!"
"고마워요!"
누가 성취가 남다른 대마법사들 아니랄까봐, 그들은 주절주절 떠드는 와중에도 파괴마법을 주구장창 터트리는 시전행위는 매우 안정적이었다.
"거 진짜 황당한 주장이야."
"왜? 어째서? 계약으로 연결된 정령들이 부름을 거부하는 일도 딱 설명되지 않는가?"
"그거야 그렇지만..."
"오호라~, 내 주장을 뒷받침해줄 근거들이 저기에 속속들이 등장해주는군!"
"아이구야, 맙소사!"
정령왕이 빙의한 커티스 글랜의 기이한 마법은, 이윽고 흉흉한 영체들을 소환해냈다. 그것들은 전장 여기저기에 산재되어 있던 괴수들의 사체파편 개수만큼 대량 출현했다.
- 슈아아아아아.......
다만 주목할 부분은 지금 막 이면세계 깊은 곳에서 현세로 이끌려나온 정령들이 띄는 특성에 있었다. 언뜻 보이는 반투명한 형태는 정령사들이 불러내는 일반적인 정령들과 큰 차이가 없는 것 같았으나, 그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음침하고 스산한 기운은 사악한 원혼에 가까웠다.
{끼아아아아...}
{그으으으으...}
"오호라~, 분노와 원한에 변질된 정도가 아니야. 완전히 잠식됐어! 저거라면 내 정령친구들이 확실히 꺼려할만도 해! 아아, 장시간 갇혀 있어서 그런가? 저것들은 이제 정령이 아니라 그냥 힘센 악령으로 분류해도 되겠군!"
"...자네 이왕 떠드는 김에 좀 긍정적인 정보도 하나쯤은 말해줄 수 없겠는가?"
수많은 악령들을 보고서 기운 빠진 레플로가 희망을 논했으나, 디마우스의 열심한 설명은 살짝 덜 암울한 정도에 그쳤다.
"...에... 그... 아! 불러내는 바람의 정령으로 고정돼 있고, 저 중에 상급은 안 보인다는 거? 중급이 최고 한계인 것만 놓고 보면, 우리의 1대 정령왕께선 본인의 숙주를 망가트리지 않으려고 굉장히 자제하는 모양이네!"
"햐~, 진짜 환장하겠네! 당장 상위 마법이라도 시원하게 난사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레플로는 씁쓸한 입맛을 다셨다. 지금 이 자리에서 자신과 디마우스가 상위마법을 펼치면 당장의 힘싸움에서 우위를 점할 순 있을지 몰라도, 반대로 흐나파스의 안전을 장담할 수 없음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대화 도중 디마우스가 갑자기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했다.
"근데 정작 중요한 걸 모르겠단 말이야."
"또 뭘 말인가?"
"커티스의 상태로 볼적엔 그의 육체는 이미 한계에 다다랐어. 그런데 저렇게까지 무리하면서 얻고자 하는 게 대체 뭘까? 혹시 흐나파스 깊은 곳에 정령왕의 다른 조각이라도 묻혀 있는 건가?"
"글쎄, 낸들 알겠나? 이 도시에서 새로운 그릇이라도 찾으려나보지. 딱 봐도 신체조직이 붕괴되기 직전이구만."
"!"
농담처럼 적당히 툭 던져진 레플로의 추론을 두고 디마우스의 귀가 쫑긋했다.
'만약 저 정령왕 조각의 최종목적이 '온전한 부활'에 있다면? 그래서 지금 현세에서의 실체화 과정을 억지로 참아내고 있는 거라면?'
확실히 지금 저렇게 고집스럽게 숙주에 집착하는 행동을 이해되고 남았다.
"...후후후, 그래. 지금 이대로 형태가 고정되면 아무래도 다른 조각과 융합할 적에 애로사항이 꽃피겠지."
"응? 또 뭔 소리야? 불안하게시리 왜 혼자 구시렁거려?"
오랫동안 강제분할됐던 영적 위상을 이전처럼 완벽히 복원하는 일엔 상당량의 섬세함이 요구됐다. 이에 대한 적절한 예시를 들자면, 절단된 신체를 다시 연결하는 접합수술에 비길 수 있을 것이다.
단순히 조직만 꼼꼼히 이어붙이는 정도론 본래 상태로 되돌아가는 게 불가능한 것처럼, 영체 복구 또한 그 못지 않은 난이도와 어려움이 동반된다고 생각하면 쉽다.
디마우스는 이와 관련된 지식과 사례를 아주 상세히 설명하고픈 욕구를 눈물을 머금고 꾹 참으며 레플로를 향해 말했다.
"지금 바로 자네의 가설을 증명해봐야겠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주게나! 부디 잘 부탁허이, 으흐흐!"
"뭐, 뭣?! 야, 어딜 가?!"
이렇다 할 대꾸도 없이 상향 곡선을 그리며 앞으로 나아가는 친구를 의아하게 바라보던 레플로는, 곧이어 디마우스를 중심으로 역동하기 시작한 마나를 느끼며 경악했다.
"저, 저, 저 미친 놈이 설마?! 여기서?! 야, 이 썩을 새끼야!!! #%@#$@#%!@#!!! !@#$&%&$!!!"
디마우스의 영창에 따라 하늘 위로 갈기갈기 번져나가며 치솟은 마나 뭉치들은, 간만에 방언처럼 터진 레플로의 욕설에도 불구하고 맑은 하늘 위로 갈래갈래 번져나갔다.
"에잇, 썅!"
마나들이 이윽고 작은 붉은 점 형태로 별자리처럼 알알이 맺힌 모습으로 짐작컨대, 레플로 본인이 익히 아는 그 상위마법임에 틀림없었다.
"거기! 내 뒤로 물러나! 지금 당장!!!"
현재 성벽 밑에서 괴수들 사이를 용감하게 휘젓고 있는 인물이라고 해봐야 메토와 엘로디가 전부였지만, 본능적으로 위기임을 알아들은 그들은 레플로의 뒤편으로 호다닥 달음질쳤다.
그와 그녀는 단순히 후방으로 물러난 정도가 아니라, 엘로디의 비행마법에 메토가 편승하여 공중으로 멀리 도망쳤다. 아주 신속정확한 철수의 모범사례가 아닐 수 없었다.
{나를 보호해라, 어서! 망할 놈들아!}
반면, 정령왕의 조각은 디마우스의 마법을 방해하기보다, 땅 위의 괴수와 정령들을 모조리 끌어모아 숙주를 보호하는 방법을 택했다.
그것은 디마우스가 워낙 까마득히 하늘 높은 곳으로 옮겨갔기에 선택해야 했던 차선책이었다.
"망할 새끼, 내가 이 도시를 어떻게든 지키겠다며 혓바닥을 얼마나 놀렸는데! 아오, 썩을 놈의 자식, 디마우스! 내 이 일은 결코 잊지 않으마! 으아아아! '인첸시움-클라우스트(Incensium-Claust, 희생의 요새)'!"
6위계, 아니 7위계 이하의 방어마법 중에 가장 견고한, 그러나 그 대신 마나효율이 극악하기로 유명한 결계장벽이 레플로를 통해서 발현됐다.
- 우우우웅-!
그렇게 레플로의 방어막이 장장 1km가 넘게 전개됐을 무렵, 디마우스의 주문 또한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딱 맞춰 완성되었다.
"뤼니아-소플루스(Ruinia-Sopulus, 파멸의 암석)!"
어느덧 은하수처럼 하늘을 꼼꼼히 수놓은 마나덩어리들은, 정령왕의 숙주가 위치한 방향으로 지름 1.2m 내외의 시뻘건 바위체를 일제히 토해냈다.
- 피익, 피유우우우... 쿠와앙! 쾅! 쾅! 꽝! 콰과과광!
소규모 유성우처럼 세상을 강타한 그것들은, 7위계 파괴마법으로 분류될 수밖에 없는 막강한 위용을 자랑하며 지면을 온통 벌집으로 만들어 놨다.
그리고 이로 인해 발생된 고압의 충격파와 후끈한 먼지 돌풍은 필연적인 덤이었다.
"끄으윽... 아이고~, 나 죽네!"
현재 레플로의 괴로움과 걱정거리는 '괴수와 악령들이 이 상위마법 속에 얼마나 살아남았을까?'가 아니었다.
여느 때라면 응당 주요 관심사였겠으나, 광범위하게 펼쳐진 주문의 유지가 그딴 궁금증보단 더 시급한 문제였다.
"으으, 이건 마나가 소진되는 게 아니라, 아주 타들어가는 것 같구만! 아고고, 조금만 작게 펼칠걸! 괜히 무리했어, 젠장!"
그가 말은 이렇게 했으나 실제로 결계장벽의 크기를 줄이진 않았다. 그것은 행여 오차가 발생한 눈 먼 운석 중 단 1개라도 도시성벽을 강타하게 되면, 이후 어떤 뒷감당을 해야할런지 감조차 잡히지 않아셔였다.
때문에 레플로는 비상용으로 챙겨왔던 마정석을 비장의 카드로써 꺼내야 했다.
'분명... 베스퍼가 혈압으로 쓰러지겠지?'
그는 손끝에서 느껴지는 마정석 특유의 딱딱한 감촉을 느끼며 자신도 모르게 킥킥 웃었다.
다량의 마나석을 고도로 응축ㆍ정제하여 만든 이 귀한 최고급 마정석을 사용됐다는 사실을 베스퍼가 인지하는 순간, 뒷목을 붙잡고 혼절할 그녀의 모습이 레플로의 머릿속에 선명한 환상처럼 그려졌던 것이다.
'그래도 지금이 비상상황이 아니면 뭐겠어? 이럴 때 쓰라고 연맹지침 하에 구비시키는 거 맞잖아?'
이렇듯 자기합리화에 빠진 레플로가 얼마나 버텼을까? 엄청나게 요란뻐적지근 했던 대지의 소동이 잠잠해지고, 대차게 나부끼던 먼지바람마저도 이내 잠잠해졌다.
"아하하하하! 자네가 옳았네, 레플로!"
"......"
- 작가의말
아레나 종료일 기준, 연독률 14.3%.
소리 없이 우수수 떨어져 나가는 선작수.
이게 제 필력의 현주소이겠습니다만,
괜찮습니다. 앞으로 차차 나아지겠죠.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