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 이후 (2)
레이첼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가르디엔의 출현을 열렬히 반겼다.
"여긴 어쩐 일이야?"
"음... 너랑 같은 이유?"
"뭐?"
갈피를 잡지 못한 그녀의 표정에 가르디엔은 친절히 설명해줬다.
"내가 일전에 말했었지? 루카스란 남자에 대해서 시간과 정성을 들일 거라고."
"...그랬지."
"그래서 내가 그 동안 사람을 써서 정기적으로 보고를 받고 있었는데 말이지~. 어느 날 불쑥 도시를 떠났다고 하지 뭐야? 그래서 조금 더 신경 써서 알아봤더니, 와~ 이거 묘한 소식까지 들리데?"
"......"
"이건 뭐 확인 안 할래도 안 할 수가 있어야지, 아하하하!"
"칫... 네 짐작이 또 들어맞은 거 같아. 가르."
"글쎄... 실상은 내 짐작보단 훨씬 더 거물일수도 있겠던데?"
"?!"
가르디엔의 손에 들려져 있는 종이뭉치가 레이첼의 눈에 포착됐다.
"너! 너! 너! 그 보고서는 또 어디서 났는데?! 혹시 훔친 건 아니지?! 그랬다간 아무리 너라ㄷ···"
"에이, 훔치긴! 아주~친절한 알랭 단장님께서 특별히 공유해주시던데?"
"뭐, 뭐야?! 난 진짜 간곡히 사정사정하고난 후에나 간신히 받아볼 수 있었다고!"
"으흐흐, 그러게 평소에 좀 신뢰를 쌓지 그랬어~."
"힝... 너무해..."
가르디엔은 그녀가 대판 토라지기 전에 서둘러 화제를 전환했다.
"그나저나 우리 영웅 나리께서 행방이 묘연하단 게 진짜 사실인가 봐."
"정말? 확실해?"
"어. 너 만나러 오기 전에 몇 군데 들려봤어. 수도로 복귀하려는 메토 씨를 부랴부랴 붙잡고 이야기도 나눠보기도 하고, 그날 당직이었던 경비대원들에 얼마씩 쥐어 줘보기도 해봤는데 하나 같이 허탕이더라. 기껏해야 이 영웅나리의 일행이었던 사람이 오늘 점심 무렵에 홀로 헤트만 국으로 떠나면서 투덜거렸다는 사실 정도?"
"진짜?"
"응. 목격자들의 말에 의하면, 그 고고학자는 더 이상 이곳에서 죽치고 체류할 순 없다면서 마지못해 떠났다고 하더라고."
확인사살이나 다름 없는 가르디엔의 이야기에 레이첼의 마음이 한껏 달아올랐다.
"그, 그럼! 그럼 메토 씨는? 뭔가 더 알고 있지 않을까 싶은데? 그 사람과 완전 친했다며?"
"흐흐, 별 소득 없었어. 너도 알다시피 메토 씨는 나 별로 안 좋아하잖아. 나중에 스승님께 여쭈어보는 수밖에 없어."
"으으..."
"일단 그 일행이라던 사람에게 개인적으로 감시를 붙여놓긴 했는데, 당장 큰 기대는 어려울 거 같아. 어쨌든 결과적으로 위치파악은 힘들단 소리지."
"히잉... 풍요로운 별의 축제까지 앞으로 70일도 안 남았는데..."
"후후후..."
"?"
실망감 속에 책상에 머리를 파묻었던 레이첼은, 가르디엔의 의미심장한 웃음소리를 듣곤 다시 고개를 번쩍 치켜세웠다.
"가르! 뭔가 좋은 방법이 있는 거지? 그치?!"
"뭐랄까... 단순히 축제가 목적이라면 시도해볼 만한 방도가 있긴 해."
"진짜, 진짜?! 뭔데! 뭔데에?!"
갑자기 어린 아이처럼 졸라대는 레이첼의 철부지 행동에, 가르디엔은 어깨를 으쓱하며 응답했다.
"우린 그 사람이 어디로 갔는지는 몰라도, 어디로 올런진 잘 알고 있지 않나?"
"앗...!"
그의 말은 한 가지 문제에만 매달리던 그녀의 관점을 상쾌하게 환기시켰다.
"맞아! 그 사람이 아끼는 아이들이 2명씩이나 이번 마법교류과정에 참여한다고 들었어!"
"그 말인즉슨 구태여 바득바득 안 찾으러 다녀도, 때가 되면 알아서 찾아올 거란 의미와도 같지."
"어, 어쩌면 더 일찍 방문할지 몰라! 학기시작 자체는 내년 하반기이지만, 사전교육의 일환으로 입학예정자들을 요정족 본토로 미리 입교시키기로 결정했다는 수장님의 공표도 있었으니까!"
"하하, 그래 맞아. 내가 힌트를 더 줄 필요도 없네."
"그건 심지어 풍요로운 별의 축제에 맞춘 일이라고!"
"자, 어때? 이제 이해했지?"
"가르! 넌 내 구세주야!"
레이첼은 당장이라도 그에게 뽀뽀세례라도 퍼부을 기세를 머금었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준비태세를 감지한 가르디엔은, 이쯤에서 행복 회로를 무한정 가동 중인 그녀를 진정시켜야겠다고 판단했다.
"워~워~, 아직 임무복귀가 확정되진 않았으니까 흥분을 가라앉히도록 해. 까딱하면 축제고 뭐고 일 그르친다?"
"흠흠, 알았어. 네 말이 무조건 옳아!"
"크크크, 아무튼 논리를 잘 다듬어서 네 아버지께 말씀 드려봐."
그녀는 가르디엔의 제안을 들으며 두뇌를 휑하니 굴렸다.
"에... 역대 오드노아 전사들 중에서도 몇 명 안 되는 특급 전투사를 추적하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오니, 본토에 상주하면서 그를 기다린 다음 호의적인 접선 기회를 만들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헤헤, 뭐 대충 이러면 되지 않을까?"
가르디엔은 너무 대충대충인 레이첼의 생각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아무래도 과도한 흥분이 그녀의 이성적 사고에 영향을 크게 끼친 게 틀림없었다.
"글쎄... 여느 때라면 모르겠지만, 지금은 누가 뭐래도 명실공히 비상사태니까... 흠, 아무쪼록 보다 신중히 접근하길 권장한다."
"걱정 마! 이렇게 그럴 듯한 명분이 있는데 뭘~. 요 정도는 껌이지! 난 이만 알랭 단장님한테 마법통신도구 빌리러 가볼게~."
그는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가득 찬 레이첼을 보고 미지근하게 웃었다.
"하하... 그래, 잘 되길 빈다."
그리고 이후에 이어진 결과 또한 그의 예상과 꼭 맞아 떨어졌다.
"그, 그런 게 아니에요, 아빠!"
<이 고얀! 도대체 생각이 있는 게야, 없는 게야?!!!>
"아니요, 제 말뜻 그게 아니고요..."
<시끄럽다! 우리 모든 일족의 운명이 궁지에 몰린 위기에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하략)...>
딱 30분. 이는 희희낙락하며 더 없이 호언장담했던 그녀의 비전이, 역풍 같은 호통과 함께 처참하게 작살날 때까지 걸린 시간이었다.
<아무튼 샌더스 수장의 의지에 따라 원로회는 비상사태를 공표했고, 더불어 올해의 남은 모든 행사를 무기한 연기시키기로 결정했다! 당연히 네 일정 역시 변경됐으니까, 차후 알랭 단장에게서 다시 지시 받도록 해! 그리고 그 임무를 완수하기 전에 집으로 돌아올 생각은 꿈도 꾸지 말거라!>
"아잉~, 아빠~! 아빠아~!"
<시끄럽다고 분명히 말했다! 이렇게 철딱서니가 없어서야 나 원! 에잉! 전부 내 탓이다, 내 탓! 내가 너무 오냐오냐 키워서... 아이고야...>
"......"
그녀는 대대로 구전되는 '세상 일 참 내 마음 같지 않다'는 옛말을 가슴 깊이 아로새겨야 했다.
* * * * *
호되게 혼난 레이첼이 어느 침낭 속에서 유리구슬 같은 눈물을 똑똑 흘리고 있는 야심한 밤. 마치 축 쳐진 곰팡이처럼 침체된 레이첼과는 달리, 활기가 잔뜩 넘치는 3명의 여성들도 있었다.
"리사~, 마나 집적도 효율 확인 좀~!"
"수치 정상!"
"좋았어! 베라~, 회로 상태는 어때?"
"발진 회로 양호! 변복조 회로 양호! 증폭 회로... 아... 이건 못 쓰겠네. 교체 필요!"
"혹시 예비 부품 있어?"
"있긴 있는데, 그것도 결손이 좀 있다야."
"아웅, 이런 이런... 좋지 않네, 좋지 않아~."
"그래도 망가진 부품들을 뜯어서 서로 합치면 어떻게든 될 거 같은데? 내일 하루만 줘봐. 해보고 나서 알려줄게."
"베라! 넌 완벽하게 멋져!"
그녀들은 루카스의 힘의 여파에 휩쓸려 매몰됐다가 다시 발굴되다시피 한 워프게이트 상태를 면밀히 점검했다.
"이것도 이상 무, 요것도, 그리고 요것도... 좋아! 증폭 회로 문제만 해결되면 종합상태 대체로 양호!"
"우와! 이거 운만 따라주면 의외로 쉽게 가동시킬 수도 있겠는걸?"
"이게 다~ 코어를 목숨 같이 지켜낸 영웅! 바로 니들 덕분이야~."
"엣헴~! 더! 더! 칭찬해줘! 베라 양!"
"풉, 미라이 얘가 뭐래니?"
그녀들의 겉모습은 하하호호 웃고 있었지만, 속마음은 시설 주변을 살벌하게 순찰 중인 특수부대 대원들의 동태를 주르륵 훑고 있었다.
"아우웅~, 너~무~ 피곤타아~! 이만 자러 가자!"
"으음... 글쎄... 난 좀 출출한데...?"
리사와 베라는 천연덕스럽게 운을 띄우기 시작한 미라이에게 동조하며 호흡을 맞췄다.
"아서라, 베라! 이 시간에 먹으면 디룩디룩 살찐다?"
"어? 난 베라가 먹으면 같이 먹을 건데?"
"리사! 이 배신자!"
"그럼 너도 같이 먹던가?”
"......난 알량한 유혹 따위에 굴하지 않겠어!"
"정말? 난 아까 경비대장이 감사하다며 베라에게 선물한 쿠키 좀 얻어먹을 생각인데?"
"뭐, 뭣?!!! 쿠, 쿠키?! 쿠우키이?!!!"
가뜩이나 빵의 색깔로 신분계급을 알 수 있는 인간들의 문화였다.
아무리 국가간 무역이 활발해져 백성들의 주머니와 식량사정이 든든해졌다 한들,
그리고 국왕의 명령을 받들어 부조리했던 '방앗간과 화덕의 영주의 소유화'가 폐지되었다 한들,
아랫것들과는 항상 구분되길 원하는 기득권의 유세는 여전히 변화를 모르고 완고했으며, 이것은 부당한 정책으로 이어져 영지민들을 괴롭히기까지 했다.
어느 영지 건 간에 잡곡이 섞이지 않은 밀가루 빵이나 사탕과자 같은 간식류를 포함한 몇몇 품목에 붙어 있는 엄청난 세율이 바로 좋은 예시일 것이다.
"진짜? 진짜?!"
더군다나 영주성 안팎으로 분위기가 뒤숭숭한 현재였다. 바보 천치가 아닌 후에야 이런 때에 쿠키란 존재가 얼마나 대단한지 모를 사람은 없었다.
"응, 경비대장의 아내 분이 영주성 주방에서 일한다더라."
"오홍~?"
"생명의 은인이나 다름 없는 베라에게 어떻게든 성의표시를 해야 한다면서 영주 자제들의 간식을 재료를 아주 넉넉히 해서 만들곤 거기서 얼마쯤 숨겨가지고 왔대."
"어후, 완전 목숨 걸고 했겠네. 들켰으면 본보기로 처벌받을 걸 뻔히 알고 있었을 텐데도 말이야."
"그러니까 내 말이. 얼마나 고마웠으면 그랬겠니?"
"그래도... 차암 맛나겠다, 그치?"
"여기선 엄청 귀한 설탕까지 팍팍 뿌렸다더라. 솔직히 우리 본토 길거리에서 파는 싸구려 먹거리에도 비할 순 없겠지만, 그래도 내심 기대 중이야. 파견 나온 이후로 달콤한 건 구경조차 제대로 못 해봤잖아?"
"...하긴 인간들이 만든 간식을 돈 주고 사먹긴 아까워서 자제하긴 했지."
"······"
사뭇 조용해진 미라이는 정말 각별하기 짝이 없는 기회라는 걸 깨달은 표정을 지었다. 그리곤 쭈뼛쭈뼛 움직여 베라 곁에 바짝 붙어왔다.
"사, 사랑합니다. 베라 님."
"푸훕!"
"하, 한 입만! 제바알~!"
"그래, 가자. 가!'
"오우~예~~!"
"야야, 이왕이면 한적한 곳에서 먹고 숙소로 가자. 우연이라도 엄한 인간들에게 들켜서 경비대장 아내분이 곤란 겪게 되면 안 되잖니."
"예이~ 예이~, 베라 님 뜻대로 하쇼셔!"
"나! 나! 내가 적당한 장소 알아!"
이렇게 한참을 재잘거리던 그녀들은 작업장에서 신속하게 쪼르르 빠져나갔다. 다행히 그녀들이 의도한 바대로 인근 경계자들 중에 그녀들을 부러워하는 이는 있었을지언정, 특별한 관심을 두는 자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후 크지 않은 외딴 인공 호수에 다다른 그녀들. 주위를 재차 쓰윽 훑어본 베라가 일정간격을 두고 박수를 쳤다.
- 짝, 짝짝, 짝, 짝.
힘이 가득 실리지 않아 소리가 미약했으나, 지표면 쪽으로 공기가 굴절되는 밤의 영향을 받으며 음파가 낮고 멀리 퍼진 덕에, 소기의 목적은 충분히 달성할 수 있었다.
"힘세고 좋은 밤! 안녕합니까, 베라? 그리고 다른 친구분들도!"
- 작가의말
다음화는 5분 후로 예약해놨습니다.
2연참의 경우엔 오히려 그 편이 괜찮아 보여서... ^^;
Comment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