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상한 혼잣말 (2)
“부연 설명이 매우 절실합니다.”
”이번 사태는 비스마우어 일족이 자신들의 저주를 타종족에게 전이시키려는 과정에서 생겨난 재앙에 가깝습니다.”
“음? 정령왕의 저주를 옮길 수 있었다고요?”
”네. 그들이 해주법을 필사적으로 연구하던 와중에 우연히 발견한 산물이 바로 '저주의 전이'입니다."
"허허..."
폴라는 이해를 돕기 위해 일족의 과거사를 살짝 덧붙여줬다.
"발견 초창기 당시에 그들은, 적극적으로 이 저주 전이를 활용했었습니다. 세력을 확장하여 일족의 부흥을 도모할 힘을 키우고, 아울러 복수의 기반을 다지고자 했었죠. 특히 지역 권력자들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하여, 그들을 탐욕스런 추종자로 만들어 버리곤 했습니다."
"영생을 누리고픈 인간들이야 워낙 차고 넘치니... 수명을 10배로 늘려준다는 장생의 유혹에 쉽게 빠져들었겠군요."
"네. 만약 700년 전에 그들 내부에서 예기치 않은 사건이 터지지 않았더라면, 저희 조상들이 큰 곤욕을 치뤘을 거라는 주장이 일반적입니다. 그 당시에 수면 위로 드러난 카이므의 전력만 해도, 근래 마왕을 소환하려 했을 때보다 5배나 더 강력했다고 하니까요.”
폴라는 비스마우어 일족이 그때 당시 터진 사건 이래로, 저주 전이에 대한 방침을 매우 소극적으로 변경했다는 자잘한 이야기까지 해줬다.
"흐음, 과거의 비극이 가넴 자작령에서 재현됐다라..."
아카반 총장은 부쩍 좁아진 본인의 미간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린 뒤 말을 이었다.
“오케이, 원인은 대충 파악됐군요. 그러면 혹시 저희가 이 상황을 대처함에 있어서 도움이 될만한 정보도 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물론 비공식적으로 말입니다.”
“네, 가능합니다.”
“먼저 치료법이 없다고 단언하신 연유부터 경청하고 싶군요.”
“음... 그렇다면 그 전에 비틀린 저주에 대해 간략히 언급해야 할 것 같습니다. 배경지식이 어느 정도는 필요하거든요.”
"오히려 환영입니다. 저희 쪽에서 먼저 부탁드리고 싶군요."
폴라는 청중들이 궁금하고 있을 점들을 하나하나 짚어줬다.
"비스마우어 일족은 직접적인 수혈과 마법을 적절히 혼합시켜 저주를 전이시키는데, 그 과정은 짧게는 7일에서 길게는 한 달에 걸쳐 진행되곤 합니다.”
”크흠... 정령왕의 저주가 발현할 때까지 대상을 일족의 일원으로... 아하! 세습되는 저주이니만큼 어머니 뱃속의 아기처럼 위장시켰겠군요! 그리고 그 여파에 의해 기존의 체질이 해당 일족과 유사하게 변화되는 거겠고요!”
“정확하십니다. 저주를 이용해 유전자 변형을 임의로 일으키는 겁니다. 흡사 키메라처럼요.”
폴라는 아카반 총장의 빠른 통찰력에 감탄하며 말을 이어갔다.
"그 성공 확률은 높지만 당연하게도 100%는 아닙니다. 특히 전이 대상자가 천신들의 가호를 받고 태어난 필멸자라면, 그들의 저주가 극렬하게 뒤틀리는 부작용까지 발생하게 되죠."
일반적인 상황이라면 천신들이 간택자를 위해 영향력을 발휘해줬을 것이다.
그러나 이 저주의 원인이 행성 수호자인 정령왕의 정당한 분노였던데다가, 개인의 영달을 위해 피해자가 자발적으로 받아들인 경우였고, 심지어 마족 엔마노의 장난질까지 섞인 터라, 천신들의 입장에선 상당히 고까울 수밖에 없었다.
"허! 그렇기에 신관을 통한 해주도 기대할 수 없단 말씀이셨군요!."
“네, 맞습니다. 실제로 700년 전 당시엔 신관들의 기도에 응답해준 천신이 전무했다는 기록이 존재합니다. 과거 어느 패망국가의 야사에선 ‘필멸자의 탐욕에서 비롯된 고통은 필멸자 스스로가 감당하라.’는 신탁마저 내려왔었다고도 합니다.”
“...그랬군요. 후우...”
이렇게 신의 가호와 충돌하며 크게 비틀어진 저주의 여파는 대단히 심각했다. 같은 종족에 대한 전염성 자체도 엄청났거니와, 타액이 혈관에 침투하는 순간 저주가 옮겨지는 식으로 감염경로마저 어처구니 없게 간단했다.
한 마디로 일단 한 번 물리면 끝. 그 상태 그대로 모든 체액이 쪽쪽 빨려 사망하거나, 설령 가까스로 살아남았다 하더라도 종국엔 똑같은 괴물로 변하게될 따름이었다.
"저희 내부자료에 의하면 3차, 혹은 4차 감염까진 자의식이 희미하게라도 남지만, 그 이후의 개체는 그렇지 않다고 합니다. 이는 마치 기본적인 욕구만 남아 피에 굶주린 맹수와 다름 없는데, 기형으로 태어난 비스마우어 일족의 신생아 사례와 아주 흡사하다고 보시면 됩니다."
"......저희가 자체적으로 수집한 흑마법사 조직정보 중엔 없는 내용이로군요. 애초에 그런 사례가 있는 줄도 몰랐습니다."
"에... 또... 감염후 36시간 내에 변이가 완료된다는 점은 이미 알고 계시고... 아! 숙주를 비롯한 일부 특이체, 그러니까 자의식이 강한 개체는 하위 개체의 정신을 지배하여 수족처럼 부릴 수 있습니다. 작전실행에 있어 매우 주의하셔야 할 부분입니다."
"이따금씩 수십에서 수백의 무리가 발견됐는데, 바로 그 때문이었군요. 허허, 정신 지배라..."
"여기까지가 제가 아는 전부입니다."
“아이고, 이거 참... 귀한 정보를 들으면 들을수록 곡소리가 절로 나오는군요.”
아카반 총장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말을 이었다.
"덕분에 이해 못했던 특이점들까지 납득했습니다. 불필요한 시간낭비를 줄였군요. 거듭 감사드립니다, 폴라 양. 기대이상이었습니다."
"과찬이십니다, 총장님.”
“하하하, 과찬이라니요. 너무 상세히 알려주셔서 솔직히 놀라는 중입니다.”
”부끄럽습니다. 제가 말씀드린 이야기들은 모두 중요도 높게 다뤄지는 훈련 시나리오 중 한 가지로서, 특수전 교육을 받은 대원이라면 이 정도는 다 숙지하고 있습니다."
"...역시 요정족은 지식의 깊이 뿐만 아니라 체계 또한 저희보다 훨씬 앞서 있군요. 향후 저희 연맹은 보다 적극적으로 요정족께 배움을 청해야할 듯 싶습니다. 허허허!"
어떻게든 웃음지어 보이는 총장과 달리, 베스퍼와 지르츠는 여전히 입술을 꾹 닫고 있었다. 아무리 생각을 반복해도 치료는 언감생심 꿈도 꾸기 힘든 상황이란 결론에 도달하는 까닭이었다.
때문에 아카반 총장의 입에서 이어진 한탄도 전혀 쌩뚱맞지 않았다.
"그나저나 생존자 구출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니... 후우... 시간이 생명인데... 하다못해 연맹의 실력자들을 총동원할 수 있으면 좋으련만..."
"어떤 문제가 있습니까?"
루카스가 던진 이 물음엔, 난색을 표한 총장 대신 베스퍼가 나서서 답변해줬다.
"내전으로 인해 발목이 붙잡힌 실정이랍니다."
"미안합니다, 베스퍼 양. 나는 잘 이해되지 않습니다."
"총장님께서 정치적 중립을 위해 어느 편도 들지 않으셨었는데... 그 결과 왕실과 제후 양측에서 강력히 경고해왔습니다. 저희 의사를 존중하는 대신, 불온한 움직임이 포착되면 즉시 적으로 간주하겠다라고요."
"지금은 비상사태가 아닙니까?"
"이곳 상황을 제대로 모르는 왕실과 제후들은, 저희의 주장에 조금도 동의하지 않을 겁니다. 그렇기에 저희 총장님께서 집행부와 과거 제자들만을 데리고 이렇게 고전하고 계신 거고요. 괜한 빌미를 제공할까 싶어 각 지역의 지부장들은 동원하지도, 심지어 돈이 있어도 용병단을 고용 못하는 형편입니다."
"흠... 대충 이해했습니다."
게다가 이들의 목표는 단순파괴가 아니었다. 그러니 겨우 삼사백 명의 마법사들로 거주인구 8만의 도시를 어찌해보려던 고역은 말로 다 표현하기조차 힘들 터였다.
'가만... 이 총장이란 인물은 디마우스의 스승이자, 서방대륙의 인간종족 중 둘 밖에 없는 8성 마법사. 요정족으로 치면 원로회 장로급... 흠, 이거 괜찮은데?’
루카스의 입장에선 지지부진한 마계차원문 개방 연구의 진척률을 극적으로 끌어올릴 절호의 기회였다.
’어차피 가넴 자작의 기반이 저 꼴로 망했으면, 훗날 요정족이나 칼리드의 비호를 받게 될 나디아에게 위협이 되기 힘들 거다. ...설사 잘못돼도 손해볼 게 없어. 이건 오지랖을 부려서라도 거래할만 하다.'
갑자기 의욕이 충만해진 루카스는, 다시 수 초간의 저울질을 마무리한 뒤 아카반 총장에게 한 가지 제안을 건넸다.
"아카반 총장님, 내가 당신의 고민을 많이 덜어줄 수 있겠습니다."
"?"
"골치 아픈 숙주와 무리를 생성하는 특이체 제거. 그리고 마법사 대동원령의 명분."
"그게 무슨..."
아카반 총장은 자신이 이해한 대로 되짚어 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루카스 님께선 제가 연맹인원을 총동원해도, 저희 왕실과 제후들에게 보복 당하지 않게끔 해주실 수 있단 말씀이십니까?"
"그렇습니다. 나는 방금 가능하다고 판단했습니다."
"...그게 말씀처럼 잘 된다면야... 제 입장에선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만..."
루카스는 여전히 의구심을 떨치지 못하는 총장에게 오히려 역으로 질문했다.
"만약 그 부분을 해결해주면, 나는 무엇을 얻습니까?"
"......"
그의 표정에서 물욕을 읽지 못한 아카반 총장은 오히려 루카스의 목적을 알지 못해 껄끄러웠다.
"루카스 님의 어감상 금전을 요구하시려는 것 같진 않군요. 따로 원하시는 게 있는지요?"
"나는 들었습니다, 당신은 디마우스의 스승이라고."
"...그렇습니다. 제가 루카스 님께서 정령왕을 단독으로 물리치셨다는 내막도 그 녀석을 닦달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었습니다. 그 녀석과 사제관계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압박이었지요."
"흠, 그렇다면 나는 직접적으로 요구하겠습니다. 나는 당신의 지식과 지혜를 원합니다. 현재 진행 중인 디마우스의 연구에 당신이 적극 협력했으면 좋겠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루카스는 설명을 추가로 요하는 총장의 요청을 완곡히 거절했다. 디마우스가 마계 차원문 개방을 최종목표로 본격적인 연구에 돌입했다는 이야기를 절대 밝힐 수 없어 서였다.
"그건 말할 수 없습니다. 디마우스 외엔 아무도 모릅니다."
"크흠흠, 그렇다면 최종 답변은 내일 아침에 드려도..."
"당신이 지금 시간 벌어도 의미 없습니다. 디마우스는 이미 나에게 마나를 비롯한 모든 것을 걸고 서약을 했습니다. 설령 그를 고문하거나 기억을 읽으려 시도한들 성과는 안 나옵니다."
"그, 그런!"
디마우스가 마법사의 생명을 걸고 비밀유지계약을 했단 이야기는, 아카반 총장을 비롯한 모든 이에게 커다란 물음표를 안겨줬다.
'오! 대~박!'
특히 뜻하지 않게 상부에 보고할 왕건이를 획득한 폴라의 광대가 자신도 모르게 승천하는 사이, 루카스의 역제안은 강력하게 이어졌다.
"어쨌든 이유불문하고 가능합니까? 전폭적인 가담이 힘들다면 자질구레한 연산보조와 자문을 부탁합니다. 아, 당연히 목적에 대한 비밀유지 서약은 필수입니다."
"너, 너무 갑작스러운 말씀인지라... 아무래도 생각을 조금 더......"
뜨뜻미지근한 협상은 때론 강하게 밀어 붙어야 한다. 그리고 루카스가 생각하기에도 바로 지금이 강경하게 휘몰아쳐야 할 때였다.
"아카반 총장. 당신이 몇 시간 더 생각해서 변하는 것. 그런 게 존재합니까? 현실은 급박합니다. 그리고 오늘의 시간은 당신의 친구가 아닙니다. 거절하면 나는 떠날 뿐입니다."
"......"
"당신은 하루 중 서너 시간만 연구를 보조하는 것뿐입니다. 겨우 그것으로 당신 앞의 장애물이 치워지는 겁니다.”
"끄으으으음...."
”또 다른 무엇보다 이곳의 당신 부하들이 덜 죽게 됩니다. 이 단순함이 당신에겐 정말로 어렵습니까?"
“허허허... 루카스 님께선 의외로 달변가셨군요. 머잖아 공용어에 능숙해지시면 아주 무서울 거 같습니다.”
아카반 총장은 일부러 여러 말을 갖다붙이며 논점을 흐리려했지만 이미 절반 이상 마음이 넘어간 상태였다. 그가 뒷맛이 구리고 마뜩잖다며 거절하기엔 악마, 아니 고위마족의 속삭임이 너무나 달달했던 것이다.
"...좋습니다, 까짓 꺼 하지요! 하겠습니다! 허나, 저의 협력은 이곳의 문제가 모두 마무리된 이후가 될 것입니다."
“훗, 멋진 결단입니다.”
뜨거운 악수로써 총장과의 가계약을 체결한 루카스는 폴라를 향해 말했다.
"나는 네 윗선과 대화하고 싶다. 내 부탁 들어주면 지난번 페이와 관련한 실수는 깨끗하게 잊겠다고 전해라."
"즉시 연락 취하겠습니다."
"그리고 그 다음엔 칼리드랑 통신할 수 있게끔 도와줬으면 좋겠다."
"네, 외무부서에 전달하여 헤트만 왕실과의 통신시간을 즉시 조율시키겠습니다."
"그래, 고맙다."
"천만에요, 현재 제 임무는 루카스 님의 보좌입니다."
아카반 총장과 지르츠는 루카스가 차기 국왕 예정자의 이름을 친구처럼 부르는 광경이 믿기지 않았고, 반면 베스퍼는 폴라가 마치 루카스의 비서처럼 빠릿하게 행동하는 모습이 몹시 부럽, 아니 낯설었다.
'치... 저런 일은 나도 잘 할 수 있는ㄷ... 큼큼...'
-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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