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외] 의외로 치명적인 (2)
“...어머, 어머.”
“어뜩해~, 어쩜 좋아!”
“그런 사연이...”
더군다나 베스퍼가 들려주는 사연의 원출처가 루카스 본인이었던 고로, 일찍이 로비샤의 존재를 알고 있었던 폴라조차 미처 몰랐던 그의 심경고백을 간접적으로 듣는 가운데 흠뻑 빠져들었다.
"아아... 그래서 루카스 님이 이를 악물면서까지 로비샤 님을 기피하시는 거였군요. 어쩐지... 많이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지만... 그런 속사정이 있었을 줄은 전혀 예상도 못했었네요."
그렇게 점점 열기를 머금고 벌겋게 달아오른 흐름은, 베스퍼가 마나의 서약을 언급한 시점부터 방안 분위기를 처지 비슷한 부류의 공동체 소모임으로 바꿔놓았다.
“...(중략)... 그래서 서약과 보상을 정할 적에 제 사심을 잔뜩 첨가했답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제가 반한 남자의 애정 한 조각이나마 얻길 바랬어요. 마치 사랑 받는 강아지가 주인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음식을 받아먹듯이요.”
“””......”””
”호호호,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추잡하기만 하죠? 지나치게 돌발적이었지만 그 당시의 결정을 전 후회하진 않는답니다. 흠흠, 뭐 어쨌든! 제 입장이 여러분과 크게 다르지 않다던 말, 이젠 이해되셨으려나요?”
아무도 긍정의 고갯짓 외엔 섣불리 입술을 떼지 못하던 그때, 레이첼이 코끝이 찡해진 청중의 심정을 대표하듯 나섰다.
“...저, 저 감동했어요! 정말로요!”
“아니에요. 앞으론 제 인생엔 이런 기회가 다신 없을 거 같아서 꽉 붙잡았을 뿐이랍니다. 요정족의 경우는 어떨진 모르겠지만, 인간 기준으로 여자의 나이가 마흔쯤 되면 마음에 드는 이성을 만나기가 하늘에 별따기거든요.”
”그러니까 더욱 용감무쌍한 쟁취라 할 수 있는 거죠!”
오드노아 종족의 사고체계가 별난 건지, 아니면 여기 모인 사람들이 유독 독특한 건지는 인간인 베스퍼로선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아... 네... 뭐... 그렇게 생각해준다면 저야 고맙고요.”
”그런 의미에서 베스퍼 씨를 저희가 언니로 모셔도 될까요?”
레이첼은 기회를 낚아채듯 본심을 드러냈고, 반면 베스퍼는 그게 무슨 말이냐는 투로 눈살을 찌푸렸다.
“...이중에선 인간인 제가 가장 나이 어리지 않나요?”
“그래도요! 명실공히 두 번째이시잖아요! 엄연히 서열이란 게 있는데!”
“......”
행성이주 역사를 반복하는 가운데 자연스럽게 오드노아 사회 속에서 형성된 일부다처제 문화는, 그들의 마법체계만큼이나 똑 부러지게 엄격한 면이 있었다.
“그냥 호기심에 여쭤보는 건데... 방금 말씀하신 그 서열이라는 건 친밀한 육체관계를 맺은 순서를 뜻하는 건가요?”
“네, 그게 사회통념상 적용되는 관례 아닌가요? 이 부분은 인간사회도 유사한 걸로 배웠는데 실상은 조금 다른가 보죠?”
하기야 정략결혼을 제외하면 왕이나 귀족들이 자기침실에 들이는 여자들의 순서가 곧 첩실의 서열이긴 했다.
“가만 생각해보니 그런 거 같기도 하네요.”
“그럼 앞으론 언니라고 부를게요! 저희한테 말도 편히 놓으세요, 베스퍼 언니!”
“......”
그녀가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를 갈피 못 잡는 사이, 페이가 흡사 적기를 기다렸던 야수처럼 불쑥 난입했다.
“그래서 이 가운데 셋째는 누구죠?”
이는 화제중심에서 벗어난 다소 엉뚱한 질문이었다. 그러나 경쟁자 4인의 경각심을 일깨우기엔 더 없이 적합했다.
불치병으로 요절할 예정인 로비샤와, 앞으로 50년을 더 살면 장수했다고 여겨질 베스퍼. 막말로 수명이 인간의 10배인 요정족의 입장에선 조금만 인내하면, 실질적인 루카스의 첫째 부인이 되는 까닭이었다.
“설마 나이 순으로 하려는 건 아니죠?”
능청스럽게 과자주머니를 새로 개봉중인 페이의 음흉한 미소는 ‘내 진짜 목적은 이거였다!’란 시커먼 속내를 숨기지 않고 있었다.
“이왕 이렇게 말 나온 김에 감히 제안 하나 할게요. 제 생각엔 이 자리에서 교통정리 한 번 시원하게 하는 건 어떨까 싶습니다.”
“””......”””
“그냥 생각 없이 꺼낸 제안이 아니란 것 정도는 다들 눈치채셨죠? 최근 엘로디 양의 선례만 떠올려봐도 이게 딱 정답처럼 느껴지지 않나요?”
“””......”””
”순서 없이 너도나도 마구 들이댔다가 싸그리 퇴짜 맞고 끝난다~. 이 가정에 제 봉급 반년치 걸고 내기할 의향도 있습니다.”
불난 집에 부채질해서 아수라장을 강제 조성하려는 그녀의 몹쓸 취지가 훤히 엿보였으나, 한 집안의 서열문제는 누구도 섣불리 양보 못할 중대사안인지라 제3자가 나서기도 애매했다.
심지어 두 명의 절친이 연관된 베라조차 슬그머니 오지랖 부리려던 메토를 만류할 정도로 민감했다.
“그으... 뭐시냐... 평화적으로다가 제비뽑기를...”
“자기는 가만히 있어요. 수백 년간 두고두고 원망 받고 싶으세요?”
“아앗... 으, 으응...”
페이가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침묵 속에 4쌍의 눈빛들이 싸늘히 교차했다. 물끄러미 서로가 서로를 응시할 뿐인데도, 한 치의 물러섬 없는 치열한 난투를 연상케 했다.
시간이 그렇게 1분이나 흘렀을까? 이 더부룩한 평행선을 깨트린 자는 이번에도 역시 페이였다.
“에이~, 뭐야~. 애들처럼 하루 종일 눈싸움만 할 생각?”
“””......”””
“일단 한 가지 명확히 짚고 넘어가죠. 에... 이 자리에서 순서를 정하자는 제 의견엔 다들 동의하십니까? 여기엔 자기 차례가 올 때까지 남을 방해하지 않는다는 조건도 포함됩니다.”
후보자들의 의미심장한 고갯짓을 두루두루 확인한 페이가 말을 계속했다.
”좋습니다! 자~, 그럼 이런 식의 무의미하고 시시한 기싸움은 관두고 밖으로 나가시죠! 왠지 이럴 거 같아서 제가 야외수련장을 미리 한 군데 섭외해뒀거든요!”
“””......”””
그녀가 제시한 해법은 정식 결투. 성별만 정반대일 뿐, 남자들이 한 여자를 두고서 공개적으로 치고 박는 승부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는 행성난민 초기 때의 성비 불균등 세대에선 하루가 멀다 하고 빈번하게 이뤄지나, 남녀인구 균형이 비교적 완만해진 오늘날과 같은 세대에선 그다지 흔치 않은 갈등해결법이었다.
‘앗! 안 돼! 이 승부는 나한테 너무 불리해!’
‘레이첼 양은 둘째치고, 최정예 요원을 내가 어떻게 이기냐고!’
비교열위의 리사와 미라이는, 폴라에게만 살짝꿍 날려진 페이의 눈짓을 읽고서 속으로 부들부들 떨었다. 그러나 앞서 동의한 이상 페이가 준비한 함정을 거부할 명분이 마땅찮았다. 지레 질려서 기권하든 용기 내어 싸우든, 그 중 어느 한 가지를 선택해야만 했다.
“으으... 조, 좋아요! 결투로 순서 정해요!”
”까짓 꺼 하죠! 저기... 그런데...”
비전투 요원이자 한낱 기술연구원에 불과한 그녀들이었지만 악으로 깡으로 맞설 각오를 비장하게 마쳤다. 둘이서 편 먹고 동시에 선공을 취하면 운 좋게 한 명은 이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가진 것이다.
다만 그 결전장소가 보안에 허술한 야외시설이었던 만큼 큰 장애가 하나 존재했다.
“근데 실내에서 하면 안 될까요? 저희 부모님께선 전혀 모르고 계시거든요.”
“저도 부탁 드립니다! 사정 좀 봐주세요!”
리사와 미라이가 간청했지만 들 뜬 표정의 페이는 그것을 귓등으로 흘려냈다.
“그건 어렵습니다. 두 분도 폴라와 레이첼 양이 진심으로 싸우면 어떻게 되는지 충분히 예상하시잖아요. 야외가 아니면 그 여파를 감당 못할 겁니다.”
“그, 그러면 시간을 조금 허락해주세요! 부모님께서 사람들의 구설수를 통해 전해 듣게 하실 순 없어요! 차라리 제가 먼저 말씀드리고 싶어요.”
“저도요! 가서 이실직고하고선 설득하고 올게요! 일주일, 아니 3일만 허락주세요!”
그녀들은 부모를 이해시킬 시간이 필요했다. 물론 ‘꼭꼭 숨긴다’는 선택지도 존재하겠지만, 마계차원문 연구에 적극으로 협조하는 최근 수뇌부의 행태까지 고려하면, 비교적 높은 직책에 있는 그녀의 부모들도 조만간 루카스의 정체를 알게 될 가능성이 컸던 것이다.
오드노아 사회가 인간에 비해 혈통과 위계에 덜 예민하다고는 하나, 마족의 인연은 전혀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그것은 마왕을 소환하려다 겨레에서 추방된 비스마우어 일족에 대한 인식이 얼마나 밑바닥인지만 살펴봐도 충분히 가늠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런데 옷깃이 스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연인관계를 맺으려 한다? 이건 ‘내가 좋아한다는데 종족이 무슨 상관이야?’란 잣대를 그대로 들이댔다간 부모의 손에 붙들려 뼈도 못 추리는 상황으로 번질 일이었다.
때문에 리사와 미라이가 ‘선조치 후보고’를 왜 꺼려하는지를 납득할 수 있었다. 단편적인 예로 ‘나 마왕한테 시집갈래!’란 사전양해와 ‘그동안 속여서 미안!’라는 식의 때늦은 사죄 중 어느 편이 부모의 입장에서 용서하기가 수월하겠는가?
레이첼 또한 그녀들의 심정과 다르지 않은 입장이었으므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도... 기간을 한 달만... 유예해주시면 어떻게든 아빠를...”
“땡-! 후보 셋 모두 기권패~! 탈락!”
“””......”””
그녀의 말문을 막아버린 페이의 음성이 경쾌했다. 놀랍게도 일찍이 부모를 여윈 폴라의 아픈 과거까지 감안하여 치밀하게 설계된 함정이었던 것이다. 어쩌면 구경꾼을 자처하며 이 자리에 끼어든 일부터가 계획의 일부였는지도 몰랐다.
“아아~,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이것으로 우리 폴라 양의 부전승이로군요!”
“저, 전 인정 못해요! 이건 억지인데다 주최측의 농간이에요! 하나부터 열까지 편파적이라고요! 야외수련장 예약해놨다는 이야기도 순 거짓말이죠?”
“후후후, 레이첼 양. 아까 동의해놓고선 이제와 딴소리하시는 겁니까?”
“그, 그치만 이건 너무 불공평한...”
”이의제기하기 전에 파렐 스톤 대장로님부터 설득하고 오시죠. 다른 두 분도 마찬가지고요. 예의상 2시간 정도는 기다려드리겠습니다.”
“윽...”
“솔직히 가문에서 이름 파일 수도 있는, 그런 매우 중차대한 사안입니다. 제가 아는 대장로님의 성정이라면 레이첼 양에게 설득되기는커녕 독방에 처넣으실 테죠.”
“......”
승기를 잡았다 싶어진 페이는 자신의 목적과 의도를 다른 세 사람에게 훤히 드러내 보였다.
”이런 상황에서 다른 후보, 아니 우리 폴라가 언제까지고 기다려줘야 합니까? 그러니 셋째 자리는 순순히 포기하시죠. 아아, 맞다. 설득 작업 전에 비밀유지 서약은 반드시 필수입니다?”
“““......”””
가족이란 맹점을 건드린 페이의 계략은 무척 성공적이었다. 비록 부모를 일찍 여읜 폴라의 아픈 추억을 건드리게 됐지만, 드센 성향을 지닌 세 사람을 이렇듯 합죽이로 만들어버렸으니 대단한 성과임엔 틀림 없었다.
[폴라야, 어때? 내가 얼마나 머리 굴렸는지 아냐? 내가 막 고맙지? 너 나한테 제대로 빚진 거다? 잊지마! 크으이이히히힛!]
[......그래, 고마워.]
페이의 우정에 힘입어 폴라의 입지가 이대로 굳어지려던 찰나, 현 상황이 몹시 못마땅한 베스퍼가 페이의 기선제압에 딴지를 걸었다.
“잠시만요, 페이 씨.”
“?”
“중요한 문제가 있어요.”
“아하~, 그러고 보니 베스퍼 씨는 잘 모르시겠네요.”
페이는 즉시 장황하게 대꾸했다. 여기에서 이 판을 뒤집을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 바로 베스퍼였기 때문이었다.
“결투와 서열정리는 말이죠~, 저희 종족의 오랜 전통이자 풍속 같은 거랍니다. 자연의 법칙대로 ‘강자생존’! 한낱 개인의 역량이나 자질 따위를 운운하며 형평성을 논할 문제가 아니에요. 뭐 이번엔 시작도 전에 끝나버렸지만요. 크흐흐흐.”
“아, 아니요! 전 그 이전의 오류를 지적하고 싶은 겁니다!”
“?”
“무엇보다 루카스 씨의 의견은요? 이런 걸 순순히 용납하실 리가 없잖아요! 이 소식을 전해 듣는 즉시 이곳을 떠나시겠다며 짐을 꾸리실 걸요?”
“훗! 그거야 문제되지 않습니다. 친밀한 관계를 맺는 묘책이야, 베스퍼 양께서 이미 상냥하게 공유해 주셨잖습니까?”
“아앗...”
”그걸 이행 못할 정도로 의지가 박약한 후보는 이대로 영영 빠지면 될 일입니다.”
글자 그대로 아뿔싸였다. 루카스가 고위마족임을 알았음에도 끝끝내 연심을 접지 않는 여인들이 한낱 서약과 맹약을 두고 망설일 리가 없었던 것이다.
“사실 이런 퀘퀘 묵은 관례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여기서 결성된 서열 및 유대관계가 새로운 경쟁자를 견제하기 위한 동맹이 되는 거거든요.”
“......”
”이제 더 문제될 거 없죠? 그럼 앞으로 우리 폴라를 셋째로써 많이 챙겨주ㅅ...”
“아뇨! 페이 씨 말대로라면 반드시 짚고 넘어갈 문제가 남았어요!”
“...그게 뭔가요?”
“이 자리에 모든 후보가 모이지 않았습니다!”
“?”
베스퍼의 지적을 들은 페이의 머릿속에 두둥실 떠오른 경우의 수는 세 가지. 바로 엘로디와 나디아와 에이샤였다. 하지만 루카스가 아동성애를 지닌 너저분한 이상성욕자도 아니었던 데다가, 엘로디는 현재 중도하차나 다름 없는 상태였으므로 큰 장애가 되지 않았다.
“하핫, 엘로디 양은 이전에 거절당했습니다만? 이미 대차게 탈락한 후보까지 신경 써야 할 이유나 필요가 있을까요?”
“역시나... 페이 양도 제일 위협적인 한 사람을 간과하고 계셨군요?”
“...엥? 그게 무슨 말씀인지?”
순간 어리둥절해진 페이가 되물었고, 베스퍼는 한숨을 쉬며 대답해줬다.
-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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