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려진 발자취 (6)
* * * * *
"잠깐. 저건 뭐지?"
루카스의 한 마디. 성인남자의 머리통만한 봉인석과 접촉한 채드를 가리킨 그의 한 마디에 많은 이들의 고개가 빠르게 꺾여졌다.
특히, 자신들은 그동안 제프리와 토비가 받은 수모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며 부단히 변명 중이던 리코우의 반응이 가장 격렬했다.
"악! 안 돼!!!"
- 쁘지지직...
실금이 점점 커지던 봉인석을 보며 그가 길길이 날뛰었으나, 최상급 악령을 가둔 봉인은 마치 모두가 보란듯이 두 개로 쩍 갈라지고야 말았다.
- 째앵-!
"으하하하하하!!!"
어느샌가 바닥에서 벌떡 일어서 있던 채드가 크게 웃어 젖혔다.
"그래! 이거야! 이거라고!!!"
그는 심장을 거쳐 온 몸의 혈관으로 뻗어나가는 막강한 기운에 흠뻑 취했다. 신경세포 하나하나가 새로이 깨어나며 진화한 감각은, 평범한 인간의 오감으론 모르고 지나칠 수 밖에 없었던 세상까지도 양껏 만끽할 수 있게끔 해줬다.
그 감각의 수준은 그와 약 20미터 이상 떨어진 버그먼의 말소리까지도 바로 귓가에서 떠드는 것처럼 생생하게 들릴 정도였다.
"하... 저 찐따 새끼가 갑자기 뭐라고 씨불이는 거냐? 정신 사나우니까 니들이 가서 조용히 시켜.”
“"예, 형님."”
”저거 도망치면 골 아프다. 아참, 그래도 저게 돈줄이니까 너무 심하게 다루진 말고."
불과 몇 분 전의 채드였다면 몇 대 얻어맞은 똥개처럼 깨갱했을 대화였으나, 넘치는 힘과 전율에 심취해 있는 지금의 그는 조금 다른 의미로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푸흐흐, 천민 주제에 감히... 아, 그래! 내가 친히 귀족의 무서움을 알려줘야겠군!"
채드는 자신의 입꼬리에 광기가 조금씩 녹아 들고 있음을 깨닫지 못했다.
"적당히 훈련용 허수아비로 써 먹으면 딱이겠어! 크으흐흐흐!"
말과 함께 뻗은 그의 손짓은 암석 밑에서 수많은 넝쿨줄기가 자라나게끔 했다.
"이, 이건 또 뭐야!"
버그먼과 용병들은 자신들의 몸을 휘감는 넝쿨에 기겁하며 속히 달아나려 했지만, 채드의 의지를 받드는 줄기들을 떨쳐내는 데엔 역부족이었다.
"미친 새끼야, 이거 안 풀어?!"
"크크크, 아직 주제 파악이 덜 됐구나."
채드는 넝쿨을 타고 물 흐르듯이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버그먼에게 다가가 그의 입 속에 기존과는 조금 다른 무언가를 우겨 넣었다.
"웁! 우우웁!"
버그먼의 목구멍을 타고 소장까지 뻗어나간 뿌리들이 인간의 체액을 빨아들이는 과정은 그야말로 삽시간에 이뤄졌다.
"끄어어어! 커어허헛!"
그렇게 생기를 흡수하고 한층 짜릿해진 쾌감을 느낀 채드는, 이어서 나머지 바아가예거 용병단들도 자신의 양분으로 삼았다.
"꺼어... 꺼억..."
"으어으어으..."
한편, 리코우를 비롯한 오드노아 종족들은 나름의 대열을 갖췄다.
"전투준비! 식물의 왕이 깨어났다!"
그나마 봉인석에서 풀려난 것이 식물의 정령임을 위안 삼아야 했다.
물론 상대가 6원소(대지, 바람, 물, 불, 식물, 금속)의 우두머리 정령이라는 점에선 똑같이 죽을 맛인 건 고만고만하겠으나, 현재 사방이 암석으로 둘러 쌓인 동굴 내에서 '대지'나 '금속'의 정령과 싸우는 것보단 상대적으로 난이도가 낮은 건 엄연한 사실이었기 때문이었다.
{크하하하, 이 거만한 요정족들! 너희도 날 아주 우습게 대했었지! 니들도 그 값을 치뤄야 할 것이다!}
어느덧 음성이 삭막하게 변질된 채드가 입맛을 다시며 중얼거렸지만, 대원들을 독려중인 리코우에겐 그런 것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가능할 지라도 중급 미만의 정령은 소환치 마라! 저 악령에게 맛 좋은 먹이만 던져주는 꼴이다!"
{감히! 내 말을 무시해!}
"이길 수 있다! 아무리 최상급 정령의 우두머리이었다 해도 이제 막 봉인 풀린 반푼이에 불과하다!"
{네 놈부터 죽여주마!!!}
흰자가 빨갛게 충혈된 채드가 주변 식물들에게 살해의지를 전달했다.
"온다! 1분대! 장막 전개!"
"""푸로프 툼브아!"""
- 따앙, 따앙, 따다당!
옅은 파란색 광채를 머금은 불투명한 장막이 채찍처럼 휘둘러진 넝쿨들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방어했다.
"2분대! 6위계 화염 마법, '불길의 전이' 준비!"
{내 위업의 밑거름이나 되거라!}
"발사!"
"""플라-멘타시스(fla-mentasys)!"""
- 쿠화아아아-!
이글거리는 불길 다발은 비교적 만만한 넝쿨들을 향해 쏘아졌고, 이로 인해 채드는 마치 3도 화상을 입은 듯한 고통을 느꼈다.
{으아악!}
당장이라도 까무러치고 싶을 정도인 그가 몇 미터나 뒷걸음질 치며 넝쿨에 달라붙은 불을 서둘러 진화하려 했다.
그러나 그가 호들갑을 떨며 난리를 피우면 피울수록 요정족 엘리트 요원들이 만들어낸 불길은 더욱 넓게 번졌다.
"이 때다! 최소 5위, 아니 6위계 이상의 화염 마법으로 몰아쳐! 이대로 숙주를 빈사상태로 만들면 우리의 승리다!"
"""브라둑스 마티에(Braddox Matier, 용암지배자의 분노)!"""
"""포부스 파그멘(Phobus Phagmen, 태양의 파편)!"""
"""넌-레베소 플람(Non-Reverso Flam, 돌이킬 수 없는 불꽃)!"""
갖가지 화염의 난사 속에 채드의 정신력은 용병들을 먹고 성장한 식물들과 함께 잿더미가 되어 뭉텅뭉텅 떨어져나갔다.
{아아아악! 안 돼! 이럴 순 없어!}
영주의 아들로 귀하게 자라 정신력이 평균 이하인 채드가 다시 한 번 소왕을 향해 울부짖었다.
{도와줘! 도와줘!!! 도와달라고!!!}
이로 인해 채드의 영혼에 기생한 채로 잠시 휴식을 취하려던 악령이 다시금 눈을 떠버렸다.
'한심한 놈.'
불만을 짧게 터트리고 난 악령은 숙주의 영혼을 게걸스럽게 파먹었다.
{...윽.. 으윽...}
그것은 단순한 두통이 아니었다. 영혼이 침식되는 그 맹렬한 속도는 채드가 눈치챌 정도로 빠르고 과격했다.
점점 자신의 몸이 자신의 것이란 생각이 들지 않았다. 마치 늪으로 떠밀려 빠진 것만 같았다. 갑자기 다른 이에게 고삐 빼앗긴 마부처럼, 자신의 육체에 대한 통제력이 희미해지고 있음을 이내 자각해버렸다.
{아니야, 이건 아니야! 내가 이런 걸 원하진... 으으으윽...}
"젠장! 숙주가 자아를 상실하고 있다!"
이 변화를 제일 먼저 눈치챈 리코우가 황급히 외쳤다.
"다 쏟아부워! 숙주가 악령에게 완전히 잠식되기 전에 막아!!! 각자 가진 마나를 몽땅 소진해도 상관 없다! 어차피 못 막으면 다 죽어!"
"""흐아아아아압!"""
- 퍼버버펑!
그의 명령에 특임조는 물론이고, 중간에 가세한 페이와 폴라까지 전력을 다했다. 이들 중에 간신히 고개를 돌릴 만한 여유가 있는 사람이라고 해봤자 레이첼 뿐이었다.
"루카스 님! 여기 좀 도와... 어?"
당연히 옆에서 지켜보고 있으리라 믿었던 존재는, 중요한 물품을 싸그리 챙긴 채 동료들과의 이탈준비를 마무리 짓고 있었다.
"여보님, 나디아가 요정족의 승률이 7.19%라고 전해달라네요."
"그 정도면 충분하다. 남의 일에 신경 꺼라."
"아삐이..."
"내가 이 행성의 일에 멋대로 관여하는 건 합당치 않다. 이유가 달리 없다면 그대로 놔둬야 옳다."
"히잉..."
시무룩해진 나디아는 자신의 능력을 강화시켜준 이름 모를 누군가에게 기도하기 시작했다.
'도와주세요! 천신님! 저 사람들을 살려주세요!'
그녀는 끈질기게 칭얼댄지 얼마 되지도 않아서 눈치가 보였기 때문에, 루카스의 행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존재에게 부탁하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아빠가 저 사람들을 도왔으면 좋겠어요! 꼭이요! 만약 제 소원 안 들어주시면요! 이제 앞으로 양피지 조각은 전달 안 할꺼에요!'
천사가 임명한 대리자 또는 판관의 기도가 임명자에게 닿는 속도는 거의 실시간이었고, 덕분에 되돌아온 입질은 나디아의 기대이상으로 신속했다.
<< 돌발 임무 : 꼬맹아, 너 지금 나 협박하니?! >>
'앞으로 말 잘 들을게요! 진짜 진짜요! 도와주세요!'
<< 돌발 임무 : 나참, 어이가 없다, 증말! >>
기가 찬 아리사엘이 천상에서 콧방귀를 핑핑 뀌며 몇 마디 더 주고받는 사이, 소왕을 향해 전력으로 마법을 한바탕 터트린 레이첼이 헐레벌떡 뛰어와 루카스의 앞을 떡하니 가로막았다.
"루카스 님! 저흴 도와주세요!"
"싫다. 내겐 그럴 이유가 없다."
"좀 도와줘요! 소왕들의 힘은 분할된 정령왕의 조각보다 강력하다고요! 자칫 다 죽을지 몰라요!"
"이길 확률이 7%이상이라고 했다. 힘내라."
"네? 그건 무슨 개풀 뜯어먹는 소리에요! 지난 번 흐나파스 때처럼 도와주면 어디 덧나요?!"
"그땐 해야 할 필요성이 있었다."
"?"
"타미아르의 대마법사 디마우스는 내 목표를 전폭적으로 돕기로 했고, 본인의 모든 것을 담보로 했다. 그는 심장과 마나를 걸고 맹세까지 했다. 그래서 나는 기꺼이 싸웠던 거다."
"...그, 그런..."
조금만 달리 표현하면 디마우스는 루카스의 심복이 되는 조건으로 흐나파스를 지켜냈다는 의미. 미처 몰랐던 진실을 알게된 레이첼의 입장에선 디마우스와 동일한 값을 강요하는 협박으로 느껴졌다.
'나쁜 인간, 결국 나를...'
레이첼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갈팡질팡할 여유가 없었다. 무엇보다 시간이 촉박했다. 결국 그녀는 동족을 지키기 위해 루카스의 노예로 전락하는 희생을 각오했다.
"......좋아요."
그녀는 어느샌가 나디아가 쫑쫑쫑 뛰어와 건넨 무언가에 정신 쏠려 있는 루카스를 향해 담담히 선언했다.
"저도 똑같이 하겠어요! 제 모든 것을 당신께 바치겠어요! 그걸로 됐나요? 원하신다면 지금 당장 심장과 마나를 걸고 서약을..."
"아니, 됐다."
"이봐요! 설마 저 하나로는 부족하다는 뜻인가요?"
"딱히 필요없단 의미다."
"...이익!"
수치심에 어금니를 꽈득 깨문 레이첼이 울컥한 울분을 터트렸다.
"야!!!"
그녀는 자신의 인생 중 가장 큰 결단을 잡동사니 취급하는 루카스에게 그간 쌓였던 앙금을 다 토해냈다.
"그래! 너만 잘났지? 너만 잘났어! 꼬박꼬박 존댓말로 받들어주니까! 내가 그렇게 만만해? 만만하냐고! 100년도 못 산 어린 꼬마 놈아! 이 누나는 200살이 넘었거든?! 무려 이백하고도 스물 넷이라고, 이 나쁜 자식아!"
"...너는 진정해라."
루카스가 품에 안았던 나디아를 바닥에 얌전히 내려주는 동안에도 그녀의 분풀이는 그칠 줄 몰랐다.
"됐어! 꺼져! 똥고집에 막무가내인데다, 못생긴 근육 돼지 같은 너 따윈 내가 필요 없어! 내가 싫다고! 너 없이 알아서... 히이익!"
- 철커덕.
레이첼은 루카스가 번쩍 소환한 대검이 자신에게로 겨눠지는 줄로 착각하고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그녀의 망상처럼 그가 그녀의 머리를 잘라내는 참상은 일어나지 않았다.
"시간상 간단히 설명하겠다.”
“...?”
”넌 오해했다. 나는 방금 허락 받았다. 그래서 네가 필요 없다고 말했던 거다."
"???"
레이첼은 무기를 쥐지 않은 루카스의 왼손에서 이질적인 먼지가 작게 흩날리는 광경을 목격했다. 하지만 태도를 전향한 루카스가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 것과는 별개였다.
『 이깟 일은 너 하고픈 대로 해! 니가 본연의 형상만 취하지 않으면 내가 알아서 수습할 수 있으니까! 마족답게 꿀린 대로 처신할 것이지, 누가 더러운 마귀새끼 아니랄까봐 더럽게 귀찮게 하고 있어. -아리사엘- 』
아리사엘의 새침한 전언으로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드리워진 루카스는, 아직 눈두덩이에 물기가 촉촉한 레이첼의 머리 위를 톡톡 다독이며 돌아섰다.
"지금부터 내가 상대한다. 넌 책임지고 대피시켜라, 모두."
"......알겠어요."
"아, 그리고 내가 하대한다고 기분 나빠하지 마라. 내가 너보다 더 오래 살았다."
"?!"
"네 할아버지의 증조할아버지도 내 앞에선 아기다."
"뻐, 뻥치지 마요!"
-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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