뺏고 빼앗기 (2)
{그래서 실망했나?}
{외람되오나 가감 없이 고백 드리자면 처음엔 많이 낙담했었습니다. 군주님께오서 시시한 유희에 빠져 대업을 까맣게 잊으신 줄로만 생각됐으니까요.}
{절대로 그렇지 않다. 내 마음 한 구석엔 언제나 복수에 대한 열망이 자리잡고 있다.}
{예, 군주님의 단호한 의지는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정식으로 당신께 용서를 청하고자 합니다.}
{...?}
유리아나는 루카스를 향해 무릎과 허리를 살짝 굽혔다가 펴면서 말했다.
{군주님의 심계를 뒤늦게 깨우친, 이 우매한 저를 너그러이 용서하십시오.}
{???}
{선계의 상급여신을 볼모로 붙잡아, 무려 10명에 가까운 천신들의 비호를 반강제적으로 이끌어 내시다니... 그 사실을 깨닫고 나서 제가 얼마나 감탄했는지 모르실 겁니다. 힘을 온전히 보중한 채 마계로 복귀하시고자 한, 군주님의 그 크신 인내심에 경의를 표합니다.}
{...그, 그랬지. 커흠흠.}
루카스는 약간 어긋난 유리아나의 오해를 굳이 풀어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며 표정관리에 힘썼다.
{군주님께서 그 요망한 상급여신에게 마음을 실제로 일정부분 허락하셨다는 것만 제외하면, 정말이지 더할 나위 없이 아주 완벽한 임기응변이셨습니다.}
{크흠, 그렇게 후하게 평가해주니 고맙구나.}
{아닙니다. 그나저나 천상의 개입은 도대체 어떻게 막으신 겁니까? 만약 저였더라면 천상의 감시망에 걸리자마자 그대로 영멸했을 터인데... 그저 2명의 신탁자들을 당신의 감시역으로 붙여 두기만 하고 있는 게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흠흠, 미안하지만 거기까진 말해줄 수가 없다. 절대로 드러낼 수 없는 영업비밀쯤으로 여기고 넘어갔으면 좋겠군.}
{과연! 제왕의 직계자이십니다!}
루카스는 이왕 이렇게 된 거 더욱 뻔뻔해지기로 했다. 불편한 진실을 감추려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으니까 말이다.
{커어흠! 나는 피의 복수는 물론이고, 마계의 통일과 지배를 논하는 자다. 이 정도의 능력은 보유하고 있어야 마땅하지 않나?}
{아아, 이 얼마나 훌륭한 군주로서의 풍모이신지!}
이 자리에 메티갈로사가 있었으면 루카스를 대단히 재수 없다고 생각하다가, 짐짓 무언가 이상하다고 느꼈을 것이다. 그러나 대악마 루치펠이라면 덮어놓고 맹신하는 타천사 일원인 유리아나는 달랐다.
그녀는 루치펠이 완전무결한 존재라며 경외하듯, 그의 직계자인 루카스 또한 믿어 의심치 않았다.
{군주시여! 저 유리아나는 당신이 가시는 길을 끝까지 따를 것이옵니다!}
{...고맙다. 앞으로도 그대는 나의 참모이자 군주 대리로서 성실히 보좌해주길 바란다.}
{마, 맡겨만 주십시오, 군주님!}
어째 분위기가 잘 무르익었다 싶어진 루카스는, 입 안에서 계속 간질거렸던 명령을 내렸다.
{아참, 우리가 마계로 돌아갈 때까진, 당분간 네가 부의장을 전담하여 감시해줬으면 한다.}
{...네?}
{부의장은 나보다 더더욱 돌아가기 싫어하는 낌새더군.}
{호호, 아주 이해 못할 건 아닙니다. 저 역시도 마계로의 귀환이 무척 꺼려지니까요. 하지만 염려 마십시오. 그녀는 저와 정식으로 계약을 맺었기 때문입니다.}
{음... 그래도 신경을 써줬으면 한다. 나는 그녀가 에이샤에게 지대한 관심을 보이는 모습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아.}
보다 상세한 지적은 그녀의 공감을 이끌어냈다. 사실 유리아나 또한, 에이샤가 루카스를 주인님이라고 부르는 것을 듣기 전엔 그녀를 탐냈었기 때문이었다.
‘썩 만족스럽진 않지만 당장 임시방편으로 삼기엔 그럭저럭 괜찮은 그릇이니까...’
인간 이상의 무언가로 진화한 에이샤의 육신은 대단히 강인한 반면, 그녀의 정신연령은 아직 어린아이처럼 미숙해서 여러모로 허점이 많았다.
다시 말해 에이샤의 정신을 붕괴시키거나 한 쪽으로 가두고 나서, 그 육체에 차지하는 일이 어렵지 않다는 의미였다.
‘메티도 탈출수단을 하나쯤 확보해두고 싶은 거겠지. 다음을 기약할 수 없는 상황이기도 하고.’
이번에 마계에서 자유로이 벗어날 수 있었던 일도, 루카스를 마계로 복귀시키기 위한 가브리엘의 포석이었다는 진실을 메티갈로사가 깨우친 이상, 자존심 뭉개진 그녀가 온갖 수단을 강구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예, 무슨 말씀을 하시고자 하는지 알겠습니다.}
{그래. 뭔가 사고칠 조짐이 보이면 즉각 내게 보고하도록.}
{예, 군주님.}
결과적으로 루카스의 육감은 옳았다. 메티갈로사가 바로 이 시각 아주 정교한 자신의 모조품으로 아리사엘의 이목까지 속여가며, 비밀리에 아르카니토와 접선했기 때문이었다.
* * * * *
일반적으로 ‘용건만 간단히’는 마법통신을 사용하는 자들의 암묵적인 합의였다.
당연하게도 가장 큰 이유는 사회예절과 일절 관계 없었다. 통신유지 중에 소모되는 에너지를 아끼기 위해서라는, 대단히 현실적이고 경제적인 목적에 의한 것이었다.
괜히 군대와 같은 조직 내에서 암어와 약속어를 만들어 활용하거나, 일정 간격을 두고 거미줄 같은 통신망을 구축하는 게 아니었다.
그 모든 행위는 통신거리와 유지시간에 비례하여 우상향 곡선을 이루는 소모비용을 줄이기 위한 노력으로 봐야 했다.
다만 비용 따윈 아무래도 상관 없을 정도로 내용이 중차대한 경우는 예외가 되기도 했다. 무려 행성 간 통신을 장시간 유지 중인 아르카니토의 행위처럼 말이다.
“위대한 라호나바스 님, 다음 번에 그 마족이 연락을 취해오면 제가 무어라 답변해야 하겠습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 보거라.>
“......예.”
지름 1m 수정구 너머로 비치는 라호나바스는 장장 2분에 가까운 시간이 흐르도록 아무 말이 없었다. 그의 침묵은 아르카니토가 슬슬 기기고장을 의심할 때쯤에야 비로소 깨졌다.
<나중에 그 마족이 연락을 취하면 이렇게 대답해라. ‘그 분께선 너의 제안에 동의하셨다. 그대의 활약을 무척 기대하고 계신다.’라고.>
“예.”
<이후로부터 너는 나를 대하듯 그에게 절대 복종하거라. 그 마족이 나의 숙원까지 완성시켜 줄 것인즉, 그녀의 명령이 곧 나의 명령이라 여기도록.>
“알겠습니다, 위대한 라호나바스시여.”
비록 상세한 내막과 계획을 모르는 아르카니토였으나, 일단 자신의 주인이 강한 어조로 지시한 이상 종복은 그대로 따라야만 했다.
“비가아르! 언제고 출병할 수 있게끔 철저히 준비시켜라!”
“옛! 명을 받드옵니다!”
"드레이크, 워프게이트의 완성에 더더욱 박차를 가하도록 해라! 모든 자원을 소모해도 좋다!"
"예, 반드시 해내겠습니다!"
그렇게 트로돈이 전 병력을 대기시킨 지 일주일 뒤, 메티갈로사의 은밀한 지령에 따라 그동안 소극적이었던 태세를 풀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 * * * *
트로돈 군세의 대규모 준동.
그 거대한 일렁임이 감지됨에 따라, 오드노아 및 인간 국가들도 신속하게 연계하여 연합군을 출병시켰다.
물론 이기적인 계산에서 삐딱선을 타려던 군상들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흠흠. 침략자들이 그렇게 강력하다던데... 차라리 그쪽이랑 동맹을 맺는 편이 어떨는지요?"
"....뭐?"
"침략자들이 받들어 모시는 존재가 무려 '승천을 거부한 초월자'라고 하잖습니까?"
더 힘센 쪽에 붙어 목숨을 건사해 보자는 군상들의 얄팍한 수작. 그러나 각 나라의 실세들은 그런 그들보다도 저울질에 능통한 자들이었다.
“풉, 웃기고 앉았네. 평소에 니는 니가 잡아먹을 가축이랑 동맹 맺고 그러냐?”
“그, 그렇다면 상황을 조금 더 지켜본 후에 참전하는 편이 현명...”
“미친! 이게 영토 싸움이랑 같냐?! 하여간 전쟁의 ‘전’자도 모르는 무능한 놈들이 주둥이만 살아가지고. 이건 우리 모두의 사활이 걸린 문제야!”
통치권자들의 결정에 번복은 없었다. 그간 국내에서 산발적으로 벌어진 트로돈과의 소규모 전투를 통해 열세를 실감했거니와, 최근 모스피투 공국 및 그 주변 일대의 유목민들이 어떻게 유린됐는지를 정찰로 파악했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최근 반트리슨에서 도저히 항거할 수 없는 존재들을 직접 목도했던 그들은, 적대적인 초월자가 이 땅에 발을 내딛지 못하도록 모두가 힘을 합쳐야 함을 잘 알았다.
"이 싸움에서 지면 우리도 덩달아 끝장이야, 끝장! 각개격파 당하고 다 뒤지는 겨! 막말로 니가 천신보다 싸움 잘 해? 하다못해 발목이라도 잠시 붙잡아둘 능력이라도 있냐?"
"......그거야 추가로 뛰어난 인력을 보충하여..."
"새꺄, 지금은 돈이 있어도 사람이 없는 실정인 거 알아 몰라? 돈을 마구 처바른다고 해서 훈련병이 하루아침에 뛰어난 기사로 막 돌변하고 그러디? 아오, 기본적인 사리분별도 못하는 놈이 참모랍시고... 에잉~!"
"......"
"쯧! 썩 꺼져!!!"
그들이 생존에 얼마나 진심이었는가 하면, 그동안 서로 잡아먹지 못해 안달이었던 앙숙 국가들조차 긴급히 휴전을 선언하는 일까지 심심찮게 발생될 지경었다.
"나는 니가 여전히 밉다. 하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으니 어쩔 수 없군. 일단 살고 보자."
“쳇, 누가할 소리! 착각하지 마! 네 놈과의 동맹은 이번 뿐이닷!”
그렇게 결성된 서방대륙 연합군은 서로 긴밀한 공조를 통해 경이로운 속도로 이동하여 방어선을 빠르게 구축했다.
"흠... 병력이 역대 최대 규모이군요. 상당히 고무적입니다."
파렐 대장로는 북적이는 전선을 바라보는 샌더스 총통의 탄성에 깊은 공감을 표했다.
"그러게나 말입니다. 과거 투쟁의 역사를 통틀어도 이만한 규모의 전력으로 트로돈을 상대한 적은 없었을 겝니다."
"게다가 고맙게도 트로돈 측의 전력이 불완전합니다. 우리 또한 만반의 준비를 갖춘 것은 아니나, 이 정도라면 충분히 싸워볼 만 합니다."
"총통의 말이 옳소. 이 전투에서 반드시 이기십시다. 이번에 대승을 거두기만 하면 전쟁의 승기는 우리 쪽으로 기운거나 다름없으니까 말이오."
상황이 대단히 긍정적인 파렐 대장로와 달리, 샌더스 총통은 지도자로서 부정적인 변수들을 심도 있게 짚었다.
"헌데 저는 대관식을 치른 아르카니토가 몹시 우려스럽습니다. 우선 관측된 기량부터가 상상 이상입니다. 저희의 예상을 가볍게 상회하고 있어요."
"그리 심려 마시오, 총통. 라호나바스의 힘이 깃든 화룡족이 대단한 건 사실이지만, 우리 쪽에도 화신과 천신의 사도가 계시잖소이까? 그 분들께 비하면야 용족은 별 것도 아니외다. 어허허허!"
"그래서 걱정이 된다는 뜻이었습니다."
"......?"
"우리 쪽에서 파악된 아르카니토는 대단히 신중하고 인내심이 많은 자입니다. 그건 드레프타에서 대패한 이후 아주 오랫동안 힘을 끌어 모았던 자제력과, 전력을 최대한 보존하기 위해 바로 후퇴를 명령했던 지난 날의 결단만 봐도 알 수 있죠. 근데 그런 자가 이제 와서 어리석은 판단을 내렸을 거 같지가 않습니다."
"크흠... 패배가 뻔한 데도 불구하고, 공연히 싸움을 걸어왔다라..."
파렐 스톤은 입맛을 쓰게 다셨고, 샌더스는 작은 넋두리를 했다.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이럴 때 루카스 님께서 우리와 함께 해주셨더라면 한시름 덜었을 텐데 말입니다."
"아아, 그 분은 행군 도중에 갑자기 본토로 되돌아가셨다 하더니만, 그게 정말이었소?"
"예, 나디아 신탁자님과 긴급통신을 나누신 뒤에 황급히 떠나시더군요."
"흐음..."
"부디 별 일이 아니길 바랄 뿐입니다."
그러던 그때, 전령이 헐레벌떡 뛰어와 소리쳤다.
"총통님! 큰일 났습니다! 웜홀생성기가 뜬금 없이 재가동 했다는, 본토로부터의 급보입니다!"
"...뭣?"
파렐 대장로가 일순간 사고가 정지된 듯한 샌더스를 일깨워줬다.
"이 상황에서 트로돈의 군세가 양쪽에서 밀고 들어오게 되면..."
"이보오! 정신 차리시오, 총통!"
"설마... 루카스 님이 변절을... 우리가 농락 당했던 겁니까?"
샌더스는 트로돈과 손잡은 루카스의 빈집털이와 기만책을 운운하며 절규했으나, 파렐 대장로의 의견은 조금 달랐다.
"아니, 그건 아닐 거요. 그곳엔 그 분께서 진심으로 아끼시는 로비샤 영애님과 신탁자님들께서도 계시지 않소?"
"그러면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란 말입니까?!"
"일단 내가 곧장 날아가보리다. 그러니 총통께선 오직 이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데에만 전념해주시구려."
"...알겠습니다. 그럼 부탁 드립니다, 대장로님."
파렐 대장로는 곧장 담당자를 불러 공간이동이 가능한, 그리고 메디오스페라에서 가장 가까운 좌표를 확인했다.
- 작가의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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